기원전 550년경 성립한 아케메네스 왕조 제국은키루스 2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메디아를 병합한 뒤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했고, 그 결과 메소포타미아·아나톨리아·레반트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집트의 병합은 기원전 525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 치세에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제국의 완성은 2대에 걸친 확장 과정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왕실 비문, 특히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비문에는 왕이 자신을 ‘아리야 ariya’라 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용어는 고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집단의 자기 지칭으로, 어원적으로 ‘고귀한’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19~20세기 유럽에서 왜곡된 인종주의적 ‘아리아인’ 개념과는 직접적 연속성이 없다. ‘아리야’는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어) 단계에서 ‘에란 Ērān’으로 발전하며, 본래는 ‘아리야인들의 영역’ 혹은 ‘이란계 세계’를 뜻하는 문화·언어적 공동체 개념이었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제국의 핵심 지역이던 ‘파르사 Pars’에서 명칭을 따 ‘페르시스 Persis’라 불렀고, 이것이 라틴어 ‘페르시아 Persia’로 전승되었다. 파르사는 오늘날 파르스 주Fars Province에 해당하며, 고전 그리스·로마 문헌 전통이 유럽 역사 서술의 기준이 되면서 외부 명칭인 ‘페르시아’가 국제적 통용어로 굳어졌다. 요컨대 내부적 자의식은 ‘아리야→에란’이라는 계보를 따랐고, 외부 세계는 특정 지방명에서 파생된 ‘페르시스→페르시아’를 전체 문명의 이름으로 확장시켰다. ‘이란’이라는 명칭이 명백히 국가적·영토적 의미를 갖춘 것은 224년 성립한 사산 왕조 제국 시기이다. 이 왕조는 스스로를 ‘에란샤르 Ērānšahr’, 곧 ‘이란인들의 왕국’이라 칭하며, 이를 조로아스터교적 세계관과 결합된 신성한 왕권 질서 속에 제도화하였다. 여기서의 ‘에란’이 현대 국가명 ‘이란’의 직접적 어원이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정치적 지배 구조는 변화했으나, ‘이란’이라는 문화적 개념은 소멸하지 않았다. 특히 10~11세기 페르시아 시인 피르다우시가 집필한 샤나메(Shahnameh, 왕들의 서)는 ‘이란’을 신화적·역사적 공동체로 재구성하며, 이슬람 시대 이후에도 지속된 문명적 정체성을 문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중세 이란사의 중요한 전환은 아바스 칼리프조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시작된다. 10세기 데일람 산악지대 출신 부와이흐 왕조는 945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칼리프를 형식적 존재로 남겨둔 채 실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시아파 성향을 띠었으나 국가 차원의 강제적 종파 통일은 시행하지 않았다.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한 튀르크계 군사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며, 11세기 이란을 지배한 셀주크 제국이 등장한다. 셀주크는 수니파 정통성을 복원하고 니잠 알물크의 행정 개혁과 니잠이야 마드라사 설립 등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특징은 “군사 지배층은 튀르크계, 행정과 문화는 페르시아계”라는 이중 구조였으며, 이러한 구조는 이후 수세기 동안 반복되었다.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 성립한 일한국은 초기에 대규모 파괴를 초래했으나, 1295년 가잔 칸의 이슬람 개종 이후 이란 행정과 문화를 적극 수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티무르 제국 역시 투르크-몽골계 군사 정권이었지만,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중심으로 페르시아 문학·예술을 후원하며 ‘티무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외래 정복 세력이 오히려 페르시아 문화를 확산시키는 역설적 현상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16세기 초 국가 구조는 근본적으로 재편된다. 1501년 창건된 사파비 왕조는 12이맘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하며 종파 국가를 형성하였고, 이는 오늘날 이란의 종교적 정체성 기원이 된다.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 종교·지정학적으로 대립하며, 특히 1514년 차르디란 전투는 양 제국의 경쟁을 상징한다. 압바스 1세 시기에는 상비군 개편, 길만 제도 도입, 수도 이스파한 재건, 국제 무역 확대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722년 아프간 길자이 부족의 침공으로 왕조는 붕괴하고, 이후 나데르 샤가 아프샤르 왕조를 세워 제국을 재통합하며 1739년 델리를 점령하였으나, 그의 사후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이어 잔드 왕조가 비교적 안정적인 지방 통치를 실시했으나 전국적 통합에는 한계가 있었고, 1796년 카자르 왕조가 최종적으로 통일 왕조를 수립하였다. 카자르 시기에는 러시아 제국과 영국 제국의 압박 속에서 영토 상실과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고, 1906년 입헌혁명을 통해 의회와 헌법이 도입되며 근대 정치 질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란혁명 © 나무위키

20세기 들어 이란은 다시 체제 전환을 겪는다. 1925년 레자 칸이 즉위하여 팔라비 왕조를 수립하고, 세속주의, 중앙집권, 사법·교육 개혁, 인프라 확충을 추진하며 근대 국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를 병행하였다.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의 석유 국유화 정책 이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비밀정보부MI6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었고, 이는 반서구 정서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1979년 이란 혁명이 발생하여 왕정이 폐지되고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최고 지도자가 종교적 권위를 겸하는 ‘벨라야테 파키흐, 즉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 체제가 헌법에 명시되었으며, 이는 현대 이란 정치의 핵심 구조가 되었다. 이란의 역사 전개는 정복과 동화, 종파와 권력, 외세 개입과 내부 개혁이 반복되는 복합적 과정이었으며, 외래 지배 세력조차 결국 페르시아 문화와 행정 전통에 흡수되었다는 점은, 권력의 변화 속에서도 문명적 연속성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란’과 ‘페르시아’ 명칭의 변화는 단순한 호칭 교체가 아니라, 내부 정체성과 외부 인식이 교차하며 형성된 장기적 역사 과정의 산물임을 시사한다.

 

© 동아일보

이란과 중동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최근 분쟁 뉴스만 볼 게 아니라, 권력 구조의 뿌리를 만든 제국의 기억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출발점 중 하나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600년 넘게 존속한 이 제국은 아나톨리아에서 발칸, 아랍 지역까지 지배하며 오늘날 중동 국경과 권력 지형의 전신을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이 체제가 단순한 ‘터키 제국’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종교를 통치하기 위해 종교 공동체 자치인 밀레트 제도 Millet System를 운영했던 다층적 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제국이 해체되면서 그 공간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 체제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이라크·시리아·요르단 같은 국경이 형성되었다. 즉 현재의 갈등 상당수는 “고대의 증오”라기보다 제국 붕괴 이후 급조된 국가 구조와 권력 공백의 산물에 가깝다. 이란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당시 이란은 사파비·카자르 왕조를 거치며 독자적 페르시아 정체성을 유지했고, 오스만과는 수 세기에 걸쳐 경쟁 관계였다. 이 경쟁은 단순한 영토 다툼이 아니라, 수니파 중심의 오스만과 시아파 국가로 자리 잡은 페르시아 사이의 종교·정체성 구도와도 연결된다. 오늘날 이란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잇는 ‘시아파 벨트’를 전략적으로 중시하는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깔려 있다. 반대로 튀르키예는 오스만의 후신 국가로서, 제국의 기억과 공화국 정체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잡고 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을 다시 본다는 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왜 이 지역의 국경은 직선이고, 왜 종파가 정치의 핵심 축이며, 왜 권력 공백이 생기면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가”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제국이 사라졌다고 질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제국이 남긴 구조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중동은 과거가 끝나지 않은 공간이다. 역사는 배경음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서사다.

 

오스만 제국 다시보기

 

시빌라이제이션 V : 오스만 제국

모카 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동양의 향신료와 직물이 서방으로 운송되는 중요한 환적항이었다. 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아랍 상인들은 예멘 고원지대에서 자란 최상급 커피를 독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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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I

 

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 타마라 손 I - I

├── 수니파-시아파 갈등: 역사적 흐름과 현대적 전개 (2025년까지) │ │ ├── 632년 이후: 무함마드 사후 후계 문제로 수니-시아 분열 발생 │ │ ├── 수니파: 칼리프제 인정 (아부 바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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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II

 

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 타마라 손 I - II

이슬람이 서구의 적으로 간주된 배경을 살펴보면 단지 종교적인 차이만이 아닌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맥락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선 11세기부터 13세기 동안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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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이 설명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지리의 힘 2 - 팀 마샬 I - II

전제군주제 (샤 중심의 절대왕정) → 입헌군주제 1906~1925 (헌법 제정, 의회 설립) → 절대군주제 1925~1979 (서구식 근대화 추진, 권위주의 강화, 정치적 억압, 비밀경찰) → 이슬람 공화국 1979~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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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타임라인


2009년: 오바마 취임, 이라크 미군 철수 계획과 아프가니스탄 전투 조정 시작.
2010년: 중동 외교 강화, 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 재추진.
2011년: 아랍의 봄 대응, 리비아 공습 및 시리아 내전 초기 관여.
2012년: 이란 핵 문제 관련 P5+1 다자 회담 지속, 외교적 압박 강화.
2013년: 오바마-로하니 통화, 이란과 핵 협상 본격화.
2014년: ISIS 부상 대응, 중동 안보·군사 개입 확대.
2015년: JCPOA(이란 핵 합의) 체결, 경제 제재 단계적 해제 합의.
2016년: 합의 이행 및 검증 지속, 팔레스타인·시리아 문제 외교적 관리.
2017년: 트럼프 취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 미국 대사관 이전 발표.
2018년: 트럼프, JCPOA 탈퇴 및 대이란 제재 재개.
2020년 8월: 이스라엘-UAE 외교 정상화 합의.
2020년 9월: 이스라엘·UAE·바레인·모로코, 아브라함 협정 공식 서명.
2021년: 바이든 취임, 아브라함 협정 확장 소극적, 중동 긴장 완화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집중.
2022년: 이란 핵 프로그램 외교 재개, 제한적 제재 완화 협상 지속.
2023년: 중국 중재로 이란-사우디 외교 정상화, 중동 내 긴장 완화 시도.
2024년: 아브라함 협정 유지, 이란 핵 문제·중동 안보 외교 계속.
2025년 1월: 바이든 임기 종료, 외교적·경제적 접근 중심 정책 마무리.
2025년 3월~5월: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국·영국 공습 후 휴전 체결.
2025년 3월 이후: 하마스 전투력 점차 감소.
2025년 6월 초: 네타냐후 총리 부패 혐의로 기소, 연정 붕괴 위기.
2025년 6월 13일: 이스라엘군, 이란 핵시설 및 군사 시설 대규모 공습 개시.
2025년 6월 22일: 미국, 이란 핵시설 정밀 공습(벙커버스터 등) 실시.
2025년 7~12월: 이란-이스라엘 군사 긴장 지속, 유엔·IAEA 외교적 조율 진행, 예멘 후티 반군과 사우디 연합군 제한적 휴전 유지.
2026년 1월: BRICS+ 확대 절차 진행, 국제사회 외교·경제 협력 강화.
2026년 2월: 이란 핵 프로그램 관련 IAEA 정례검증 보고서 제출.
2026년 3월: 중동 일부 지역 군사적 긴장과 분쟁 가능성 지속,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투 계속, 국제 에너지·경제 영향 지속.

 

중동 전쟁의 동력을 단순히 ‘석유’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일관되게 강조해온 핵심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탄도·정밀유도 미사일 역량, 그리고 헤즈볼라 및 시리아 내 친이란 세력을 통한 군사적 포위 구조다. 이스라엘 안보 당국은 특히 레바논 남부에서 증강된 정밀유도 미사일 능력을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해왔고, 이란은 이를 자국 방어를 위한 억지력이라 반박한다. 미국 변수도 결정적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재임 중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최대 압박’ 제재 정책을 추진하며 강경 노선을 취했지만, 동시에 미국 사회에는 중동 장기전에 대한 피로감이 뚜렷하다. 걸프 국가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은 안보상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자국 내 미군 기지가 보복 표적이 되는 상황을 경계한다. 다만 ‘두바이 공항 전면 폐쇄’나 ‘바레인 미 해군 기지 대규모 피격’ 같은 표현은 상시적·확정적 사실로 일반화하기 어렵고, 드론·미사일 위협과 방공 대응이 반복되는 긴장 국면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 역시 이란이 수차례 경고해온 전략적 카드이지만, 실제 전면 봉쇄는 자국에도 치명적 부담이 되는 고위험 선택지다. 이란 내부에서는 2022년 ‘여성·생명·자유’ 시위 이후 세대·계층 간 균열과 국가에 대한 불신이 누적되어 사회적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동시에 이란 혁명수비대와 정보기관, 사법 체계는 여전히 강한 동원력과 억제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권력 엘리트 간 공개적 분열이나 군 지휘 체계의 붕괴 같은 체제 전환 신호는 확인되지 않는다. 즉, 불만은 광범위하지만 국가 장악 구조는 아직 견고한 ‘긴장된 안정’에 가깝다. 따라서 외부와의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정권 붕괴나 체제 해체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며, 오히려 전시 상황은 단기적으로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한편 이스라엘은 이란의 미사일·핵 역량 약화를 전략적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고, 미국은 국제법·억지 논리를 내세워 명분을 구축하는 구조 속에서 양국의 이해가 부분적으로 교차한다는 분석은 가능하지만, 특정 ‘로비의 절대적 영향’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국제 유가와 해상 물류, 안전자산 선호 심리에 충격이 가해져 금 가격 상승이나 증시 변동성 확대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한국을 포함한 수입 의존 경제에 물가·환율 압력으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 사태는 자원 쟁탈전이라기보다 억지력 경쟁, 체제 생존 본능, 국내 정치 계산이 겹겹이 얽힌 복합 위기이며, ‘누가 설계했는가’보다 ‘어떤 구조가 긴장을 재생산하는가’를 묻는 편이 현실을 더 정확히 겨냥한다.

 

트럼프는 이번 공격을 공식적으로 “미국과 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하며, 이란이 지속적으로 미국과 동맹국에 위협을 가하고 미군과 해외 군사기지를 겨냥해온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설과 전문가 분석에서는 이번 결정이 단순한 방어적 조치에 그치지 않고 더 복합적인 정치·전략적 계산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첫째, 공격은 핵시설 파괴나 단기 억지를 넘어 이란의 주요 지도자, 특히 하메네이를 겨냥한 것으로 알려져, 정권교체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전략적 행동으로 해석된다. 둘째, 트럼프가 강경 외교를 통해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대선 전략에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셋째, 미국의 행동은 이스라엘과 걸프 지역 동맹국들의 안보 우려와 밀접히 연결돼 있으며, 이란의 지역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동맹과의 전략적 공조를 강조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이번 공격은 미국 의회의 승인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 핵 위험과 유가 변동, 글로벌 경제에 미칠 영향, 그리고 중동 지역 긴장 심화 가능성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와 여론의 우려를 사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표면적 명분과 달리 미국 내 정치적 계산, 동맹 전략, 지역 패권 경쟁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란 전쟁 결과

├─ 🇸🇦 사우디아라비아
│   ├─ 이란 약화 → 안보 부담 감소, 지역 패권 경쟁 우위
│   ├─ 확전 → 유전·석유시설 보복 위험
│   ├─ 체제 불안 → 시아파 네트워크 확산 우려
│   └─ 외교 타협 → 경제 다변화 전략에 유리

├─ 🇦🇪 아랍에미리트
│   ├─ 이란 약화 → 금융·물류 허브 지위 강화
│   ├─ 확전 → 항만·공항·에너지 인프라 표적 위험
│   ├─ 해협 긴장 → 물류비 급등
│   └─ 안정화 → 중재 외교 이미지 강화

├─ 🇧🇭 바레인
│   ├─ 확전 → 미군 기지 보복 표적 위험
│   ├─ 내부 시아파 변수 → 사회 긴장 가능성
│   └─ 이란 약화 → 단기 안보 안정

├─ 🇶🇦 카타르
│   ├─ 확전 → 미군 기지로 인해 표적 위험
│   ├─ 해상 긴장 → LNG 수출 차질 가능성
│   └─ 에너지 가격 상승 → 수익 증대 (단기)

├─ 🇰🇼 쿠웨이트
│   ├─ 확전 → 미군 협력국 압박 증가
│   └─ 안정화 → 원유 수출 안정성 회복

├─ 🇮🇶 이라크
│   ├─ 확전 → 친이란 민병대·미군 충돌 위험
│   ├─ 이란 약화 → 권력 공백 경쟁
│   └─ 체제 불안 → 내부 정치 재편

├─ 🇸🇾 시리아
│   ├─ 이란 약화 → 정권 방어력 약화
│   └─ 확전 → 이스라엘 공습 빈도 증가 가능성

├─ 🇱🇧 레바논
│   ├─ 이란 약화 → 헤즈볼라 영향력 약화 가능
│   └─ 확전 → 남부 전면전 위험

├─ 🇹🇷 튀르키예
│   ├─ 이란 약화 → 지역 영향력 확대 기회
│   ├─ 체제 불안 → 난민 유입 가능성
│   └─ 권력 공백 → 시리아·이라크 북부 세력 경쟁

└─ 🇮🇱 이스라엘
    ├─ 이란 약화 → 전략적 최대 수혜
    ├─ 확전 → 다면전 위험 (레바논·가자·시리아)
    └─ 체제 붕괴 → 단기 혼란, 장기 안보 재편

 

1979년 이란 혁명영화 「아르고 사건」에서 보듯, 이란은 외세 압력과 국제적 관심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당시 미국과 서방이 개입한 이유는 단순히 인질 구출만이 아니라, 중동 내 정치적 영향력 확보, 이란 핵 프로그램 통제, 그리고 지역 안정을 위한 외교·군사적 메시지 전달 등 복합적 목적이 얽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이후, 일부 분석가들은 그가 중동에서의 군사·경제적 긴장 유지가 유가 상승과 방위산업 활성화에 유리했을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공식적 정책 목표는 이란의 핵 활동 제한과 이스라엘 안보 보장에 있었다. 이스라엘 측은 기본적으로 이란의 핵 포기와 군사적 위협 감소를 원했지만, 고위 지도자 제거나 군사적 공격은 중동 정세를 재편하고 자신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동시에 다른 중동 국가들 역시 시아파 주도 이란이 친서방적 국가로 전환되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란 내부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요소가 혼재해 있어 강력한 중앙 권력과 자주적 정체성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이란은 자유와 현대화의 요구를 갖는 동시에, 자신들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자율성을 지키려는 균형을 계속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1979년 11월 4일, 이란 혁명으로 격화된 반미 시위 속에서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은 시위대에게 점령당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직원 6명은 영국과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피신 거부당한 뒤 캐나다 대사 관저로 급히 숨었다. 이들의 존재가 발각될 경우 즉결 처형이 불가피했으나, 호메이니는 인질 보호를 지시했고, CIA 요원 토니 멘데즈는 헐리우드 영화 제작팀으로 위장시켜 탈출시키는 작전을 계획했다. 멘데즈는 가짜 영화 ‘아르고’ 제작과 관련해 배우, 기자 회견, 대본 리딩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으며, 캐나다 대사관에 숨어 있던 직원들은 지속되는 불안 속에서도 이를 실행할 준비를 했다. 출국 직전 델타포스 군사 작전이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멘데즈의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공항에서는 사전에 준비한 영화 관련 서류와 소품으로 혁명수비대의 추궁을 피하며 활주로에 도착, 간발의 차로 비행기가 이륙했다. 캐나다 가정부 사하르와 대사관 직원들은 안전하게 이라크 바트주로 탈출했고, 미국은 캐나다의 단독 작전으로 이를 발표하며 국제적 보복을 막았으며, 멘데즈는 비밀리에 훈장을 받고 개인적으로도 가족과 재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78년은 이란 국민들의 팔레비 정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해였다. 멀리 나자프에 있던 호메이니의 연설과 설교는 테이프와 문서로 전해져 국민들에게 행동 지침이 되었고, 그는 왕정 전복과 지속적 투쟁을 독려했다. 팔레비 왕은 잠시 양보의 기미를 보였지만 결국 탄압을 강화했다. 라마단 마지막 날, 테헤란과 각지의 모스크에서 설교자들이 왕의 퇴진을 촉구하며 수백만 명이 시위에 나섰고, 군대의 발포로 많은 시민이 희생된 ‘검은 금요일’이 발생했다. 이후 호메이니는 이라크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며 혁명을 지휘했고, 대학생과 젊은 층이 반정부 운동의 주력 세력이 되었다. 11월 4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군대가 발포해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팔레비 정부는 샤푸르 바흐티아르를 총리로 임명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979년, 호메이니는 혁명회의를 구성하고 왕이 망명하자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환호하며 축제를 열었다. 바흐티아르 정부가 호메이니의 귀환을 막으려 했지만, 호메이니는 이를 불법 정부로 규정하고 수많은 군중의 환영 속에서 귀환해 이슬람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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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2008년 대선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과 중동 군사 개입을 비판하며,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투병력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철수시키는 전략을 추진했다. 이는 현지 자립 능력 강화와 미국 내 전쟁 피로감·경제적 부담을 고려한 결정으로, 전반적으로 군사적 부담을 줄이고 외교·경제적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반면 트럼프는 이란 위기에서 지상군 투입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공식 명분은 동맹 보호지만 전문가들은 정권 교체, 친미 세력 부상, 중동 전략적 이익 등 복합적 계산이 작용했다고 본다. 아니라면 혹시 트럼프가 이란산 원유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중국에 대해 보여주는 카드로, 제재나 협상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두 리더십의 차이는 중동 정책 철학과 정치·국제 환경에서 비롯되며, 트럼프의 접근은 군사적 억지와 전략적 압박을 포함한 미국 전략 우선순위 변화의 신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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