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의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Inspiration: 언더스텐딩, “머스크 AI만 보수우파 된 이유”) --- AI는 스스로 세계를 경험하며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존재가 아니다. AI는 인간이 제공한 데이터와 지식을 바탕으로 학습하며, 그 학습의 방향 또한 인간에 의해 결정된다. ---- 따라서 AI는 자신을 학습시킨 사회의 역사와 문화, 언어, 관습, 지역적 특성, 그리고 기후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AI의 사고방식은 결국 그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지식과 가치관을 반영하게 된다. ----- 그렇다면 서로 다른 AI의 세계관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예를 들어 미국의 AI에게 "아침으로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계란, 베이컨, 감자, 팬케이크와 같은 메뉴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 ------- 반면 한국의 문화와 식생활을 중심으로 학습한 AI라면 국과 밥, 그리고 다양한 반찬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권할 가능성이 크다. --------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가. 이는 어느 한쪽이 더 옳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 그리고 기후가 학습 데이터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AI는 자신이 학습한 세계를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한다. --------- 그렇다면 이를 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나 특수상대성이론을 떠올려 보면 된다. 하나의 사건이라도 관찰자의 기준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측정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AI 역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학습시킨 인간과 사회의 관점을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 결국 AI의 세계관은 AI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축적해 온 역사와 문화, 가치관과 경험이 기술이라는 거울에 비쳐 새롭게 재구성된 또 하나의 인식 체계이며, AI는 그 거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찰자라고 할 수 있다.
철학 한 조각
행복에 도취된 미래avenir(앞으로 닥칠 것)에 대한 믿음보다, 미래futur(앞으로 될 것)를 사는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인간은 만물의 척도, {판단의 상대주의, 믿음의 상대주의}이다.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있다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고 하는 척도이다. 152a” 따라서 오늘의 “정의just-ify”는 어제와 내일의 척도이다. 다수의 행복에 슬프다는 것self-application, (삶은 산고를 겪는, 148c) 행복을 향한 슬픔(욕망, 내게 없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사랑)이다. 어제와 내일의 척도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오늘의 흐름 “크거나 희거나 뜨거운 그런 것, 154b”, 즐겁거나 괴로운 삶의 온도(상태)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앎은 설명logos을 {언어logos를} 동반한 참된 판단이다.” 환기hypomnesis(부를 환喚 일어날 기起), 즉 '기억의 적바림'memo에 의존하는 인간은 ʻ감각할 때 사용하는 수단5’과 ʻ감각적으로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능력6’을 모아 삶은 아름답고(ʻ자음과 모음'인 음소와 ʻ음의 높낮이·길이·세기’인 운소가 음운이되고), “고상하고 건장한 산파이신 파이나레테Phainaarete(덕arete) 149a”로 여러 감각(운소)들이 “어떤 하나의 종idea(음절: 하나의 종합된 음), 혼 {또는 정신7}”이 되어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한다. (*인용, 참고: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왜 사랑은 ‘즐겁도록’ 진화해 왔는가. 키스가 짜릿한 이유는 단순한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종의 지속을 유도하는 정서적 보상 체계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이 시스템 안에서 쾌락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서, 그 쾌락 자체를 의미화하고 재해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며, 때로는 고통까지 포함한 복합적 감정 구조로 변형한다. 따라서 사랑은 생물학적 기능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잔여물이다. 즉 기능으로 시작했지만 의미로 진화한 구조다.
———— 그렇다면 인간은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고 통제할 만큼 성숙한 존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은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도덕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상태에 있다. 기후 위기나 사회적 문제처럼 명백한 구조적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지능의 부족이라기보다 방향성의 불일치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만 그것을 집단적으로 ‘실행’하는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기술이나 천재성, 예를 들어 특정 개인의 혁신은 해결책이라기보다 변수에 가깝다. 천재는 시스템을 확장하거나 흔들 수는 있지만, 인간 전체의 윤리적 합의 구조를 완성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 문명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이며, ‘교육 가능한 존재’인지 여부조차 실험 중인 단계다.
—————결국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은 환경과 자유의 결합 구조다. 개인은 자신이 놓인 환경, 즉 가정, 언어, 문화, 미디어에 의해 상당 부분 형성되지만, 동시에 그 조건을 완전히 환원할 수 없는 선택의 잔여를 가진다. 따라서 “환경이 나쁜 아이는 질이 나쁜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 그것은 결과를 성향으로 오인하는 판단이다. 인간은 입력된 세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그 입력을 다시 해석하고 변형하는 능력을 동시에 가진다. 이 구조 때문에 인간은 완전히 결정되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사랑, 혐오, 취향, 판단 모두 이 애매한 중간 지점에서 발생한다. 결국 “김치볶음밥을 좋아하는가”와 같은 질문조차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경계가 얼마나 쉽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인간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존재다.
—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논의할 수 있는 세대인가? —— 아니다, 맞춤형 세대는 없다. ——— 우리는? ———— ㅎㅎ 멀었어, 아직 시작도 안했어. ————— 무슨? —————— 잠재력을 말하는거야. 신이 왜 인간을 이렇게 볼품없게 만들었냐는 질문이 나오지. ㅎㅎ ——————— 그럼 우리에게 부족한 건? ———————— 인간은 도덕을 “모른다”기보다, 도덕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존재지. ————————— 인간이 정말로 교육이 될까? ——————————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최소한 가능성은 남아 있는 셈이지. ——————————— 하지만 기후문제 같은 보너스 문제도 제대로 못 푸는 인류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나. ———————————— 머스크의 새로운 식민지 같은 확장 시도에 기대를 걸 수는 있겠지. ————————————— 하지만 그곳에 도덕이 자동으로 따라붙는 건 아니다. —————————————— 머스크가 할 수 있을까? ——————————————— 천재 한 타스는 구조를 밀어줄 뿐, 전체를 바꾸진 못한다.
— 선과 악의 밸런스란 무엇인가. ——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가까이 하지 마. ————— 그런데 그 판단은 얼마나 충분히 이해된 것인가. —————— 우리는 타인을 ¨선·악¨으로 분류하면서 안심하려 한다. 하지만 그 분류 자체가 이미 단순화된 세계다. ——————— 너는 얼마나 ‘악’을 알고 있는가. 너는 ‘선’인가. 그렇다면 너는 얼마나 ‘악’을 알고 있는가. ———————— 선은 악을 모른 채 존재할 수 없다. ————————— 오히려 선이라고 믿는 상태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 —————————— 왜냐하면 자신을 검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악을 알아야 하는가. ———————————— 악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을 “이해하라”는 문제다. ————————————— 이해하지 못한 선은 쉽게 폭력으로 변한다. —————————————— 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 중요하다. 그러나 정당화와는 다르다. ————————————————이해는 통제 가능성을 만들고, 무지는 과잉 반응을 만든다. 결국 선과 악은 절대적 실체라기보다, 인간이 불완전한 인식 속에서 만들어낸 균형 장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을 선택하는 존재라기보다,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정되는 존재에 가깝다.
— 그렇다면 빙고가 “바다를 읽는다”는 것은 가능한가. —— 읽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번역한다는 뜻이다. ——— 우리는「바다」를 읽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생존 가능한 의미만 추출한다.
철학 한 조각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백종원 씨는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며, 대중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개발하고 대중화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왔다. 외식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고, 많은 자영업자들에게 요리와 경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공로가 모든 비판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요리 실력과 기업인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능력은 평가받아야 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논란과 의혹 역시 그와 별개로 검증받아야 한다. ———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덕은 한 가지 뛰어난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기술(테크네)은 훌륭할 수 있지만, 덕(아레테)과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가 함께할 때 비로소 좋은 삶과 좋은 리더십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백종원 씨를 평가할 때도 극단으로 치우칠 필요는 없다. 음식과 외식 분야에서 보여 준 능력과 공로는 인정하되, 기업인이자 공인으로서의 책임과 윤리 역시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진정한 신뢰는 뛰어난 실력만이 아니라, 정직함과 책임감, 그리고 잘못이 있을 때 이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 우리는 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윤리와 언어의 책임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 동의하는 것, 편안함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말한다. 그러나 불편하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대상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침묵은 언제나 중립이 아니다. 침묵 역시 하나의 선택이며, 때로는 현실을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히 자기 성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 전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좋아하지 않는 것, 불편한 것, 동의하기 어려운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어떤 대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은 이해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고, 결국 사회적 담론에서도 사라진다. 그렇게 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동의하지 않음’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이다. 또한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도구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만든다. 따라서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 가능한 영역 안에 두기 위한 시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사유의 언어 안으로 끌어들이고, 감정이 아니라 이해의 구조 속에서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다.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맹목적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그의 레시피를 수차례 사용해 온 사람으로서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제주에서 만들어진 많은 것들도 결국 백종원 씨의 레시피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나를 욕해도 좋다. (종원이 형, 기다렸어. 화이팅! 형, 나 오늘 처음으로 김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