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午 - 處暑

2026. 8. 27. 09:04 from 六十干支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단순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나, 어떤 중독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외모는 때로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가치나 매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시절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에는 단순한 낭만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본능도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사랑은 영원을 바탕으로 한 맹세라기보다, 다음 세대, 즉 후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작용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동물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투정부리며 했던 말, “어떻게 사랑도 없이 결혼했어?”라는 질문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상한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른들의 입장에서 우리 세대에게 묻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랑만으로 결혼해도 되겠어?” 우리는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마치 가게에서 사 먹는 사탕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달콤하면 사랑이고, 달콤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단순한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에는 본능이 있고, 시간이 있고, 책임이 있으며, 때로는 희생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복잡한 것들 위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그러니 사랑을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나 순간적인 설렘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담아온 것이 너무 많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는가

 

인류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따르면 식물은 이미 세상에 나왔고, 육지의 동물들이 창조된 뒤 마지막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선악, 즉 ¨앎¨을 접하게 된 후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성경에는 그 가죽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동물이 희생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보호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하느님은 아담에게 땅을 일구어 그 소산을 먹되,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아담이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 자체가 처음부터 죄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그 노동에는 수고와 고통이 들어왔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 자신의 양식을 얻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등장한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다. 둘은 각자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을 하느님께 제물로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여기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왜였을까. 성경은 가인의 제물이 농산물이었기 때문에 거부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도 곡식과 열매를 하님께 드리는 제사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오히려 아벨은 자신의 양 가운데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이다. 앞서 창조주께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기 위해 자신의 피조물을 희생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나는 아벨의 제사가 더욱 다르게 보인다. 성경은 그 가죽이 어떤 동물에게서 왔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인간을 위해 희생된 다른 생명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수고하여 얻은 것 가운데 가장 좋고 귀한 것을 창조주께 드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반면 가인에 대해서는 단지 땅의 소산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것이 첫 열매였는지 가장 좋은 것이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약의 히브리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물의 종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믿음, 그리고 정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먹어야 살아간다. 곡식을 먹기 위해서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기다려야 하며, 동물을 먹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돌보아야 하고 결국에는 그 생명을 거두어야 한다. 농사나 축산을 알 필요조차 없었던 인간이 ¨앎¨을 선택한 순간부터, 고단한 ¨삶¨은 시작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다른 생명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벨이 자신의 첫 번째 것을 하느님께 드렸던 것처럼,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조상들은 한 마리의 소를 자식처럼 아끼며 키우다가, 평생 농사만 짓던 소가 죽을 때가 되면 눈물을 삼키며 그 생명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의 잔치나 제사에서 그 고기를 나누고, 남은 뼈까지 고아 먹으며 그 생명이 자신들의 삶을 이어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먹는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럽에 감자가 들어온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감자는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뒤 처음부터 환영받은 음식이 아니었다. 낯선 식물이었고 오랫동안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감자는 유럽의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먹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구약의 레위기와 신명기를 보면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의 꾸란에도 마찬가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등장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고, 피와 죽은 동물 등을 먹지 말아야 하며, 정해진 방식과 관련된 음식에 대해서도 여러 규정이 존재한다. 나는 이 오래된 음식 규정들을 단순히 “옛날 사람들의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각각의 금지 규정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종교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고, 성경이나 꾸란이 모든 동물에 대해 각각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인간에게 모든 생명이 곧바로 소비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먹어도 되고, 이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깨끗하고, 이것은 부정하다. 이것은 잡아도 되지만, 이것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고대의 인간은 먹는 행위에 경계를 두었다. 어쩌면 그 경계는 인간에게 “네가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대의 인간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생물을 끌어올리고, 먼 나라에서 식량을 가져오며, 자연에서는 먹을 수 없었던 것까지 가공하고 변형하여 식탁 위에 올린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묻게 된다.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먹어도 된다는 것은 같은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 글에서 계속 생각하고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무엇이든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땅이 넉넉하지 않았고 식량이 늘 풍족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속의 뿌리와 줄기, 산과 들의 나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먹는 지혜를 발전시켰다. 무엇 하나 쉽게 버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세대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세대는 가난과 전쟁의 기억 속에서 성장했고, 산업화와 함께 농업의 기계화와 도시화를 경험했다. 가족계획 역시 사회 전체를 바꾸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대표하듯, 많은 가정에서 자녀의 수를 줄이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변해갔다. 그 세대가 만들어낸 변화는 엄청났다. 그들은 농업을 기계화했고,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이전 세대보다 훨씬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남겨준 풍요를 누리면서도, 그 풍요가 만들어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윗세대가 인구를 너무 많이 늘렸고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해서 이 지경까지 왔다며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윗세대 역시 전쟁과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유년기에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고, 그 현실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으며, 살아남기 위해 농업과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오늘날의 기후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 세대가 무엇을 만들어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것이 AI라고 한다면, 이것은 과연 우리를 더 현명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게을러지고, 더 적게 생각하고, 더 쉽게 소비하는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나는 그것이 조금 두렵다.

기후 문제는 단순히 인류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인간처럼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도 포함되어 있다. 오래전 내가 쓴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생명체가 ¨각성¨과 ¨망각¨의 과정 속에서 지금의 환경에 적응해 온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인류가 아메바와 같은 단순한 생명에서 진화해 지금의 인간에 이르렀다는 과학의 설명처럼, 다른 생명체들 역시 아주 오래전에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깨어 있는 존재였을 가능성을 나는 생각해본다. 놀랍게도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면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창조주가 생명을 부여하고 각각의 역할과 자리를 주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과 같은 각성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신비로운 본능만을 간직한 채 망각 속으로 들어간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과학이 증명한 사실이라기보다 내가 생명과 진화를 바라보며 떠올린 하나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기후 문제를 인간의 편의를 위한 문제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살아갈 환경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다시 창세기의 하와를 생각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 하느님은 하와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리고 에덴에서는 관리하고 지키기만 하면 누릴 수 있었던 열매들을, 이제 아담에게는 직접 땅을 일구고 땀을 흘려 얻어야 하는 고통이 주어졌다. 문제는 ¨앎¨이었고, 주어진 것은 ¨삶¨이었다. 나는 이 두 장면을 함께 놓고 생각해본다. 아담에게는 땀을 흘려 먹고살아야 하는 삶이 주어졌고, 하와에게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아야 하는 삶이 주어졌다. 인간의 삶에는 노동의 고통과 탄생의 고통이 함께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성경 본문을 넘어 한 가지를 상상해본다. 어머니는 열 달 가까이 자신의 몸 안에 한 생명을 품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몸 안에 있지 않다.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의 고통은 단순히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육체적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사랑하는 존재를 자신의 품에서 에덴의 동쪽, 다시 말해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창조주의 마음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은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성경이 직접 말하는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상상해본다.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을 세상에 내보냈고, 인간은 그 세상에서 다른 생명들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있는지를 기억하고 우리가 받은 생명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먹는 빵과 마시는 포도주를 통해 예수를 기억하듯이, 우리가 먹는 모든 것 뒤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과 노동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노동을 먹고 살아가며, 다른 생명의 죽음 위에서 살아가기도 하고, 누군가가 흘린 땀과 누군가가 감당한 고통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일 것이다. 받은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창조주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오래된 정성과 믿음인지도 모른다.

로마서를 보면 하느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창조주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말고, 자신이 만든 다른 피조물들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예수를 보내신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빵을 들어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잔을 들어 자신의 피, 곧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나는 예수가 왜 하필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먹어야 살아간다. 우리는 빵과 곡식과 열매를 먹고, 때로는 다른 생명의 몸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창세기의 순서를 생각해보면 동식물들은 인류보다 먼저 창조된 피조물들이다. 인간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그들은 이미 이 땅에 존재했고, 인간은 창조된 이후부터 그들이 내어주는 것을 먹으며 살아왔다. 결국 인간은 자신보다 먼저 존재했던 수많은 생명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라는 음식의 형태로 내어주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성찬의 의미를 조금 더 넓게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받아 살아가는 일이다. 아벨이 자신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듯이, 우리 역시 우리가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먹는 곡식과 열매, 그것을 길러낸 사람들의 땀과 노동,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희생된 동물까지 생각한다면, 식탁 위의 음식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어 이 땅에 존재했던 동물, 곡식, 그리고 열매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내어주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내가 무엇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돌려줄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창조주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정성과 믿음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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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네간의 경야」, 그는 하얗게 밤을 지새우다. 오리온의 신탁으로 까만 밤 하늘을 모두 집어 삼키려드는 시리우스가 빛나기에, 어둠에 소록소록 스며든 우리는 「한 여름밤의 꿈」을 노래하고자 한다. 그가 베누스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천공에 은빛의 비옥한 은반을 그린다. “즐거움을 위해 쓰라.” 그와 장단을 맞추어본다. “헤이-호, 헤이-호 노래하라. 푸른 {호랑가시나무}에게 우정은 위선이고 사랑은 어리석을 뿐.”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오베론을 거슬릴가보다. 그러나 시인은 멈추지 않는다. “이 향기 속, 이 정원에선 꾀꼬리도 밤새 노래부르겠지. 허나 밤에 일어날 그 많은 것을 보려면은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걸. 왜냐하면 이 {후로라}의 계절은 희랍 사람들이 말하듯이 생과부 아우로라가 미청년 헤스페루스에 미쳐 몸이 달아오를 때거든. 뒤를 돌아 봐! 그녀가 오고 있어! 쏜살같이! 꽃 만발한 긴 들판 가로질러!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그야말로 밤을 휘몰고 있구나. 날렵한 빨간 신을 신고 해와 더불어 달아난 그를 쫓아가 잡으려 미친 듯이 달려가는구나. 저 사랑의 신음소릴 너 느끼지 않느냐? 「서동시집」, 괴테”

 

두 번째 논문을 쓸 당시 저는 당신의 현재 나이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너무 깊이 독서와 글쓰기에 심취해 수면장애가 생겨버렸습니다. 위는 2번째로 쓴 논문 첫마디에 쓰여진 오마주 시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지명인 할리우드 Hollywood는 영어로 호랑가시나무를 뜻하는 홀리 Holly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19세기 후반 서부 개척 시기, 로스앤젤레스 산기슭과 인근 지역에 호랑가시나무 덤불이 무성하게 자라있던 데서 지명이 비롯됐다고 합니다. 왜 우정은 위선이고, 왜 사랑은 어리석은지 혹시 이해가 가십니까? 할리우드의 우정은 아마도 ʻ슬픔의 공간’을 함께 꾸미고 장식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 첫 번째로 소개하는 책은 「숨결이 바람이 될 때」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들숨과 날숨,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결국 바람이 되어버린 사건인데 왜 사람들은 눈물이 흘릴까요? 네, 그건 바로 ¨하나의 눈부신 삶¨이 다시 ¨하나의 눈부신 앎¨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 ¨삶¨이 궁금해도 이제는 네모난 책 속에 갇힌 하나의 ¨앎¨으로만 만날 수 있는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네, 당시 그는 당신의 또래였습니다. 얼마전 공항에서 다시 읽다가 눈물이 나는 것을 겨우 집어 삼키고는 책을 접어버렸습니다. 어떤 누군가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책방 책장에 꽂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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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은 「오즈의 마법사」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인물로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용기가 없는 겁쟁이 사자가 있는데, 주인공인 도로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오즈는 전에 제가 다니던 직장의 거래처로,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IT 일을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부터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제임스 조이스가 연인과 그의 대변인을 동반해 시청으로 걸어가는 사진을 우선 설명해야 합니다. 사진에서 조이스와 연인은 때마침 시청으로 혼인 신청을 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그리 넉넉하게 살지 못해서 꼭 저처럼 넉넉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글이나 논문을 편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누군가가 걱정 없이 열심히 글만 쓰며 그 과정에서 조이스처럼 연인을 만나 그 사진과 같은 낭만을 그렸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M City Condo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매주 수요일마다 업무를 봐주고 있던 오즈에서 M City Condo 전체 전기공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더 이상 마법사가 되어 이 Condo 잔금을 계속 납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안 된다면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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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책은 「파우스트」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대상이나 사물을 언제 아름답다고 하십니까? 우리는 식물에 대해서는 제법 관대하면서도 동물에 대해서는 쉽게 그 대상의 행동이나 모습이 아름답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유인즉, 식물은 언제나 예상 가능하나 사고하는 동물은 언제 어느 순간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 즉 인간을 포함한 ¨삶¨은 죽은 후 ʻ바람’이 될 때 ¨아름다움¨ 즉 ¨앎¨으로 저는 예전 글에서 표현했습니다. 지금 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었습니다. 그것은 제 현재 위치가 토론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위도는 무엇을 정의합니까? 세계인들이 모여 이 위치에 모인 국가들은 이 위도를, 또는 이 경도를 사용한다라고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전에는 이런 합의가 없었습니다. 그냥 해시계나 달시계, 혹은 북극성 같은 별시계가 전부였습니다.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또한 오차가 발생하여 4년마다 1번 윤년이 추가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수없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며 합의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정의로운가요? 혹시 정의란 단지 승자의 관념일까요? 뉴욕시 신호등이나 서울 지하철 임산부석을 보면 서로와의 합의를 어기고 빨간불에 건너거나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편법이 존재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기나긴 적색신호를 기다릴 수 없을 때 한 손을 들고 건넌다면 어떨까요? 그럼 늘 비어있는 임산부석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사고하고 합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편법이라면 우리는 악법도 법인지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제 생각에 정의로운 사자는 없습니다. 약육강식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은 밝음을 강조하기 위한 섭리임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에게 빨간색은 빨간색이고, 그녀에게 빨간색이 파란색인 게 정말 중요하고 심각한 논란거리라고 보십니까? 젓가락질을 잘 못해도 밥만 잘 먹으면 그만이고, 빨간색 파란색 구분이 애매한 사람도 태극기만 잘 그리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배설이란 진화의 문제인가요? 예로 SpaceX 연료를 위한 연료의 무게와 몸무게는 비례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미각은 축복이지 못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구원받습니다.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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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아, 그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왜 맨날 배가 고플까요? 아마도 위가 비어서, 위액이 넘쳐서일까요? 비타민이랑 미네랄만 섭취하고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다르게도 생각합니다. 포만감을 아십니까? 일종의 뇌에 쌓이는 보상(CCK, GLP-1, PYY 같은 신호가 관여)입니다. 사람들은 그게 좋답니다. 네, 비타민과 미네랄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직장동료에게서, 직장상사로부터, 마음에 안 맞는 친구들로부터 말입니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그럼 우리는 하교 후나 퇴근하고 열심히 넷플릭스나 다른 OTT들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마음에서 비우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당신의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바로 “슬픔의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럼 누가 무엇으로 그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요? 와인이나 위스키로 그 공간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요? 당신은 무엇으로 행복을 느끼십니까? 만약 무엇인가가 당신에게 행복을 준다면 그 행복들이 차츰 쌓여가며 “슬픔의 빈 공간”을 채워가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공간에 빈자리가 사라지면 당신은 그 자체를 더 이상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이 책은 특별한 부탁으로 제가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함께 슬픔의 빈 공간을 꾸미던 친구들의 부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많은 행복을 바라지도 않고, 그냥 숨 쉴 수 있는 공간만 제공해 줄 수 없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의견은 단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2달 동안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의 눈물을 함께 나누고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7개의 묵주를 명동성당에 선물해주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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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메리 올리버 시인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지금 교보 광화문 현수막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한번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릎으로 걷지 않아도 괜찮아, 사막 건너 백 마일의 거리를 참회하며. 너는 다만 네 몸의 그 보드라운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면 되지. 내게 말해보렴, 네 절망을. 나도 내 절망을 네게 말할 테니. 그러는 사이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 태양과 비의 또렷한 방울들은 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지. 저 너른 초원과 저 깊은 수풀 너머로, 저 산과 강들 너머로. 그러는 사이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보여주지, 네게 소리치지, 꽥꽥 즐거운 기러기처럼 네 자리를 사물의 무리 안에서 다시금 일깨우면서.” 시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모아 글로 표현해내면 됩니다. 다만 필자와 청자의 마음이 통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왜 다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들먹이냐고 말하십니까? 네, 첫 번째 워싱턴 DC 방문에서 평생 간직한 이 책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정말 서울에 사는 학생에게 주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죽은 시인들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저희들에게 발견되고 싶어 할 뿐입니다. 제 블로그에 꽤 많은 시들을 써 올렸는데 혹시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당신께 써드린 시입니다. 다시 한 번 감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파도가 포말을 개워내고 갈매기의 꿈이 창공을 가르며 쇳물이 끓는 그런 어느 봄 오후, 셔? 왕 라면먹고 쉬영갑서. 곶 마냥 거친 파도로 내뻗은 갯바위에 올망졸망 둘러앉은 낚시꾼 무리 제주의 바람 가르고 - 점점이 흩어진 엽선에서 키를 잡은 율리시스 바다의 노래 부르면, 셔? 감시냐, 가시냐, 폭싹 속았수다, 혼저 라면먹고 갑서. 달의 깊은 애상에 매섭게 넘실거리는 파도의 춤시위 조르바의 열정으로 뭍머리를 달래고 - 올레길 담벼락에 수줍게 고개 든 동백꽃 사랑의 인사 전하면, 셔? 옵서 - 라면 갈랑 갑서. 함바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주방들 장다리꽃 향에 눈 멀고 대지에서 스멀대는 유채의 앎에 귀 멀고 - 푸른 산빛 깨치고 아아 ‘작고 좁은 길’ 걸어 가노라.” 네, 바로 그 영화 대목이 쓰였습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아, 시에 대해서 당신에게 설명하려면 하루도 모자랍니다. 당신이 저에게 절망을 말해보세요, 그럼 저도 제 절망을 설명해 볼 테니. 네, 고통이 없으면 시도 적히지 않습니다. 사랑도 일종의 고통으로 향하는 마음의 고백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거기서 절망을 맛보게 되니까요. 우리는 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또 우리는 사물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아름답다는 겁니까, 하고 질문하시고 싶으신지요? 네, 그 사물의 성격, 그 사물의 모습, 그 사물의 독특한 향기 등의 오감에 따른 복합적인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우리는 이것을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괴테 역시 무엇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시간이 멈추어야 하는 걸까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어제의 당신입니다. 저는 어제의 당신, “당신이라는 정보”를 기억하며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다섯 번째 책 「죽은 시인의 사회」에 속하지 않으면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의 당신은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설명될까요? 어렵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늘 무엇인가가 알고 싶은 저의 ¨삶¨과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소개한 호랑가시나무 기억나시죠? 이 오마주 시 한 편이 어른들을 설득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은빛의 비옥한 은반 역시 이제는 쉽게 이해가 가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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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로 머리가 복잡하십니까? 네, 저도 복잡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고 싶은 여섯 번째 책은 「모비딕」입니다. 네, 알고 싶은 것을 멈추는 것,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일 겁니다.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아, 영우의 대사를 하나 가져와 봅니다. “저는 흰 고래 무리에 섞여 사는 외뿔고래 같습니다... 다른 많은 흰 고래들이 나와 어울리지 못하고 나를 공격하겠지만, 괜찮습니다. 이게 나만의 삶이고 꽤 가치 있는 삶입니다.” 「모비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래 이야기입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을까요? 흰 고래 이야기도 나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과거 흰 향유고래인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항해하다 배와 선원 모두가 몰살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바다는 조롱하듯 그의 필멸의 육체만 물 위에 띄웠고, 불멸의 영혼은 익사시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익사시키지는 않았다. 영혼은 산 채로 놀랄 만큼 깊은 곳까지 끌고 내려갔다. 거기서는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 세계의 낯선 형상들이 그의 생기 없는 눈앞을 미끄러지듯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하와이에 가면 돌고래가 자주 출현하는 장소가 있다고 하는데, 돌고래는 종종 밖으로 뛰쳐나오기 때문에 바닷가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하와이에 가고 싶어졌냐고 물으십니까? 아니요, 이 「모비딕」을 감명 깊게 읽고 좋아하는 사람이 하와이 해변 오두막에 누워 이 돌고래를 구경하는 걸 무척 즐긴다고 합니다. 네, 그분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버락 오바마입니다. 알게 되니까 직성이 풀리십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남 말 따라 하지 말고,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너무 솔직하게 말하지 말고, 특히 고래 얘기 하지 마.” 네, 「노인과 바다」 이야기도 상당한데 고래 얘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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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우리는 종착역에 곧 도착합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ʻ현재’는 미래를 향하는 과거, 과거의 결과는 미래의 예상. 이제 왜 시간이 멈추어야 아름다움이 보이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마지막 한 권이 남았는데 계속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런데 책을 반드시 읽기 위해 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책의 색깔과 그림만 좋아합니다. 아닌가요? 책이 모여 도서관을 이루고, 도서관이 학교를, 그런 학교가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 책 한 권의 분량을 써주고 싶었는데 「조르바」를 포함하면 이게 가능할지 모릅니다. 「조르바」를 쓰던 당시를 찾아볼까요?

이별이 뭐야? 
↘ 떠날 리離, 나눌 별別. 그러니까 넌 밀떡복이를 좋아하고, 난 피자를 좋아해. 그래서 우리는 밀가루를 구입하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었어. 하지만 늘 피곤한 너의 미각은 고추장의 삼투압 효과보다는 쌀의 높은 당질과 고소함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난 어쩔 수 없이 볶음밥을 요리하기 시작한 거지. 여기까지는 사랑을 위한 배려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곧 금전적인 문제가 대두 된거야. 그래서 우리는 결별을 선언하게 돼. 그리고 넌 밀떡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였거든. 애정결핍으로 이어진 넌 수많은 밤을 지새며 떡볶이 폭풍먹방을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난 밀떡을 먹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을 보면 곧장 널 떠올리겠지. “공간적으로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는, ‘양자 얽힘’ 관계에 놓인 A(나)와 B(너)가 존재한다면 ‘국소성의 원리’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두 물체는 절대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물리학 원리) 대로 A에게 어떤 외부적 영향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보다 먼 위치의 B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 2016.6.2.” 하지만 네가 일주일이 지나도, 1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떡볶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인다면 나는 ‘며느리도 모른다’,는 양자역학을 다시 펼쳐야 하겠지.  
그럼 이별에 남은 ‘사랑은 냉정적 긍정’이라고 말해야 할까? 
↘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열정적 긍정’이자 ‘사랑’ 만큼 우리가 남용하고 악용하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 “자기 목적에 유익하다면 그 어떤 잔인함도 눈감아줄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찬양한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해 자기 행복을 희생하라고 강요하고, 그 희생으로 덕을 볼 사람에게 자아를 완전히 줘버리라고 강요한다. 또 부당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말로 도덕적 압력을 행사한다.” 
마조히즘적 사랑이나 사디즘적 사랑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놀이”에 불과하다는 뜻이지? 
↘ 하지만 비가 오면 우리는 선조들처럼 다시 동굴로 돌아가 치맥삼쏘 파막걸리를 섭취하며 「소나기」를 피해야 하겠지. 오전이라면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빠져 초콜릿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셔도 「좋을텐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넌 떠나지 않을텐데. 鳴る神の、少し響(とよ)みて、 さし曇り、 雨も降らぬか、 君を留(とど)めむ。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머무를 겁니다. 鳴る神の、少し響(とよ)みて、 降らずとも、 我(わ)は留まらむ、 妹(いも)し留(とど)めば。「언어의 정원 中, 만요슈 万葉集」” 
¨플라토닉¨이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앞선다는 뜻이야? 
↘ 너의 ¨살아가는¨ 시각 87%, 나의 ¨살아가는¨ 청각 7%, 너의 ¨살아가는¨ 촉각 3%, 나의 ¨살아가는¨ 후각 2%, 우리의 ¨살아가는¨ 말초적 미각 1%, 그리고 남겨진 ¨앎¨ platonic. 
7! 
↘ Eleven!

그래서 비라도 내리면 당신과 작별하지 않을까요? 네, 우리는 이같이 어려운 말을 쓰게 됩니다. 아, 식상하고 피로한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매번 같은 말만 하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고 상대가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한 권은 「연금술사」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는 스페인의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보물을 찾는 꿈을 꾼 뒤, 자신의 꿈을 믿고 긴 여행을 떠나는 모험과 내면의 깨달음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너무 오래된 책이 아니냐고 하십니까? 아, 그럼 우리가 쓰는 사전들의 나이는 얼마나 됩니까? 그러니까 연금술사를 말하려면 인류의 금본위제도를 설명해야 합니다. 옛날 화폐가 없던 시절, 그 당시 모든 상품들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품은 너무 값이 높고, 또 어떤 상품은 물물교환으로만 하기에는 값어치가 상당해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동전입니다. 나중에는 동전도 무거워 지폐를 사용하게 되지만 그 부분은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금덩어리가 번쩍이는 이유 말고, 혹 단단하다는 이유 말고 또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전자기기나 음식에 소량의 금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발굴된 금 모두가 우리 일상에 필요할 만큼의 양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시 금덩어리는 상품을 대신하는 가치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화폐의 가치를 얻게 된 금은 사실 잘 녹습니다. 요즘은 다이아몬드도 기계가 더 정밀하게 만들어내는 세상인데 그리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이 금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연금술입니다. 혹시 납이나 구리 같은 싼 금속을 칼처럼 단련시키면 금이 나오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금속을 단련해 금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삶¨을 단련시키고 또 계속해서 단련시킨다고 그것이 ¨앎¨이 되지 않습니다. 키는 허수 시간에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학교에서, 또 직장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 바로 이 연금술입니다. 지금까지 별의 폭발과 죽음으로만 가능했던 초신성의 다이아몬드도 인간이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일까요?

20년 간의 파란만장한 유랑을 마치고 이타카로 돌아온 율리시즈가 울부짖는다. “오오, 캡틴, 마이 캡틴! 끔찍한 항해가 끝났습니다. 배는 온갖 황폐를 견뎌냈고, 우리는 추구하던 목표를 성취했습니다. 항구가 가까워지며 종소리가 들려요, 사람들이 모두 환희에 차 있어요. 그들이 안정된 용골을, 굳세고 용감한 배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가 회답했다. “소녀들이여, 시간을 헛되이 말라.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시간의 흐름은 이리도 빠르니, 오늘 피어 미소 짓는 이 장미도, 내일이면 시들어 지리니.....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 여기서 캡틴이 말한 라틴어 카르페 디엠이란 무슨 의미일까. 간단하다. 이 시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내일 따먹힐 토마토’다. 캡틴은 그 붉고 탐스러운 토마토가 오늘 저녁 올리브 오일로 목욕재계를 갖춘 라구 알라 볼로네제로 변신해 향긋하고 근사한 바롤로와 촛대를 사이에 두고 눈맞춤을 나누어야 한다고 토로한다. 다시 캡틴이 말했다. “언어가 만들어진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순진한 우리들은 언어가 의사소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곶잘 생각한다. 그렇지만 캡틴의 생각은 다르다. “아냐, 틀렸어. 바로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캡틴, 사랑이 뭐죠? “사랑이란 느닷없이 다가와 아픔만 남기고 가는 거야.” 캡틴이 말하는 ‘언어’, 그것은 소년 바이런이 외치는 낭만주의라기 보다는, 청년 파블로 네루다가 바라보는 여인의 관능,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 다리, 그러나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그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찬 그 눈, 그리고 그 치골의 장미들, 그의 갈증, 그의 욕망, 그리고 그의 동요하는 길이다. 우리는 트로이 전쟁과, 오귀기에 섬의 칼립소 여신과, 식인거인이 사는 라이스트리곤들의 섬과, 요정 세이렌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동굴과, 키르케의 마법 때문에 돼지로 변한 친구들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캡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어린애라는 거야. 넌 네가 뭘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고 있어. 내가 너에게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댈껄? 미켈란 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그에 대해 잘 알거야. 그의 걸작품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본능까지도 알거야. 그치?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내음이 어떤지는 모를껄? 한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적이 없을테니까.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세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 하면서.. 하지만 넌 상상도 못해. 전우가 도움의 눈빛으로 널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게 어떤 건지.. 사랑에 관해 물으면 한 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히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껄?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랑은 어떤 역경... 암조차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달이나 병상을 지킬땐 더 이상 환자 면회 시간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타인을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누굴 그렇게 사랑한 적 없을껄?” 캡틴은 그렇게 말한 후 홀연히 자리를 비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운명의 주인공은 나다. 나 스스로가 아니면 나를 조종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너무 늦지않게 그를 찾아 버몬트 주의 웰튼 아카데미로 떠난다면 우리는 책상 위로 올라가 출구로 향하는 캡틴의 쓸쓸한 뒷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편견과 고정관념을 그 자리에서 훌훌 떨쳐버리고 이렇게 외칠 것이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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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