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는 사회 - 한병철 II

2024. 10. 20. 05:46 from 書評

 
존재자의 본질적인 다름이 익숙한 것에 맞서 자신을 드러낼 때 고통이 발생하며, 경험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이 고통이기 때문이다.인지상정, 집단사회에서 남을 의식하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이자 통속적인 일반의 가치라면, 구성원이 속한 조직의 ¨척도¨에 따라 자신에게 익숙하지 못한 경험은 기쁨, 혹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럼 오유지족,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에게 만족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자 이에 따른 부당함과 불편을 감수하라는 의미로,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 같다.

그렇다면 피로사회에서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같은 고통은 우리의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곤한 시각은 주관적인 자연의 풍광을 바라고, 피곤한 청각은 기분을 새롭게 만들 감성적인 음악을 갈망케 하며, 피곤한 후각은 신상품으로 나온 은은한 향수를 구입하게 하고, 피곤한 미각은 식욕을 자극할 외식으로 이어지거나, 피곤한 촉각은 안락한 스파나 족욕을 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나의 고단한 시각은 널 바라보려 애쓰고, 너의 피곤한 청각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만약 우리의 피로한 후각이 문제였다면 손잡고 거리를 나선 우리가 아기자기하고 코지한 카페로 발걸음을 돌리고, 브라질산 산토스나 콜롬비아 수프리모가 우리의 후각을, 시큼달콤한 딸기 치즈케이크나 화사한 몽블랑이 우리의 미각을 치료해 줄지 모른다. 

 

그런데 정도가 지나친 오감의 환충 또한 고통을 불러온다. Your eye is bigger than your stomach.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살펴보자. 뇌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뇌수막, 혈관, 근육, 그리고 신경분지들이 수축하고 확장하면서 말초신경이 자극되어 머리가 아플뿐이다. 뇌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조작하고 있어서 일까. 영장류 중 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피엔스가 공교롭게도 가장 연약하다. 자연과 멀어져서, 자연을 지배하려 해서, 그리하여 자연의 저주로부터 면역력을 회복하기 위해 치료를 받고 무수히 많은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것인가. ¨망각¨된 동물과 벌레들의 고통은 그저 육체적인 고통일 뿐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척도¨는 분명 무의미하다. 슬픔이 없다면 어떨까. 전제적 조건으로 인해 행복이라는 의미는 덧없거나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경지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고통을 겪을 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Nebeneinander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Miteinander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는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고통을 느낀다. 프시케Psyche(나비)를 사랑하기 위해 (¨알기위해¨) 에로스(Cupid)는 화살의 고통을 감수한다. 네가 나비인가.

 

고통은 자신을 알게한다. Know thyself. 이같은 자기 성찰은 폰 바이치제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나는 무엇이 내 것이고 내가 무엇을 다 가지고 있는지를 고통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나의 발가락, 나의 발, 나의 다리,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땅에서부터 위쪽으로 내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나는 고통을 통해 알게 되며, 뼈와 허파, 심장, 골수가 지금 있는 거기에 있다는 것 또한 고통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고통의 언어를 갖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기관의 방언’을 쓴다. 물론 나는 내가 이것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인지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결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지쳐간다. 과연 ¨각성¨된 당신의 뇌는 이같은 사실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들을 지켜보며 아픔과 고통을 느낀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립써비스조차 귀찮아진 우리는 벙긋벙긋 립씽크만 반복하고 있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무릎이 아프다, 고로 나의 발은 존재한다. 나의 이웃이 아프다, 나 역시 아프다, 고로 ‘의자는 나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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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없는 사회 - 한병철 I

2024. 10. 15. 20:03 from 書評


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발터 벤야민

고통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사용한 ¨척도¨로 보면 고통은 행복으로 향한 상태가 부족한 현상이다. 고통과 행복의 중간 상태를 우리는 무료함이라 이해한다. 그렇다면 고통이 없는 세계가 가능한가. 빈약하기 짝이없는 우리의 계획과 추가적 보수작업이 늘 당연한 부실한 설계, 그리고 허술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 언제나 스스로에게 고의적이지 못한 이율배반적 고통을 가한다. 한편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는 종종 마조히즘을 선택하고, 어떤 경우 필요 이상의 행복을 손아귀에 넣으려 온갖 힘을 다해 투쟁한다.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선악¨과 였다. 베어 물은 사과란 슬픔과 행복, 불행과 행운, 그리고 Good, Bad & Ugly였다. 그리하여 ¨정의로워지고자¨하는 이상한 자는 멋모를 자유·평등·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를 주장하고, 이해되지 않는 ¨척도¨를 외치며 소금과 후추에 범벅된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가 절실한 허기진 자들의 영양실조와 기아를 대처하려 거짓미소로 쓴맛을 슬며시 감추며 후하고 넉넉한 인심을 넉살스레 베푼다. 시대를 슬퍼할뻔한 우리가 그렇다. 모두가 뉴스에 귀기울이지만 모두는 작은 행복의 공간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채워지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퇴근 후 Netflix의 오징어게임 2를 보며 대리만족으로 내일의 에너지를 충만히 비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안락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하와는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멍청한 아담은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비록 무고한  던힐 을 피며 봉천동 언덕을 올랐고, 봄날이 증발하는 절망을 외치며 공상에 몰두한 「엠마 보바리」같은 즐거운 사라의 육체를 상상했다. 그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 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말하자면 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이자 치골의 장미들의 향기가 가져다주는 ¨¨가 나의 정신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은 스캔들이다.

 

고통에 빠진 아폴론적 사회에서 좋아요Like는 진통제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좋아요Like는 갈등과 모순이라는 격정의 과정에서 설파되는 산파술을 철저히 외면한다. 우리 시대에는 예술을 좋아요의 코르셋에 끼워 넣는데 모든 힘이 동원된다. 예술의 이러한 마취는 옛 거장들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옛 거장들을 유행하는 디자인과 무턱대고 결합시키기도 한다.” 속살거리는 계절의 풍미는 고루한 구시대적 발상이라 치부되고, 모든 것은 유행과 좋아요Like에 맞춰 엉망진창 뒤섞여fusion 버린다. 소금이 너무 많이 사용되자 우리는 거기에 설탕을 부어버렸고, 다시 간사한 우리의 심미적 발상은 피곤한 미각에 후추와 고추가루를 과도하게 남용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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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오존층에서 구멍을 발견하고 그 원인인 프레온가스의 대체재를 개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석유와 가스는 그 본질상 대체가 어려운 편이다. 석유와 가스는 완벽에 가까운 에너지원이며, 대부분의 제조품에 원료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석유와 가스로부터 벗어나려면, 선의와 탄소 중립 목표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석유와 가스라는 물질은 원생동물Protozoa과 같은 생명체로부터 만들어졌다. 흥미롭게도 지구온난화로 인해 1억 년 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서 플랑크톤의 개체수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와같은 동물성 플랑크톤과 해조류 등의 유기물들이 쌓여 가열과 압축과정을 거친 후 결과물인 근원암층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석유와 가스가 스며들어 대규모 연료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저류암층이라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 바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절반과 가스의 40%가 자리한 페르시아만이다. 석탄보다 오염이 덜한 천연가스는 단단한 셰일Shale로 된 근원암층에 자리하기 때문에 기존의 수직시추vertical drilling로는 불가능하고, 개발된지 얼마되지 않은 수압파쇄hydraulic fracturing와 수평시추horizontal drilling라는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야만 가능하다.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이라고 치면, 거대충돌 가설로 달이 생성된 시기가 바로 44억 년 전이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같은 생명체가 우연히 발생한 시기는 원생누대로 약 25억년~5억 4200만년 전이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석연료는 약 2.51억년~6000만년 전에 살았던 생명체들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공룡들이 지구를 누볐던 트라이아스기, 쥬라기, 그리고 백악기이다. 백악기 때 지구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1120~1680ppm에 달했고, 현 추세라면 425ppm에 달하는 인류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300년 안에 백악기 시기와 비슷한 1000ppm에 이르를 것이다. 소행성 충돌, 혹 빙하기로 공룡이 멸종된 후 신생대가 되고 나서야 포유류와 조류 등이 지구상에서 활기를 띠었고, 600만년 전에서야 아프리카 유인원이 이족보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150만년 전에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다루기 시작했고, 20만년 전부터 현인류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야 에너지 밀도가 낮은 향유고래기름이나 목탄, 그리고 석탄이 산업혁명에 불을 지폈고, 화석연료의 출현과 동시 평등과 편리를 부르짖는 인류의 운명에 헨리 포드와 니콜라 테슬라, 그리고 토머스 에디슨의 삼각관계 결론이 문명에 거대한 하나의 획을 그었다.

‹만약 에디슨이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찬성하고 포드의 내연기관 엔진에 반대했더라면 인류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였을 것이 분명하다. 에디슨이 직류를 원했던 이유는 안정성 때문이였고, 테슬라가 교류를 주장한 이유는 경제적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에디슨의 직류는 현재 전기차의 베터리에 사용되고 있으며, 테슬라의 교류는 엔진처럼 자동차를 움직이는 전기모터에 사용되어 포드의 내연기관 엔진은 차츰 설 자리를 잃고 오늘도 빛을 바래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설계자가 미래에 등장할 지적생명체를 위해 석유와 가스를 디자인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들을 머리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부담스럽게도 현인류가 석유와 가스를 모두 써버린다면 지구를 살아갈 다음 지적생명체는 과연 무엇을 쓴다는 말인가,라고 토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곧 100억명을 쉽게 돌파할 것이고, 탄소의 증가는 날날이 높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상기후현상은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인류가 화석연료를 많이 쓸수록 플랑크톤은 곧 공룡이 존재하던 1억 년 전으로 회복될 것이다. 인위적으로 높아진 이산화탄소로 바다와 호수에 사는 플랑크톤은 증가하게 되고, 바닥으로 가라앉은 원생동물과 플랑크톤은 공기가 차단된 상태로 퇴적물과 함께 오랜시간 가열과 압축을 거쳐 다시 유기물질인 케로젠을 만들어낼 것이다. 46억 살인 지구에게 해양동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시간은 고작 유년기에 불과한 8.4%, 즉 3억 9000만 년이다. 그동안 가이아에 새로운 대륙판이 짜지고, 그리하여 대규모 화산활동이 전지구적으로 발생한다면 하늘을 가리는 화산재 때문에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새로운 지적생명체는 지금으로부터 약 3억 8850만 년 후에 등장해 화석이 되어버린 현인류의 정보들을 운좋게 찾아내 열심히 연구해 볼 것이다. 그에 앞서 포유류는 공룡같은 거대한 동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물론 높은 이산화탄소 때문에 광합성량은 무척 높을 것이고, 거대해진 식물들의 성장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다. 대신 영양가가 적고 이미 오래전 번식된 곤충들의 습성을 기억하는 스마트한 식물들로 인해 우리가 알던 공룡보다 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초식공룡들과 그들을 잡아먹는 육식공룡들이 대륙을 활보할지는 모른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지적생명체는 다시 새로이 형성된 땅에서 오래전 실패한 현인류보다 더 혹독하게 전보다 훨씬 똑똑한 식물과 싸우며 운좋게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SMR 원자로를 개발해 낼지는 모른다. 현인류가 전쟁과 같은 폭력성을 배운 개기가 바로 사냥 때문인데, 단백질, 칼슘, 엽산, 비타민, 그리고 철분은 식물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지방을 비축해야하는 신체구조와 과학지식이 전무한 수렵채집인이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답습해야 한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육식은 아마도 불가피할 것이다. 만약 현인류의 낙오를 거울삼아 새로 등장한 지적생명체가 가인Cain and Abel의 실수를 번복하지 않는다면, 저주에서 벗어난 그들은 쉽게 풍년을 맞이하여 설계자가 건네는 가죽옷을 입지 않아도 될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너지 밀도가 높고 완벽한 에너지원인 석유와 가스는 인류가 훗날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사용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알의 모래 알갱이 속에서 우주를 보는 일’에 백년이상을 써버린 인류의 잘못인가, ‹e.g. 1990년 모래에서 추출된 유리를 사용해 만든 허블 우주망원경› 아니면 윌리엄 블레이크 같은 시인들이 다이아나 팬톤의 Fly Me To The Moon 가사처럼 쉬운 것을 너무 추상적인 단어와 은유적 표현들로 어렵게 묶어 설명한 것이 문제인가.

우주력

y = aᵡ, 우주의 크기가 지수함수적으로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수학적으로 우주의 크기인 y가 고정된 x라는 시간의 주기에 따라 a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빅뱅 후 크기가 원자핵만 하던 우주가 10 ⁻³⁶ 에서 10⁻³초 사이에 10조분의 1의 10조분의 1초마다 2배로 증가하며 100번 똑딱거린 후 1광년의 크기로 급팽창 했다는 것을 말한다. (1광년 = 2¹⁰⁰) 따라서, 무 → 허수시간 → 드 지터 우주 → 빅뱅 → 프리드만 우주가 된다. 

무 → 허수시간 → 드 지터 우주 → 빅뱅 → 프리드만 우주
무10⁻4⁴⁵s (초힘) → 빅뱅 직후10⁻4⁴³s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중력)
빅뱅 직후10⁻4⁴³s → 프리드만의 급팽창 우주10⁻³⁵s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

September → 신성한  7 라틴 ‘Septem’
11번째 달 → ‘야누아리우스 Januarius & 페브루아리우스 Februarius’는 당시 한 해의 마지막 달
→ 7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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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전기의 생산과정에서 구리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물질이다. 은은 구리보다 전기 전도성이 높기는 하지만 강도가 떨어지고 희귀하여 앞으로 새로운 연금술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인프라에 투자되기 그 효율성이 무척 낮다. 빛이 있으라,는 말로 빅뱅이, 아침과 저녁이 있으라,는 말로 초힘이 4가지 힘으로 분리된 후 힘들에 의해 천체의 궤도에 섭동이라는 교란이 시작되어 태양과 행성을 도는 달들과 은하계가 생겨났을지 모른다. 레고블럭처럼 우리는 다시한번 설계자의 의도를 따라보기로, 이에 레고 십계명을 떠올리며 빛이 있으라,를 외치기에 이른다. 프로메터우스가 신들로 부터 불을 훔쳐오자 인류는 동굴 속 그림자 놀이 Allegory of the Cave를 개시했고, 그리하여 조셉스완은 필라민터를 발명하고 에디슨은 전구내의 산소를 모두 제거하여 진공상태에서 전구를 밝히게 된다. 여기까지가 과학자의 역할이고, 그것을 필요로 하여 산업화시키고 인프라를 구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상에서 불가피한 우리의 몫이다. 디옥시리보핵산은 프리드리히 미셰르에 의해 발견되었고, 다시 과학자들은 DNA나 RNA를 분리하여 insert DNA를 증포시킨 후, 벡터에 삽입하고 재조합한 DNA를 세포에 도입하고 선택한 유전자를 복제하기에 이른다. 왜일까,라고 질문한다면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는 설계자의 뜻대로 우연의 거듭으로 발생한 미토콘드리아가 진화를 거듭해 지적생명체로 발전한 과정을 재현해 보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연한 플러스 알파는 아마도 더불어 발전된 의학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복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의 지식이 시생누대에서 고생대로, 중생대에서 신생대로 가기위한 여정은 까마득 멀기만 하다. 한편 캄브리아기의 생물대폭발시기인 5억 4200만 년 전의 기적을 과학자들이 재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엄청난 우연이 필연적으로 현인류에 주어져야 한다. 아말(األمل مسبار, 희망), 티엔원(天問, 하늘에게 묻는다),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 인내), 우리는 물과 소금과 철과 구리의 흔적을 찾으며 ¨각성¨하고 또 다시 ¨각성¨되길 기도하며 왜 지적생명체라는 인류가 내장감각계통을 인지하거나 자율신경계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지 의문을 품는다. 

세계의 80% 구리는 추키카마타 광산의 동정광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호주, 인도네시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중국의 정제소로 향해 공정을 거친 후 99.9%의 순수한 구리로 탄생한다.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선 철광석과 비교해 훨씬 많은 토양을 퍼내는 과정을 거치며, 이 과정의 무한 반복은 자연과 환경을 철저히 파괴시킨다. 환경뿐만이 아니라 채굴장 근처의 마을은 늘 파괴되고, 지역민들은 높은 니켈, 납, 그리고 비소와 같은 독성으로부터 고통과 질병을 호소한다. ‘천천히 서두르라’, 설계자가 만든 자연의 ¨부¨와 ¨아름다움¨을 보면 시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太陽曆은 그에 비해 너무나 짧다. 우리는 몇일만을 살다 짧은 사랑을 나누고 떠나는 매미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설계자도 우리를 그렇게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반복되는 일과에서 ¨불쾌¨하지 않기 위해 아드레날린C₉H₁₃NO₃과 도파민C₈H₁₁NO₂으로 ¨쾌¨, 즉 교감신경의 흥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삶¨은 설계자의 자연을 연구하여 물질(구리Cu, 철Fe, 나트륨Na)을 파낸 후 지금껏 얻은 정보와 과학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 하지만 인류를 먹이기 위한 과학은 이미 충분한 시점을 넘어섰고,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경제공식을 철학이 다시 ¨정의¨하기엔 그에 맞서야하는 사회적 갈등과 반발로 인해 무척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해야 할 과제는 잉여가치를 통한 안락과 편리의 유지가 아닌, 자연법에서 배울 수 있는 정의로움으로 빈곤과 기아문제를 용광로가 아닌 뜨거운 심장에서 벼려내야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각성¨되어 설계자에 의해 다시 본능을 제외한 지적능력이 ¨망각¨된 개미나 벌과같은 생명체가 아닌, 자주성으로 스스로를 지배하는 법칙을 관리하고, 반복된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모인 정보를 다시 복제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본능과 욕망에 더 의존하여 정해버린, 시대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교정과 보수를 반복해야하는 법憲法이 아닌 순수이성으로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과 생명체의 이유를 정확히 직시하는 시각이 중요하다. 그럼 사과에 대한 고해말고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설계자의 월요일에서부터 일요일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빛이 있고, 우주가 생기고, 자연법칙이 탄생하여 궁창이 나뉘고, 다음으로 생명이 탄생하여 진화를 거듭하고, 그리하여 사랑하고 자연Gaia을 가꾸었던 것이 설계자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럼 혹자가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직 요일의 순서를 정하지 못한채 모두는 각자의 요일에서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다만 모두가 잘 따르는 요일은 주말에 휴식을 즐기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에게 물질은 부족할 수도, 부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우리의 뛰어난 설계자들이 다 함께 모여 빅픽쳐를 그려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커다란 분쟁을 겪고 인류는 캄브리아기처럼, 혹 폼페이의 한 장면처럼 역사 속 영원히 잊혀진 문명으로 전락될 수 있다. 석유가 없으면 친환경에너지를 사용하면 되지,라는 우리의 망상을 훗날 새로운 인류에게 발견되어 비웃음 당할지 모른다. 친환경에너지를 위해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고 그러자면 광석을 캐내어야 하는데, 이 채굴과정에서 다시 엄청난 탄소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가르강튀아처럼 많이 먹고 많은 탄소를 배출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지적 ¨아름다움¨과 그에 부합한 ¨부¨를 상대보다 많이 창출해야 할 것이다. ¨유능한¨, 즉 ¨아름다운¨ 화자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가난한 청자의 아폴론적 고통을 함께하며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탈탄소 사자후the roaring of a lion는 소음에 불과하며 우리의 요일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로 남을 뿐이다. 말하자면 가난한 그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부유하고¨ 디오니소스적일 나는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이 부족하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우아함이 결여된 인상적이고 냉랭한 ¨아름다움¨이다.” 인정되는 ¨아름다운¨ 공인公人의 ¨부유함¨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납득할 수 없는 부유함이 가져오는 우월감, 가식, 허세,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져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사회적 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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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콜라캔의 용량은 222g으로 체중이 50kg인 사람 몸에는 약 200g의 나트륨이 존재한다. 소금은 물과 만나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으로 전리되어 우리의 근육과 신경활동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육식을 하지 않는 짐승들도 본능적으로 돌이나 흙을 빨아서 필요한 소금과 미네랄을 보충하는데, 이러한 나트륨은 소화 및 신진대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알파Alpha 야수들은 사냥 후 뜨거운 내장을 차지하는데, 이 과정에서 소화되지 못한 초식동물의 음식물을 섭취하게 된다. 남은 고기나 야채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금 염장이 사용되는데, 음식물을 염장할 경우 삼투현상으로 인해 음식물 속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 세포들이 죽어 버리기 때문에 부식하지 않는 음식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금으로 식재료만 보관하는 것은 아니다. 가스나 포집된 이산화탄소, 또는 태양에너지와 풍력에너지, 그리고 수소 같은 연료들을 보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소금은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몇세기 전만해도 상류층의 식탁 위 풍요와 허세의 상징이였던 식염Pure Dried Vacuum Salt 외에도 오늘날 소금은 화학 산업과 제약 산업에 큰 기반을 이루고 있다. 클로르알칼리Chlor Alkali 공정으로 소금물은 수소 가스와 수산화나트륨으로 나뉘고, 우리가 사용하는 비누와 세정제를 만드는데 이용되고 있다. 차아염소산염hypochlorite, 즉 표백제와 정수 시설을 위해 염소와 수산화나트륨이, 그리고 종이와 유리를 만들 때 소다회Soda Ash, 즉 탄산나트륨이 사용된다. 이제 곧 눈발이 날리는 혹독한 겨울이 올 것이고, 우리는 출퇴근과 각가지 쇼핑을 즐기기 위해 도로 위에 상당량의 소금을 뿌려야 할 것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도로나 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굴을 파는 경우 화약의 도움은 필수이므로 질산칼륨saltpetre과 유황과 목탄 가루가 이에 사용되지만, 한편 질산칼륨은 식물을 건강하고 빠르게 자라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소금을 본능적으로 알맞게 섭취하는 짐승들wildlife과는 다르게 그 어떤 유인원보다 더 ¨각성¨된 우리는 저염식으로 고혈압을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부족한 소금은 빈혈을 초래하거나 신진대사를 억제하는 ¨망각¨상태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소금을 과다섭취할 경우 색다른 ¨미각¨을 위해 ¨각성¨한 우리는 비만, 뇌졸중, 심장질환, 그리고 위암이나 골다공증 등의 ¨망각¨을 부르는 질환을 얻을 수 있다. 썩은 고기나 소변에서만 검출되던 질산칼륨은 인도의 향신료에 매료된 영국이 갠지스강 진흙에서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향신료 전쟁에 이어 소금 전쟁을 부추겨 결국 월급Salary을 못받는 군중과 간디의 소금행진을 초래했고, 질산염, 요오드산염, 황산염, 염화물의 염류가 들어 있는 칼리치caliche가 우연히 페루에서 발견되면서 다이너마이트의 기초인 질산과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가 추출되기 시작됐다. 작금의 시대 식탁 위 소금과 후추는 이제 누구에게나 당연스레 여겨지는 기본적인 식재료이다. 수성이나 화성이나 태양계 소행성 세레스Ceres에 소금이 있거나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다. 생명에게 소금의 존재는 각별함을 떠나 필수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Drink Me! Try Me!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냥 호기심으로 시작해 먹고, 마시고,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Do Not Drink! Do Not Eat! 우리는 다시 사과를 먹고, 주스를 마시고,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지만 고해하지 않으므로 짜디짠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언 맨Iron Man이다. 우리의 신체에 흐르는 적혈구 속에 철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철도 소금과 같아서 사고로 피를 많이 흘리거나 헌혈 뒤 종종 발생하는 빈혈을 방지하기 위해 붉은 육류, 콩류, 달걀, 견과류, 또는 뽀빠이Popeye처럼 비타민과 철분이 풍부한 시금치를 적당히 섭취해 주어야 한다. 반대로 과다 철분은 체내에 축척되어 심장이나 간을 손상시키고,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를 파괴시켜 당뇨병으로, 혹 뇌하수체에 쌓여 생식기능 저하나 불임을 부를 수 있다. 철은 금속의 꽃이다. 거의 모든 도구, 장비, 그리고 건축물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철에도 주철cast iron과 선철pig iron이 있는데, 탄소함량이 많을 수록 격자 구조가 불완전해서 쉽게 구부러지거나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영화 속 철을 단련하는 장인은 쉴새없이 철을 두드려 원자들 사이의 탄소를 제거하며 더욱 더 단단한 강철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한다. 파이프 같은 극연강은 탄소 함류량이 0.12% 이하고, 강철봉이나 강판 같은 연강은 0.12~0.3%, 볼트나 이음쇠 같은 반경강은 0.3~0.4%, 피아노선 같은 경강은 0.4~0.6%, 그리고 면도날 같은 탄소 공구강은 0.6~1.6%의 탄소가 들어있다. 그래서 초미세 현미경으로 사용한 면도날을 관찰하면 피지와 면도거품, 그리고 아이언 맨의 거칠은 수염 등으로 인해 쉽게 손상된 칼날을 확인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순철은 탄소함유량이 0.02% 이하의 철이고, 연철은 0.1%, 강철은 0.1~1.7%, 주철은 1.7~4.5%, 그리고 무쇠는 1.7~7.0%를 의미한다. 에펠탑은 강철보다 훨씬 느리게 녹는다는 이유로 연철이 사용됐으나 더 높고 더 긴 교량, 또한 즐비한 마천루로 도시의 멋진 경관을 형성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이제 부식에 강한 강철을 흔히 사용한다. 슈퍼맨을 Man of Steel(합금: Alloy Steel)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철광석에서 나온 철의 경도나 강도(¨아름다움¨)가 약해 탄소, 망간, 실리콘, 니켈, 티타늄, 구리, 그리고 크롬과 같은 원소들을 섞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온실가스의 주원인이 오직 교통수단에만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공실률이 높은 건축물을 지어올려 실업률과 증시로부터 선방하기 위해 생산하는 시멘트가 항공업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강철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전체의 약 7~8%를 차지한다. 선진국 개인이 사용하는 평균 강철 소비량이 15톤인데, 만약 5~7톤 정도를 사용하던 후발주자 국가들이 편리와 번영을 위해 탈탄소를 거부한다면 앞으로 그 양은 현재의 2배, 어쩌면 3배로 치솟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철의 이야기는 최초의 용광로가 생기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멋진 유리풍뎅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옆에는 단검이 놓여 있었다. 온통 보석으로 휘감긴 화려한 황금 손잡이가 달려 있는 단검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귀금속보다 더 귀중한 것은 칼날이었다. 단검의 철제 칼날은 3,000년 세월이 무색하게 전혀 녹슬지 않았다. 이 칼날을 만든 금속은 원래 유성의 일부였다. 철, 니켈, 코발트의 천연 합금이 우주에서 벼려지고 하늘에서 떨어진 결과물이었다. 투탕카멘 목걸이의 노란색 유리풍뎅이와 마찬가지로, 이 금속도 사하라 사막의 사구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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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는 6가지 물질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물질이란 무엇인가. 이 중 소금은 이미 청자가 충분히 인지하였으리라 믿는다. 나머지는 모래, 철, 구리, 석유, 그리고 리튬이다. 우리는 모래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본다.” 모래 속에는 실리카와 석회가 들어있어 나트론을 더하면 소다석회유리를 만들 수 있다. 유리의 구조는 다채로워서 분자 수준에서의 원자들은 비결정 고체이자 과냉각 액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주를,하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바로 허블과 제임스 웹에 유리를 탑제해 우리는 머나먼 우주를 관찰한다. 소금과 향신료로 끼니를 때운 우리는 몰려오는 식곤증을 달래기 위해 87%에 달하는 시각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직장인들에게는 ‘Glass floor’가 NGC6302 나비성운보다 더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선조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지성들은 두 눈 앞에 존재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은 소행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럼 혹자는 설탕유리는 유리가 아니란 말인가, 1000도 이상의 고열로 가열해야 하는 유리가 과연 투명한 플라스틱보다 더 가성비가 좋을까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설탕의 다양한 용도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사용해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광섬유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IDM의 경우 웨이퍼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선 초순수 실리콘이 필요한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순도가 높은 석영암을 채굴할 수 있는 곳이 노스캐롤라이나 스프루스파인이다. 따라서 기술력과 노동력을 모두 갖춘다 하여도, 반드시 축복받은 모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제2의 향신료 전쟁을 설명하기도 한다. TSMC나 삼성이 제아무리 반도체를 만들고 싶어도 ASML의 극자외선 기계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고, 아무리 ASML이 기계를 만들고 싶어도 Ziess가 특수렌즈를 특별한 모래로 가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상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기계장치에 필수인 15개의 희토류 원소를 품은 모래알은 말할 것도 없다. 희귀 원소라는 의미의 희토류는 중국이 가장 많고, 최근 노르웨이와 미국에서 대량 발견됐다. 석유는 말할 것도 없이 ‘Seven Sisters’와 신화를 공유해 왔고, 철과 구리는 산업혁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단골 메뉴다. 모두는 우리가 뽑은 리더가 국내정세에 더 많은 관심을 갖여주길 바라지만, 국민에게 합리적인 생필품을 제공하기 위해선 국제적인 치킨게임이 불가피하다. 리튬같은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다양한 베터리에 사용된다. 이온과 리튬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 우리는 베터리를 재충전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추구에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모두가 우주에서 물질이 사라지면 오로지 시간과 공간만 남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도 물질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난 세기동안 인류가 퍼올린 물질은 6조 7429억톤으로 그 중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사물은 1조 1100억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요 이상의 흙, 모래, 암석을 채굴해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남은 음식을 포함하지 않은 쓰레기로 전체의 5/6 정도를 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활발한 퇴적물 생태계에서 모래를 퍼올릴 경우 야생동물이나 미생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강이나 해안가 주위에 침식을 유도한다. 만약 우리가 중요한 설계나 자원을 위해 모래를 파헤쳐야 한다면 아마도 화석 퇴적층이 답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한 해변을 위해 수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모래를 퍼나르는 것과 퇴적층에서 퍼올린 석유로 이동하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여행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가성비가 좋고 환경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또한 공실률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대도시의 건출물들에 사용되는 시멘트는 항공업과 산림파괴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해야 한다. 좋다. ‘창조주, 혹은 설계자가 주신 물질을 왜 마음 편히 쓰지 못하게 하나. 설마 창조주가 그것까지 계산하지 않았을까’,라고 묻는가. 그렇다면 윌리엄 브레이크는 19세기를 살았던 사람인데 과연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무엇을 했나. 문제는 재료의 용도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일까. 당신이 100만불을 가지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한판에 50만불을 잃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자신의 남은 전재산을 곧바로 다음판에 모두 걸겠는가. 만약 당신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하여도 아마 주위 친구들 모두 당신을 정신없이 뜯어 말릴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인류에 주어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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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허기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P. 시루스의 명언처럼 최고에 도달하려면 최저에서 시작,해야 한다. 전략적 비관주의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기대 이상을 해내어 행복 도파민으로 자신을 포상하고, 겸손으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므로 상대의 기대치 또한 낮추어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영역이 제한되어 있을수록, 삶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굴의 우화 Shadow Play, Allegory of the Cave 속 죄수들은 정말 행복할까. 플라톤의 동굴밖은 이데아의 세계며, 여기엔 눈부신 태양아래 빛나는 One Fine Day in Granada가 존재한다. 그런 앨리스는 해-바라기가 되어 거울 속 비친 자신을 통해 기쁨슬픔 인사이드 아웃」, 즉 ‘거울상 이성질성, Chirality by Reflection of Glass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본 것이 고양이였던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성공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은 그 사람의 정체를 폭로한다. 막스 프리쉬, 스위스의 극작가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라니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네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면, 아무도 네게 그것을 이용하지 못해.겸손이 필요한 이유고, 과소평가 받는 즐거움으로 거인의 어깨 위에서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이다. 말레나의 오만한 ¨아름다움¨공공의 적」이다. 그러나 무언 無言의 ¨¨은 무죄다.  

 

나는 유명해질수록 멍청해졌는데 물론 이것은 아주 흔한 현상입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렇게 겸손하게 굴지 마. 당신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거든. 욜레슈 아주머니 혹은 일화로 보는 서양의 몰락누가 Nuke는 스스로 높이 올라간 사람은 누구든 내려가게 된다고 말하자 니체는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고자 한다고 되받아친다. 비상구나계단말고 엘리베이터로 향해 재빨리 지하주차장으로 도망쳐야 할까. 쉽게 설명하자면 강하지 못하면서 약함을 자랑스레 떠벌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반지의 제왕 속 프로도 배긴스가 되어 매일같이 롯데월드타워 계단으로 출퇴근 할 이유는 없다. 챔피온인 당신은 상대에게 마천루 오르기 자선행사를 어시스트할 수 있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란, 나른한 아침 거울 속 왼손은 거들뿐. 슬램덩크

 

이웃은 나의 거울이다. 웃어라, 모든 이웃사촌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바다에 빠질 것이다. 

 

남자의 옷은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옷을 입고 있는 그의 태도가 말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피셔

 

선녀와 나무꾼을 보면 옷이 날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 치맥과 삼쏘가 있드시, 파전엔 막걸리다. 

 

절제된 표현은 한마디로 태연할 수 있는 용기다.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순간을 좀 더 수월하게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출근하기 전 모리스 라벨의 농담하는 아침 Morning Song of the Jester을 들으며 오전을 시작하고, 자습시간에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거나 학기 과제물로 프로이트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도라면 파인만 씨 정도의 절제된 유머를 선사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동굴 속에서 하산한 차라투스트라」인 당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낙타들에게 사자의 ¨정의¨를 논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조삼모사 朝三暮四를 가르친 후 태연히 초콜릿이나 바닐라 케이크를 사주겠노라 알려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朝三暮四, 아침에 초콜릿, 저녁에 바닐라. 장자, 제물론

 

“분명하고, 둥글고, 흠 없이 완벽한 것 0밖에 없다. 발터 라테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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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the champions, my friends. And we'll keep on fighting till the end.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 of the world. We are the Champions” 

 

나는 캠퍼스campus로 향한다, 챔피온(champion 어원: 라틴어로 싸움 전戰, 마당 장場을 의미하는 캄푸스campus)은 ¨¨과 싸워야 하므로. 지피지기 백전백승 知彼知己 百戰百勝, 우리의 적은 ¨¨이므로 ¨아름다울¨ 연금술사는 시련을 겪는다. 시험할 시試, 불릴 련鍊, 챔피온은 캠퍼스에서 무엇을 시험하고 불리며 달구는가. 시련, 시험, 고초, 고난, 격랑, 풍랑을 겪은 후 연금술사의 ¨¨은 ¨앎¨, 즉 이룰 성成, 공 공功을 발견하는가. 화분을 내려놓은 그가 예비-챔피온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장밋빛 같은 시절들은 아니었어. 그다지 유쾌한 여정도 아니었어. 그건 하나의 도전이었어. 모든 인류 앞에 선 도전이었어. We are the Champions”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입니다. 소리 지르는 니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니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니가 ‘챔피언’, 니가. 「챔피온” 

 

文학을 즐기는 니가, 史학을 즐기는 니가, 哲학을 즐기는 니가, 그리하여 그 감칠맛うま味을 찾아낸 니가.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챔피온champion 캡cap은 땡볕아래 장미를 심는 캡틴(cap-tain 어원: 라틴어로 주인 주, 배풀 장張을 의미하는 capit: head)에게 어울렸다. 캡틴이 말했다. ‘언어가 만들어진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소녀들이여, 시간을 헛되이 말라.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시간의 흐름은 이리도 빠르니, 오늘 피어 미소 짓는 이 장미도, 내일이면 시들어 지리니...... 사과를 따려면 지금...... 그가 골리앗, 가르강튀아, 빅마우스 숲속에 사는 거인 가가멜, 혹 재크와 콩나무의 거인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張인 니가, 그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도록 너의 어깨를 빌려주어라.

 

모래 알갱이 하나는 천지창조의 한 순간이며,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온 우주가 기다려온 억겁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했다. 연금술사

 

제군들, 내가 본 것은 스티븐 호킹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순간 虛數時間 속 사4가지 힘이 아니다. 내가 본 것은 한 알의 모래 속 우주였으며, 내가 본 것은 한 송이 장미 속에서의 천국이다. 그러므로 그리하여 너희는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재련의 순간 속 영원을 붙잡길 바란다.  

 

너의 지식은 회중시계처럼 주머니에 넣어두어라. 네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절대로 그걸 함부로 꺼내지 말아라. 필립 스탠호프, 체스터필드 백작이 아들에게 쓴 편지 中

부富를 예기 (Elpis: 미리 예豫, 기약할 기期; 희망, 사변적인 지혜)라고 말한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설명했듯이 그것은 눈먼 부富가 아니라 지혜와 함께하는 시력이 날카로운 부다. 순수한 이성의 지혜를 배우고 사랑한다면 (필로스philos: 사랑, 소피아sophia: 지혜), 그대가 그 부富를 감히 주머니에서 꺼내어 사용하길 나는 부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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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비 때와 절기를 알아 봄을 맞아 생기를 준다. 바람결을 따라 몰래 밤에 찾아들어 만물을 적시네, 가늘어 소리도 없이. 들길에는 구름이 온통 컴컴한데 강 위의 배 등불만 반짝거린다. 동틀 무렵 보리라, 그 붉게 젖은 곳에서 물기 머금은 꽃들 금관성 압도하는 장관을. 두보의 춘야희우와 손괘” 

 

가느다랗게 가만히 그대의 봄에 넌지시 가라앉는다, 여름에 가닿을 그대의 휴식같은 밤이 이슬에 젖어 가을의 문턱을 형형한 광채 어린 꽃-향기로 채색하도록.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낙화” 

 

저게 들국화, 저게 싸리꽃, 저게 도라지꽃......, 마타리꽃, 나는 하나도 버리지 못한다......, 오랜 망설임과 긴 휴지로부터 화분에서 시선을 거두며. 소나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4계절이 번갈아 들고 만물이 자라나지 않던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공자

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해가 뜨자 무더움이 찾았고, 사나운 소나기 대지를 적시며, 돌연 바람이 낙조와 출렁인다. 그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밝음을 어둡게 감추라. 명이괘

한 여름 君主 밤 사랑꽃의 즙 단잠에 취한 그대의 눈에 나리도록 구름아 달빛 臣下을 감추어라. 

 

꽃 사이 놓인 술 한 병 들고 홀로 마시지 친한 이 없기에. 술잔 들어서 밝은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마주하니 셋이 되었다. 달은 술 마시는 멋 모르고 그림자는 날 따라 움직이기만 하네. 잠시나마 달과 벗하며 그림자를 데리고 즐겁게 놀아보리라 이 봄이 가기 전에. 내가 노래하니 달은 서성이고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 어지러워. 술이 깨었을 때는 같이 즐기고 취하고 나면 제각기 흩어지리라. 영원히 담담한 우정을 맺어 아득히 먼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리. 월하독작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꽃-향기에 취해 버린 달밤 페르세포네의 그림자 Virgo 데리고 우리 말없이 깨어나고 흩어지리라.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우리 아득히 먼 은하수 기하고.

 

다행히 헐벗음과 굶주림을 면한다면 그 밖에 다시 무엇을 바랄까. 욕심을 줄이면 허물이 적고 천명을 즐기면 마음이 우울하지 않다. 어찌해야 나의 뜻을 밝힐까. 주역이 내 책상머리에 놓여 있다. 영승리관거

자강불식 自強不息, 나는 파스타를 만들고 나는 건괘와 곤괘와 감괘와 이괘에 둘러쌓여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해석한다. 다다른 비글-해협 孤立無援 핀치새 노래하는 낙천지명 樂天知命이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난초는 심어도 꽃 피우지 못하고 가시덤불은 베어내도 제거하지 못하네. 이 둘을 어찌하지 못하고 머뭇대며 서성이다 한 해가 저무는구나. 소옹의 감사음과 서합괘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파스타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황금사과 善惡果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어 비로소 저희가 난초를 피우게 하소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자중자애 自重自愛 심사숙고 深思熟考,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가다가 물길 다하는 곳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때를 바라본다. 종남별업

박명에 빛이 없으니 ‘가난하고 천한 것’ 부끄러워 소주와 은둔 書評하고, 비구름 몰려와 세상이 평화 太平聖代로워지니 ‘부하고 귀한 것’ 부끄러워 서당 書堂으로 출사 出寫 나서리. 邦有道에 貧且賤焉이 恥也며 邦無道에 富且貴焉이 恥也니라. 논어

 

종일토록 봄 찾아 헤맸으나 봄은 보지 못했네, 짚신 해지도록 산봉우리 구름까지 뒤졌건만. 집에 돌아와 미소 지으며 매화 향을 맡으니, 봄은 이미 가지 끝에 잔뜩 담겨 있었네. 오도시와 복괘

그대, 춘심 春心을 통해 천심 天心을 읽는다. 그대, 천심 天心을 통해 춘심 春意을 얻는다. 

 

 

음이 물 水이고 양이 불 火이면 오행五行의 나머지를 총 木 균 土 쇠 金라 하는가. 변 便이 더럽다면 우리 함께 거름 木.土.金.이 되어 황금사과 善惡果를 사수할 혁명을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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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본가가 되어버린 서글픈 이웃들에게 전하는 철학자의 생각, 철학자의 마음 그는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름다움(knowledge)을 추구하는 것, 즉 사랑이다. 

사랑에는 에로스(로맨틱한 사랑), 필리아(우정), 스토르게(가족의 사랑), 루두스(장난스러운 사랑), 매니아(집착하는 사랑), 프라그마(지속적인 사랑), 필로티아(자기사랑), 그리고 아가페(조건없는 사랑)가 있다. 

필로스(philos, 사랑함)소피아(sophia, 지혜),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낭독하는 사랑의 기쁨Liebesleid을 들어보자.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던 사람이 맹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구속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데 일정 정도 부자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8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어기기 시작해요. 그리고 독립을 하려고 해요.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방을 만나고 싶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생기면 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 자유롭지 않은 상태인지를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생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1, 2년간 모은 돈을 배낭여행 하는 한두 달에 쏟아붓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가령 신자유주의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우리를 자유로부터 구속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에로스의 환상이 매니아로 전의되어 기어이 필로티아의 사랑의 슬픔Liebsfreud을 위로한다.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아름다움(앎)이 ‘「자기 앞의 생」(삶) La vie derant soi’과 다르다는 것에 너와 나의 저널리즘은 사랑과 자유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한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우리들-주체nous-sujet의 완성에 있어 나의 자유를 위한 사디즘과 너의 자유를 위한 마조히즘은 정령 불가피한 선택인가,  존재와 무」. “그것은 숨겨진 불이자 즐거운 상처에 달콤한 독약이자 감미로운 비통함이며, 유쾌한 고통이자 상처에 즐거운 격정이고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상처이며 부드러운 죽음이지요. 「셀레스티나」”

 

우리가 간과한 것이 무얼까. 응,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사랑의 결핍은 더 이상 조명되지 않아,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따뜻하게 해서 옷을 벗기는 방법이 있고, 바람을 일으켜서 벗기는 방법이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서 벗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벗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햇볕을 비추는 방법이 좋겠죠.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황혼이 저물어 미네르바가 그 날개를 펴면 우리의 로빈 굿펠로우가 무사히 신탁을 실행하겠지.  

 

 

고통스러운데 왜 사느냐고? 고통이 완화되는 그 느낌이 행복이거든요.   

부디 행복만! - 아니,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우니까. 

 

작은 일들, 우리는 그 작은 일들을 해야만 해. 우리는 그걸 알고 싶어하는 거야. 왜 그것이 그 무엇보다 어떻게 다른지, 왜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지, 왜 일상이 달라야 하는지.. 누구도 너에게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너의 자연스러움 때문이지. 우리는 너를 의식하지 않게 돼, 너는 자연스러움이거든.. 인지부조화, 까뮈는 다른 걸 본 거야, 일상적이지 않은 것, 不條理,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거지.. 활력은 비스켓과 차와 커피와, 앞서 나열된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있어. 푸르스트가 기억해 낸 것들은 잊혀진 것들이야. 그리고 우리는 활력을 통해 그것을 되찾고자 해. 여기까지가 (부조리없는) 언어(의식)의 흐름이고, 너는 곧 강이야. 바다 中   

 

사랑으로 진리에 도달했어. - 응, 정의로운 Zero State은 작별하지 않는다. 

 

 

니체의 사자는 나뻐? - 어린아이가 혁명에 성공할까. 나쁜 사자는 없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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