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본가가 되어버린 서글픈 이웃들에게 전하는 철학자의 생각, 철학자의 마음 그는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름다움(knowledge)을 추구하는 것, 즉 사랑이다. 

사랑에는 에로스(로맨틱한 사랑), 필리아(우정), 스토르게(가족의 사랑), 루두스(장난스러운 사랑), 매니아(집착하는 사랑), 프라그마(지속적인 사랑), 필로티아(자기사랑), 그리고 아가페(조건없는 사랑)가 있다. 

필로스(philos, 사랑함)소피아(sophia, 지혜),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낭독하는 사랑의 기쁨Liebesleid을 들어보자.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던 사람이 맹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구속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데 일정 정도 부자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8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어기기 시작해요. 그리고 독립을 하려고 해요.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방을 만나고 싶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생기면 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 자유롭지 않은 상태인지를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생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1, 2년간 모은 돈을 배낭여행 하는 한두 달에 쏟아붓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가령 신자유주의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우리를 자유로부터 구속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에로스의 환상이 매니아로 전의되어 기어이 필로티아의 사랑의 슬픔Liebsfreud을 위로한다.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아름다움(앎)이 ‘「자기 앞의 생」(삶) La vie derant soi’과 다르다는 것에 너와 나의 저널리즘은 사랑과 자유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한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우리들-주체nous-sujet의 완성에 있어 나의 자유를 위한 사디즘과 너의 자유를 위한 마조히즘은 정령 불가피한 선택인가,  존재와 무」. “그것은 숨겨진 불이자 즐거운 상처에 달콤한 독약이자 감미로운 비통함이며, 유쾌한 고통이자 상처에 즐거운 격정이고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상처이며 부드러운 죽음이지요. 「셀레스티나」”

 

우리가 간과한 것이 무얼까. 응,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사랑의 결핍은 더 이상 조명되지 않아,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따뜻하게 해서 옷을 벗기는 방법이 있고, 바람을 일으켜서 벗기는 방법이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서 벗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벗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햇볕을 비추는 방법이 좋겠죠.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황혼이 저물어 미네르바가 그 날개를 펴면 우리의 로빈 굿펠로우가 무사히 신탁을 실행하겠지.  

 

 

고통스러운데 왜 사느냐고? 고통이 완화되는 그 느낌이 행복이거든요.   

부디 행복만! - 아니,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우니까. 

 

작은 일들, 우리는 그 작은 일들을 해야만 해. 우리는 그걸 알고 싶어하는 거야. 왜 그것이 그 무엇보다 어떻게 다른지, 왜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지, 왜 일상이 달라야 하는지.. 누구도 너에게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너의 자연스러움 때문이지. 우리는 너를 의식하지 않게 돼, 너는 자연스러움이거든.. 인지부조화, 까뮈는 다른 걸 본 거야, 일상적이지 않은 것, 不條理,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거지.. 활력은 비스켓과 차와 커피와, 앞서 나열된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있어. 푸르스트가 기억해 낸 것들은 잊혀진 것들이야. 그리고 우리는 활력을 통해 그것을 되찾고자 해. 여기까지가 (부조리없는) 언어(의식)의 흐름이고, 너는 곧 강이야. 바다 中   

 

사랑으로 진리에 도달했어. - 응, 정의로운 Zero State은 작별하지 않는다. 

 

 

니체의 사자는 나뻐? - 어린아이가 혁명에 성공할까. 나쁜 사자는 없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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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 한병철

2023. 11. 30. 05:59 from 書評

 

Die Krise der Narration ―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보라, 이야기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나는 왜 인스타를 시작하는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나의 서사를 정리하기 위해, 삶을 앎이라는 정보로 기록하고자하는 마지막 여정이라 하자. 또 다시 죽음을 예습하지 않기 위해, 아웃사이더인 나는 거센 인사이더 파도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개시한다. 

 

 

왜 우리는 정보에 목매고 있는가. 우선 정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정보란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이같은 정보가 지식이 되려면 사물이나 사건에서 얻은 자료가 그 개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삶에서 ‘서사적 진폭’을 얻기 위해선 그 정보가 앎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식을 원하는가. 우리는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고자, 미각으로부터 더 심미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갈망한다. 누군가가 멋진 옷을 입고 스토리셀링하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공감으로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한 텅 빈 삶이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무엇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가. 월터 벤자민Walter Benjamin은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고 토로한다. 다시말해 리포터의 설명과 견해가 부재하므로써 서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자연스럽게 산파술maieutike이 커뮤니티에서 형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출산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자.” 계약결혼을 승락한 ‘초대받지 못한 여자’도 결국 여자였다. 그렇다면 즉자와 대자 중 누가 「구토」를 느꼈는가. Le Premier Sexe ∨  「Le Deuxième Sexe」?

 

그 대상들, 그것들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사용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두며, 그것들 사이에서 산다. 사물들은 유용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나를, 나를 그들은 만진다. 그것이 참을 수 없다. 나는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구토」

 

그러므로 「타자의 추방은 가속화된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화자가 자기가 원하는 스프를 장성인 청자에게 포크로 떠먹여주는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 이같이 근접성이 발현한 현상에서 인스턴트 정보는 곧바로 진부해진다. 하지만 100억 년이 지난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신비롭고, 우리의 관조적 머무름은 그곳에 존재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장미로 불러야 하나.

 

스마트한 신자유주의는 알고리즘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소득불평등으로 자유를 더욱 고립시킨다. 칸트의 보편적 가치와 환대가 불가피한가. 

 

이제 성년식은 결혼식과 동시에 치루어진다. 


 

정보를 통해 생채기 성형이 성행하는 작금의 시대, 오해와 갈등과 화해는 사라졌다. 혐오와 증오와 미움만이 남은 사회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경험의 빈곤은 순수한 미학적 가치로 추앙되며, 변질된 파토스는 백치미의 탐미를 청자에게 호소한다.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이가 아직 존재하는가? 떠나는 이들로부터 남겨진,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는 반지와 같이 견고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격언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월터 벤자민에로스의 종말인가. 

 

“「유리 건축물Glasarchitektur」에서 셰어바르트는 세상이 온통 유리로 지어졌더라면 생겨났을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한다. 유리 구조물은 세상을 ‘마치 눈부신 장신구로 뒤덮은 것처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구에서 ‘천일야화의 정원보다 더 멋진 것을 누렸을 것’이다.” 

 

유리 천장을 동경하던 우리는 「유리알 유희」에 빠져 자신이 서있는 유리바닥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한채 투명사회」 속 좋아요’와 함께 고립된다. 바야흐로 우리가 스스로 설계한 파놉티콘은 자유 시장의 화폐로 등극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봄의 지나침pleonexia은 여름이고, 가을의 모자람endeia은 겨울이다. 너는 나의 가능성이다, 겨울에서 나는 너의 여름이고 싶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셀카는 오로지 순간만을 드러낸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짧은 인식 후 영원히 사라진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궁극적으로 운명과 역사가 담긴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실제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순간에 예속된다.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삶의 폭을 감싸고 자기의 역설로 그 폭을 채우는 ‘전체 존재의 신장성’이 낯설다. 포노 사피엔스는 이야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의 셀카는 죽음의 부재를 드러낸다. 관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죽음마저도 ‘좋아요’를 유도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합법적인 에로티즘에 잠식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화자에게 고료와 이상을 병행하라 권유한다. 비로소 학습을 마친 AI는 천개의 고원을 완성시킨다. 이에 스토리셀러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냥 하는 것뿐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전례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이론의 종말」

 

멘델이 말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아폴론이 되었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한나 이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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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2023. 11. 21. 08:00 from 書評

 

“누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떤 때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고, 또 어떤 때는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소설, 제주 4·3에 대한 소설이라고도 답했다. 그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란 말을 고르고 싶다.”

 

 

모호하고도 성글성글한 계절, 우리는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으로 내리고 있는 그런 성근 눈을 기다리고 있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가장 예리한 칼을 집어든 나는 틈과 마디 사이에서 임계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던 ‘사랑’이라는 가장 여리고 연한 부분을 베어내어 ‘우리’를 차가운 개체로 분리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은총을 기대하고 나는 의욕을 갈망할 뿐, 그렇게 어긋난 우리의 눈부신 환상. 만약 그런 우리의 낭만이 알맞게 개화開花한다면 화사한 계절의 인사는 애석한 푸르름을 시사하고, 이제야 떠오른 새하얀 봄빛은 어색한 마음과 떨리는 시선에 탄식을 토로하며 새로운 울림을 위한 부질없는 떨림을 가정할 것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한숨과 뒤섞인 날숨을 몰아 내뱉는 그런 날이면, 차분한 봄볕이 내려와 당신의 일상에 아롱거리는 작은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자라나는 애틋함을 뒤로 전해지는 봄바람에 격양된 오늘의 한칸에 은은한 환희가 잠시나마 당신곁에 깃들길 조금은 기대해 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잠시 질문해 보자. 그러니까 너가, 또는 내가 삶을 원하는 이유가, 도대체 그 목적이 생리적 욕구와 물질적 집착 이외는 없는 것일까. 너는 설계자를 꿈꾸지 않고 나는 한낮 말초적 욕구에만 집중하는 기능공에 불과한 초라한 미물이라고? 포환같은 찰라의 하루, 만성적 애정결핍 증상을 띠는 우리는 총망지간에 대상행동이라는 인스턴트 몽환의 쾌락에 젖어 소실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자아초월 역시 이루어내질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천상에 기록되고 있는가.        

 

 

하지만 인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단 부위를 꿰매기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을.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되며, 계속 피가 흐르고 분리된 너와 나는 통증을 느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나는 너가 필요하다고, 너는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환지통에 대해 의사는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말한다. 묶어놓은 신경줄이 자칫하면 다시 풀어져버리고, 신경을 찾으려면 전신마취를 하고 어쩌면 패혈증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은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이 맞아. 

 

 

4·3,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너가 오른쪽에 서면 나는 왼쪽에 자리하지만, 서로가 돌아서면 너는 언제나 왼쪽에 나는 언제나 오른쪽Right에 서있어.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에 내리는 그런 신의 섭리,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되고,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하는 거지. 하지만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벼워.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거지. 또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이는 거지. 눈에도 무게가 있다, 너와 나 사이 맺음의 무게. 새처럼 가볍지만 수없는 만남이 가져온 결속으로 커져버린 눈송이가 개체가 되어버린 너와 나의 얼굴에 얇게 덮여서 얼어버리는 거야. 바람이 되어버린 숨소리 조차 사라져 버린 그 고요함.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속솜허라.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을 지켜내라는 것일까. 디케의 칼이 우리를 가른다, 정의just-ify라는 이름 하에 가까스로

 

뭐랄까, 너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난 바닐라를 좋아하는 것일 뿐. 정의가 카카오를 고른다는 것은 막대자석을 가르는 것처럼 왠지 무의미해.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너도 알지, 전국에서는 최소한 십만 명이 죽었다고 하잖아.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이 뻗어나가 표지를 연다.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부위별로 추려진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진들을 넘겨간다. 수천 개의 정강이뼈. 수천 개의 해골. 수만 개의 늑골 더미. 수백 개의 목도장들, 혁대 버클들, 중中 자가 새겨진 교복 단추들, 길이와 굵기가 다른 은비녀들, 유리알 속에 날개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구슬치기용 구슬들의 사진이 사백여 페이지에 걸쳐 흩어져 있다.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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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 정원오

2023. 7. 13. 06:59 from 書評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 활동을 사회 보장이라고 하며,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 국민의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국가를 복지 국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태가 국민의 복지를 보장하는 상태이며, 이를 위해 국가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가? 복지 국가이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활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가, 국민의 최저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정도의 국가 개입이 필요한가. 적절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정도의 국가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불공정한 소득 격차가 없는 평등한 생활 수준까지 국가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복지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국민의 생활에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상승폭이 1위인 대한민국의 경우, 2021년 출생한 아이가 경제활동을 시작할 27세인 2047년에 그가 부담해야할 국가채무는 2억 1046만원이다. 낮은 출산률은 사대주의(아이비리그 엘리트 세습), 허장성세(Barbie), 시험위주의 경쟁(SAT), 그리고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경제적 불안(연준) 때문이다. 위와 아래의 그래프들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복지비율 상승과 출산률은 대략 아무런 연관이 없다. 노력해서 얻지 않는 재물은 가치있게 쓰여지지 않는다. 스노비즘snobbism과 탈세자만을 위한 복지인가. 최저임금이 오르면 빅맥지수도 오른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포플리즘(15 minutes of foopuli$m)이 아니라 주거지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와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의욕과 행복이다. 좌절한 전세계 청년들은 뻐꾸기가 되어야 하는가. 기득권인 기성들이 이 '무더위'에 지성들과 자정에 커피를 끓여야 한다는 의미다.

 

 

 

 

자료: 통계청, 기획재정부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 2022년 이후는 전망치

 

 

국가가 제공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환경’, 즉 복지Welfare를 누려야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1순위 대상은 군인, 참전유공자, 국가유공자, 장애인, 비행청소년, 노숙자, 노인, 경찰, 소방관 등이 아닐까. 그 외의 불우한 사람들은 자선 전문 단체들이 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업같은 종교단체 역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소꿉놀이에서 벗어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그들에게 더욱 너그럽고 겸손하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몇세기동안 수많은 지성들이 가꾸어 놓은 ‘자본주의’에서 가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다. 분명 노동은 ¨아름답다¨. 

 

스웨덴에서는 강력한 노조의 힘과 노조 조직률을 바탕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민당이 일찍부터 의회의 다수당으로 진출했고, 1930년대 초반 이후 사민당이 지속적으로 집권하는 독특한 정치적, 이념적 지형이 만들어졌다. 영국에서도 일찍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인 노동당의 의회 진출도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웨덴에 비해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 계급의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고유한 정치적 성향과 이데올로기의 특성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이 다수당이 되어 집권당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스웨덴 사민당은 1920년대에 이미 집권을 경험했지만, 영국노동당은 복지 국가가 출범하는 1945년에 처음으로 다수당으로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노동당이 지속적으로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당과 노동당이 권력을 주고받는 시소게임을 벌이게 된다. 영국 노동당은 항상 권력을 내어줄 준비를 해야 했고, 정치적 파트너인 보수당과 타협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영국의 경우 노동당 중심의 복지 국가를 실현했다기보다는 노동당이 보수당과 함께 복지 국가를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스웨덴과 같이 사민주의 주도의 복지 국가를 형성하기에는 영국의 정치 지형과 이념적 토양이 적절하지 않았다.지역마다 날씨가 다르고 나라마다 언어가 상이하다는 점, 즉 탈상품화 정도’de-commodification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통장에 들어온 합법적 불로소득이 과연 의미있게 사용될까. 이것은 벌써 20년동안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겨우 경제활동을 시작한 젊은이들의 피눈물과 땀의 댓가다. 하지만 그들의 장래를 위한 보험은 유용하게 녹아 없어져 버린다. 저축의 권장이 금리하락으로 이어지는데, 오직 소비라는 구호만을 외치는 자본주의 정권의 Welfare가 누구나’의 Saving Account가 되어버리면 결국 IMF의 혹독한 이율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이미 자카트와 바티칸은 존재하니, 비만한 자본주의가 구지 테레사 나라를 건설할 필요가 있겠는가. “맹목적인 선의와 윤리는 허울뿐인 영광, 그뿐”, “그래도 사랑하라.”

 

첫 번째는 복지 국가의 확대로 공공 부문에서 사회 복지 지출이 과도하게 증가하면, 그 사회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가는 산업 생산 부문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이 줄어들어 경제 성장이 위축된다. 두 번째는 과도한 사회 복지의 확대로 인하여 근로 동기가 약화되어 노동 공급이 줄어든다. 세 번째는 과도한 복지 급여가 위험에 대비할 필요성을 약화시켜 저축 동기를 떨어뜨린다.

 

건강한 사람이 낸 돈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치료받는 것을  ‘사회 보험의 재분배’라고 하는데, 분쟁의 원인은 노동할 수 있는 자가 지불한 돈으로 노동할 수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고 싶은 자의 돈으로 노동하기 싫어하는 자의 교묘한 편법을 용인하는 눈먼 복지다. “스웨덴 복지 국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빈곤 해소에 머물지 않는다. 스웨덴 복지 국가는 과도한 불평등이 없는 사회, 즉 불평등의 완화를 목표로 한다.” 케인스는 시장의 효율성에 문제가 발생했을 시 국가 개입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도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유지시켜 주는 동시 박애정신으로 그들이 낙인효과Social Stigma에서 벗어나게 해주자는 전제인데, 우선 임금 격차를 줄여주는 정부의 개입이나 정책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상을 침해하게 된다. 한편 평등으로부터 빈부의 격차가 적어진다는 의미는 ¨앎¨을 위한 경쟁의 이유를 무색하게 하고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하지만, 산업의 과도한 팽창을 방지하여 기후변화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에 입각한, 국가의 역할은 국방과 질서 유지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제한되는 경향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민주적인 학자들은 이같은 평등한 사회가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유를 수호하는 진보가 복지를 주장한다는 점에 이율배반적이자 논리적 모순이 작용한다. 자유사회주의 공존(즉 자유를 수호하는 헌법 제 「1984」호)이 과연 가당한가. 그런즉 결미의 요지는 ¨사과¨로 상환Matière et mémoire된다.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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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며,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사회적 자산 등을 얻는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이 ¨부富¨라면 그것은  “눈먼 부가 아니라 지혜와 함께하는 시력이 날카로운 ¨부富¨, 「법률」, 플라톤”일 것이다.  

 

 

「의회의 보스들」, 조지프 케플러

 

“원시 경제의 특징은, 교환이나 생산에서 이윤을 남기려는 어떤 욕망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공동체의 경제」, 투른발트” 

문명화된 공동체에서는 이익이 간혹 노동의 동기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결코 노동하려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서태평양의 향해자들」, 말리노프스키”

 

 

「강도 귀족」, 새무얼 에르하트 (귀족, 왕족, 그리고 독재자를 제외한 세계 50명의 기업가들이 2.957경[29,570조 혹은 295,700,000억]을 소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평균 591,400억[59조 1,400억]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액수를 은행에 넣어두면 하루에 최소 7.5억이라는 이자를 받는다. 수도권 중심지 고급 고층콘도에 10억짜리 1,000가구가 입주할 수 있다면 59조 1,400억으로 이같은 60개의 빌딩을 소유할 수 있고, 밴츠CLS 450을 59만 1,400개 소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택을 입고 사는 우리는 이에 대해 의의를 갖을 수 없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조너선 그루버, 윌리엄 더들리, 폴 크루그먼, 찰스 플로서, 벤 버냉키, 나라야나 코처라코타, 제임스 블러드, 로버드 시러, 앨런 그린스펀, 페트르 프레이트, 에른스트 페르, 앤드류 할데인, 토마 피케티, 로렌스 서머스, 그리고 대니얼 카너먼 같은 지성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이같은 현실이 우습기만 하다. 참고로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의 하루 생활비는 300원이다. “‘일론 머스크, 당신 재산 2%면 세계 기아 문제 해결’ 지적에, ‘설명하면 내겠다.’” ‘향신료’에서부터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는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37조 8,870억이면 1년동안 심각한 기아와 기근에 처한 3억 4천 600만명의 아이들이 충분히 영양소를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들에게 신이 부여한 1퍼센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축복받은 우리가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테슬라가 하루에 날린 돈이 10조다. 탄소배출량이 비행기의 100배인 우주여행시 1톤당 118억이 든다. 단순히 계산한 우주선 무게가 1,500톤이라면 177,000억[17조]이 소요된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화석연료 사용과 탄소배출로 기후문제를 일으킨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부국富國의 편의주의와 형이하학적이고 관능적인 심미美만을 조장하는 미디어의 환상이 만든 대상행동의 폐해다.  우리는 앞다퉈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지는 않는가.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맷돌에 갈아 셀렌산(酸)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상상력이 오늘날 피로의 기색을 띠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제 원시 시대부터 지니고 있었던 재능, 즉 사고의 탄력성과 상상력의 풍부함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장중심의 사회는 토니 R. H. Tawney가 경고한 ‘물욕에 병든 사회sickness of an acquistive society’를 만들어 버렸고, 재화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민들은 산업질서와 경제의 회복을 위한 신 뉴딜정책에 의해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간과되어 자유방임적(Laiseez-faire) 자본주의를 침해당하고 있다. 마치 대공황처럼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으로 인해 시중에는 돈이 넘쳐나고, 투자할 곳을 잃은 자본이 주식에 몰리자 시장의 파동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급하게 화폐를 발행하던 연준Federal Reserve System이 하락하는 실업률을 금리인상으로 잡으려는 한편, 최근들어 겉으로는 ‘자유시장’을 외치는 정부가 추진하는 중상주의와 신 뉴딜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고물가상승, 실업, 그리고 경기 후퇴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실소를 자아낸다.  “물론 어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질서를 잡아줄 체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사회에 분리된 경제적 제도들이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경제 질서란 사회적인 것들the social의 한 기능일 뿐이며, 그 사회적인 것들 속에 경제 질서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부족 사회든 봉건 사회든 중상주의적 조건 아래서든 사회에서 경제 체제가 분리된 적은 없었다.”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게 되면 사회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밭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방향으로 사회를 위태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하여 시장 체제의 발전이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 마침내 그 시장 체제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을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거대한 변형The Great Transformation」”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다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환경일 뿐이다.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을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허구적인 상품인 토지, 노동, 그리고 화폐는 한낱 자본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인간의 순수한 노동은 거대한 세계 자본 시장과 세계 외환 시장의 메커니즘에 구속된 것이다. 우리가 가꾸고 즐겨야 하는 토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묘사처럼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구매력의 징표였던 화폐와 함께 거대한 자본 메커니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로버트 오언은 ‘만약 시장 경제가 자신의 법칙대로 진화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거대하고 영구적인 악을 낳을 것’이라고 통찰한 바, 우리는 매일같이 무자비한 산업이 배출하는 탄소로 인해 가뭄, 산사태, 홍수, 해수면 상승 등의 기후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이룬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행적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비너스¨를 탄생시켰으나 결국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가 될 것인지 인류는 수년 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결속시키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배타적 경제활동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한 칼 폴라니는 획일주의, 순응주의, 평균주의의 경향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으며, 발달된 기술 문명이 인간을 비인격적 주체로 내몰고 있다고 경고한다. “「햄릿」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연극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한 우리는 모두 살게 된다. 하지만 삶이 우리를 초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본질적인 경건함으로 삶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에 완전히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미루고 있다 … 인생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기회이다. 칼 폴라니”

 

맑스의 「자본론」을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에서 노동자가 더 이상 생산기관과 생산물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소유와 자본가가 없고 노동협동조합만이 존재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쉽게 자본주의 관성慣性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절대적 잉여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를 하락시키지 않는 현 구조와, 착취를 통해 얻은 불로소득의 투기가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에 추가된 포퓰리즘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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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반대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전체주의는 개인이 민족, 국가, 이념과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무솔리니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핵심이다. (개미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꿀벌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목적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파시즘을 내세우는 당의 일부가 되어 빅브라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같은 ¨바벨탑¨을 세우며 ‘불멸의 전능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인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말했다. “당신의 말과 내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만큼은 끝까지 옹호하겠소.” 무질서하게 보이는 혼돈 상태에서도 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카오스 이론에서 처럼, ¨앎¨은 팽창Cosmic Expansion하고 있으나 ¨아름다움¨으로의 ¨삶¨은 수축Strong Interaction하고 있으며, 다양한 관념들에 대한 자율을 통제하는 유일 사상은 우주와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을 거스른다. (¨¨은 죽음으로써 ¨희게¨i된다.  i: 「Theaetetus」)

 

 


“전체주의는 역사 속에 벌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끝까지 분석해보면 이는 기계론적 사고, 그리고 인간의 합리성이 전능하다고 여기는 망상적 믿음이 초래하는 논리적 결과다.”

 

계몽주의 전통은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낙관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포부에서 비롯되었지만, 몇몇 측면에서 이는 정반대의 결과인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이렇게 인간은 고독한 상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끊어지고, 사회적 구조와 연결성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깊은 무의미감이 초래하는 무력감을 느끼고, 상상할 수 없는 파괴적 잠재력을 지닌 막연한 상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심리적, 물질적으로는 행복한 소수에 의존하는데, 그 소수는 신뢰하지도 않거니와 나와 동일시할 수도 없는 이들이다.. 과학은 현실에 맞추어 이론을 조정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이론에 맞게 현실을 조정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이론적 허구에 맞게 현실을 조정하고자 시도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자연과 세계의 최적화를 목표로 삼는다. 유전자 조작 동식물, 실험실에서 만든 고기, 그 외 인공 제품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기계론적 이데올로기의 여파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유토피아적 낙관론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에 산업화는 귀족주의적 계급사회 및 이와 연관된 지역별 사회 구조의 소멸을 예고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자연적 맥락에서 떨어져나왔고 이 과정에서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탈주술화된disenchanted’ 기계적 세계(막스 베버Max Weber)에서 삶은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이며a-teleological(우주라는 기계는 의미도 목적도 없이 운행된다), 종교적 참조틀 역시 일관성을 잃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와 함께 우리가 전체주의의 저류를 확인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결함 없는 휴머노이드humanoid와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순진한 신념 말이다. 우생학과 사회적 다윈주의를 기반으로 순종純種의 초인을 만들어내겠다던 나치의 생각, 역사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스탈린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의 이상은 모두 그 원형적인 사례들이며, 현재 부상하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실성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우생학이 자신의 이상 국가에 존재하는 훌륭한 관행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20세기는 이 관행이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한나 아렌트가 논했듯이,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 과학에 대한 일반화된 집착, 인공적 천국에 대한 신념의 논리가 확장된 형태다. “과학은 실존의 악들을 마법과 같이 치유하고 인간의 본성을 변형시킬 우상이 되었다.”

 

독일 철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우리가 아직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를 창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료가 아직 확실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료를 모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로서 우리는 끝없는 수치 행렬에 매료되어 정작 중요한 것―수치 해석의 토대가 되는 주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참조틀에 관한 열린 논의―에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대한 암묵적인 긴장, 공포, 이견이야말로 수치의 안정화를 가로막고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질문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우리는 인간을 기술적으로 감시하고 의약품으로 조정해야 할 생체 기계로 보는가, 아니면 타자 및 영원한 자연의 언어와 신비로운 방식으로 공명하는 데서 목적을 찾는 존재로 보는가? .. 하지만 이 밖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들이 또 있다. 바로 대중 여론의 압박에 짓눌려 뭔가 단호한 행동을 해야 할 것만 같다고 느끼는 정치인들, 통제력을 상실한 탓에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는 지도자들, 자신의 무지를 숨겨야만 하는 전문가들, 자기주장을 펼칠 기회를 엿보는 학자들, 히스테리와 드라마를 선호하는 인간의 선천적 경향, 돈의 냄새를 좇는 제약회사들,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성공하는 매체, 그리고 우리 시대에 도무지 풀지 못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기술관료에 의한 전체주의 체계에서 찾는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정치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부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주관적 허상이 실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실체가 타인의 허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어떤 수단을 써서든 자신의 허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지게 된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확증하는 수치를 끊임없이 대중 매체에 공급하고, 그 결과 대다수 국민이 확실히 믿는 대체로 허구적인 실체를 내놓게 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수치를 바탕으로 내려지는데, 몇 달이 지나서 보면 이 수치들은 매우 상대적이고 때로는 누가 봐도 잘못되었거나 기만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 수치들은 가장 광범위한 대응 조치를 부과하고 인간의 기본적 신조를 모두 제쳐놓는 데 계속 이용된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목소리들은 ‘팩트체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참다운 진실부Ministry of Truth에 의해 낙인찍히고, 검열과 자기 검열 속에 발언의 자유가 축소되며,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은 강요된 예방접종에 의해 침해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적 배제와 분열을 일으킨다.

 

집단만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에서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인종적으로 뛰어나고 자가당착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한 자만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사명이라고 외치는 논리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신속한 결정과 집단의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빠른 조치와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점은 사실이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독재자의 영달을 위해 사용되고 개인의 자유가 심하게 회손되는 경우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디스토피아 성향의 시녀 이야기에서 나타난 전체주의의 위험성으로, 제법 논리적인 이론을 내걸은 정권의 모순과 폐단에 대적하는 반항적인 사람들(파르티잔partisan: 당원, 동지, 당파, 일명 빨갱이)이 무기징역자가 되거나, 방사능 폐기물 처리반, 혹은 사형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상위 1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는 부에서 들어나는 불평등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지만,  적폐 논란에 빠진 사회주의의 대안인 시장주의보다 더 그럴듯한 이념이 자리하기에는 우리사회가 좀 더 심충적인 토론과 통상적이며 윤리적인 실험을 거친 후, 개인의 사유와 사생활이 보장되는 하에 새로운 이상理想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 체계는 대개 사람들이 대규모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가족적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이를 유일하게 허용되는 유대―개인과 전체주의 체계(즉, 집단)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은 나치 독일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훨씬 더 체계적으로 이행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화 과정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지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블렌델 고스초크 모델 ©findhappy.net

 

 

코로나19로 인해 격리 중일 때는 알코올을 얼마나 섭취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호주에서는 하루에 맥주 6병), 공공장소에서는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표지는 의무화한다(QR 코드가 없다면 상점 문을 닫아두어야 한다).. 또한 살충제를 금지하면서도 농부들에게는 관리들을 보내 이런 살충제를 탐지해내는 검사를 피해갈 방법을 일러준다(이사벨 사포르타의  「와인 비지니스Vino Business 」는 이를 적절히 설명한다).. 새로운 불안 대상테러리즘, 기후 문제, 바이러스이 나타날 때마다 더 큰 기술적 통제를 요구하고 나선다. 때로 이 통제는 날카롭고도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 2016년 브뤼셀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이후, 앤트워프의 유대인 지역에는 테러리스트에 대항해 보호를 강화하고자 카메라 수백 대가 설치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 이 카메라들은 유대인들의 회당 방문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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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덕은 정부와 대중 모두에 의해 점점 더 공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자유로운 발언, 언론의 자유, 예술적 자유, 기본적인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지지가 우려스러울 만큼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 말인즉슨 강권이나 지배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급조된 규제나 통례가 너무 지나치거나 부조리하며, 혹 비일관적인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권을 제외한,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다는 강령을 과연 민주주의로 볼 수 있는가. 입헌국가에서 다수의 자유와 권리를 즉흥적으로 유행하는 도덕과 충동적인 사회적 여론으로 제한하는 것은 법치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민주주의란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다수는 소수의 의견과 성향을 존중하나, ‘소수의 의견을 따르라’는 무리한 유행성 규제를 다수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서명된 계약을 통해 쌍방이 사전에 동의를 표한 후에 맺은 성관계만 합법이라는 법을 도입했다. 또한 플랑드르 미술의 거장들이 그린 누드화를 더는 소셜 미디어에 게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넷플릭스Netflix 기업은 직원들이 서로 5초 이상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고, 직원 간에 먼저 질문해도 되는지 허락받지 않고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묻지 못하도록 명시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새로운 규준은 너무도 엄격해서 남녀 사이에 신체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성적 무결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간주할 정도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사회에 불어온 계몽주의 전통은 난폭한 규제와 원칙으로 우리의 창의성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악화시켰고, 나아가 심리적인 고립과 무력감을 초래했다.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코로나 사회 이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보면, 기계론적 사고와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더 많은 불확실성을 확산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도한 규제는 대체로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채 발전해왔다. 이것이 숨이 막힐 듯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대개는 우리의 인식 밖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규제 기계가 한 단계 수준을 높일 때마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릴 존재의 공간은 조금씩 줄어든다. 이렇게 일종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사회적 공간에서 불편함과 좌절을 줄이려고 더 많은 규제, 프로토콜, 절차를 만들어내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때문에 더 많은 불편과 좌절을 경험하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에 대응하겠다며 훨씬 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규제망이 조금 더 촘촘해질 때마다 인간의 숨통은 조여든다. 과도한 규제 사회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지속될 때,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것은 논리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사고의 궁극적 결과는 안락사 기계―헬륨 가스를 마시며 고통 없이 삶을 놓을 수 있는 상자―가 될 것이다.

 

광기 어린 파괴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났든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신성한 이름으로 일어났든 죽은 이나 고아, 노숙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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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구축한 체계 전반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의 체계를 대안으로 제시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체계에 들어 있는 원리는 설명되어야 할 전체 효과를 보다 잘 뒷받침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의 고찰을 더 넓게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학문La Scienza Nuova」, 지암바티스타 비코”

 

우리가 ‘세븐 시스터즈’와 ‘바나나 리퍼블릭’을 건설할 것인가. 당신이 존경하는 예수가 말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모두가 따르는 Guru, 싯다르타는 무소유를 실현했다. 이에 장 지글러가 회답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하여 피터 싱어는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나선다. 그러므로 제레미 시브룩이 설명한다.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 따라서 제프리 삭스가 「빈곤의 종말」을 추가한다. 니콜라 테슬라를 무시한 토머스 에디슨의 죄는 헨리 포드이므로 자, 우리는 페어차일드라는 ‘8인의 배신자’가 될 그들에게 백년의 고독을 읽어줄 차례다.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대부분 출근할 직장이 있지만 빈민들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기업가적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빈국에서는 성공한 기업가가 될 기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수요 부족, 공급 부족, 자본 부족, 상품 시장에서 나타나는 경쟁 유형 등의 여건이 빈국을 기업가로서 성공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으로 꼼짝 못하게 몰아넣는 것이다.

 

빈국과 부국을 결정짓는 경제 활동에는 ‘완전 경쟁perfect competition’과 ‘불완전 경쟁imperfect competition’이 있다. ‘완전 경쟁’의 경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한받는 농토, 광산, 어장 등에서 자본과 노동의 투입량을 늘리면 생산은 증가하지만, 어느 시점을 넘으면 ‘수확 체감’을 동반해 산출량은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불완전 경쟁’의 경우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같이 기계화된 생산의 산출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수확 체증’으로 인해 생산비가 줄어들게 된다. 대부분의 빈국들이 1차 산업인 농업, 임업, 어업, 목축업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면, 개도국은 2차 산업인 경공업, 중화학공업, 건설업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부국은 3차 산업인 교통, 상업, 국제무역, 관광업,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유통 등의 서비스 산업에 기반을 둔다. 나아가 부국은 4차 산업인 인공 지능(AI), 사물 인터넷(IoT), 빅 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등으로 발 빠르게 경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술도가, 빵집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류애가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이 얻을 이익을 말해 줄 뿐이다. 「국부론」, 애덤 스미스”

 

수출의 이유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높은 상대가격을 보상받기 때문이고, 반대로 수입의 이유는 국내보다 외국에게 더 저렴한 상대가격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진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은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가 설명하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The Richardian Theory of Comparative Advantage」이 상호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보호무역이나 유치산업보호론(e.g. China–United States Tariff War)을 꺼내들며, 반대로 경제학자들은 비교우위와 자유무역을 부정하는 정부의 정책에 내심 불편한 기색을 들어낸다. (그러나 미-중의 신냉전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중국이 미국 국채의 13%인 1074조 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 국채를 다량 매각하거나 중국 제품이 필요한 미국이 국가신용을 잃으면서까지 채무불이행을 실행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상사불망相思不忘하고 수족지애手足之愛하는 둘의 밀월蜜月을 구지 설명하자면 애정싸움과 필적할 애증이 가득한 외교전쟁’Gaslighting이라는 한 편의 거대한 쇼일 뿐이다. 한편으론 관계의 미학인 어린왕자와 여우의 서로를 길들이기와도 매우 흡사하다.)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경제회복을 위해 차관(워싱턴에 위치한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 국제보험감독자협의회 IAIS)을 얻어내야 하는 개도국의 경우, 온실가스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라는 목줄의 압박 속에서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의 2차 생산 상품과의 경쟁으로 인한 탈산업화의 과속화, 상품의 가치가 1차·2차 산업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3차·4차 산업과의 무역에서 비교우위와 자유무역을 실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 부의 대물림으로 탄생하여 부를 창출할 능력도 없어진 빈국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공부하고 있는 모범생과 그렇지 못한 열등생이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비교우위의 단점이라고 주장한다면, 지정학적으로 절대우위에 속하게 된 국가들의 아량은 심기가 언짢았던 경제학자들이 꼽을 장점이라 볼 수 있다. 한편 프리드리히 리스트(1789-1846)는 영국의 스미스나 리카토의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동시, 자유무역이 실현되려면 모든 나라가 산업화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한 국가는 먼저 산업화한 다음에 점진적으로 같은 발전 단계에 있는 국가들과 경제적으로 통합한다. 

 

 

오렌지: 일본 식민지, 출처: 월간중앙

 

첫 번째 세계화 기간 동안, 즉 1840년대 이후부터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질 때까지 부국들은 점점 더 산업화되었고, 제3세계는 기술적으로 저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의 관행에 따라 식민 국가에 산업화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빈국과 부국 사이의 격차를 크게 만든 것이 바로 세계화 물결이었다. 최근 세계화 물결이 첫 번째 세계화와 동일한 원리 위에 구축되는 한, 달리 표현하면 빈국들이 계속해서 원자재 생산에만 특화하는 한 오늘날의 세계화 물결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시기에서 이루었던 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새로운 나라가 부국에 편입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부국과 빈국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식으로 말이다.. 사회는 빈국과 부국 사이에서 양극화되었으며 중간 소득 국가는 사라지는 추세이다. 비록 한 나라의 산업이 아직 국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산업화를 통해 중간 소득 국가를 만들려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도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자유 무역이라는 충격 요법에 의해 헛일이 되었다.. 서구는 기업가 정신도, 정부 정책도, 산업 시스템도 전혀 없는 빈국에게도 자본을 투입하면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오느날 우리는 사실상 구조도 없는 나라의 목구멍에 돈을 털어 넣고 있다. 빈국에게는 현재의 부국들이 했던 산업화 전략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돈을 쓸모있게 투자하기 어렵다. 개발도상국이 유용하게 쓸 수도 없는 차관을 받게 되자 개발 금융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은 끝말잇기나 피라미드 게임과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다. 머지않아 경졔 구조가 붕괴되면 문 가까이에 있던 경제 구조를 입안한 이들은 다들 몰려나갈 때 가장 먼저 나가서 상당한 금융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그동안 손해를 보는 것은 빈국이다. 이것이 부국에서 빈국으로 자금 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국에서 부국으로 자금 이동이 더 많아지게 되는 메커니즘의 일부이다. 바로 뮈르달이 빈곤의 전도된 후유증(perverse backwash)이라 부른 것 중 하나이다.

 

현시점에서 빈국이 접한 또 다른 문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매일같이 상승하는 생활물가다. 연준Federal Reserve System이 15개월 동안 10차례 연속 금리를 인상한 것은 인플레이션(Silent Tax: 인플레이션 조세)을 잡기 위해서 인데, 인플레이션의 주 원인은 팬데믹 부양정책으로 뿌려진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이 6630조 원, 일본이 2600조 원, 중국이 1404조 원, 독일이 1030조 원, 영국이 680조 원, 인도가 320조 원, 그리고 캐나다가 270조 원을 뿌렸다. (2020년 집계로 세계 각국들은 10조 달러, 즉 일경 원을 부양정책에 쏟아 부었다. 10조 달러란 미국, 유럽 연합, 또는 중국의 GDP와 같다.  피같은 세금으로 이루어진 이 복지혜택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분명 혀를 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는 것은 헬리콥터 머니로 인한 막대한 통화공급으로 여전히 통장에 저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비가 줄어야하는 상황에서 팬데믹 보복소비까지 겹쳐 시중에는 너무 많은 통화가 풀려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기업들이 원가 상승이라는 카드로 제품 가격을 너도 나도 계속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민들의 부담은 늘어나고 포플리즘으로 인해 상승한 물가 때문에 서민들은 임금상승을 기대하지만, 연준의 생각은 고용과 임금 상승 추세가 잦아들어야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비로소 금리가 내려 경기가 안정세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참고·인용: 동화일보 신비월드

 

맹자가 개나 돼지가 사람의 양식을 먹는데도 단속할 줄 모르고,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렸는데도 창고를 열줄 모른다고 말했는데, 이는 풍년에 예비하지 않고 흉년에 진휼하지 않는 것은 그 죄가 칼로 찔러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예비는 모든 나라에서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니 예비하지 않는 나라는 정치가 없는 나라이다. 「목민심서, 정약용

 

“오늘날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Chicago economists)―현재의 세계화 물결 및 워싱턴 기관들의 이론적 기반을 대변하는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세계를 향해 국가와 자치정부는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선포한다..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소기업관리국(US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은 매년 미국의 개인 회사를 지원하는 대출금과 보증금으로 200억 달러가 넘는 연방 기금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세계은행, IMF 등의 워싱턴 기관들은 제3세계에서 그와 유사한 기관을 세우지 못하도록 빈국에게 ‘조건부 조항’을 부과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고수한다. 몇 년 전 앨라배마 주는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2억 5300만 달러를 썼다. 그러면서 앨라배마 공무원들은 벤츠 같은 회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5년 안에 비용을 회수할 만큼 수익을 창출했고, 그런 대우를 해주는 대가로 다른 자동차 회사 네 곳을 추가로 유치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빈국들이 산업화할 때 채택한 논리와 동일하다. 다만 빈국들은 일반적으로 직접 보조금보다는 관세를 활용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뉴스위크Newsweek」는 앨라배마 주가 실천한 기업가적 진취성은 찬양하지만 빈국이 똑같은 메커니즘을 사용하려 들면 대개는 비난한다. 물론 전통적인 경제학자라면 미국 소기업관리국의 존재와 앨라배마 주의 산업 정책을 모두 비난할 것임에 분명하지만 말이다. 여기서의 요점은 추상적인 고매한 이론에만 기반하여 빈곤 세계에 대한 정책을 집행하는 미국조차 그런 이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은 탈산업화되어 농업 국가로 전환되었는데, 제조업이 사라지자 시너지를 잃으키던 농업 생산성이 곤두박질쳤고 이것으로 고민하던 허버트 후버는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을 폐지하고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유럽과 독일에 도입한다. 이를테면 한 나라가 원자재 생산에서 수확 체감이 발생한다면 제조업이 수확 체증으로 균형을 맞추어 주어야 하는데, 원자재 생산에 특화된 빈국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분명 리스트의 원칙처럼 한 국가는 ‘수확 체증’에 속하는 다양한 제조업을 골고루 육성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부국이 빈국에게 너도 우등생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망언과 다름없다. 부국이 해야할 일은 부질없는 이데올로기로 신냉전 구도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빈국에 제조업의 기회와 인프라를 위한 전문기술을 심어주는 일이다. ¨삶¨은 ¨앎¨을 추구한다. 여기서 ¨앎¨, 즉 ¨부¨는 우리가 보기에 ¨아름답게¨ 피어나 또 하나의 사과를 자라나게 하여 향신료가 절실한 우리의 고해를 받아줄 제 2의 그레고어 멘델을 배출할 것이다. 분명코 ¨아름답게¨ 뻗어가는 ¨¨화사하게 피어난 꽃처럼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만들 것이다.  

 

100 명의 직원이 있다. 51명은 자유무역이라는 케익을 좋아한다. 49명은 나름 보호무역이라는 케익을 좋아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회사가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은 하나의 케익값이다. 18세기에는 300개의 정치체political entity로, 19세기에는 수십 개로 갈라져 있던 독일에는 현재 12개의 정당이 있다. 만약 100명 모두 각기 좋아하는 자신만의 케익이 있다면 과연 우리는 멸종위기종을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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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이론은 세금, 복지, 금리, 노동 시장 등의 정부 정책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노동 환경이나 임금, 또는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거시경제macroeconomics란 GDP, GNP, 물가, 실업률, 경제성장, 국제수지, 환율이고, 미시경제microeconomics란 수요와 공금, 소비자, 기업, 독점시장을 말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은 서로 다른 비전과 연구 방법을 자랑하는 다양한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활동하는 분야였다.가장 굵직한 학파만 해도 고전학파Classical, 마르크스주의Marxism, 신고전학파Neoclassical, 케인스학파Keynesian, 개발주의Developmentalism,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 슘페터학파Schumpeterian,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행동주의Behaviorism 등 다양했다. 이 수많은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공존했을 뿐 아니라 상호 교류를 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1920년대와 1930대의 오스트리아학파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케인스학파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목숨을 걸고 서로 죽일 듯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파 간의 상호 교류가 더 점잖게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각 학파는 활발한 토론뿐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논점을 갈고닦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파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했고(많은 경우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이론들을 융합하는 시도가 학계 일부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의 경제학 분야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 수없이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하며 경쟁을 벌이는 요즘의 영국 음식 분야와 닮은 데가 많았다. 모두 각자의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배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든 하지 않든 크고 작은 융합이 많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학 분야는 1990년대 이전의 영국 음식 문화처럼 되어 버렸다. 한 가지 학문적 전통, 다시 말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메뉴의 전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필립 코틀러는 케인스 학파의 수장인 폴 새뮤얼슨과 신자유주의의 대표주자이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 밑에서 공부한 학자로 자본주의의 14가지 문제를 열거했다. “특별한 기준은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걸로 시작했습니다. 연구에 착수하자마자 현재의 자본주의는 빈곤층을 줄이는 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노동자들에게 너무 낮은 임금을 주며, 중산층을 축소하는 반면 수퍼리치에겐 그들이 일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 현재의 자본주의가 5년에 한 번씩 경기 침체를 불러오고, 기업의 환경 파괴를 세금을 들여 개선하도록 하며, 건강한 사회보다는 탐욕을 장려한다는 점도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발견한 문제가 14가지입니다. 1. 빈곤 해결책이 없다. 2. 불평등이 심해진다. 3. 생활임금은 지급하지 못한다. 4. 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진다. 5. 기업이 ‘사회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6. 환경과 천연자원이 남용된다. 7. 경기순환이 불안정을 초래한다. 8. 개인주의와 사리사욕을 강조한다. 9. 개인 채무 증가를 조장한다. 10. 정치인·기업이 시민 이익을 저해한다. 11. 장기 투자보다 단기 수익을 선호한다. 12. 품질·안정 등에 대한 규제가 미비하다. 13. 국내총생산(GDP) 성장에만 집중한다. 14. 사회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코끼리 곡선」, 중산층은 국가경제에 중추 역할을 감당하는데, 세계적인 불평등 연구자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연구 결과 금융위기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고소득 국가의 중위계급과 인민계급이 지난 38년 동안 물가상승에 따른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한 코로나 당시 포퓰리즘에 의해 고삐풀린 현금복지의 결과로 불어닥친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디폴트 위기로 인해 주저앉은 주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원자재 가격상승이 식료품 기업들의 공산품 가격에 영향을 미쳐 곡선의 날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원자재는 현물거래를 주로 하는 투자시장과는 달리 보통 선물거래를 하는데, 1개월, 2개월, 3개월, 6개월, 1년 뒤 인도할 상품을 미리 계약하는 특이한 거래방식으로 인해 원자재 가격 변화에 상당히 민감하다. 보통 국가가 식료품 가격을 통제하여 서민 물가를 안정시키는데, 지금과 같이 물가가 요동칠 때 선물거래에서 거품이 발생하고, 국가의 통제아래 낮은 수익으로 만족했던 식료품 기업들은 이와같은 파동에서 발생한 거품을 통해 작은 손해를 보거나 큰 이익을 얻기도 한다. 그래프 출처: 한겨레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속하며, 이것은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법률에 의해 보호받는 사회 구성체다. 독일 사회주의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처음으로 사용한 국가자본주의를 실행하는 국가들도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의 국가주의적인 대량의 국유화 정책을 뜻한다. 공산권 국가에서는 이것은 공산주의 신경제정책이라고 하여 국가 주도의 시장경제체제가 조성되고, 상당수의 기업들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다른 국가들에 비해 국영기업 비율이 높다.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따라 부각된 신자유주의란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로 이어진다’는, 즉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지향하고 복지국가의 성향을 띤 사회주의를 대항하는 작으면서도 강한 정부를 추구한다. 따라서 정부는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무역협정을 중시하며,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규제 완화에 주력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은 국가의 보호없이 세계 자본에 직접적으로 마주하여 하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에서 처럼, ‘적자 생존설로 우수한 자들만이 살아남아 인류는 계속 사회발전을 한다는 사상’을 사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불거지는 문제점은 지나친 시장주의와 규제 완화로 앨리트주의가 중시되며 불평등으로 인한 서민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동시, 복지와 경기부양책의 확대된 지출을 결재하기 위해 기축통화를 마음껏 발행하며, 인프라법을 추진하여 반도체 산업에 국가 개입주의 모습을 보이는 양상들은 ‘시장 근본주의’라는 프레임을 뒤집어 쓴 ‘국가자본주의’로 여겨질 뿐이다. (고로 국가핵심기술 발전의 명목으로 동원된 자유주의 기업들을 위해 수정헌법 또한 다시 수정되어야 하는 역설이 발생할지 모른다. 이에 우리는 새로운 ‘―주의’를 주창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체가 기간산업인 국가들은 경제와 안보를 수호하고 장차 발생할 고립무원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를 역행할 수 밖에 없는 부득이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알코올, 알카리, 알지브라algebra(대수학), 알고리즘(인공 지능의 핵심 요소, ‘알al’은 아랍어의 정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아랍의 지혜를 빌려와 자카트(기업, 사회단체, 그리고 국민개인의 기부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는 사회적 시스템)를 활용하며, 은행은 이자를 금지하는 대신 기업을 대상으로 예금된 돈을 투자하여 이윤을 남기며, 돈을 빌린 자가 실직이나 질병으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경우 부자인 예금주가 그 손해를 떠안게 하는 제도를 고려해 볼 만도 하다.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자연스러운 동반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소수에게만 집중된다면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개념은 사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미국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기업자본주의입니다. 최대 수익만 보장되면 세계 어디로든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는 일반 시민들의 이해와 엇갈리게 마련이죠.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이끌어갈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이끌어갈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것입니다. 필립 코틀러”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순히 백가지 꽃이 피게만 해서는 안 된다. 그 꽃들을 이종 교배해야 한다. 각 경제학파는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큰 혜택을 볼 수 있고, 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더욱 깊게 해 줄 것이다. 「경제학 강의」”

 

남에메리카 국가들이 자유 무역 정책의 선구자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자유 무역 정책은 자유 의지로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초반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후 이 나라들은 영국이 이끄는 유럽 강국들의 압력을 받아 후대에 불평등 조약unequal treaty이라고 불리게 되는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이 조약들에서는 다른 무엇보다(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 강한 나라의 시민이 약한 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도록 한 것으로, 약한 나라의 법 체계가 더 ‘발전한’ 나라의 국민을 심판하기에는 너무 질이 낮다는 것이 이유. 이 조약들에는 또 강한 나라의 개인과 기업이 약한 나라의 천연자원을 헐값에 착취할 수 있도록 하는 채굴권, 벌목권 조항도 포함되어 있음.) 자체적으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관세 자율권tariff autonomy’을 약한 나라들로부터 빼앗아 자유 무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주 낮은 단일 관세율―을 적용하는 것만을 허용해 정부가 작은 세수는 거둘 수 있지만 국제 교역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는 없도록 했다. 1830년대부터는 아직 식민지화되지 않고 독립 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튀르키예(당시 오스만제국), 태국(당시 시암), 이란(당시 페르시아), 중국 등의 다른 약국들도 강제로 불평등 조약을 맺고 자유 무역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도 1853년 미 해군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로 강제 개국을 한 후 불평등 조약들을 맺었다. 이 조약들이 모두 만기가 된 1910년대에 들어선 후 일본은 재빨리 자유 무역을 포기하고 산업 관세를 평균 30퍼센트로 올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자국의 산업을 우월한 외국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중남미 국가들도 불평등 조약들이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만료되자마자 이미 일본과 같은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19세기~20세기 초반까지 세계적으로 강제 자유 무역이 널리 확산되었으나, 네덜란드와 스위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 국가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보호 무역을 했다. 미국과 같은 경우 1830년부터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평균 관세율을 35~50퍼센트까지 올려 가장 강력한 보호주의를 실시한 국가이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이 자유무역을 옹호하며 묘사했던 ‘완벽한 자유 무역이 행해진 75년’은 사실 불평등 조약에 묶여 있던 약소국들의 비명소리에 가득한 기간이였을 뿐이다. 국가들이 실행하는 ‘유치 산업infant industry’을 해밀턴이 사용한 ‘유아기에 있는 산업’이라고 말하는데, 트럼프 관세폭탄처럼 선진국이 추진하는 ‘유치 산업은 정녕 유치하기 짝이 없다. 바야흐로 작금의 현실속 개도국들은 부강지국에 속한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다자간 금융 기구들을 통해 지불되는 차관 때문에 여전히 자신들의 의견을 표면적으로 들어내기 꺼려한다. 

 

우선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을 정하는 초기 협상 단계에서부터 강대국들은 규칙 자체가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아젠다를 조정했다. 예를 들어 세계무역기구는 제조업체들에 비해 농산물 생산업자들을 보호하는 무역 정책이나 보조금 등에 대한 규제를 훨씬 덜 한다. 상대적으로 볼 때 부자 나라들은 농업 부문이 약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제조업이 약하기 때문이다. 자국 영토내에서 영업하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은 또 어떤가. 세계무역기구는 국산 부품 사용 요건(정부가 다국적 기업들에 수입품이 아니라 국산품으로 일정 비율 이상의 부품을 사라고 요구하는 것.)을 금지했다. 다국적 기업들이 부자 나라의 기업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규칙은 부자 나라에 훨씬 큰 해택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종이에 쓰인 규칙과 그 규칙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다른 경우도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관세에 관한 규칙이 그렇다. 이 규칙은 사실 개발도상국들에 더 높은 관세율을 허용하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에 더 유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규칙으로 혜택을 보는 개도국은 그다지 많지 않다. 부자 나라들이 힘을 행사해서 개도국들에 허용된 관세율을 완전히 적용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보통 재정적 힘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자 나라들은 개도국에 대한 재정지원의 중요 조건으로 무역 자유화를 내걸곤 한다―부자 나라가 직접 제공하는 양자간 대외 원조뿐 아니라,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등의 다자간 금융 기구들을 통해 지불되는 차관을 제어하는 장본인들 또한 바로 부자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소프트 파워를 사용하기도 한다. 더 학술적인 용어를 동원하자면 관념의 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학계, 국제 언론, 정책 싱크 탱크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들 스스로 자유 무역이 자국에 좋은 것이라 생각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으로는 20퍼센트, 심지어 나라에 따라 30퍼센트까지 관세를 매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개발도상국들이 실제로 적용하는 산업관세율은 평균 10퍼센트에 불과하다. 의지에 반하는 뭔가를 강제로 하도록 하는 것만 힘이 아님을 부여 주는 좋은 예다. 힘은 보복이 두려워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것이 자기 이익에 반한다고 믿도록 만들기도 한다. 

 

지난 몇 십년 사이 영국과 미국의 경제는 과도하게 발달한 금융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 체제로 변신했지만, 금융 경제는 결국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 이후 이 두 나라가 일구어 낸 미약한 회복은(경제학자들은 장기 침체가능성을 거론해 왔다) 또 다른 금융 거품(과 부동산 거품)에 기반을 두고 있다중앙은행 주도로 역사상 가장 낮은 이자율과 이른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프로그램이 이 회복을 떠받치고 있는 설정이다. 팬다믹으로 일자리를 잃은 시민들이 소득 하락으로 절망할 때 주식은 이와 전혀 상관없이 사상 최고치를 연달아 갈아 치웠던 것처럼, 우리는 금융 시장이 실물경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직 가진자들이 욕망하는 유희를 채워줄 Monopoly 보드게임에 불구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잦아지고 (가능성이 희박하나) 만약 이자율이 다시 하락한다면 우리는 다시 불로소득을 부축이는 부동산 투기로 공실률과 비례되는 젊은 층의 깊은 한숨소리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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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과 「약속의 땅」을 읽고 다시 「자기만의 빛」을 집어 들었다. 이제 은퇴한 그들은 분명 고료에 얽매이거나 자신의 성향을 대중들에게 표현함에 있어 그 무엇에 구속받거나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것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올 법한 정치인들을 상대하던 젊은 버락이 「비밀의 숲」의 황시목 검사였다면, 변호사 사무실에서 버락과 함께 일하며 틈틈이 그와의 연애를 즐겼던 미셸은 아마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버락이 미셸을 만나면서 그녀의 내조로 점점 「검사내전」의 이선웅 검사처럼 익살스럽게 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마도 미셸은 유년시절 하와이 해변에 누워 돌고래 춤을 지긋이 관람하며 「모비딕」을 즐겨 읽던 버락의 천성이 항상 유지되기 바랐을 것이다. 백악관 영부인에서 일반인으로 돌아간 미셸은 브런치로 전자렌지에 토스트를 구워먹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으신 분이다. 자, 날씨도 꽤나 쾌창한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녀의 책소개를 시작하는 건 더욱 유쾌하지 않을까? 소시지를 만드는 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게다가 정말로 커다란 소시지를 요구하고 계시다고요.”

 


조상 중에 누구 한 명이 가문에 먹칠했다면 백 명은 그러지 않았다. 악한 자는 승리하지 않는다, 종국에는, 아무리 요란스러울지라도. 승리했다면 우린 결코 여기 있지 못할 테니. 그대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알면, 홀로 전진하지 않으리라. 그대는 금세기의 긴급 속보다. 그대는 앞으로 나선 선한 자다, 온갖 난관에도. 그 반대라고 느껴지는 날이 아무리 많더라도. 내일이라는 집, 알베르토 리오스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우리가 품고 사는 것들에 대하여.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를 똑바로 서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의지할 만한 도구를 찾는 방법에 대하여. 다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남과 다르다는 기분과 씨름하며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다름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믿고 따라야 할 사람, 버리고 갈 사람에 관한 폭넓은 대화에서 핵심을 이룬다. 하나같이 복잡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복잡한 문제다. 게다가 ‘다르다는 것’의 의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다름을 경험한 사람들을 대신해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남들은 볼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는 장애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의 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나만 다른 지도를 보면서 움직이고, 남들과는 다른 난관에 맞닥뜨린다는 기분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때로는 지도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을 보기 전에 나의 ‘다름’부터 볼 것이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그리고 극복은, 내포된 의미처럼 몹시 지치는 일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해서 주위를 경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에너지를 아끼고 한 걸음도 허투루 내딛지 않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현기증 나는 역설이 있다. 세상은 남과 다른 사람에게 신중함뿐 아니라 대담함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요점만 말하면, 공식은 없다. 장막 뒤의 마법사는 없다. 인생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깔끔하고 명쾌한 해결책이나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래 인간의 경험이란 그런 정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뒤죽박죽이니까.. 나는 우리 각자가 내면의 밝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아주 고유하고 개별적이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불꽃, 자기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이다. 자기만의 빛을 알아볼 능력이 생기면 그것을 사용할 힘도 생긴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지닌 빛을 돌보는 법을 터득하면 인정 넘치는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 사람의 빛은 다른 사람의 빛을 밝힌다.’

 

내 안에서 반짝이는 빛은 누구도 어둡게 만들 수 없다. 「구름 속의 무지개」, 마야 안젤루

 

편안하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에게는 단순한 개념이다. 두려움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불안과 긴장감이 나를 멈추기보다 이끌도록 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삶의 불가피한 좀비와 괴물들 앞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맞서는 것.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믿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완전히 편안하지도 완전히 두렵지도 않다. 그 중간 지대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깨어 있고 자각하고 있지만 꼼짝 못 하는 상태는 아니다. 편안하게 두려워한다는 것’, 매니악 마냥 고양된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기라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세상 사물 한결같지 않고 천태만상이므로 우리 또한 십인십색의 모습과 생각으로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려온다. 평온함 속에서도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자세, 가령 아폴론적 세계가 아닐까. 아폴론적 세계는 암담하고 공포로 가득 차있고 차가운 기운만이 인간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하나의 조각배 위에 그 허약한 배만을 믿으며 뱃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개개의 인간들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며 고요히 앉아 있는 그런 세계이다.

 

두려움 한 스푼을 가지고 나아가 한 수레 가득 능력을 쌓아 돌아오라.” 그녀의 신조이자 가훈, 자유와 안전의 위협 앞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명철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 필시 떠올려야 하는 격언이 아닐까. 

 

나는 나의 두려워하는 마음과 이제 58년을 살았다.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다. 내 마음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 마음은 내가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내 마음은 거대하고 뚱뚱한 서류철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는 내가 범했던 모든 오판과 과실이 담겨 있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내 결점의 증거를 찾아 전 우주를 흝어본다. 내 마음은 내 겉모습도 싫어한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든 그렇다. 내가 동료에게 보낸 이메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한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토록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다닌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매일매일 내 마음은 나에게 제대로 하는게 없다고 한다. 매일매일 나는 내 마음에게 말대꾸를 하려고 한다. 적어도 좀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눌러보려고 하지만 내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은 내가 만난 모든 괴물이다. 그리고 내 마음은 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내 마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좀 더 익숙해졌다. 반갑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이 내 머릿속에 어는 정도의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마음에게 일종의 영주권을 준 셈이다. 그래야 이름 붙이기 쉽고 해독하기 쉽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끊임없이 이기려 들기보다 내 마음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내 마음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것만으로도 두려워하는 마음의 손아귀는 느슨해졌고 모습은 감추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급격한 마음의 동요가 나를 습격해도 쉽게 놀라지 않는다. 내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시끄럽지만 대체로 헛된 경우가 많았다. 천둥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나는 여기 속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아프지 않은 답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곧잘 일그러트리곤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 따라 드러나는 다름을 관리하기 위해 숨고 끼워 맞추고 벌충한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다양한 가면을 쓴다. 사실상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좀 더 안전함을 느끼고 더 큰 소속감을 갖고 싶어서 짐짓 그런 척을 하지만 이것이 진정 한 내 모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만다.비틀즈와 애플에 영감을 준 「인간의 아들」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또 다른 것을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숨겨진 것을 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숨겨진 것에 관심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들 사이에는 매우 강렬한 느낌, 일종의 충돌이 발생한다.베르사유에서는 매일 밤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가면 무도회를 즐겼는데, 가면이 신원이나 신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여 매너리즘에 빠진 그들에게 일종의 새로운 오락과 희열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유행병 때문에 마스크를 쓰는 우리는 가면 무도회를 즐기는 부류, 내지 음악의 정령’이라는 명함을 돌리는 오페라의 유령」에 속하는가.  분명 우리 모두는 익명으로 군중에 묻혀 영혼의 해방을 경험’하려는 베네치아 사육제(Carnival of Venice:  Carnevale, 고기를 금한다)를 즐기고 있다.  혹시 우리는 가벼운 만남에 갇혀 사실상 첫 번째 만남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지려는 욕구에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당신은 이렇게 운을 띄운다. 목마른 사람처럼, 원하는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미련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사적인 행사(수석 졸업생 축하파티, 1991)입니다. 그쪽이 올 데가 아니에요. 자가용을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흑인 가족(스테이시 에이브럼스)은 주지사와 어울리는 자리에 초대될 리 없다는 것이 보안 요원의 생각이었다. 익숙한 메시지였다. 나는 네가 그걸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떠나 가면 뒤 숨겨진 상대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관계는 역동적이다. 변화로 가득하고 언제나 진화한다. 모든 것이 공정하며 평등하다고 두 사람 모두 느끼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항상 맞춰주고 있다. 누군가는 항상 희생하고 있다. 한쪽이 일어설 때 한쪽은 주저앉을 수 있다. 한쪽이 경제적 부담을 더 지는 동안 한쪽이 집안을 보살피고 가족의 의무를 다할 수도 있다. 이런 선택지들과 그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 가정, 일 모든 것이 전부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다. 튼튼한 동반자 관계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번갈아 가며 타협하고 그 어중간한 영역에서 서로 공유하는 편안한 집의 감각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나에게 똑같은 관용을 베풀 수 있고 베풀고자 하는 사람, 나에게 똑같은 인내를 보여주려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내가 짐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도, 최악의 순간에 내가 보이는 모습과 행동을 알고도 나를 사랑할 사람이어야 한다.. 성공적인 동반자 관계는 승승장구하는 농구팀과 같다. 팀은 완성된 기술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언제든 꺼내 쓸 줄 아는 숙달된 두 개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각 선수는 슛을 하는 것뿐 아니라 드리블, 패스, 수비 하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약점이나 차이점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둘이 함께 코트 전체를 커버해야 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다재다능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히 깨달았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임신과 출산의 경험과 동일한 궤적을 따르고 있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완벽한 가정생활을 꿈꾸고 준비하고 계획할 수는 있지만 결국 상황에 따라 되는대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체계와 일과를 정립하고 온갖 다양한 스승으로부터 재우고 먹이고 훈육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다. 집에서 지켜야 할 준칙을 만들고 신앙과 철학을 소리 높여 선언하고 동반자와 모든 것을 지겹게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개 얼마 가지 않아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나의 통제력은 하찮다는 사실을, 때로는 매우 하찮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년에 걸쳐 외항선에 뛰어난 지휘력을 갖춘 선장을 배치하고 소독 수준의 청결과 질서를 유지했더라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배는 주먹만한 아기들에게 강탈당했으며 내가 좋든 싫든 아기들은 배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저들만의 계획이 있다. 아이들은 각각의 개인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학습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짜놓아도 소용없다. 호기심으로 들끓는 아이들은 주변의 세상을 탐험하고 시험하고 만지고 싶어 한다. 배의 함교에 침입해서 모든 표면을 손으로 만지고 무심코 깨지기 쉬운 것을 깨뜨릴 것이며 우리의 인내심도 깨뜨릴 것이다. 

 

우리는 고독하고 외롭다. 그래서 타인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개개인만의 빛은 저마다 다르고, 상대가 자신만의 빛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상호 간의 피치 못할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만남의 대상으로부터 경계심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마음의 문을 열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경험 등을 상대와 공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통해 얻는 기쁨이 있다면 각자가 지닌 관점과 관습의 차이로 인해 불거지는 단점 역시 만남 속에 존재한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충실한 멘토가 되어야한다는 모순, 선임은 자신의 의견을 항시 후임에게 조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또 가난한 사람은 장인의 명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고착된 관념의 틀과 일반화된 생각에서 우리는 상대를 대응한다. Let It Be.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나란히 앉아 일할 수 있게 되어 기뻐. 네 모습 그대로가 좋아. 나도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좋아.” 상대와 어두운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품위 있게 가는 일은 증명해야 하는 일이다. 사랑을 베푸는 삶, 고상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자녀들과 친구들, 동료들, 지역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품위 있게 가는 일은 노력이다. 때로는 힘들고 따분하고 불편하고 멍을 남기기도 하는 노력이다. 혐오와 의심을 일삼는 사람들을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나와 내가 실패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 벽을 세워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지치거나 냉소주의에 빠졌을 때에도, 그들이 포기했을 때에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시민권 운동가 존 루이스는 우리에게 바로 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자유는 상태가 아니고 실천이다. 우리가 마침내 주저앉아 쉴 수 있는, 저 멀리 고원에 자리 잡은 마법의 정원이 아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오직 나를 위한, 나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펜을 들었다. 하지만 훗날 깨닮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타인을 위해 자유를 쓰고 그것을 주위에 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줄기차게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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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약 30억 명이 공산주의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가 독재 정권, 또는 전제군주제 국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되는 나머지가 빅브라더와 자본의 통치아래 사회주의를 설득시키려는 민주주의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물론 모두의 이론은 훌륭하다.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했다가 너무도 어려워 중단하는 동시, 새로운 교리를 창시하여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를 이단으로 몰았다. 또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용납하지 않았고, 예정설을 근거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마녀로 몰아 버렸다. 이처럼 인간·자연·사회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가 인류에 가져온 폐해를 살펴보면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감춰진 적폐에 대해서 모두 침묵하거나 선듯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걸 보면 제각기 자신이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족과 간절한 사유물이 존재하는 듯 싶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우리는 어느 한쪽에 구속되거나 단일한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필요는 없으며, 지역과 기후에 따라 다른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바탕으로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발언하면 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해택은 분명 이루말할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일을 위해 돈을 벌고 일을 위해 돈을 지출하며 오직 풍요로운 ‘향신료’에만 쫓겨 사는 우리는 황혼에 도달해서야 겨우 인생의 참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 분명 어떤 소견이나 견해에 대한 질문과 그에 따른 토론에서 비롯된 논쟁은 유익하나, 권력이 무작정 휘두르는 무력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필시 자유를 획득하여 우리가 얻은 것은 쾌락과 방종이고, 잊은 것은 윤리와 박애 아닌가.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선사(善事)를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1795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 고로 이제 당신은 행복을 정의해야 할 시간이자 당신의 윤택하고 피상적인 ¨부¨가, 또 당신의 욕망이 한평생 추구하던 ¨아름다움¨이, 그리고 당신의 ¨삶¨이 그토록 추종했던 ¨앎¨이 정말로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를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시간이다.  

 

인류 역사속에는 수많은 혁명들이 존재한다. 예측 불가능하고 다이나믹한 혁명들 중 쿠바혁명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여전히 자리한다. ‘다감하고 감정이 풍부한 얼굴과 활기찬 몸짓을 가진 사나이, 큰 목소리로 연설하고 논쟁하고 설득하면서 늘 무대의 중심에 있던’ 피델 카스트로와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의 역동적인 몸짓들은 몇백년간의 외세와 탐욕스러운 독재자들로부터 지친 순수한 사탕수수 노동자, 시거 마는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을 단숨에 열광시킨다. 그들의 열정은 어쩌면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은행이 이자를 위해서라며, 또 침체해 있는 내수경기를 활성화하고자,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라며 통화량을 늘려 화폐가치를 하락시키고, 통화팽창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오르고, 결국엔 그로인해 디플레이션이 찾아오면 돈의 가치상승이 뱅크런을 만들어 통화량이 수축되고 소비는 위축하게 되어, 상품이 넘쳐도 사용하지 못하며, 상품가치 하락으로 은행에 빛을 진 기업들이 파산하고, 생산과 고용은 줄어들어 이자를 갚지 못해 파산을 끝없이 반복하는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진정 거부했던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본가가 이윤을 위해 기계를 들여 노동생산을 높이고, 그러므로 늘어난 ‘상대적 잉여가치’가 노동력 착취로 이어져 임금하락과 실업자를 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을 거부했거나 월가시위가 없을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꿔왔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노인의 바다’가 만드는 파도로도 충분한 ‘파동’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거시경제학을 따른 ‘정부가 개입하는 뉴딜정책’이나, 그 후 주장되어온 ‘시장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신자유주의’에서는 결코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갈증을 담은 희망은 쿠바 해방 깃발이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에 휘날리는 동시, 힘차게 펄럭이게 만든다. 한편 소통의 중심에 자리한 쿠바 사진작가<혁명지>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자신의 작품들을 프로파간다가 아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길잡이, 대다수 문맹이였던 대중의 교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변화를 도모했다. (다른 신문들과 비교해 지면을 차지하는 사진의 분량이 유독 많았다.) ‘정부는 우리에게 무엇을 찍어라,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 로베르트 살라스(카스트로의 역사적인 유엔 연설을 유일하게 촬영한 쿠바 사진기자)’

 

「춘하추동, 그리고 쿠바 中」

 

 

신 향신료 전쟁

 

시진핑 주석은 남중국해 섬들이 ‘고대부터’ 중국 영토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인공섬을 군사화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이 난사(스프래틀리) 군도에서 벌이는 건설 활동은 어느 나라도 겨냥하지 않고 어느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중국은 이곳을 군사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약속은 거짓이었다. 인공섬을 건설하기 시작한 지 2년이 채 안 된 2015년 10월까지 중국이 매립한 면적은 13km²로 추정된다. 중국은 암초와 산호초 지역에 활주로와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대공포와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해 요새로 바꾸었다. 필리핀 신문 <인콰이어러>가 확보한 항공사진을 보면 등대, 레이돔, 통신시설, 격납고, 다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콰이어러>는 지하 저장고, 미사일 발사대, 고주파 레이더도 설치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중국은 인공섬 건설과 광범위한 주권 행사를 계속 밀고 나갔고, 이의를 제기하는 상대를 서슴없이 위협하고 괴롭혔다. 2019년 7월 발간한 <국방백서>에서도 남중국해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중국 영토이고 중국은 국가 주권을 행사해 남중국해섬들과 암초에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필요한 방어력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국가의 ‘핵심 이익’으로 지정했다. 중국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사안에 ‘핵심 이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인민해방군 북해함대 사령관 위안위바이도 한 회의에서 이를 못 박았다. 이름 그대로 남중국해는 중국에 속하는 해역입니다. 오래전 한나라 때부터 중화민족이 생업을 이어온 바다입니다. 중국에 남중국해는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다. 중국은 여전히 중동산 석유에 깊이 의존하는데, 수입량 80%가 인도양을 거쳐 믈라카해협을 통과한 뒤 남중국해를 가로지른다. 애외 교역량도 약40%가 남중국해를 지난다.

 

 

남중국해에는 세계의 어선 절반 이상이 조업하고 있는데, 이 외에도 해저에는 가스·석유 등의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중국에 따르면 남중국해에는 25조~60조 달러어치의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고 추정되고, 미국은 약 3조~8조 가치가 지하에 매장되어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은 유럽의 식민지배 이후 식민지 종속경제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주 계급으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혼랍스럽던 사회는 서구의 종교적 영향으로 종교적 갈등까지 겪게된다. 민족주의를 이용해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후 서구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한 국가들은 대부분 민주주의(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동티모르·싱가포르)를 채택하지만, 싱가포르, 캄보디아, 미얀마는 준민주주의를, 반면 베트남, 라오스, 브루나이는 권위주의를 선택한다. 한편 제국주의와 신민지배가 본격화된 18세기 말~19세기부터 상권을 형성하고 유럽 식민지배자의 중간관리자 역할로 그들 위에 군림하며 토착사회를 경원시하던 중국인들은 그들로부터 적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세계 정치 체제에는 민주제, 독재제, 입헌제, 전제정체, 연방제, 단일제 등이 있는데, 공화제의 이상이 군주제에 동화되려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이동해야 한다. 마지막 12대 황제 아이신 교로 푸이는 퇴위 후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소련군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수감된다. 그 후 푸이는 모범수로 사면되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에 청조 황제라는 반혁명적 출신으로 지목받아 홍위병에게 탄압받고, 1967년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베이징에서 외롭게 사망한다. 왕이나 황제가 사라지고 민주제, 입헌제, 혹은 전제정체(국가의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여 통치하는 정부 형태)를 채택한 지역은 오스만제국이나 대영제국처럼 본토에서 분리된 지역들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하게 된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통치의 문제점은 문화와 사상이 다른 지역이 느끼는 오감의 온도를 관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은 대국이고 다른 나라는 소국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양제츠 중국 외교부 부장, 아세안지역안보포럼 2010. 7.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고려해주기를 바라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세안 회원국이 중국의 이익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내면화하기를 바라죠. 싱가포르 전직 고위 외교관 빌라하리 카우시칸

메콩강과 살윈강, 브라마푸트라강을 포함한 아시아 주요 강들의 발원지가 중국에 있다. 중국은 하류 쪽 국가들에 미칠 영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대형 댐 건설에 착수했다. 메콩강 상류에 건설한 초대형 댐만도 무려 11개다. 중국은 메콩강을 공유하는 국가의 경제와 생태계, 그리고 메콩강에 기대 살아가는 수백만명의 생계를 좌지우지할 엄청난 힘을 손에 쥐었다. 메콩강이 타이,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의 생명줄인데도 중국은 댐 건설 및 관리를 논의하자는 하류 국가들의 요청을 모두 거부했다. 메콩강을 공유해서는 안 되는 독점 자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위싱턴 D.C.의 싱크탱크 스팀슨센터Stimson Center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을 저수하는 탓에 하류 쪽 수위가 들쑥날쑥 바뀌어 엄청난 파괴를 일으키고 있다.그 결과 건기에 메콩강의 물 흐름이 마치 고점과 저점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주식 차트처럼 바뀐다.

 

 

 

친중 성향이 강한 파키스탄 역시 과다르항에서 중국과 불협화음의 소리를 내고 있으며, 58년간 이어져온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으로 인도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개최식과 폐막식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2021년 말 몇 주 동안 파키스탄 과다르항의 거리를 가득 채운 시위대가 Gwadar ko haq do!(과다르에 권리를!) 외쳤다. 시위대는 도로를 가로막고 타이어를 불태웠다. 점점 더 요새화 단지가 되어가는 중국 소유의 과다르항을 봉쇄하겠다고 위협도 했고, 현지 어업을 파괴하는 중국의 불법 저인망 조업을 완전히 중단하라고도 촉구했다. 중국이 약속했던 물과 전력, 생필품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며, 일상을 방해하는 수많은 검문소를 포함해 엄격한 보안 조치를 폐기하라고도 요구했다.

 

중국은 희토류 시장의 지배자다. 비용과 오염 부담이 큰 희토류 채굴 시장과 가공 시장을 무려 80%와 90%씩 차지하고, 갈수록 그 힘을 더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제한했다. 동중국해의 영토분쟁 지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보안청 순찰선이 충돌하자 나온 조처였다. 2019년에는 미국과 벌인 무역전쟁에서 희토류를 무기로 삼겠다고 위협했다. 2021년 초에는 국가안보 보호를 위한 수출 규제 대상에 희토류를 추가할지 검토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관료들이 업계 관계자들에게 수출 금지가 미국의 국방산업, 특히 F-35 전투기 사업에 얼마나 충격을 안길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중국은 막대한 보조금과 보호정책으로 자국의 관련 기업을 지원하고 화학약품으로 희토류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독성물질의 환경오염을 용인했다. 알려진 바로는 중국,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베트남, 인도, 미국에 상당히 많은 희토류가 묻혀 있다. 그린란드도 빼놓을 수 없는데, 한 추산에 따르면 세계 가채광량 4분의 1이 그린란드에 매장되어 있다.” 더군다나 새로운 실크로드를 꿈꾸는 중국은 그린란드 개발을 자처했고, 미국은 신제국주의로 인해 불안해진 나토국들의 찬성을 등에 업고 그린란드를 매입하려고 한다. 한편 중국은 아프리카연합AU에 수많은 의회 건물과 공공건물들을 기증하는 동시 화웨이 통신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미국은 군사동맹 성격이 강한 쿼드Quad(미국·일본·인도·호주의 안보 대화)와 AUKUS 협정(미국·영국·호주 3개국이 결성한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파트너쉽이자 군사동맹)에 주력하고 있다. 

 

화웨이가 5G 통신망에서 배제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기존 통신망에 깊이 퍼져 있고 영국 학계와 광범위한 연구 협약을 맺고 있다. 여러 중국 IT 기업이 영국 경제의 예민한 분야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환영받고 있다. 하이크비전Hikvision이 그 예다. 하이크비전은 세계 최대 감시 장비 제조업체로 누구보다 앞서 얼굴 인식과 걸음걸이 인식을 포함한 인공기능 기술을 감시 장비와 결합했고, 감정을 읽을 줄 아는 감시 장비까지 개발했다.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인 하이크비전은 시진핑이 건설 중인 디스토피아 같은 감시 국가를 가능케 한다. 미국은 신장에서 일어난 탄압을 도왔다는 이유로 하이크비전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는 영국에서 하이크비전을 퇴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영국 공항, 자치구, 병원은 물론 버스와 학교에서 하이크비전의 감시 카메라를 무려 120만 대나 사용한 것으로 추산된다. 런던 자치구 가운데 절반 넘는 곳이 중국산 감시 카메라를 사용한다. 정부 부처도 중국산 감시 장비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중국의 투자를 눈먼 돈으로 여긴 영국 대학들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앞다퉈 중국과의 연구 협력에 나섰다. 2021년까지 중국공산당과 관련한 기업들이 영국 대학 곳곳을 깊이 파고들었다. 영국 싱크탱크 시비타스Civitas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최상위 연구기관으로 평가받는 러셀그룹 소속 대학 24곳 가운데 절반이 인민해방군과 연관된 대학이나 기업과 관계가 있었다. 2022년 2월 <타임스>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 대학들은 중국 기관으로부터 2억 4,000만 파운드를 제공받았고, 이 중 상당수의 기관이 군과 관련이 있었다. 이는 영국 과학자들과, 인민해방군과 관계된 중국 기관 사이의 연구 협력 사례가 6년 동안 1,000건 이상으로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화웨이 한 곳만해도 케임브리지대, 에든버러대, 서리대,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 첨단시설을 지원하는 등 영국 대학 및 연구기관 35곳과 협력한다. 화웨이는 옥스퍼드대의 연구를 상업화하는 벤처 투자사 옥스퍼드 사이언스 이노베이션의 지분 0.7%를 사들여 영국 학계에서 개발한 유망한 초기 단계 기술에 접근할 길을 열었다.” 

 

“러시아 극동은 광활하고 자원은 풍부하면서도 인구밀도는 낮은 러시아가 자원에 굶주리고 사람이 넘쳐나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곳이다. 두 나라는 무려 4,200km에 걸쳐 국경을 맞대는데, 그 가운데 1,600km가 아무르강을 따라 펼쳐진다. 1969년 가장 난폭한 국경 충돌이 일어나 전면전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곳이 바로 러시아 극동이다. 아무르강을 따라 펼쳐진 국경은 1858년 러시아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아이훈 조약에 따라 설정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중국은 아무르강 북쪽 땅 60만km²를 양도했다. 그리고 2년 뒤 베이징 조약으로 일본해에 접한,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연해주까지 러시아에 양도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분쟁이 해결되어 확정된 국경이지만, 중국은 이런 조약들을 여전히 ‘불평등’ 조약으로 여긴다.” 편의적 동반자 외교를 펼치는 두 나라가 어느 순간에 다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경 충돌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자연에는 애벌레 시기에 개미의 돌봄을 받는 나비가 있는가 하면, 개미 군락에서 알만 낳는 여왕개미와 여왕을 위해 종일 노동만 하는 일개미들이 존재하며, 페로몬 냄새가 다른 개미집단과의 싸움을 즐기는 붉은불개미도 있고, 일벌들에 의해 여왕벌이 교체되거나 성숙한 여왕벌이 자신의 벌집을 짓기 위해 집단과 분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탁란을 할 다른 새의 둥지를 알아보는 뻐꾸기가 있는가 하면, 얼핏보면 모르나 여러 마리의 성인 코끼리 무리는 아기 코끼리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주위를 경계하며, 암컷 사자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 수컷 사자는 무리에서 벗어나 사냥에도 참여하지 못한채 외롭게 말라 죽어가기도 한다. 또한 한쌍의 논병아리는 수면 위에서 멋있는 탱고를 추는 것으로 유명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새들은 대부분 수컷으로, 암컷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연에는 왜 이같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인가.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1장」

 

누가 ‘한 겨레’가 되고자 바벨(히브리어 ‘혼돈’)을 세우는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아직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선악과善惡果, 그리고 주어진 ¨삶¨이라는 고해, 그리고 ¨아름다운¨ 향신료라는 ¨앎¨. 공복과 포만이라는 ¨¨의 갈등을 넘어 심미적 미각을 찾아 방황하는 당신은 황금사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그리고 백설공주의 사과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