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는 사회 - 한병철 I

2024. 10. 15. 20:03 from 書評


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발터 벤야민

고통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사용한 ¨척도¨로 보면 고통은 행복으로 향한 상태가 부족한 현상이다. 고통과 행복의 중간 상태를 우리는 무료함이라 이해한다. 그렇다면 고통이 없는 세계가 가능한가. 빈약하기 짝이없는 우리의 계획과 추가적 보수작업이 늘 당연한 부실한 설계, 그리고 허술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 언제나 스스로에게 고의적이지 못한 이율배반적 고통을 가한다. 한편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는 종종 마조히즘을 선택하고, 어떤 경우 필요 이상의 행복을 손아귀에 넣으려 온갖 힘을 다해 투쟁한다.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선악¨과 였다. 베어 물은 사과란 슬픔과 행복, 불행과 행운, 그리고 Good, Bad & Ugly였다. 그리하여 ¨정의로워지고자¨하는 이상한 자는 멋모를 자유·평등·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를 주장하고, 이해되지 않는 ¨척도¨를 외치며 소금과 후추에 범벅된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가 절실한 허기진 자들의 영양실조와 기아를 대처하려 거짓미소로 쓴맛을 슬며시 감추며 후하고 넉넉한 인심을 넉살스레 베푼다. 시대를 슬퍼할뻔한 우리가 그렇다. 모두가 뉴스에 귀기울이지만 모두는 작은 행복의 공간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채워지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퇴근 후 Netflix의 오징어게임 2를 보며 대리만족으로 내일의 에너지를 충만히 비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안락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하와는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멍청한 아담은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비록 무고한  던힐 을 피며 봉천동 언덕을 올랐고, 봄날이 증발하는 절망을 외치며 공상에 몰두한 「엠마 보바리」같은 즐거운 사라의 육체를 상상했다. 그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 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말하자면 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이자 치골의 장미들의 향기가 가져다주는 ¨¨가 나의 정신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은 스캔들이다.

 

고통에 빠진 아폴론적 사회에서 좋아요Like는 진통제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좋아요Like는 갈등과 모순이라는 격정의 과정에서 설파되는 산파술을 철저히 외면한다. 우리 시대에는 예술을 좋아요의 코르셋에 끼워 넣는데 모든 힘이 동원된다. 예술의 이러한 마취는 옛 거장들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옛 거장들을 유행하는 디자인과 무턱대고 결합시키기도 한다.” 속살거리는 계절의 풍미는 고루한 구시대적 발상이라 치부되고, 모든 것은 유행과 좋아요Like에 맞춰 엉망진창 뒤섞여fusion 버린다. 소금이 너무 많이 사용되자 우리는 거기에 설탕을 부어버렸고, 다시 간사한 우리의 심미적 발상은 피곤한 미각에 후추와 고추가루를 과도하게 남용하도록 유도한다.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