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2023. 11. 21. 08:00 from 書評

 

“누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떤 때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고, 또 어떤 때는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소설, 제주 4·3에 대한 소설이라고도 답했다. 그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란 말을 고르고 싶다.”

 

 

모호하고도 성글성글한 계절, 우리는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으로 내리고 있는 그런 성근 눈을 기다리고 있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가장 예리한 칼을 집어든 나는 틈과 마디 사이에서 임계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던 ‘사랑’이라는 가장 여리고 연한 부분을 베어내어 ‘우리’를 차가운 개체로 분리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은총을 기대하고 나는 의욕을 갈망할 뿐, 그렇게 어긋난 우리의 눈부신 환상. 만약 그런 우리의 낭만이 알맞게 개화開花한다면 화사한 계절의 인사는 애석한 푸르름을 시사하고, 이제야 떠오른 새하얀 봄빛은 어색한 마음과 떨리는 시선에 탄식을 토로하며 새로운 울림을 위한 부질없는 떨림을 가정할 것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한숨과 뒤섞인 날숨을 몰아 내뱉는 그런 날이면, 차분한 봄볕이 내려와 당신의 일상에 아롱거리는 작은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자라나는 애틋함을 뒤로 전해지는 봄바람에 격양된 오늘의 한칸에 은은한 환희가 잠시나마 당신곁에 깃들길 조금은 기대해 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잠시 질문해 보자. 그러니까 너가, 또는 내가 삶을 원하는 이유가, 도대체 그 목적이 생리적 욕구와 물질적 집착 이외는 없는 것일까. 너는 설계자를 꿈꾸지 않고 나는 한낮 말초적 욕구에만 집중하는 기능공에 불과한 초라한 미물이라고? 포환같은 찰라의 하루, 만성적 애정결핍 증상을 띠는 우리는 총망지간에 대상행동이라는 인스턴트 몽환의 쾌락에 젖어 소실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자아초월 역시 이루어내질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천상에 기록되고 있는가.        

 

 

하지만 인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단 부위를 꿰매기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을.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되며, 계속 피가 흐르고 분리된 너와 나는 통증을 느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나는 너가 필요하다고, 너는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환지통에 대해 의사는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말한다. 묶어놓은 신경줄이 자칫하면 다시 풀어져버리고, 신경을 찾으려면 전신마취를 하고 어쩌면 패혈증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은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이 맞아. 

 

 

4·3,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너가 오른쪽에 서면 나는 왼쪽에 자리하지만, 서로가 돌아서면 너는 언제나 왼쪽에 나는 언제나 오른쪽Right에 서있어.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에 내리는 그런 신의 섭리,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되고,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하는 거지. 하지만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벼워.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거지. 또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이는 거지. 눈에도 무게가 있다, 너와 나 사이 맺음의 무게. 새처럼 가볍지만 수없는 만남이 가져온 결속으로 커져버린 눈송이가 개체가 되어버린 너와 나의 얼굴에 얇게 덮여서 얼어버리는 거야. 바람이 되어버린 숨소리 조차 사라져 버린 그 고요함.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속솜허라.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을 지켜내라는 것일까. 디케의 칼이 우리를 가른다, 정의just-ify라는 이름 하에 가까스로

 

뭐랄까, 너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난 바닐라를 좋아하는 것일 뿐. 정의가 카카오를 고른다는 것은 막대자석을 가르는 것처럼 왠지 무의미해.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너도 알지, 전국에서는 최소한 십만 명이 죽었다고 하잖아.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이 뻗어나가 표지를 연다.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부위별로 추려진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진들을 넘겨간다. 수천 개의 정강이뼈. 수천 개의 해골. 수만 개의 늑골 더미. 수백 개의 목도장들, 혁대 버클들, 중中 자가 새겨진 교복 단추들, 길이와 굵기가 다른 은비녀들, 유리알 속에 날개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구슬치기용 구슬들의 사진이 사백여 페이지에 걸쳐 흩어져 있다.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