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 한병철

2023. 11. 30. 05:59 from 書評

 

Die Krise der Narration ―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보라, 이야기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나는 왜 인스타를 시작하는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나의 서사를 정리하기 위해, 삶을 앎이라는 정보로 기록하고자하는 마지막 여정이라 하자. 또 다시 죽음을 예습하지 않기 위해, 아웃사이더인 나는 거센 인사이더 파도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개시한다. 

 

 

왜 우리는 정보에 목매고 있는가. 우선 정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정보란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이같은 정보가 지식이 되려면 사물이나 사건에서 얻은 자료가 그 개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삶에서 ‘서사적 진폭’을 얻기 위해선 그 정보가 앎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식을 원하는가. 우리는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고자, 미각으로부터 더 심미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갈망한다. 누군가가 멋진 옷을 입고 스토리셀링하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공감으로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한 텅 빈 삶이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무엇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가. 월터 벤자민Walter Benjamin은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고 토로한다. 다시말해 리포터의 설명과 견해가 부재하므로써 서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자연스럽게 산파술maieutike이 커뮤니티에서 형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출산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자.” 계약결혼을 승락한 ‘초대받지 못한 여자’도 결국 여자였다. 그렇다면 즉자와 대자 중 누가 「구토」를 느꼈는가. Le Premier Sexe ∨  「Le Deuxième Sexe」?

 

그 대상들, 그것들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사용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두며, 그것들 사이에서 산다. 사물들은 유용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나를, 나를 그들은 만진다. 그것이 참을 수 없다. 나는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구토」

 

그러므로 「타자의 추방은 가속화된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화자가 자기가 원하는 스프를 장성인 청자에게 포크로 떠먹여주는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 이같이 근접성이 발현한 현상에서 인스턴트 정보는 곧바로 진부해진다. 하지만 100억 년이 지난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신비롭고, 우리의 관조적 머무름은 그곳에 존재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장미로 불러야 하나.

 

스마트한 신자유주의는 알고리즘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소득불평등으로 자유를 더욱 고립시킨다. 칸트의 보편적 가치와 환대가 불가피한가. 

 

이제 성년식은 결혼식과 동시에 치루어진다. 


 

정보를 통해 생채기 성형이 성행하는 작금의 시대, 오해와 갈등과 화해는 사라졌다. 혐오와 증오와 미움만이 남은 사회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경험의 빈곤은 순수한 미학적 가치로 추앙되며, 변질된 파토스는 백치미의 탐미를 청자에게 호소한다.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이가 아직 존재하는가? 떠나는 이들로부터 남겨진,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는 반지와 같이 견고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격언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월터 벤자민에로스의 종말인가. 

 

“「유리 건축물Glasarchitektur」에서 셰어바르트는 세상이 온통 유리로 지어졌더라면 생겨났을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한다. 유리 구조물은 세상을 ‘마치 눈부신 장신구로 뒤덮은 것처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구에서 ‘천일야화의 정원보다 더 멋진 것을 누렸을 것’이다.” 

 

유리 천장을 동경하던 우리는 「유리알 유희」에 빠져 자신이 서있는 유리바닥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한채 투명사회」 속 좋아요’와 함께 고립된다. 바야흐로 우리가 스스로 설계한 파놉티콘은 자유 시장의 화폐로 등극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봄의 지나침pleonexia은 여름이고, 가을의 모자람endeia은 겨울이다. 너는 나의 가능성이다, 겨울에서 나는 너의 여름이고 싶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셀카는 오로지 순간만을 드러낸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짧은 인식 후 영원히 사라진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궁극적으로 운명과 역사가 담긴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실제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순간에 예속된다.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삶의 폭을 감싸고 자기의 역설로 그 폭을 채우는 ‘전체 존재의 신장성’이 낯설다. 포노 사피엔스는 이야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의 셀카는 죽음의 부재를 드러낸다. 관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죽음마저도 ‘좋아요’를 유도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합법적인 에로티즘에 잠식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화자에게 고료와 이상을 병행하라 권유한다. 비로소 학습을 마친 AI는 천개의 고원을 완성시킨다. 이에 스토리셀러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냥 하는 것뿐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전례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이론의 종말」

 

멘델이 말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아폴론이 되었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한나 이렌트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