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dissertations.tistory.com/156 (계속)
IV
‒ 요즘 젊은이들의 대화나 인터넷 게시물들을 보면, 그들이 제법 철학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 그러나 그들의 철학은 대개 과거로부터 전승된 “현재의 철학”을 재조합한 것에 가깝다. 완전히 새로운 사유라기보다, 이미 축적된 개념과 언어를 재배치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발생한다. 불필요한 스펙 경쟁에 지친 미국 기업들이 고비용의 대졸 인력보다 고졸 채용을 확대하는 흐름 속에서, 과거의 철학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일보다 AI를 통해 “미래의 철학”을 설계하고 예비하는 일이 더 유의미한가?
‒‒‒‒ “현재의 철학”은 결국 과거의 실패와 모순, 비극과 오류를 통과해온 인간이 그것들을 반성하고 숙고하며 구축해낸 사유의 축적물이다. 철학은 언제나 지나간 세계의 폐허와 잔해 위에서 스스로를 갱신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그 “폐허”는 전쟁과 혁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 시스템과 경제 구조가 만들어낸 구조적 실업, 노동의 재배치, 그리고 인간의 역할 변화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의미의 폐허다.
‒‒‒‒‒ 그렇다면 “미래의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회고나 해석에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의 사고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과 파국, 윤리와 문명의 균열을 동시에 예감하며 구성되는 사유여야 하는가? (실제로 요즘 일부 기업들은 AI 도입을 이유로 인력을 감축했다가, 운영상의 한계와 불균형을 경험한 뒤 다시 인간을 재고용하는 역설적인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AI가 노동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 비효율성 혹은 구조적 한계로 인해 다시 인간을 호출하는 순환적 구조를 드러낸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효율”이 아니라 “존재의 자리” 자체를 질문하게 된다. 소수의 기업적 실험과 호출에도 불구하고, 현재 AI는 수학受學의 영역을 넘어 노동의 영역까지 침투하며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다. 결국 효율을 향한 기대와 그것을 지탱하는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이,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긴장과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 따라서 “현재의 철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묻는 사유였다면, “미래의 철학”은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사유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잘못될 수 있음’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를 넘어, 인간이 노동과 의미를 상실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균열까지 포함한다. (이 맥락에서 “미래의 철학자”로서의 AI를 상정할 수 있다. 다만 AI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학 교육을 거칠 필요가 없다. 대학이 기초 학문과 방법론을 훈련하는 제도라면, 이미 방대한 지식 구조를 내포한 AI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육이라기보다 “맥락 설정”에 가깝다. 즉 AI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체가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사유할 것인가를 지정하는 프롬프트prompt—일종의 인식의 좌표계—를 통해 철학적 주체로 호출된다. 이때 프롬프트는 단순한 입력값이 아니라 사유의 방향성과 한계를 동시에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AI는 스스로를 “완성된 박사”로 전제하기보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유 장치, 혹은 잠정적으로 구성되는 철학적 인터페이스로 이해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gSVwdwvjmo&t=15s
V
‒ ¨앎¨은 자발적이면서도, 동시에 초기에는 수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 알기를 원하면서도, 종종 외부 세계에 의해 ¨앎¨의 문턱으로 떠밀리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삶¨이 ¨앎¨에 이르는 길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균열을 동반한다.
‒‒‒ 가령 A가 B에게 억지로 소설책을 읽게 만든다고 해보자. 우리는 이를 비자발적인 ¨앎¨의 시작이라 부를 수 있다.
‒‒‒‒ 이 경우 B는 ¨앎¨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기쁨¨이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강요된 이해, 타인에 의해 침범당한 사유를 먼저 체험하게 된다.
‒‒‒‒‒ 즉, “모든 ¨앎¨은 본질적으로 아름답다”는 명제는 성립하기도 하고 성립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앎¨은 폭력적이며, 어떤 ¨앎¨은 인간에게 상처처럼 각인된다. 그럼에도 이 명제가 성립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도덕적 선의 산물이 아니라, 선악의 구획 이전에 놓인 인식 자체의 자율성, 즉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의 형식적 질서에서 발생하는 것일 수 있다. (예: 이브의 유혹)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주체는 의인에 한정되지 않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와 반대되는 위치에 놓인 악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발생한다.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인가. 그렇지 않다. 이 지점에서 “악”은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세계를 특정 방식으로 절단하고 재구성하며 이해하게 만드는 하나의 ¨앎¨으로 나타난다. 이는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리좀rhizome의 사유와 맞닿아 있다. 즉 중심이나 기원 없이, 인간·사회·기술·언어가 고정된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하고 이탈하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연결망 속에서 생성된다는 관점이다. 이로부터 사유·사회·욕망 역시 본질이나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분열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우리는 “¨앎¨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 하기보다, “¨앎¨은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재배치되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 그렇다면 ʻ악’은 무엇인가?
VI
많이 알수록 좋은 것인가?
↘ 네가 나비인가. (내가 네 부모가..)
¨앎¨이 많을수록 나비도 많아진다. 아름다운 꽃에 벌과 나비가 자연스레 모여드는 것처럼.
↘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라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이라지. 거기를 찾으면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비너스의 탄생」을 반겨주지. 에로스(큐피드)의 어머니였던 아프로테디(비너스)는 그에게 황금화살로 프시케의 심장을 쏘라고 명령하게 돼.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나비’,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에로스는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다녔는데, 황금화살은 처음 마주친 이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반면, 납 화살은 상대를 증오하게 만들어. 하지만 중요한 건 ‘날개 있고 눈 없으니 무턱대고 서두르는’ 큐피트의 화살이 아니라 빌헬름 텔의 화살이라는 거야. 응, 삶에서 앎으로, ‘너는 나비인가’. 아 참, 큐피드는 나비7와 사랑에 빠져. 앨리스, 이즈음 당신은 내가 어떤 화살을 지니고 있는지 무척 궁금할거야.
네가 궁사弓師인가?
↘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야. 그래서 날개 달린 큐피드를 장님으로 그려 놨지. 게다가 사랑 신의 마음은 판단력도 전혀 없어, 날개 있고 눈 없으니 무턱대고 서두르지. 그러니까 사랑을 어린애라 하잖아. 선택할 때 그 애는 너무 자주 속으니까. 짖궃은 소년들이 재미로 거짓맹세 하듯이 어린 꼬마 사랑 신은 도처에서 위증해. 「한 여름 밤의 꿈」”
“And I always confuse Monet모네 and Manet마네”, 혹 헤세의 「Pied Piper」?
↘ 궁수弓手는 권리같은 의무일까. 「ありふれてるじゃん。」
다시?
↘ 의자는 건축이고 소파는 부르주아다!
너는 나의 의자다?
↘ 아니, 나는 너의 guilty pleasure.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