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午 - 大寒

2026. 1. 24. 09:04 from 六十干支

 

I

 

“신은 왜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들었는가?”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착하면 보상받고, 나쁘면 벌받아야 공평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1이 존재한다면 2도 존재한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밝음이 있으려면 어둠이 있다. 나쁜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비되는 선한 사람 또한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이 세계는 단절된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를 전제하는 관계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음을 함께 놓고 본다면, 과연 이 세상은 불공평한가? 세상은 흔히 선과 악, 보상과 처벌이라는 이분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은 실제로는 명확히 끊어진 범주가 아니라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악인 ⇆ 극도로 나쁜 사람 ⇆ 아주 나쁜 사람 ⇆ 조금 나쁜 사람 ⇆ 보통 사람 ⇆ 조금 좋은 사람 ⇆ 아주 좋은 사람 ⇆ 극도로 좋은 사람 ⇆ 의인

 

그렇다면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고, “너는 1과 조금 나쁜 사람, 너는 3과 아주 좋은 사람”처럼 미리 정해진 역할만을 부여했을까? 1이 존재하려면 2와 3도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선과 악의 구분 위에 놓인 연속선 자체가 창조자의 섭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오감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받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에, 우리의 자유는 더욱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질병 또한 마찬가지다. 질병은 ‘벌’이라는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원인과 조건이 중첩된 연속체로 존재한다.

감염성 질환(결핵, 독감, 코로나19) ⇆ 유전 질환(혈우병, 낭포성 섬유증) ⇆ 만성 질환(당뇨병, 고혈압) ⇆ 자가면역 질환(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 ⇆ 퇴행성 질환(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 정신 질환(우울증, 조현병) ⇆ 신경 질환(간질, 치매) ⇆ 암(폐암, 위암, 유방암) ⇆ 생활습관성 질환(비만, 지방간) ⇆ 환경성 질환(석면폐증, 납중독)

 

예를 들어, 1지역에서 최고층에 이암이 존재하려면 그 아래에 사암이 깔려 있어야 하고, 그 위로는 차례로 역암, 석회암, 응회암, 셰일을 거쳐 다시 이암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SIMAGEBANK

여기에는 명확한 대응 관계가 없다. 선한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 고통을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도덕을 판독하지 않으며, 병은 인격을 심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의 저울로 자연을 재단하려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불공평해 보이는 이유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정의가 자연의 작동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은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작동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신의 부재나 무능을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신이 애초에 도덕적 회계사가 아니었음을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세상이 단순한 상벌 체계로 설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는 선과 악, 건강과 질병마저도 연속과 확률, 우연과 조건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불공평은 신의 설계라기보다, 인간의 기대에서 발생한 착시일지도 모른다.

 

II


성서와 과학이 늘 맞부딪히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나는 ❝진화론❞을 믿으면서 동시에 ❝창조론❞도 믿는다. 오래전 쓴 글에서 이 같은 나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요약하자면, 창세기의 기록처럼 동물들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각성¨된 존재였다. 예로 ¨각성¨된 뱀의 유혹적인 언어가 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의 눈이 열려 너희가 하느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을 아시고 계신다. 「창세기 3, 4–5」”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은 ¨망각¨ 속으로 빠졌고, 그 흔적만이 본능이라는 형태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나는 본다. 예컨대 개미나 벌의 집단을 관찰하면, 때로는 인간보다 더 ¨각성¨된 듯한 질서와 협응의 행동을 보이는데, 이러한 현상은 생명이 과거에 지녔던 ¨각성¨의 잔향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납득된다.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던 시대, 인간과 유사한 포유류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 시기 인간은 신의 섭리에 따라 ¨망각¨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공룡이 오랜 세월 ¨각성¨된 존재로서 세계를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생대 자체가 하나의 ❝진화❞ 과정이자 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에 걸친 공룡의 존재 역시 ❝창조❞의 한 국면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결국 문제는 어느 시점이 곧 ‘안식일’이었는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식물들조차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오늘, 같은 맥락에서 동물들 또한 저들만의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으며, 혹은 과거의 ¨각성¨ 상태에서는 분명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큰 의문이 모성애인데, 이를 ❝창조❞에서의 ¨각성¨ 이후 ❝진화❞ 과정에서의 ¨망각¨으로 이해하면 놀라울 만큼 많은 의문이 해소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는 잠재능력의 일부만을 사용한다”고 말했고, 아인슈타인이 인간은 뇌의 10%만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듯, 실제로 인간의 뇌는 항상 100%가 동시에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느 순간 50%나 75% 수준으로 더 깊이 ¨각성¨된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이러한 ❝창조❞와 ❝진화❞의 시간 개념이 불편하다면,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스티븐 호킹이 제안한 허수 시간imaginary time을 떠올려 보자. 그 안에서 모든 힘은 하나의 초힘으로 통일되었다가 플랑크 시간(약 5.39×10⁻⁴⁴초)이 지나며 중력·전자기력·약력·강력으로 분화되듯,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찰나와 중생대의 장구한 시간 역시 창조주에게는 한순간일 수도, 동시에 영원일 수도 있을 것이다.

 

III


한편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경에 기록된 ¨선악과¨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고, 소유하고자 하며, 선이 존재하면 그 반대편에 놓인 악까지 끝까지 파헤치려는 성향을 지닌다. 이는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라는 오감을 자극하려는 끊임없는 유희이자 욕망의 작동 방식이다.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코끝에 스치고, 혀로 맛보아지고, 피부로 스며드는 감각 속에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모든 감각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선악과 이전의 아담에게는 이러한 ¨아름다움¨, 곧 분별과 소유를 전제로 한 ¨앎¨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먹고 눈을 뜨는 순간, 그는 비로소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된다. 성서에서 예수가 아이들을 특별히 사랑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아직 본능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다움¨을 붙잡아 이해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반면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의 우리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하고, 그 안에 잘못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지식을 향한 갈망을 멈추지 못한다. 아름다움이 단순한 경험을 넘어 ¨지식¨, 즉 ¨앎¨으로 고착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 허락한 ¨망각¨의 질서를 넘어서는 ¨각성¨이며, 결국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편 동물이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각성되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한, 세상에 나쁜 사자는 없다.

 

¨무¨ ⇆ 극도로 추한 사람 ⇆ 매우 추한 사람 ⇆ 조금 추한 사람 ⇆ 보통 사람 ⇆ ¨삶¨ ⇆ 조금 아름다운 사람 ⇆ 매우 아름다운 사람 ⇆ 극도로 아름다운 사람  ⇆ 완벽/¨앎¨ 

¨무¨ ⇄ 극도로 추한 감각 경험 ⇄ 매우 추한 감각 경험 ⇄ 조금 추한 감각 경험 ⇄ 보통 감각 경험 ⇄ ¨삶¨ ⇄ 조금 아름다운 감각 경험 ⇄ 매우 아름다운 감각 경험 ⇆  극도로 아름다운 감각 경험 완벽/¨앎¨

¨무¨ ⇄ 극도로 추한 시각 경험(흉측한 색, 혼돈) ⇄ 매우 추한 청각 경험(날카로운 소음) ⇄ 조금 추한 후각 경험(불쾌한 냄새) ⇄ 보통 미각/촉각 경험 ⇄ ¨삶¨ ⇄ 조금 아름다운 시각 경험(아기 햇살) ⇄ 아주 아름다운 청각 경험(맑은 새소리) ⇄ 극도로 아름다운 후각 경험(꽃향기) ⇆ 완벽/¨앎¨


“열심히 살았는데, 누가 천국에 가는가?”

그 대답은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지에 달려 있다. ¨아름다운¨ 장미가 시들어 사라질 때, 장미는 더 이상 소유와 판단의 대상이 아니며, ‘예쁘고 아름다웠던’이라는 수식어마저 벗어던진 채, “장미는 장미는 장미는 장미는 장미”라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처럼, 그 자체로 남을 뿐이다. 선과 악은 태초부터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앎¨이 삶이라는 무대 위로 흩어지며 생겨난 구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조차, 사실은 하나의 기준을 두 개의 이름으로 쪼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좋은 것만 남는 순간, 그것과 비례하여 정의되던 나쁨은 의미를 잃고 함께 소멸한다. 원래 앎은 하나였고, 그 하나가 우리의 선택과 경험 속에서 갈라지며 선과 악이라는 얼굴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선만도, 악만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둘을 동시에 품은 단 하나의 ¨앎¨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곧 시작이자 끝, 알파이자 오메가다. 문제는 바로 ¨아름다움¨에 있다. ¨삶¨은 관성처럼 ¨아름다움¨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에, 선은 ¨아름다움¨의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악 또한 아름다움의 형상을 입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이 존재하듯 ¨아름다운¨ 악도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매혹당하는 것은 언제나 윤리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 단 하나의 앎이 빚어낸 형식으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선과 악은 결국 그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속으로 스며드는 동일한 근원의 두 가지 반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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