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군주제 (샤 중심의 절대왕정) → 입헌군주제 1906~1925 (헌법 제정, 의회 설립) → 절대군주제 1925~1979 (서구식 근대화 추진, 권위주의 강화, 정치적 억압, 비밀경찰) → 이슬람 공화국 1979~현재 (군주제 폐지, 신정 + 공화제 혼합 체제, 최고지도자 중심의 통치)

카자르 왕조 시기(1796–1925)의 이란은 외세의 간섭과 개입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정세에 처해 있었다. 1813년의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 이란은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했고, 이어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동아르메니아와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영국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에 대한 완충국가로 삼고자 했다. 이에 따라 카자르 왕조의 제4대 군주 나세르 알 딘 샤는 1872년 영국인 줄리어스 로이터에게 70년간의 광산 자원 개발권과 철도 부설권을 넘겼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이란 국민들의 반발과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1년 만에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세르 알 딘 샤는 로이터에게 페르시아 제국은행 설립권과 60년간의 지폐 발행 독점권을 부여하였으며, 영국인 제랄드 탈보트에게는 50년간 이란 내 담배의 재배·판매·수출 전매권을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이란 사회 전반에서 대규모 저항 운동, 특히 담배 불매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는 절대왕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확산되었다. 결국 저항 세력의 중심 인물인 시아파 성직자 모함마드 하산 쉬라지는 나세르 알 딘 샤의 암살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도시 상인 계층인 바자르가 성장하고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다. 이후 시아파 성직자들이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 민족’은 외세에 반대하고 절대왕정을 비판하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마침내 1906년, 외세의 개입에 맞서고 내부 개혁을 추구하는 입헌군주제 수립 운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1909년 7월, 입헌파 세력은 수도 테헤란에 입성하여 모하마드 알리 샤를 폐위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인 술탄 아흐마드 샤를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입헌혁명 이후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내부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이란 의회는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영국의 묵인을 받은 러시아 제국이 군사 개입을 단행하면서 입헌파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입헌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발발 이후 이란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지닌 이란은 외세의 개입을 피할 수 없었다. 북부 지역은 러시아 제국, 남부는 영국이 사실상 분할 관리하게 되면서 이란의 주권은 심각하게 침해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이란 북부에서는 혁명적 자치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러시아와 체결된 불평등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국은 이 틈을 이용해 1919년 이란과 보호조약을 체결하며 이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려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이란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고, 영국은 이 유전에 대한 독점적인 채굴 및 판매권을 확보했다. 1921년 레자 칸은 테헤란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1925년 이란 의회는 당시 국왕을 폐위시키고 그를 팔라비 왕조의 초대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1935년 레자 샤는 국명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변경하고, 철도망 건설 등 국가 인프라 구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자 레자 샤 팔라비는 중립을 선언하고, 나치 독일과의 경제·외교적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영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를 전략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란을 침공했으며, 결국 레자 샤는 퇴위당하고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새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식민주의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큰 폭풍우가 되어 오늘날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라고 부르는 곳을 덮쳤다. 이 회사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1951년, 열렬한 국유화 지지자인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총리 자리에 오른다. 이란산 원유에서 나온 돈은 이란으로만 들어오게 하겠다는 공약과 결과로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에 대한 서방의 반발이 곧장 터져나왔다. 영국 은행의 이란 자산은 동결되었고, 이란으로 향하던 물품들은 보류되었고, 아바단 정유소의 해외 기술자들은 철수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이란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953년 런던과 워싱턴은 M16과 CIA를 보내 쿠데타를 사주했다. 모사데그가 법에 따라 통치하기 위해 사실상 국왕으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으려는 의도로 의회를 해산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였다. 흔히 이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영국과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란의 여러 파벌들을 도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 나라의 정부를 전복하게 했다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지리의 힘 2」”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란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고,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의 특허료는 주변 아랍산유국에 비해서 매우 저렴했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체 국민전선의 모함마드 모사데크가 석유 국유화 운동을 주장하며 이란 국민들의 지지아래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곧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의 ‘아작스 작전’으로 인해 모사데크 정권은 붕괴되고, 모함마드 레자 팔라비는 왕위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 그는 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므로써 절대 군주 체재를 구축하였고 서방, 특히 미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부터 ‘백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이란은 토지개혁, 여성 권리 신장, 교육확대, 산업화, 그리고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하지만 호메이니 같은 성직자들과 종교세력과의 갈등으로 경제 불안과 정치 위기를 겪으며 결국 1979년 이란혁명으로 팔라비 왕조는 붕괴되고 만다.
출처·인용: 「영국-이란 왕국 건설과 이란 민족주의」

contra-diction, 콘트라 작전? contradiction, 모순?

종교적 할라카הלכה 기준에 따르면, 이스라엘 내 순수 러시아계 유대인은 약 90만 명에 달한다. 한편 이란에는 약 20,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레바논처럼 소수 종교를 공식 인정하고 국회의원 1석을 유대인에게 배정하고 있다. 중동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한 이란에는 유대인과 페르시아의 2,700년 넘는 역사적 관계에 뿌리를 둔,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이란인이자 유대인이다”라고 말하는 미즈라히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아닌, 기원전 바빌론 유수 이후 정착한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박해와 보호 등이 반복되는 긴 세월을 그곳에서 견뎌온 존재들이다. 한때 팔라비 왕조의 친서방 성향 덕분에 이란은 이스라엘과 외교·정보·군사 협력을 맺었고, 이란 혁명 직전인 1977~1979년, 두 나라는 ‘프로젝트 플라워Project Flower’라는 공동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까지 추진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스라엘은 제리코 미사일Jericho Missile의 기술 (아이언맨에 나오는 이 미사일은 실제 존재했던 이스라엘의 군사무기 프로그램에서 따온 것이다) 일부를 이란에 제공하며 이란의 미사일 자체 생산을 돕는다. 그 결과 이란은 고체 연료 추진 기술 등 일부 핵심 역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이 발발하고, 미국은 점차 이란을 적대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라크를 견제하려는 전략적 이유에서 적국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한다. 이 무기에는 대전차 무기, 미사일, 항공기 부품 등이 포함되었으며, 일부는 미국의 요청과 묵인 하에 이스라엘이 전달한 미국산 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거래가 단순한 군사 거래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당시 미국법상 금지된 이란과의 무기 거래를 위반했을 뿐 아니라, 그 무기 판매 대금으로 남미 니카라과 반공 반군(콘트라)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거래를 통해 얻은 마약을 CIA가 미국에 유통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자 미국 의회와 국민은 격분했고, 전 세계는 미국 외교정책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말은 헐리우드 영화 속 대사로나 들릴 법한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난 순간이였던 것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게리 웨브Gary Webb에 따르면 CIA가 콘트라의 코카인이 미국에 밀수입되는 것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고 하며, ‘크랙’ 형태로 정제되어 미국 흑인 빈민 지역에 유통된 이 마약은 1980~90년 미국의 크랙 코카인 중독 사태와 범죄 증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크랙은 코카인을 베이킹 소다와 물로 가열해 만든 결정형태의 강력한 마약이다. 그 당시 레이건 정부는 본격적으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 마약수사국DEA과 CIA의 탱고?는 contradiction을 방관했었던 것이다.
“If you get tangled up, just tango on. 스텝이 엉키면, 그냥 추면 돼요. 「여인의 향기」”
Contra-Diction 콘트라 작전 (80년 대 중반) → 마약남용방지법 (1986년 Anti-Drug Abuse Act) → 레이건 임기 1981~89 → 빈곤 (악순환의 고리 시작) → 마약 → 범죄 → 체포 → 실업 → 가정붕괴 (악순환의 고리 끝, 다시 빈곤) → 1992년 LA Rodney King Riots 폭동
15석 비례로 국회 진입을 제한하는 한국과 달리 이스라엘은 3.25%만 넘으면 국회에 진입할 수 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Palestine에 정착하기 전 유럽계 유대인을 아슈케나지, 중동·북아프리카계 유대인을 미즈라히, 극보수 유대교 집단을 하레디(초정통파), 종교와 분리된 자유주의 집단을 세속주의자, 그리고 전체 인구의 20%는 아랍계 이스라엘과 1990년부터 대량 유입한 러시아계 이민자들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집단 각각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정당을 만들어 집입했기에 의회에서 단독 과반 확보란 무척 어려우며, 늘 여러 정당이 뭉쳐서 연립정부를 구성해야만 예산과 법안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리쿠드 (Likud) → 우파, 베냐민 네타냐후
예시 아티드 (Yesh Atid) → 중도/세속, 야이르 라피드
샤스 (Shas) → 초정통파, 미즈라히 유대인 기반
야하두트 하토라 (UTJ) → 초정통파, 아슈케나지 유대인 기반
메레츠 (Meretz) → 좌파, 인권·평화주의
하다시·발라드 → 아랍계 정당
“토라 공부가 국가를 지킨다”며 군 복무 대신 율법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는 부류는 ‘하레디’로 ‘야하두트 하토라’를 지지한다.

참고로 유대인의 안식일(금요일 해질 무렵 ~ 토요일 해질 무렵)인 샤밧Shabbat은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특별한 날로 ‘일하지 말라’는 율법에 따라 전기, 불, 운전, 돈 거래, 전화, 글쓰기, 요리 등 대부분의 활동이 금지된다. 안실일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조차 금지하는 율법 때문에 이스라엘과 뉴욕의 일부 건물에서는 자동으로 모든 층에 멈추는 ‘샤밧 엘리베이터’가 있을 정도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려는 유대인들은 음성명령으로 AI 스피커를 사용하거나 예약을 통해 자동으로 작동하는 ‘샤밧 모드’를 활용하기도 한다. 요리까지 제한되다보니 출렌트Cholent같이 쉽게 식지않는 요리나 ‘샤밧 전용 슬로우쿠커’까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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