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에 속하는 네덜란드는 사계절 내내 비가 자주 내리는 나라다. 이러한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물이 풍부하며, 운하와 저지대가 많은 지형 속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문화도 발달했다. 특히 1930년대, 빈번한 홍수를 막기 위해 네덜란드는 전 국토에 걸쳐 제방을 쌓는 대규모 치수 사업을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계 최대 규모의 방조제인 ‘아프슬라위트다이크’Afsluitdijk, 즉 ‘폐쇄된 제방’이다. 이 제방은 노르트홀란트주와 프리슬란트주 사이를 가로지르며 건설되었고, 그 결과 북해와 연결되어 있던 자위더르해Zuiderzee는 차단되어 담수호인 에이설호IJsselmeer로 바뀌었다. 이후 이 지역은 간척이 진행되어 일부 땅은 플레볼란트주에 속하게 되었다. 총 5년에 걸쳐 완공된 아프슬라위트다이크는 길이 약 32km의 방조제와 수백㎢ 규모의 간척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를 대한민국이 약 9년간 추진한 약 56㎢ 인천국제공항 간척사업과 비교해 보면, 네덜란드의 바다 정복 사업이 얼마나 방대한 규모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고종 시대부터 조선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강화도 주변에 대한 간척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에 이미 농지 확보를 위한 소규모 간척이 있었으며, 본격적인 대규모 간척 사업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학계에 따르면, 인천 전체 면적의 약 10~20%가 간척을 통해 조성된 매립지라는 주장도 있다. 한강 유역 또한 1970년대에 본격적인 간척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잠실 지역은 이 시기에 매립을 통해 형성된 인공 지형이다. 여의도 역시 원래는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렘브란트 풍의 거스 히딩크 Guus Hiddink, Sora

땅이 낮아 홍수가 빈번했던 네덜란드의 초기 정착민들은 땅 위에 둔덕terp을 쌓아 그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줄리어스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는 이 지역을 정복하려 했고, 당시 게르만족은 켈트족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406년까지 로마 제국은 라인강 남쪽의 일부인 켈트족 거주지를 지배했지만, 5세기 초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주둔군은 요새를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후 이 지역에는 게르만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프리지아족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색슨족은 동부 지역에 침입해 정착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라인강과 마스강 남부를 점령하게 된다.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며 서로마 제국의 계승을 인정하자, 그는 네덜란드 지역에 자신의 귀족과 왕자들을 파견해 법을 집행하고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습격을 자주 겪었으며, 12세기까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행정 구역에 속해 있었다. 15세기에 접어들며 상업 도시들이 형성되고 상인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464년 부르고뉴 공국의 필립 공이 현재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저지대 국가들을 통합하려 하자, 각 지역의 대표들은 브뤼셀에 모여 최초의 의회인 스타텐헤네랄Staten-Generaal을 설립하고 연정 체제를 이어갔다. 이후 1567년,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의 영주였던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빌럼 1세(오라녜 공)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칼뱅주의자들과 함께 스페인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공포 정치와 수천 명에 달하는 반군 처형을 자행했다. 빌럼 1세는 사략선단(해적단)을 조직해 스페인과의 해상 전투를 이어갔으며, 영국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내 개신교와 가톨릭의 단합을 도모하려 했다. 결국 1579년 스페인에 반기를 든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해 연합 주 체제를 수립하였고, 1581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584년 오라녜 공은 가톨릭 신자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후 그의 아들 마우리츠가 뒤를 이어 빼앗긴 영토를 수복했다.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국제적으로 자주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 후 1602년 암스테르담에는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개설되었고, 네덜란드는 자본 축적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이와 함께 보험과 은행 시스템도 빠르게 발전하며 유럽 금융의 핵심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무역국으로 도약하면서 암스테르담은 국제적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위대한 학자, 철학자, 법학자, 은행가, 공학자, 과학자들을 다수 배출하며 황금시대를 열게 되는데, 당시 유대계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계몽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며, 대표작인 「에티카」를 통해 이성과 자연에 기반한 철학 체계를 제시하였다. 안톤 판 레이우엔훅은 현미경을 이용해 세균, 적혈구, 정자 등을 세계 최초로 관찰한 인물로,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또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토성 고리를 발견하고, 진자 시계를 개발한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로서 광학과 역학 이론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후고 그로티우스의 경우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며 「전쟁과 평화의 법」을 지필하였다. 그는 “국제법은 자연법에 기반하며, 신이나 국가 없이도 존속한다”는 사상을 주장하였다. 예술 분야에서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렘브란트 판 레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잘 알려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활동하였다. 금융과 무역 분야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남아프리카 지사장 시몬 판 더 스텔이 식민지 개척과 경영에 기여하였으며, 통계물리학의 기반을 확립한 야콥 판 더르 발스는 후대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보기 

 

In Search of Lost Time, Sodom and Gomorrah 4

405 - 11 “이 증서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원고에게 준다는 말이 없다. 여기에는 ‘살 1파운드’라고만 적혀 있으니 살을 1파운드만 잘라 가라. 단, 피를 단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그대의 토지를

dissertations.tistory.com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의뢰를 받은 영국인 탐험가 헨리 허드슨은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탐색하던 중 현재의 뉴욕만과 허드슨강에 도달한다. 그는 이 지역을 네덜란드령으로 삼고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의 교역소를 맨해튼 섬에 세운다. 이 지역은 후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 동안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겨주고, 대신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을 확보한다. 이후 영국은 이 도시에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이라 명명한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은 함께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맞서 1689년~1713년 사이 여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마무리되며, 네덜란드는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적 타격을 입고 해상 상업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1751년 총독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던 빌럼 4세가 사망하자 네덜란드에서는 자유주의 개혁과 민주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특히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영향을 받아 헌법 제정을 통한 공화정 개혁 시도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빌럼 5세는 반동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프로이센 군대의 도움으로 애국당 소속의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한다.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5년 프랑스 혁명군이 네덜란드에 진입하자 애국당 세력은 다시 입성하고 바타비아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곧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영향권에 들어가 1806년에는 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세운 홀란트 왕국으로 바뀌게 된다. 나폴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를 철수하자,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지지자들이 정권을 장악한다. 이어 1814년 오라녜 공 빌럼 6세는 국왕 빌럼 1세로 즉위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선포한다. 그는 이후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까지 포함한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다. 하지만 종교·경제적 차이로 인해 남부는 반발하였고, 1839년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네덜란드는 벨기에 독립을 공식 인정하게 된다. 1848년 자유주의 물결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자 국왕 빌럼 2세는 압력에 못 이겨 입헌군주제적 요소를 강화한 헌법 개정을 수용하게 된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실질적인 의회 민주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1890년 빌럼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한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네덜란드 왕국의 정체성과 중립성을 지킨 상징적 인물로, 20세기 초 네덜란드가 무역·금융 강국으로 진입하는 시기의 군주이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조국 '네덜란드, 누넨Nuenen'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는 17세기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상업 회사였으며, 무역로 확보, 항만 건설, 식민지 지배, 원자재 확보, 무역 독점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암스테르담은 이들 활동의 중심지로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1602)가 설립된 항구이자 금융 허브로 부상하였다. 네덜란드는 칼뱅주의가 지배적이었지만, 유럽 내에서 유대인·가톨릭·개신교 등 종교 및 사상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된 사회였다. 특히 프랑스의 위그노, 스페인·포르투갈계 유대인 등 종교 난민들이 자본과 기술을 지니고 이주하며 도시의 상업과 금융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정치적으로도 네덜란드는 귀족 중심의 왕정이 아닌 상인 계층 중심의 연합공화국이었고, 이는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안정된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환경은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이 꽃필 수 있는 토양이 되었으며, 렘브란트, 스피노자,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지성의 자유를 추구했던 데카르트와 같은 인물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편 영국은 18세기 농업혁명을 통해 인구 증가와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제1차 산업혁명 1760~1840의 중심 국가로 떠올랐다. 이 시기 자본 축적, 석탄과 철 자원, 식민지 시장, 기술 혁신 등이 결합되었고, 네덜란드의 금융제도와 상업 모델은 영국 자본주의 체계의 정착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국채 제도, 중앙은행, 상업은행 등의 네덜란드식 금융 구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이는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금융 기반의 촉진제로 기능했다.

 

“17세기 전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성공과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활기는 네덜란드에 전례 없는 부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황금시대의 정점에서, 네덜란드인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그들의 자본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VOC 주식이라는 혁신적인 금융 상품이 가져다준 합리적인 투자와 이익 공유의 경험 뒤편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상이 투기와 광풍을 몰고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꽃, 튤립이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튤립은 그저 봄을 알리는 예쁜 꽃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특정 희귀 품종의 튤립은 부와 지위의 상징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황금보다 귀한 튤립 한 뿌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튤립 구근 하나의 가격이 암스테르담 운하 옆의 잘 지은 집 한 채 값고 맞먹거나, 숙련된 장인이 평생 벌어도 만지기 어려운 거액에 거래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주식시장으로 보는 세계사, 네덜란드」” 

 


하지만 근대 주식시장 초창기에도 투기 버블은 존재했다. 그 중심에는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아름다운 꽃, 튤립이 있었다. 식물학자 카롤루스 클루시우스는 ‘동방의 보석 같다’고 찬탄하며 튤립을 심고 연구했으며, 그 열정은 곧 유럽 전역으로 번져갔다. 시민들은 튤립 한 뿌리가 운하 옆 집 한 채 값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늘날의 닷컴 버블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튤립 선물 거래와 유사한 투기적 계약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특히 ‘브로큰 튤립’과 같이 희귀한 품종은 예술 작품처럼 여겨지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과시의 대상이 되었다.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된 ‘아드미랄 반 데르 에이크’ 튤립은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완벽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1637년 2월, 광풍 같던 열기는 차갑고 무거운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튤립 경매에서 더 이상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시장은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 상거래는 마비되고 신용 시스템의 붕괴가 우려되는 가운데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시장의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다.

 

네덜란드어로 환전은행을 의미하는 비셀방크Wisselbank는 17세기 초, 유럽 각 도시와 국가마다 수백 종류의 금화와 은화가 유통되어 혼돈 그 자체였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결제 수단과 안정적인 은행 화폐, 즉 예금과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상인이 주화나 귀금속을 비셀방크에 예치하면, 은행은 그 가치를 평가하여 은행 화폐 단위로 예금 계좌에 기장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비셀방크의 성공으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는 VOC 주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럽 국가들의 국채, 지방 정부 채권, 그리고 여러 회사들의 주식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정부는 전쟁 비용이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암스테르담 금융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런던 금융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암스테르담은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었고, 영란전쟁의 패배와 해상 패권 상실로 인해 서서히 매력이 감소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사실상 기능을 잃은 비셀방크는 1820년에 해산되었지만, 국제 무역과 중앙은행 설립, 그리고 현대 금융 시스템 발전의 중요한 모델로 남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던 네덜란드는 전쟁 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며 끔찍한 시련을 겪었다. (당시 안네 프랑크 역시 암스테르담에서 깊은 시련을 겪었다. 그녀의 가족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3년 독일을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안네는 네덜란드 시민권을 받지 못한 채,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의 비밀 공간에 숨어 지내며 「안네의 일기」를 써내려갔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선한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이후 은신처가 발각되면서 가족은 체포되었고, 안네는 독일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야기는,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한편 일본의 패망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산물, 즉 석유, 고무, 주석, 향신료 등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식민지로 삼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지만, 국제사회의 비난과 심각한 달러 부족에 직면한 네덜란드는 결국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유럽 복구 목적의 원조 계획이였던 마샬플랜 등으로 전후 재건과 함께 네덜란드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복지 제도를 구축하는 한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 유니레버Unilever, 필립스Philips, ING 그룹ING Group과 같은 굵직한 글로벌 기업과 금융기관들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아이콘, 하이네켄

 

현재의 네덜란드

 

1. 1인당 GDP는 약 67,000달러
2. 세계 2위 농산물 수출국으로 주요 품목은 토마토, 파프리카, 튤립, 치즈, 육류
3. 로테르담 항구는 유럽 최대 항만이자 세계 주요 물류 허브
4. 암스테르담은 유럽 내 금융 허브 중 하나
5. 친환경 에너지 강국으로 풍력, 태양광, 수소에너지 등 지속가능 에너지 전환을 선도
6.
ASML은 세계 유일의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제조사로 5nm·3nm 반도체 생산에 필수 장비를 연간 30~40대 생산(대당 2,800억 원)

A. IDM (설계·생산: Intel 미국, Samsung 한국)

B. Fabless (설계: Qualcomm 미국, NVIDIA 미국, AMD 미국, Broadcom 미국) + Foundry (생산: Samsung 한국, TSMC 대만)

 

A & B Fabless IP Vendor (ARM 영국, Synopsys 미국 , Cadence 미국) 설계 지원 Fabless 설계 완료 Foundry에서 Wafer 생산 생산에서 EUV 노광장비 필수 (ASML 네덜란드, 경쟁사 Canon & Nikon은 기술 경쟁에서 밀림) 고도 미세공정 완성 (5nm, 3nm)

 

파리지앵이 된 수퍼 을·갑의 올림픽 나들이: 피터 베닝크 전 ASML 최고경영자, 반 덴 브링크 ASML 최고기술책임자, 그리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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