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년 전만 해도 절대군주제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 순례자나 제한된 외국인 근로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입국이 금지된 폐쇄적인 나라였으나, 2016년 살만 국왕과 그의 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국가 개혁 프로젝트인 비전 2030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정치·사회·경제 전반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수도는 리야드이며 주요 도시로는 홍해 연안의 항구도시 제다, 동부 석유 산업의 중심지인 담맘과 알코바르가 있고, 전체 인구는 약 삼천칠백만 명 수준으로 이 가운데 약 사십일 점 팔 퍼센트가 외국인으로 구성되어 중동 국가 중에서도 인구 구조가 매우 다층적이다. 지리적으로는 제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바다 연안을 따라 장대한 절벽 지형이 나타나고, 이와 연결된 거친 산악 지대가 예멘 국경까지 이어져 사막 국가라는 단순한 이미지와는 다른 복합적인 자연환경을 형성한다. 이러한 현대적 모습의 배경에는 지난 수백 년간 축적된 역사적 흐름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사는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 질서와 종교 개혁 운동, 그리고 제국 정치와 석유 자본주의가 결합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나지드 지역에서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하브가 엄격한 이슬람 정화 운동을 전개하자 디리야의 족장이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종교·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최초의 사우드 국가가 탄생했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1818년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후 사우드 가문은 재건과 몰락을 반복하다가 19세기 후반에는 라시디 가문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으나, 1902년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리야드를 탈환하면서 현대 사우디 국가 건설이 본격화되었고, 그는 와하비 성직자 집단과의 결속, 부족 연합,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활용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합한 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1938년 대규모 석유가 발견되면서 국가는 순례와 유목 중심 사회에서 세계적인 석유 수출국이자 전략적 에너지 강국으로 급격히 전환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의 군사·경제 동맹은 왕정 체제를 국제 질서 속에서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냉전과 1973년 석유 파동을 거치며 사우디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했지만, 동시에 왕실 중심의 권위주의 통치와 종교적 보수성, 부의 집중이라는 구조적 문제도 심화되었으며, 21세기 들어 구구 테러 이후 국제적 압박과 내부 개혁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주도의 비전 2030은 석유 의존 탈피와 사회 규제 완화, 국가 주도 경제 재편을 추진하면서도 정치적 자유의 실질적 확대 없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닌 역사적 연속성과 긴장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상황은 여전히 세계 석유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나, 최근 몇 년간 비전 2030에 따라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 구조를 전환하려는 정책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2024~2025년 기준으로 비석유 부문이 GDP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으며, 비오일 부문이 전체 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단계에 근접하거나 일부 통계에서는 이를 상회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비오일 부문은 연 4% 내외의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경제 전반을 지탱하고 있는 반면, 석유 부문은 OPEC+의 생산 조정과 국제 유가 변동의 영향으로 성장세가 제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둔화되는 모습이 있다. 고용 측면에서는 사우디 국민 실업률이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까지 하락했으며, 여성과 청년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가 구조적 변화를 이끌고 있다. 물가는 국제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고, 외환보유액과 은행권 건전성을 중심으로 한 금융 시스템의 완충 능력도 양호하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재정 측면에서는 유가 하락 시 재정 적자가 확대되는 구조적 한계가 여전히 존재해, 비석유 성장과 세수 확대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중기적 재정 부담이 커질 가능성도 함께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사우디는 관광, 건설, 유통, 엔터테인먼트 등 분야를 중심으로 비석유 수출과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국제 경제기관과 신용평가사들은 중장기적으로 비오일 부문이 연 4~5% 수준의 성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종합하면 사우디아라비아 경제는 석유 중심의 전통적 구조에서 벗어나 다각화된 성장 모델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으며, 비전 2030에 기반한 정책 실험이 단기 성장뿐 아니라 장기적 경제 내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슬람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정치적 색채가 짙은 종교를 처음 선포하기 시작하자 그의 부족인 쿠라이시족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메카를 찾는 순례자들의 이동을 관리하고 카바 신전을 수호하는 자들이었는데, 당시 카바는 이미 다신교의 성스러운 신전이자 순례지였다. 무함마드는 무질서한 혼인 제도와 여성을 재산처럼 취급하는 관행, 원치 않는 자식을 살해하는 풍습을 강하게 비판했다. 여기에 더해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신전으로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에 위협이 되는 주장이었다. 615년, 무함마드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피신시켰다. 자신은 메카에서 포위된 채로 남아 있다가 622년에 메카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야트립이라는 도시로 피신했다. 이 이주를 시작으로 이슬람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도시의 이름을 ‘빛나는 도시’라는 뜻의 알마다나 알무나와라로 바꾸었고, 오늘날에는 간단히 메디나로 불린다. 628년에 이르러 무함마드는 충분한 지지를 얻어 메카와 휴전을 맺을 수 있었고, 마침내 630년에는 메카를 정복해 카바 신전에 있던 360개의 우상을 파괴했다. 그는 신전 주변 지역을 비무슬림의 출입이 금지된 ‘하람(성역)’으로 선포했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32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아라비아의 거의 모든 부족이 그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정통’ 칼리프들의 시초였던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전임 서기관이었던 자이드 이븐 타비트를 불러들여 민간에 전해지던 예언자의 계시들을 문서화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원형 쿠란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 성스러운 경전은 그의 계승자 우마르와 그의 딸에게 전해졌으며, 우마르의 뒤를 이은 우스만 치하에서 동일한 이븐 타비트가 표준화된 ‘공인’ 판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아부 바크르는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무력으로 아랍 부족들의 충성을 확보했고, 예언자 서거 이후 발발한 이른바 ‘배교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이슬람을 정착시켰다. 이후 30년간 칼리프들은 메디나를 거점으로 날로 번창하는 이슬람 제국을 통치했다. 배교 전쟁의 종식과 함께 이슬람 아래 단결한 아랍 부족들은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그 힘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아랍의 군사력은 양대 제국을 신속하게 제압했고, 전례 없는 속도로 현재의 스페인에서 파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제국의 권력 중심은 머지않아 아라비아를 이탈했고, 이에 따라 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656년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이 암살되면서 무슬림 세계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었다. 수니파는 스스로를 ‘순나의 백성’이라 칭하며 예언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반면 시아파는 제4대 칼리프 알리의 혈통을 통해 영적 권위가 계승된다고 주장했는데 알리는 661년 쿠파에서 피살되기까지 주로 이라크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알리의 죽음 이후, 우마이야 가문은 다마스쿠스에서 칼리프 직을 세습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했다. 이 체제는 750년 아바스 가문이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새 도읍을 세울 때까지 이어졌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가 태어난 지 겨우 200년이 지난 8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에서 아라비아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미 크게 약화한 상태였다. 「세계 문화 여행 -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사회는 본래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를 중심으로 한 충성심과 소속감, 상호 보호의 관계로 엮인 부족 사회였다. 그러나 석유의 발견 이후 국가는 급격히 현대화되며 국제적인 도시 국가로 변모했고, 그 과정에서도 아라비아반도 곳곳에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공동체와 부족 구조가 유지되어 왔다. 중심부 나지드 지역에는 알사우드 가문을 비롯해 알라시드, 알우타이바, 알무라 같은 주요 부족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서부 해안의 해자즈 지역은 요르단 왕가로 이어지는 하심가와 알샤리프 가문과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부 아시르 지역에는 알감디, 알무하리브, 알하리스 부족이 분포하고, 석유 자원이 집중된 동부 지역에는 알도사리, 알오타이비, 알자라 부족이 거주한다. 이처럼 유목 생활을 기반으로 한 베두인 전통을 지닌 부족들이 있는 한편, 알힌디나 알마그리비처럼 외부 지역에서 유입된 집단도 공존하며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는 단순한 전통적 동맹 관계를 넘어 전략적·경제적 재조정 국면에 들어가 있다. 2025년 말 현재 트럼프 대통령과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워싱턴에서 공식 회담을 재개했고, 사우디가 약속한 투자 규모를 기존 6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발표가 나왔으며, 미국은 F-35 전투기 판매와 원자력·방위 협력 약속을 포함한 전략방위협정SDA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는 자말 카슈끄지 암살 의혹에 대해 빈 살만을 옹호하는 입장을 지속하면서 양국 간 우호를 과시했지만,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둘러싼 이견도 존재한다. 한편 사우디는 에너지 분야에서도 미국 기업과 액화천연가스LNG 공급 협력, 및 아람코의 미국 내 LNG 계약 체결 움직임을 보이며 에너지 협력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셰일 혁명은 이 관계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과거 미국은 중동 석유 의존 때문에 사우디와 안보·에너지 협력 관계를 견고히 했지만, 수압파쇄 기술로 미국 내 셰일 오일·가스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 자체가 세계 최대의 에너지 생산국이 되었고, 전통적인 에너지 의존 구조가 크게 축소됐다. 이로 인해 미국의 외교·에너지 정책은 중동 석유 의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고, 사우디의 석유 전략적 가치가 예전만큼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 셰일가스와 셰일 오일의 생산 증가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가격과 공급 안정을 재편하며 사우디와 미국의 에너지·정책적 상호작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사우디 관계는 재강화되고 있지만, 전통적 석유 중심의 상호의존에서 벗어나 경제·방위·에너지 협력으로 다변화하는 경향을 보이며, 셰일 혁명으로 인한 미국 에너지 패권 확립이 이러한 관계 구조 변화의 큰 배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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