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ju

2024. 4. 24. 09:48 from 旅行

 

낭만이란, 호접몽 마냥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하늘로 부터 이어지는 수평선을 쫓으며 자연스레 자연과 흔쾌히 동화되어 방랑벽이 돋아나는 나다. 낭만이란, 현무암 돌담으로 이어지는 어느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며 춤추는 제비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투덜대는 시골버스에 하루를 떠맡기는 천진난만한 너다. 낭만이란,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들으며 바다가 보이는 호텔방에 홀로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석양을 기다리는 오후와 함께 나른해지는 나다. 낭만이란, 뜻밖에 선물을 받고도 담배 한가치를 깨물고는 긴 한숨이 마술처럼 창백한 하늘의 구름조각으로 사라질 때 쉬이 오늘을 보내려는 너다. 낭만이란,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오래된 회색건물 숲에서 분주한 생명들의 들숨과 날숨을 헤집고 영감이 절실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기원하는 나다. 낭만이란, 6개의 듀오 중 4번째의 기교에 세삼 환희에 빠져 또 한번의 앙코르를 원하는, 사슴같이 쫑긋한 두 귀가 제주의 숲을 들으며 일탈을 떠올리어 눈부신 은빛을 뽐내려는 플라테로와 같이 차분해지는 너다. 그럼으로 그리하여 두 강이 만난다면 우리의 낭만은 태평양으로 조용히 흐르리라. 

제주의 숨결이 바람이 된다면 

파도가 포말을 개워내고 갈매기의 꿈이 창공을 가르며 쇳물이 끓는 그런 어느 봄 오후, 셔? 왕 라면먹고 쉬영갑서.
곶 마냥 거친 파도로 내뻣은 갯바위에 올망졸망 둘러앉은 낚시꾼 무리 제주의 바람 가르고 - 점점이 흩어진 엽선에서 키를 잡은 율리시스 바다의 노래 부르면, 셔? 감시냐, 가시냐, 폭싹 속았수다, 혼저 라면먹고 갑서.
달의 깊은 애상에 매섭게 넘실거리는 파도의 춤시위 조르바의 열정으로 뭍머리를 달래고 - 올레길 담벼락에 수줍게 고개든 동백꽃 사랑의 인사 전하면, 셔? 옵서 - 라면갈랑갑서.
함바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주방들 장다리꽃 향에 눈 멀고 대지에서 스멀대는 유채의 앎에 귀 멀고 - 푸른 산빛 깨치고 아아 작고 좁은길 걸어 가노라.

제주의 봄

호-라이 숨비소리 3월애 달래니 봄과 베누스 지나가신다, 대야에 담겨 해감하는 홍합무리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식객의 삶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길라잡이 나신다, 플로라의 꽃길 서풍의 발자취 스쳐가신다, 그리하여 너희가 베일로 얼굴을 가린채 커다란 어머니의 뼈를 어깨 넘어로 던진다면 제주의 밤을 찾은 흥겨운 소주잔 입맞춤은 종달새 노래와 같으리.

제주의 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펼쳐지고, 탐라왕께서 계획하신 삼투압 현상 마냥 지면 위에 켜켜이 쌓인 지난날의 애증과 회한과 탄식과 또 그리도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워던 수많은 찰라들이 모진 바람과 뒤섞여 조용히 대지에 스민다. 좀더 자나 좀더 조나 손을 모우고 좀더 눕나, 아니 우리 모두 숨을 죽이자 하여 우리의 빈궁이 강도가 되지말며 우리의 곤핍이 군사에 이르지 말도록 부족한 카페인을 채우자 하여 마당 앞 유채꽃을 감상하도록 하자.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

대왕야자 사이에 우뚝선 오벨리스크는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토록 복될까. 우리는 우리의 기쁨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2개월 29일 우리는 무슨 욕을 바라며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모든 슬픈 날에 잠못드는 우리 쑥대강 - 춘향가 쑥대머리를 틀고 브람스를 들으며 우리는 영주십경을 감상하고 주상절리를 토론하여 한 줄의 일기를 휘갈긴다. 그때 그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우리는 절감하고 토로했는가. 아침이면 아침마다 나의 텀블러를 손바닦과 발바닦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차가운 얼음 사이를 휘젓고 유유히 배회하는 아메리카노의 쓴 맛이 기억난다.

Let's pretend that we are in Jeju (참회록 오마주)

 

적바림


망각은 고통을 지운다. 술은 망각을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망각을 원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의 쾌락과 희열이라는 앎을 목격하기 위에서이다. 아름다움으로의 과정은 각성가운데 열정과 노동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삶은 늘 각성인가. 삶이 고통인 이유는 사과 때문이다. 잠은 휴식인 동시 망각이다. 노동은 사과로 인해 불가피하나 우리는 초과된 열량을 감당하지 못해 불필요한 성인병에 치다른다. 왜 풍년이 존재하여 곡주가 탄생하였는가. 혹 목적은 식초인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과식 후 좀더 다양한 디저트를 바랄 뿐이다. 총·균·쇠에는 그닥 관심이 없으나 미용과 병에는 집착에 가까운 집요함을 보인다. 뉴스는 오직 향신료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각성과 망각 사이 고해와 지각이 부재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종일 팝콘을 섭취하며 무의미한 콘텐츠와 텍스트로 소중한 하루를 낭비할 것이다. 와인 한잔에 커피 한잔이 당뇨의 원인이라 보는가. 결국 슬픔은 잊혀진 행복의 빈공간을 채운다.

각성할 수 없는 자에게 정의는 무의미하나, 각성하려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정의는 합당하다. 정의는 마음이 중요하므로 프로이트의 꿈은 타당하다. 꿈은 생각의 편린들의 집합체다. 환경은 생각을 지배하고 관계는 생각을 움직인다. 꿈은 나라는 욕망과 욕구에서 상극을 유동한다. 사유는 성찰이자 의식을 교정하지만 생각은 의식의 흐름의 작용이다. 따라서 심리는 의식을 지배하고 군중심리는 개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좌우한다. 미디어와 교육의 중요성이다. 나라는 주체는 의·식·주라는 물감으로 표현되고 오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이에 중요한 사실은 사유를 통한 6과 이어지는 정신, 즉 7이다.

쉬어가기

- 제주도의 생태계는 한라산, 오름(개개의 분화구를 가진 360개의 자그마한 산), 빌레(너럭바위), 곶자왈(화산활동 중 분출된 용암류가 만든 불규칙한 암괴지대), 벵듸(돌과 잡풀이 우거진 넑은 들판), 돌담으로 분류된다.
- 한라산은 다시 해안지대, 난대 식물대, 초원 지대, 활엽수림대, 침엽수림대, 관목대, 고산식물대로 나눈다. 정상에는 백록담이 있다.
- 좁은 길로만 알려진 올레는 오래된 문을 뜻한다.

나가며

- Hap'이란 중세 언어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행복으로 삶이 복권되려면 우선 슬픔의 공간을 정리해야 한다. 강박과 비탄을 털어버리고 우연히 찾아온 행복이 보금자리를 틀 수 있도록 생각, 즉 마음을 비워야하지 않을까.
- 슬프다는 것은 고통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몸이 아플 경우 부교감신경이 자극되어 콧물과 함께 눈물이 독성 단백질과 미세먼지를 배출하는데, 시야는 더욱 밝아지고 숨죽인 나는 더욱 맑아진다. 소금물을 머금고 소금물을 쏟아내는 당신, 제주의 바다가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당신이란 은 세월이라는 시간을 흐른다. 선하고 악하고 추하고 아름다운 심리들 사이에서 모진 풍파와 고난을 겪고 뜻밖의 반려자를 만나 거센 폭풍우에 맞서는, 한 때 노인의 포경선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 나선다는 것은 회상이라기 보다는 절망 속 행복을 준비하는, 드리브의 꽃의 이중창이 귓가를 맴돌고 낮설고 아이같은 나와의 재회의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삶은 순간순간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여야 한다. 법정

어떵호연 이디꼬장 옵디가 하시어 게메마씸 어떵호단 보난 영 뒈수다 아룁니다. 무신 거옌 고람 신디 몰르쿠게 말씀하시어 게메마씸 귀 눈이 왁왁하우다 답합니다. 당신을 응원한다는 것이, 그대를 향하여 너를 위함이 지베르니 봄의 효과를 발할까하여 놀멍 놀멍 봄의 체전을 기다립니다. 짖굿은 호-오이, 하얀구름 너울 쓰시며 진주 이슬 신고 제 오시는 그대가 꽃다발 안지 못해 매마른 가슴 애태우게 꽃샘추위 보내십니다. 우리가 왕왕 즐겨찾던 그 봄은 눈꽃날리는 오름들에 숨겨져 잠잠하던 우리의 동화 자극하고 차갑게 식어있던 아련한 우리의 애틋함 제촉합니다. 섭동의 섭리를 섭렵하여 바다를 알아갈 수 있을까하여 나는 오늘도 파도와 눈맞추고 한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려합니다.



진리는 금요일Vendredi에 나온다고 골암수꽈? 혹 사이렌의 노래소리가 들리느냐. 그럼 주머니 속 꼼지락대던 감자와 남은 동전들을 나누어 중심을 잡으라, 이타카에 도착했다면 랄프와 야생 돼지를 찾아 숲을 헤치고, 칼립소의 동굴에서의 그림자 놀이 무용담을 펼치라. 그대의 구혼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써버렸다 하니, 그들에게 호랑가시나무를 준비케하고 꾀꼬리가 찾은 정원에서 헤이-호 헤이-호 목청높여 외치게 하여 시리우스가 빛나는 한 여름밤의 꿈을 준비케하라.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과연 그들이 밤을 휘몰고 있구나.

안녕

“난 다시 힘내고 있다. 그러니 넌 계속 아름다워라. 아침, 꽃에게

닮아버린 생각들 가운데 오늘은 만들어지고, 떠오르는 영감들 속에서 내일이 기약됩니다. 어둠이 내리면 아마도 당신을 앓다가 차가운 소주로 뜨거운 마음을 치유하며 하루를 마감하겠지요. 당신의 생일이나 당신이 좋아하는 사물들에 크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확인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아마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대의 마음이겠지요. 가보지 못한 길에도 울림과 떨림은 존재합니다, 그건 우리가 별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남에서 서로가 계속 빛날 수 없다는 건 애석하게도 우리는 슬픔을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의 사정(抒情)

미움에서 증오로, 첨예함이 애상으로 전의되어 황량한 사랑은 이름모를 꽃을 피워 허무하게 시듭니다. 그러므로 혹자는 환희 속 케롤을 부르고 지그린 객체는 호메로스를 낭독하여 혹독한 겨울에서 또 다시 허무한 봄이 자라납니다. 만약 화사한 매화가 피어난다면 침향이 은은히 타오르는 향연에서 즉자를 바라보는 한량과 우리의 굿펠로우는 기네스와 참이슬로 넥타르를 만들까요. 진달래와 개나리가 서울이 꿈꾸는 호접몽의 배경이 된다면 배추꽃이 한 가득한 언덕에서 그대는 숨죽이리외다.

Brunch for Soul

“내 심장을 위해선 너의 가슴 하나면 족하고, 네 자유를 위해선 나의 날개면 족하나니. 네 영혼 위에 내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내 입으로부터 하늘까지 가 닿으리다.

희망이라기 보다는 새뜻한 봄날을 기약했는지도 모릅니다. 여우비가 내리고 시린 강풍이 시간을 몰아세웠건만, 우리는 또한번의 봄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햇빛이 내리고 곧 새싹이 잠들었던 대지를 조심스레 두두리겠지요. 얼마나 기다리면 푸른 빛을 뽐내는 잎사귀가 가지로부터 자라나 향기로운 꽃을 피워낼까요. 두근거리는 마음도 잠시, 얼마동안이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뇌리를 스치다가도, 그대를 지키는 건 영롱한 일조와 알록한 빗방울과 아지랑이와 입맞추는 산들바람이라고 여기어, 석양이 들판을 물들이면 달이 부르는 파도소리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그대와 함께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새들이 너무 시끄럽지 않았으면 하지만, 숲이 자라나 푸른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는 반가운 신호일거라 믿어봅니다.

어떤 기다림

“슬프고도 감미로운 인형이여, 네가 슬퍼하지 않는다면 좋을, 황혼의 기슭에서 네게 해줄 이야기들. 백조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아득하고도 기쁜 그 무엇. 포도송이의 시간, 과일이 여물고 열매를 맺는 그런 시간.

비바람에 씻겨진 너,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려 하느냐. 그대를 휘감던 모래알과의 시름에서 너는 우주를 보았느냐. 하늘을 뒤덥는 사나운 비구름과 대지에 널려진 지독한 열기가 그대의 열정을 두두린다. 지체할 수 없는 너의 고독이 자라나 뒤틀린 대지를 호흡케 하여, 비상한 페르세포네 망각을 건너 다시 아름다움을 살아가네. 아, 그대가 토해낸 한줌의 긍지에 요동치는 바람의 찬가가 들리느냐, 오름의 경지에 울려퍼지는 봄 내음에 취해 비틀거리는 철새들의 고음과 들리브 유채꽃의 이중창이 너에게 들리느냐. 그대 어서 빨리 깨어나 제촉하는 벌새와 입맞추고, 잠잠하던 바다를 초록빛으로 수놓는 반딧불이와 함께 사랑을 꿈꾸고 한 여름밤을 맹세하라.

고도를 기다리며

“진정한 등산가가 산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성공을 계속하다보면 과욕에 빠지게 되고 자만하기 쉽다. 처음에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수록 긴장을 느추지 않고 겸허해야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월요병에 걸린 왕룬이 초췌한 몸으로 와인을 마시네. Appetite를 위해 아아와 시큼푸릇한 셀러드는 기본이요, 이에 태양의 강렬함에 주눅든 시린 포도는 우리를 심연으로 인도하네. 그러므로 달콤시큼한 단무지와 걸죽한 짜장은 어떠하리오, 아니 숙취에 짬봉의 깊은 달램이 조국을 위한 참 애국이요, 라면에서 김밥은 허기를 조롱하는 가식이요, 달달한 맥심과 달콤한 이삭토스트는 그대의 혈당을 비웃을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는 소금빵을 먹으리외다. 아니 그대는 왜 달고나와 붕어빵에 집착하시어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을 감상하시려 하는가.

지금 서울은

“천일의 평화보다 모험이 주는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가 훨씬 달콤합니다.

“당신의 꿈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첫 번째 징후는 당신이 이런 말을 내뱉기 시작할 때 나타납니다. 지금 내가 너무 바뻐서......

구불거리는 언덕들을 넘어 아지랑이를 찾아가는 시골버스가 쉴틈없이 툴툴대며 지평선과 맏닺은 오름들과 평행선을 이루는 수평선을 경계하며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철새들이 외치는 기쁜 봄의 부활에 할렐루야를 온몸으로 화답하며 우리를 해녀들의 고향집 축제로 인도하네. 환희에 압도된 심장이 너무 뛰어 주체할 수 없는 육신은 찰라를 비웃으며 쉴세없이 튀어오르고, 반가운 전보로 요동치는 바다의 날숨에 흔들리는 꽃들은 때아닌 탱고로 푸름을 펼쳐가는 제주의 들판에 들숨을 제공하여 지각한 봄의 기운을 한껏 북돋으네. 아, 인생에 실수란 분명 없다네, 그럼으로 그리하여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오늘의 풍경 at Jeju

“봄날의 꽃처럼 활짝 피어나라.

소담스러운 당신의 두 눈이 제주의 오후를 만진다. 쫑긋한 그대의 두 귀가 제주의 봄을 흩고, 너의 아담한 두 손은 길가의 이름모를 제주의 우담바라에 울며, 나의 우락부락한 두 발은 칭칭대는 제주의 하늘을 달랜다. 초췌한 우리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대할 때, 어리버리한 그가 새하얗게 변신한 제주의 푸른 봄을 맛보리. 파란만장한 하루아래 고개 숙인 노을, 넌 붉은 우리의 마음을 정령 헤아렸느냐.

Encore Jeju!

“신념이란 단순히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념이란 실천하는 무언가죠. 다른사람이 가져올 변화만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결국 변화는 오지 않을 겁니다. 기억하세요.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찾던 변화입니다. 인생을 돈 벌이에만 집중하는 건 야망에 빈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비딕을 좋아하는 일인

건조한 삶 가운데 어제는 당신이 물들인 환락의 순간들에 겨워하고, 오늘은 푸른파도의 기승에 한참이나 감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불투명한 내일에 주어진 변수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곧은 그대의 일말의 도전에 계절은 희열하고, 저물어가는 하늘은 오색의 노을을 휘날리며 마침내 마침을 기별합니다. 시덥잖은 내가 너에게, 미덥잖던 내가 당신께 한차례 미소를 구한다면 대기를 떠도는 미묘한 어색함이 아마도 애틋한 산뜻함으로 피어날까요. 강파른 마음은 각박한 새벽의 재깍거림에 한숨을 몰아쉬며 추억이 담긴 당신의 모래성을 애써 한편에 담아내려 노력해 봅니다.

너에게

어둠을 파고드는 바다의 숨고르기에 달콤한 자장가 마냥 단잠에 빠진 제주를 외로운 등대가 속속들이 배회한다. 사방을 흘트려 놓는 바람과 함께 출렁거리며 고깃배들의 지난 자취를 말끔히 씻어내는 검푸른 파도가 비누거품같은 포말 또한 쉼없이 개워낸다. 달빛의 노고라면 성산일출봉에 해돋이가 시작될 쯤 한라의 만년설이 준비된 이슬로 봄의 수줍음을 일깨울까, 봄 내음 가시기 전 여우비 스친 올레를 지나 밤새 모락모락 한아름 자라난 아침의 기상을 노래하여 준비된 새날에 유채꽃 활짝 핀 성판악을 사뿐히 거니는 봄처녀 이에 호접몽 이루리라.

Fine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사랑의 물리학

울부짖는 바다의 신음소리에 솜사탕마냥 한껏 부풀어오른 구름이 눈물에 흠뻑 젖은 검푸른 쿠바의 하늘을 새파랗게 훔쳐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가향에 살랑이던 봄바람은 어느덧 자라난 계절의 속삭임에 쿠바의 렙소디로 회답하고, 긴 밤을 지세워 갇혀있던 꿈의 조각들은 일렁이는 파도에 쓸려와 눈부신 해변에 이내 숨겨온 진심을 살포시 새겨낸다. 거기 길잃은 봄의 환영은 고개를 들라, 쏟아지는 빛줄기가 그대의 고뇌에 파도의 환희를 눈 앞에 쏟아낼 것이요, 조려왔던 그대의 차가운 심장은 돌연 파고드는 햇살에 시원한 맥주로 진정되고 곧이어 안식의 리듬을 되찾을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를 심미로 인도하는 것은 호오이의 날숨과 강렬한 햇볕을 토로하는 모히또에서 달콤한 몰디브의 축복을 기원하는 당신의 들숨일 것이라.

쿠바의 탱고

역동적인 푸르름에 잠식되어가는 쿠바의 기상은 늘어진 오후의 눈부심에 지긋히 고개를 치켜들어 곱고도 희미한 아지랑이를 조심스레 피워낸다. 철새의 마라톤이 전해온 희소식에 활짝 피어난 봄꽃은 아침이 맺어준 맑은 이슬을 마침내 떨궈내고, 비바람에 얼룩진 화단은 긴 기다림을 넘어서 생명의 소생을 마침내 기원하네. 그늘을 찾아 헤매이는 수줍은 생명의 그림자는 강렬한 태양아래 마침내 눈부신 삼바를 추었으며, 불어오는 바람의 리듬을 타고 격하게 두두려지던 드럼은 지쳐있던 너의 한낮의 자장가가 되어주네. 우리는 이제 무엇을 바라리오, 석양의 미소를 기다리던 우리는 감춰온 지난날의 속살을 차분히 그을릴 것이오, 아니 우리가 준비한 디스코는 숙대역을 헤매이던 쑥-대강을 온통 네온빛으로 물들일 것이요.

쿠바의 송가

수줍은 한낯의 햇살이 그대의 미소같은 부드러움으로 오후의 느림을 살며시 감싸주네. 어디 우리의 애달은 노래가 그대의 흥을 한껏 돋으리오, 부디 당신의 투명한 눈빛은 편애한 나의 갈망에 치명적인 당신의 속삭임으로 나의 어리숙한 비상을 몽상에 빠트릴 것이오. 오, 나는 그대의 신비에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는 고도에서 환희에 찬 토로로 하루의 마감을 거부하여 빛나는 환상이 지속되길 숙연히 바래볼 것이오. 당신이 바래오던 그곳에서 나 또한 우리의 바람으로, 우리의 환상은 지긋한 파도의 물결을 유유히 떠돌며, 돌연한 쿠바의 외마디에 짜릿한 첫키스의 벅참은 빛나는 밤 하늘의 별빛을 스르르 헤아릴 것입니다.

무제

그는 바다El Mar를 바라본다. 출렁이는 물결하며, 오색을 띤 무지개 포말하며, 처절한 풍량을 뚫고 귀가하는 포경선을 온갖 몸짓으로 여유롭게 어루만지는 파도에서 그가 안식을 찾았고, 애처롭게 부서지는 물결에서 일말의 위안을 얻었구나. 매일이 새로운 바다에서 세월의 흔적을 내미는 바위여, 경쾌한 뱃고동 소리에 맞춰 엽선을 띠우고 파도를 술렁케하는 바다의 노래를 혹시 기억하느냐. 그는 다시 아른거리는 지평선을 향했고 소녀의 출렁이는 파도가 수평선 너머로 뻗으면, 그들의 꿈같은 심해의 풍경 속 새하얀 진주가 반짝이고 향연에 동참한 모비딕Moby-Dick이 기뻐 뛰어놀 것이요, 어둠 속 희미한 불빛을 따라 돛을 내리며 귀향길에 나서는 소년아, 너는 바다를 정복하려느냐, 아니 떨리는 파도로부터 영혼의 울림을 듣지 못하였느냐.

Il Mare

우리가 핑갈의 동굴로 향하여 그림자 놀이를 재개하고자 다시금 사자의 정의를 논하려 드느냐. 차마 주상절리에 피어난 한송이 우담바라 조차 이해하지 못하거늘, 이제 쇠사슬을 끊고 진주목걸이와 들판에 피어난 유채꽃으로 사슬자국을 가리어 하바나의 넥타르를 마시며 축복의 하바나 바나나 만나를 취하자. 우리의 이상이 강렬한 태양아래 불타고, 우리의 상상이 영롱한 달빛으로 빛날 때 우리의 기상은 지성의 가상을 얻을 것이오, 우리의 관성은 자유로이 영성에 입성하리외다. 

Appeal

“A B  D  F G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 체Che를 위한 비가, 호안 브로사

구리빛으로 그을린 쿠바의 오후가 검푸른 파도에 채 씻겨나가기도 전에 Besame Mucho를 외치는 애정의 빈궁이 돌연히 강도가 되어 우리의 궁핍이 이제 군사에 이르렀으니, 자 너와 나 Che의 뜻을 되새기여 오늘밤 성대한 혁명을 이루리라. 밤의 향연을 위해 준비한 값비싼 향료가 그대의 코를 마비시켰구나, 자 우리 함께 커피콩을 볶아보자. 네가 자정에야 눕겠느냐, 제발 자자, 부디 눕자, 그리하여 수닭이 새벽을 깨우면 나는 정성껏 두 손을 모으고, 그대는 지극히 두 발을 모아서 우리는 우리의 텀블러를 간절히 비벼보자.

쿠바의 잠언

“내게 보석 상자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을 가져가라고 한다면 나는 진실한 친구를 택하고 사랑은 한쪽에 밀쳐 두겠노라. - 호세 마르티

정제된 교육에서 무딘 하루가 발단하고 고단한 오후의 챗바퀴가 빈약한 식탁을 어김없이 채워가니, 입맛을 상실한 그대가 이를 빌미삼아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사육제Carnival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권태에 빠진 도리언 그레이에게 르네상스의 appetit을 배우고 로마의 향락에서 더러운 도자기를 기꺼이 채워갈 것이냐. 삐뽀삐뽀 유쾌하고도 저질스런 Siren을 위해 Sunny Side Up의 꿈을 빌려 오기라도 하라, 그리하여 관자놀이에 수건을 두른 곤조한 양들이 밧줄에 묶여 침묵하니, 전기밥솥에서 노릇하게 부활한 후라이의 꿈은 때맞춰 그대들의 이마를 가볍게 입맞추리라.

Ceci n'est pas une pipe, trefresher from Illyria

“아, 시간이여, 이 엉킨 매듭은 네가 풀어야겠지, 내가 아니라. 내가 풀기에는 너무도 꼬여 있으니. 십이야 Twelfth Night

사랑하라, 그대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내가 다시 이리도 오래된 책을 서재에서 꺼내 부득이한 서평에 나서는 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가 접하는 갑작스런 사랑의 인사가 좀 더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20년 전 이 책을 읽고 어떤 내용에 밑줄을 그었으며, 화자가 어떤 부분을 청자에게 호소했는지는 시간이 허락하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나 또한 세월이 주는 희로애락 가운데 조금은 성장했거나 어쩌면 작금의 시대에 통용되는 평균을 밑돌거나 한참은 뒤쳐졌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독자가 나의 지난 긴 세월에 녹아든 연륜과 경험의 노하우를 확인하고 싶다면 감히 이 서평을 정독해 주시기를 바란다.  

대상의 모순이 매력으로 발전하는 조건에는 상대의 관성적인 태도를 자동으로 의식하지 말며, 의도적인 자세로 사랑에 임하여 의식적인 사고로 관계의 흐름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사랑은 분명 여러종류가 존재하나 오감에만 집착하는 사랑이 사랑의 모든 본질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인데, 상대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한없이 투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성숙할수록 더욱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생각하는 자는 포도주에 취할 자격이 없다. 사물의 본모습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데 어찌 그것이 간직한 참 아름다움을 구별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갖고 싶은 열정에 입각해 마침내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결혼은 SNS에 자신의 허니문을 자랑하고 눈부신 혼수를 뽐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주목하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음식이라면 식객이 되어 가르강튀아를 본받고, 그대가 육체적 심미를 추구한다면 거을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후 알랑드롱을 떠올리라. 만약 그대가 음악에 심취해 있다면 편식을 금하여 다양한 음악들을 접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그 가운데서 찾아보고, 그대가 미술에 견해가 넓다면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하되, 흠집이 없는 자연과 창조주가 계획하신 생명들에게로 우선 빛나는 당신의 두 눈을 펼치라. 희락이란 오감에서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육감적으로 인식하고 정신을 향해 모순에 빠진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재에서 미래로의 궤적은 그대의 서사가 될 것이며,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섭렵한 당신의 도전은 일리아스를 뛰어넘을 것이다.

모든 벌들이 처녀비행을 할 수 없드시, 모든 여자가 어머니로 거듭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노동을 해야하는 것은 일벌과 다를바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마주한 사랑의 대상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우리는 자신의 프롤로그를 시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급한 마음이 무엇보다 앞선다면 그대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빈틈없이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대가 추구하는 사랑을 위해 그날 하루를 소신껏 소비하되, 석양아래 오늘의 마침표를 유종의 미소와 함께 찍을 수 있어야 하며, 다사다난한 과거를 잊지는 말되 그대의 이상은 늘 미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가학적이면서 피학적인 우리의 심리, 그리고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공존하는 우리의 신체구조로 설명된다. 우리가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흔히 논의되는 대상과의 밀고 당기기에 익숙해야 하는데, 자신이 소유한 최선의 혼심을 순간에 쏟되, 그것이 남용되어 마니아적 집착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의무와 권리가 사랑에 스며든다면 당신은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본능에 휩싸일 것이나, 그대가 본질적이고도 중추적인 사랑을 믿어온다면 아마도 그대의 하루는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우리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사랑하므로 자신의 취향을 다스려 대상을 좋아하게 될 수 있다. 비록 대상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나, 대상의 국부적인 모든 면모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커플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가 커다란 축복이라는 사실마저 종종 잊고 지낸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흘러 결국 사랑하는 사랑이 세상을 떠나면 그제서야 혼자가 된 것을 슬퍼한다. 지금은 당연히 여기지만 나중에 옆에 없으면 가장 그리워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깊이 은미하면서 지내야한다. 오늘부터는 하루하루를 그대의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라. 사랑에 노력이 필요해도 절대 미루지 말자. 매일이 축복이도록 바로 지금부터 시작하라.

오늘이 그대의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려는가. 곧 라테의 강을 건너 깊고도 영원한 망각에 빠질 것이니 그대는 에필로그의 서론을 서술하기 전 살아왔던 순간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보고 과연 까닭없이 휘청이던 삶을 하나의 완전한 앎으로 승화시켰는지 잠시나마 회상해야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아무런 회한없이 말끔한 최후를 수긍한다면 그대는 추후의 미련없이 다음과 같이 외칠 것이다. 

 [...] möchte ich [...]Auf freiem Grund mit freiem Volke stehen. 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Es kann die Spur von meinen Erdetagen Nicht in Äonen untergehn. -Im Vorgefühl von solchem hohen Glück Genieß' ich jetzt den höchsten Augenblick.

소소한 빗방울이 새벽을 알리고 반가운 햇살이 하루를 시작하고 살랑이는 바람이 아침이 낯설은 우리를 스치면, 다시 열기를 식히는 비바람과 여우비를 뒤쫓는 하얀 나비가 자신을 닮은 이름모를 길가의 호접란과도 비슷한 한송이 잡초에 사뿐히 내려앉고, 무더운 오후의 평온같은, 갈증을 달래는 하얀 밀크티와도 닮은 가벼운 소나기가 봄의 꿈을 깨우려 피어오르려는 아지랑이 위를 모질게 흩날린다. 우리의 가볍고도 치열한 일상은 그런 기상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루를 개척하고, 계절로 얼룩진 깨어난 푸른 도시의 지난 희로애락은 열정으로 가득한 삶들과 무분별한 앎의 소용돌이 가운데 회상에 빠져 애닮은 기억의 초상을 달래며 그윽이 떠오르는 투지를 일궈간다. 그리하여 내일의 비상을 꿈꾸는 우리가 열번도 넘게 떠오른 오늘의 태양보다 강한 의지를 지속하였고, 오늘의 여신은 석양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유종의 노을로 긴 하루의 휘장을 미소와 함께 조용히 거두리라.

우연히 어쩌다 그리하여 지금 타이베이는

 

我听见雨滴落在青青草地 我听见远方下课钟声响起 可是我没有听见你的声音 认真 呼唤我姓名 爱上你的时候还不懂感情 离别了才觉得刻骨 铭心 为什么没有发现遇见了你 是生命最好的事情 也许当时忙着微笑和哭泣 忙着追逐天空中的流星 人理所当然的忘记 是谁风里雨里一直默默守护在原地 原来你是我最想留住的幸运 原来我们和爱情曾经靠得那么近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스파트필름과 호접란 등을 키우면서 느꼈던 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식물들을 두고 어딘가 멀리 떠나게 되면 매일마다 소행운을 떠올리게 됩니다. 왜일까요? 그건 제가 식물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괴로운 당신,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번 식물을 키워보시면 어떨까요? 사람은 상처를 주고, 관계는 피로를 남기죠. 일은 탈진하게 하고 세상은 복잡하고요. 그렇지만 식물만은 달랐습니다.

젊은 시인이시여, 그대는 사랑을 노래하지 마십시오. 시를 살아가고 살아가는 모든 소중한 것을 보고 느끼고, 그렇게 디가가 그것에 대해 배운 것을 노래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의 시간이 바다의 바위섬처럼 질풍노도의 세월을 견디면 노을빛에서 진정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럼 그때 그대의 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의 승화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데, 그것이 바로 두 별, 즉 두 백색왜성이 만나 비롯 빛남에는 한계에 도달하나 초신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주는 이유는 제가 당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장자로써 막 세상으로 쏟아져 홀로됨에 도전하는 청년에게 산파술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말해준 것이 있습니다. 만남으로 서로는 서로에게 더이상 빛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물만 준다고 화분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온도와 일정한 볕을 제공해 주어야하고, 가끔 분갈이나 적절한 밀도의 새로운 토양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무한한 동경에서 만남의 묘함, 의무에 따른 관심과 권리에서 오는 행복, 그리하여 애착에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찾아옵니다. 

제가 믿는 종교에서는 창조주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아름다운 꽃들과 우람하고 멋진 나무들이 즐비한데 릴케는 왜 장미정원을 키웠을까요? 아마도 로뎅의 영감을 위해서라고 거짓말할지는 모르나 아마도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빗은 창조주의 기쁨을 장미에게서 얻으려고 한 것일까요? 릴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일 수도 없는 기쁨이여. 네, 말괄랑이 삐삐와도 같은 인생을 시작한 릴케는 연인을 위해 장미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습니다.

인간은 동식물을 먹고 입고, 그것으로 행복을 얻으며 살아갑니다. 나는 모든 동식물이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존중을 받으며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하고 나아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까지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부터, 아주 조금씩이라도 더 마음을 써봐야겠습니다. 부디 존중해주세요.

식물은 우리의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뀌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고보면 식물은 정말 유익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무관심에 함부로 다루어서는 않됩니다. 과학적으로 식물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와 교감하는 특별한 존재니까요. 믿기 어렵겠으나 식물들은 친구가 옆에 있을 때 더 잘 자라난 답니다. 식물에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있는데 봄을 기다리게 하는 식물도 있습니다. 결국 실내에서는 습도와 일조량이 계절을 정의하는데 제가 키우던 이탈리아 바질도 그와 같습니다. 식용이라기 보다는 관상용이었는데, 이 친구는 저에게 봄을 기다리게 하는 존재입니다. 씨앗에서부터 키워낸 이 친구는 분갈이도 해주고 물도 주기적으로 주었으나 잎들이 생각보다 비약했습니다. 조바심에 그렇게 일년을 보내고 다시 찾은 여름에는 작고 힘이 없어 보이는 잎들을 과감히 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곧 풍성한 잎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더군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상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여러가지 사고들이 자라납니다. 하나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면 분명 일상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시들해 집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는 불필요한 생각버리기를 종종 실천해야 합니다.

누구나 장미하면 비슷한 모양의 꽃을 머리 속에 그리기 마련입니다. 당신의 식물이 얼마나 생장하길 바라시나요? 조급한 마음에 분갈이를 너무 자주하거나 물을 과하게 준다고 식물이 빨리 자라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식물에게 해가 되거나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늘 당신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식물처럼 레벨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상대가 주어진 생을 다함으로써 그에게 이라는 레벨이 붙혀지니까요. 언제까지 식물과 지내야 하는지 궁금하시나요? 제 경험에 의하면 식물을 분가하는 기쁨의 날과 식물을 입양시켜야 하는 슬픔의 날이 문득 찾아옵니다. 예쁘고 귀여운 화분을 원하신다면 다년초는 제한적입니다.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갈 벗을 원하신다면 뿌리가 자라날 공간을 확보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농사를 지으실 의향이 아니시라면당신의 정원 대부분을 수확의 공간으로 만드시지는 말라고 부탁드립니다. 제가 당신에게 권하는 식물과는 성격이 다르니까요. 그것을 이해하시는 날이 오면 왜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창조주의 깊은 섭리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추가로 화분이 생겨 식물에 물을 주는 날이 오면 하늘이 제공하는 빗방울을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럼.

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비록 그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머무를 겁니다.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언어의 정원

 

아침의 피아노


2017년 7월: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답해야 하는 것, 것도 사랑이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2017년 7월: 몸과 마음의 기능이 경지에 도달하여 완벽하게 발휘된 상태를 덕virtus, 아레테arete라 한다. 미덕(arete; 소크라테스의 덕이란 지행합일, 즉 진리와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아는 것, 앎을 의미한다. (앎에는 의무와 행동movement이 뒤따른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미덕(용기를 가지고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platonic(정신에 집중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신nous이란 나를 이루는 몸과 영혼과 이성(logos)에서 신적인 이성을 말한다. (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2020년 7월: 쓰지 못한 답신을 생각하고 있다. 2018년 봄에 책 한권을 읽고 리뷰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혼]을 썼는데 원고를 마감하자마자 메일을 한통 받았다. 네게 원고를 청탁한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 원고를 바로 읽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바로 답신하지는 못했다. 해야 할 일을 적은 목록에 답신,이라고 적어놓고 해야 할 일로 계속 미루며 해를 넘겼다. 당신을 많이 생각했다는 답신을 쓰고 싶었는데 쓰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말이 넘쳐서 쓸 수가 없었다. 왜 내게 그 원고를 청탁했는지, 그게 내게 어떤 작업인지를 짐작하고 있는지, 나는 그런 게 궁금해서 청탁을 받은 직후부터 원고를 쓰는 내내 당신을 많이 생각했다고 답신하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당신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 원고를 쓸 수 있었다고.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내가 겪은 일이 나를 먹어치우지 않도록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게 실은 내게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그 원고를 쓰며 알았다. 그런 것을 간단하게 적을 방법이 없어 늘 다음으로 미루고 있다. 3년째 답신하지 못했다. 황정은의 일기

1924년 6월: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
2008년 6월: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파리의 아침은 얼마나 맑고 싱그러웠는지. 당신은 첫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이 거머쥔 영광은, 이후로도 줄곧 당신 곁에 머물렀지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2013년 6월: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어 언젠가 잊혀지기 보다는 상대를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멋있고, 내면의 매력으로 상대의 호의를 이끌어 낼 줄 아는 지혜와 적을 친구 삼을 수 있는 호탕함은 물론, 그에 적합한 통찰력을 필수로 소지한 사람이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며, 상대의 눈높이를 맞춰줄 수 있는 아득한 너그러움과, 적의 본성이 욕망하는 것을 꿰뚤어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지력, 침묵을 금처럼 여기나 해학은 물처럼 헤프게 여기고, 슬픔을 나눌 친구와 고통을 함께 운반할 이웃을 두루 사귀며, 넘치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줄 알고, 나아가 한 발짝 물러서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자비가 있어야 하며, 상대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 줄 수 있는 인내, 가까운 상대의 취향을 눈여겨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노력과 주위의 의증을 주의 깊게 관찰해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치밀함, 또 호의의 기술과 부탁의 시기를 간파할 줄 아는 명석한 사리 분별력, 그리고 상대보다 앞서 선을 베풀 줄 아는 아량, 그러나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호의를 알맞게 조절해주는 슬기로움이 있으며, 침묵이 평판을 바꾼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가깝게 지내는 상대를 너무 믿거나 그렇다고 너무 의심하는 일은 없어야 하며, 상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최소한의 자존심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웃과의 도덕을 실천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노인을 공경하고, 상대에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며 결국에 가서는 상대방에게 공감을 이끌어 낼 줄 아는 통찰력, 베푼 만큼 풍요로워 진다는 진리를 상기하며 칭찬이 호의의 원천임을 기억하는 자여야 하고, 속단으로 상대를 쉽게 평가하지 않으나 상대의 욕망을 견제해 그의 욕구를 자극할 줄 아는 시기적절한 처세술, 상대의 장점으로 자신의 단점을 보안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하며, 호감가는 달콤한 말과 의견에 반박하는 기술들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얻은 호의로 자신의 능력을 보충할 줄 아는 지혜와 상대에게 먼저 손을 건넬 수 있는 용기, 상대의 기질을 파악하고 그의 의도와 생각을 읽어내 만약을 대비하는 준비된 자세, 우정에 진실하며 친구의 부정을 긍정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우정을 나눌 친구를 신중히 선택할 줄 알며, 사람의 외모보다는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친구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줄도 알며, 후원자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동원시키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지식을 한순간에 털어놓지 않는 지혜, 거절과 승낙에 앞서 보여지는 신중한 처사, 그래서 빛나고 성의있는 거절과 멋있고 유쾌한 승낙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지나친 예의를 벗어나 허심탄회한 자세를 들어내는 순수함, 상대에게 기다림의 미학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그에 걸맞는 격식을 갖추는 능숙함이 존재하고, 백 마디 말보다 한가지 행동으로 그를 대신하며, 상대방의 호의와 예의를 존중해 주지만 반대의견에는 쉽게 반대하지 않는 신중함, 농담과 조롱을 구분하여 사용할 줄 알며 증언부언이 없는 짧고도 명쾌한 언어구사, 그리고 적절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간파해 내는 예리한 감각이야말로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음 하나를 더하면 기쁨이 되고 음 하나를 빼면 슬픔이 되는 것, 그게 인생이야.

2020년 2월: 아우로라 모랄레스는 [망명괴 자긍심, Exile and Pride]을 추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알고자 하고, 우리가 기여한 모든 것을 더욱더 제대로 인식하고, 우리의 구체적이고 다충적인 삶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책임을 지고 발언해야 한다. 언제든 그 페이지로 돌아가려고 스티커를 붙여두었고 며칠째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기여하는 모든 것. 황정은의 일기
2022년 2월: 그대의 두 귀에 퐁롱거리는 새들의 노래소리가 울리고, 그윽한 그대의 두 눈에 나린 별들이 총총히 빛나며, 그대의 하얀빛을 띤 엷고도 붉은 두 입술은 으레 천사의 말을 속삭이고, 다소곳한 그대의 두 손은 조용히 푸른 희망을 나누며, 가벼운 그대의 두 다리가 자유롭게 세상의 중심을 찾아갈 때, 비누 향 그대의 순백한 피부는 붉은 태양아래 찬연히 빛나고, 여린 그대의 어깨에 사나래가 자라고, 어린 그대는 라온하제를 꿈꾸며, 갓 그대로부터 자라난 아련나래는 하늬와 여우별을 지나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것입니다. - for my valentine
2024 2월: 일기장을 꺼내십시오. 그대는 이 날 무엇을 하셨습니까? 일기는 영혼의 거울입니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그대여, 피네강의 경야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자, 인내심. 인내심은 가장 위대한 것이고, 그 무엇보다 우리는 인내심이 사라질 만한 혹은 사라진 듯 보이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을 피해야 함을 명심하시오. 우리는 수면을 통해 휴식을 취하는 순간조차 무엇을 얻고자, 무엇을 알고자 쉬지않고 뇌를 회전하며 갖가지 꿈을 꿉니다. 하물며 깨어있는 상태의 우리는 일탈을 꿈꾸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누군가를 만나려 하고, 그리하여 어딘가를 가고자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까요? 그대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딱히 정해진 통행로가 없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인내하십시오. 생각에 생각을, 그리고 다시 그 생각을 한동안 재운 후 또 한번 심사숙고하여 남들과 같이 기수와 선배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 다음 행동에 나서십시오. 철학자 김진영 씨의 발언대로 그대라는 존재는 바닥에 도착했고,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본질적 타자성의 존재로 나락한 자신을 스스로 껴안으십시오. 만약 스스로가 무척이나 무겁다고 느끼신다면 이토록 무거운 당신을 껴안고 진땀을 훔치며 그대를 사수하던 주변과 지인들을 떠올리어 다시 삶으로 떠오르십시오. 그대는 클레망마로의 시선을 외치시렵니까. 봄도 나의 아름다운 여름도 창문으로 도망가 버렸네.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겨울의 냉기가 몸을 파고드네. 그대여, 냉기가 스며들기 전 가을에는 부디 기도하소서. 그리하여,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자기연민에 눈물을 글썽이는 그대가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듣는다는 건 정녕 가식이고 모독이자 파렴치 행위일 것입니다. 미지를 정복하기 위한 모험이 필요하시다면 드레스가 한가득한 캐리어를 버려둔 채 배낭을 둘러매고 버스를 타십시오.

M. 먼로는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 강 위를 유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또 다른 강을 만나거나 곧이어 여러가지 존재들이 범람하는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가 오면 그대를 위한 비타 노바의 시간이 기원할 것입니다. 그때는 사이렌 소리의 괴로움에 대해서, 그리하여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를 떠올리고, 그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돛단배의 키를 잡으십시오. 고독과의 친구는 유익할 것이며, 하늘에 빛나는 별은 그대를 자연과 함께 노래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침내 항구에 도착해 잊혀진 마들렌의 맛을 만끽한다면 되찾은 기억에서 인식의 흐름으로 그대는 새로운 변화와 환희를 만끽하실 겁니다. 그때는 턱시도와 정장구두가 불편함에도 왜 그것을 선호하며, 왜 프롤레타리아가 기꺼이 부르주아지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레닌의 말대로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종려나무와 제주의 야자수만 푸릅니다. 

...... 그러나 우리가 낙담하여 문 찾기를 그만두려 할 때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문은 열린다. 푸르스트 , 그러나 두두리라. 열릴 것이요.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두리게 되고 그러면 마님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

종다리의 지저귐이 잠잠한 새벽을 흔들어 깨우니, 쓱쓱 부지런한 미화원의 경쾌한 빗질소리가 제주의 아침을 화사하게 단장한다. 봄 하늘 아래 피어나는 제주의 하루는 흩날리는 봄비에 본연의 색채 과시하고, 봄눈처럼 쌓여가는 벚꽃잎이 고독한 순례자를 기다리며 수줍은 올레길을 수놓는다. 오름이냐, 바람이다, 아니 쪽빛바다와 푸른 밤이다. 동백이드냐, 유채꽃이 화사하구나, 그럼 우리의 fasting은 고기국수와 빙떡으로 breaking 하드냐, 제주에 취한 그대 전복죽과 보말칼국수로 고개내민 식욕을 다스리어라.

탐나耽羅는 제주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도를 기다려.기조력으로 지구와 가까워진 달은 파도를 끌어 당깁니다. 썰물일 때는 서로가 너무 가까워서 일까요? 우리는 때론 가까울수록 무관심해지거나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도 합니다. 파도가 밀려나가는 동시 첫만남의 설레임과 긴장감 역시 거품들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모래를 두려워하는 것인지 백사장 쪽으로 조금만 이끌어도 주저앉으며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바다에 접근하는 것은 단념하고, 그리하여 그렇게 만남을 포기해야 할까요? 물론 모든 익숙함과 편함에는 조건과 제약이 따릅니다. 불편함이란 상대를 존중하여 지키는 예절과 법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불편함을 대하는 자세로부터 우리의 만남은 꽃을 피우거나 또는 파탄으로 말미암아 결별의 절차를 밟습니다. 두번째 데이트라고 마실차림으로 외출할 수는 없겠지요.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F. 실러

 

기억은 망각으로 이어져 있어 우리는 늘 기록을 해야 하지만, 각성하는 이성은 기억의 고뇌 때문에 뉴턴처럼 기록을 폐기하거나 노아처럼 망각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대는 망각이 필요한 부류에 속하시나요? 불면증이 없으시다면 즉흥적인 유희나 곧바로 소비될 심미적 요소를 위함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중독이 아닌 치유를 위함이라면 체력소모가 높은 유산소 운동이 주는 Runner's High나 테라피 요가도 있습니다. 저와같은 경우, 긴 세월과 함께 그같은 노력들이 모두 무력해져 버렸지만 적어도 독주가 짧은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나 당신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이유는 어떠한 불가항력에 의함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원해서 입니다.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며 오랫동안 이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그의 첫사랑과 같은 첫만남을,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눈부신 봄꽃을 피워냈다는 사실을. 그 기억이 그대의 시간과 함께 빛바래도록 일상에 전시하지 마시고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과 그날을 마감하는 늦은 오후에 습관처럼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인해 소모된 저와 많은 분들의 시간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닌 부디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봄꽃이 봄비처럼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 나는 동심이 새록새록한 책방으로 걸음을 제촉하고, 갸냘픈 봄눈이 이리저리 네둘레로 퍼지듯 전후좌우로 흩어지는 꽃향기가 브라이트 리버 역까지의 발삼 향 그윽한 전나무와 야생 자주나무, 그리고 달콤한 향을 품은 사과나무를 연상케 한다. 하얀 면사포를 씌운 듯한 벚꽃나무가 한가한 주말의 오후를 찾으면 다급함을 잊은 눈동자들이 파란 지붕들 사이에서 초록 지붕을 꿈꾸지 않을까, 행여 오렌지 공으로 속속 만세를 부르는 어린 도깨비들이 어쩌면 빨간 문을 꿈꾸는 것일까. 주홍 글씨의 굴레를 벗어나 해방 일기를 적어가는 한량들은 오늘 밤 고래의 사랑을 그릴텨, 아니 안데르센이 지겨운 올빼미들은 황혼이 저물기 전 저마다 분주히 자신의 동화를 펼치리라.

쇼핑목록: 크레파스

진리의 발견 에서 마리아 포포바는 삶에 별빛을 섞으라고 조언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황혼 후 순례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목적지로 인도해 줄 별빛입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저자 로렌 엘킨은 걷지 않는 문화가 권위적인 문화를 만든다고 합니다. 권력으로 상대를 억압하려는 이유가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당신이 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산책, 또는 산보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나치시절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굶주림 상태에서까지 산책에 나서서 어지럼증으로 쓰러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산책이 순례로 이어진다면 더없이 좋고, 그럼 그대는 자신을 인도해 줄 별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삶이 거대한 카오스로 다가온다면 가을의 코스모스를 기다리십시오. 

연인 을 쓴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어린 시절에는 베란다, 생기 잃은 나무들, 깍은 돌로 만든 난간들, 타일을 박은 테라스들, 흰 라카 칠을 한 가구들, 등나무 의자들, 부드러운 물 위를 흘러가는 불안한 소형보트들, 아시아의 습기 찬 송진 속에서 베트남의 물지게꾼과 마주치는 식민지의 희디 흰 실루엣들이 있었다. 항상 그녀는 이 빛을 기억할 것이다. 이 불공평한 세계의 빛을. 그대의 시절에는 어떤 오브제가 빛을 잃었고, 어느 시대의 유물이 불공평한 세계의 빛을 토로하나요? 제주의 돌담을 끼고 골목을 돌다보면 저는 모호하고 성글성글한 계절을 떠올리고, 그리하여 나는 인생과 화해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살아야겠다고 살며시 중얼거립니다. 그러니 바라건데 그대여 솜솜하라, 그러나 부디 늘 생생하시길. 그럼.

그러니까 너가, 또는 내가 삶을 원하는 이유가, 도대체 그 목적이 생리적 욕구와 물질적 집착 이외는 없는 것일까. 너는 설계자를 꿈꾸지 않고 나는 한낮 말초적 욕구에만 집중하는 기능공에 불과한 초라한 미물이라고? 포환같은 찰라의 하루, 만성적 애정결핍 증상을 띠는 우리는 총망지간에 대상행동이라는 인스턴트 몽환의 쾌락에 젖어 소실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자아초월 역시 이루어내질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천상에 기록되고 있는가.

책 읽어주는 남자 #1 - 나의 아기 오리에게

네 안에는 꿈과 잠재력과 가능성이 출렁이고 있어. 네겐 나눌 것, 내어줄 것이 무척 많단다. [이것이 너의 인생이야. 지금이 너의 시간이고.] 네가 여태 하고 싶어 했던 모든 걸 해 볼 기회가 온 거야.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는 힘껏 사람들을 아끼고, 넉넉히 나누렴. 빛나는 모든 순간을 만끽해. 너의 삶을 사랑으로 채우고, 일상을 경의로움으로 채워. 하려는 모든 일에 너 자신을 기꺼이 던진다면, 그때가 바로 네가 살아 숨쉬는 순간이며 마법의 불꽃이 튀는 순간이 될 거야.

은빈 씨, 타고르나 셰익스피어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동화에서 힐링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글들이 때로는 난해하다는 점, 저도 알고 있고 그런 글을 통해 제가 호소하고자 하는 부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실 겁니다. 

이룰 수 있을 때까지 꿈을 꾸는 거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꼭 필요하지.

그대는 젊다, 아니 아직은 많이 어린 그대는 아직 꿈의, 꿈에 의한, 꿈을 위한 믿음을 완성시켜야 할 시기입니다. 황혼을 지나 당신의 눈부신 날개를 펼쳐야하는 때는 반드시 그대를 찾아옵니다.

원하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발을 내딛어. 바로 거기서 또 한 걸음을 더 나아가는 거야.

디딤돌이 그대를 견디어 줄 것인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대를 조용히 뒤따라가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새로운 시도를 해 봐. 원하는 게 없다면 네가 직접 쓰는 거지.

반드시 무얼 원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가 만약 원하시는 것이 없어도 오늘이 행복하시다면 당신은 주위에 사랑을 나누어 주실 준비가 된 것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때론 우리 자신이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해낼 수 없을지 몰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해낼 수 있게 돼.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대를 위한 하루에서 그대가 행복을 꽃피우면, 그대가 발산하는 향기에 미소짓는 주위는 지친 일상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입니다.

"너 자신을 잃을 만큼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도 너를 찾게 될거야.

어느세 하루를 찾은 노을에 놀라워할 만큼 자신이 깊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셨다면 망설임없이 그 일에 꾸준히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존재의 이유가 당신을 설득하려 문득 그대의 오늘을 노크할 것입니다.

망설여질 때마다 더 사랑해 봐. 마음은 꼭 풍선 같거든. 부풀어 오를수록 더 날아오르고 싶을 거야.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애로스를 분리시키려는 열정이나 진취적이고 건설적인 주체에 깊은 끌림을 느끼십니까? 아무렴 저는 그대의 선택에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다만 당신이 바라보는 곳으로 저의 시선 또한 고정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느림과 빠름 가운데 유족히 하루를 마감하여 또 다시 주어진 삶으로 무던히 떠오를 수 있도록.

지금...... 이런...... 이번에도...... 다시...... 됐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해낼 수 있는 힘이 생겨.

아마도, 어쩌면’, 만약과 같은 단어들은 어감nuance이 좋아서 아직 미래가 불투명한 청소년들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일상에서 이와같은 단어들을 난발한다면 대인관계에서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헤리 투루먼은 염세주의가 기회를 장애로 만들지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가 장애를 기회로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고 희망을 배신당하거나 불완전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비해 견고한 확신과 긍정이 넘치는 여유로운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한 가지 일을 해내면 다른 일은 한결 쉬워지지. 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잘 해야 할 필요도 있어.

뭐든지 시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드높은 투지와 지의와 의향으로 일에 착수했으나 의미가 무산되는 경우도 있지요.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처럼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룹니다. 필시 추진력에는 노력이라는 가속력이 불가피합니다.

노력은 조금씩 이뤄나가는 여정이야.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조금씩 나아지는 길 이라는 거지. 기꺼이 부딪혀 보려는 너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대의 현재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까요? 이미 검증된 당신은 조금 더 힘을 내어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에게 널리 전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걱정은 네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내. 그리고 마음은 네가 주는 것을 먹고 자라지. 그러니 희망을 줘. 사랑을 주고. 진실을 줘.

걱정만 하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성공의 어머니인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그대의 모습에서 주위는 희망을 보고, 당신의 아름다운 도전에서 사람들은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 특히 너 자신을.

 

우린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을 더 많이 후회하곤 해. 너무 조심하지 않아도 돼. 어리석어 보이면 어때. 편한 것보다 용감한 것을 선택해.

내가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도전이란 공허하며, 그는 늘 외롭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실수들이 모여서 성공을 만드는데,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삶이 제공하는 너그러움과 여유를 버린다면 그는 한낮 소모품이나 기계부품에 불과합니다. 비록 지금은 어리석지만 그에게는 현명하려 애쓰며 몸부림치는 오늘이 있고, 간절히 바래오는 미래 또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외치세요 이렇게, Freedom!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도 네가 믿는 것을 위해 당당히 맞서. 용기와 두려움은 종종 함께 찾아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대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더는 물러설 수 없으며, 두루 주위에 귓감이 되어야하는 소명이 있다면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맞서 대응하는 소신있는 용기는 필연입니다. 과단성으로 상황에 대치하는 용맹은 높이 평가됨이 옳지만, 속수무책으로 어리석고도 무지한 언행은 되도록 피하셔야 합니다.

너 자신에게 상냥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깊이 들이마시는 숨결은 너에게 건네는 작고 다정한 위로야.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시나요? 저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에게 무척이나 혹독했습니다.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한 일상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 무너져 버립니다. 

너그러워지길. 네가 나누었던 것들이 최고의 선물로 되돌아오게 될 거야.

소유에 집착하다보면 그대의 주위는 황량하게 변해갑니다. 이웃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정으로 넘쳐야 극복할 수 있던 우리의 희로애락은 어제의 퇴물로 전락해 버립니다. 창조주가 그대에게 배풀은 물질과 역량을 환수하여 새로이 분배하기 전, 자진해 주변과 두루 나눌 수 있다면 그대는 행복과 축복을 동시에 얻을 것입니다. 단 금은보화를 나누어야 할 경우가 더러 있으나 마음과 정성을 나누는 것이 으뜸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곁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해. 따스한 행동은 따스한 감정으로 연결되지.

그대가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혹 다정한 말 한마디에 추락한 기운을 회복했드시 당신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셔야 합니다. 지인이 아닌 경우 선뜻 낯선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가 힘들었던 자신에게 선뜻 다가와준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 친절하기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겠지요? 생명의 신비를 많이 알아갈수록 그 경이로움에 언제나 그 앞에서 숙연해 집니다.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비밀의 문이야. 감사할 줄 알면 감사할 일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야.

일상이 불평으로 가득차면 만사가 순조롭지 못합니다. 무엇에나 감사하고 거기서 작은 행복을 느끼면 그대를 감도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든 일들을 뜻대로 풀어줍니다. 

모든 일이 저절로 단순해지고, 쉬워지고, 나아지진 않아. 삶은 항상 어려운 법이야. 지금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 바로 지금이어야 해.

모든 일에는 데뷔할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는 톨레랑스로 그를 응원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은 대부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앎으로의 삶은 어렵고 힘듭니다. 하지만 수많은 눈물과 고뇌로 이루어진 그 과정을 돌아보면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은 놀이터야. 노는 걸 잊지 마.

Carpe Diem!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 또는, 오늘을 잡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에 놀 때는 제발 놀아야 합니다.

기억해. 네가 아주 많은 것을 지녔다는 걸. 네겐 나누어 가질 많은 재능이 있다는 걸. 네 삶은 네가 꿈꾸던 그 모습이 될 거야. 그리고 꿈꾸던 모습보다 더, 훨씬 더 나은......

새순이 돋아나는 유채꽃 언덕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실어나른 벚꽃눈이 가볍게 내려앉아 제주의 의욕을 슬그머니 잡아당긴다. 붉은 동백처럼 절개를 지켜낸 우리의 애필로그가 만약 여기라면 길고도 짧은 동행에서 그대와 나는 애증과 애상과 애오를 유족히 주고 받았을까. 이에 그대 가시냐 감시냐,라 마시고 소랑에는 부치름이 엇나,라 말씀하시어 부족한 저 조끄뜨레 하기엔 하영멍 당신,이라 조용히 종알대게 하소서. 우리 곧 와시냐, 오라시냐,라 주고받음으로 호랑가시나무 숲에 올망졸망 모여앉아 모닥불을 밝히고 지난 추억을 불태워 한 여름밤에 풍성한 가을동화 꿈꾸게 하소서. 삼춘, 또시 오쿠다 양.

봄의 질량

책 읽어주는 남자 #2 - 작별들 순간들

나는 교회와 먼 만큼, 미래와 먼 만큼 우아함과 멀다. 왜냐하면 내게 작가들의 우아함이란 곧 그들이 책을 다루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천으로 장정한 하이네 뮐러의 하드커버 책을 욕조에 빠뜨리는 바람에 완전히 망가뜨린 적도 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그 책을 친구 부부에게 보여주었고 친구 부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 듯이 경악했다.

은빈 씨도 알다시피 제가 한국에 와서 산 대부분의 책들은 새것이거나 제가 모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새것과 다름없이 상태가 양호했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우아함을 선호하지만 제가 토론토에서 작업에 사용하던 책들을 보시면 그 당시의 처절함과 간절함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면국물자국은 그래도 괜찮다,라고 넘어가겠지만, 찟어진 페이지나 강한 집게로 페이지들을 고정시켜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 때의 깊은 상흔이 새겨진 것을 목격하시면 지금처럼 향기가 나는 우아함이 아닌 우악스러움을 떠올리실 겁니다.

책에 대한 내 태도는 우아함이 아니라 강박에 가까웠고 나는 익명의 책들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서가가 도서관이나 책방이 아닌 은자의 섬이 되기를 원했다. 텅 빈 해변, 하나의 발자국, 한 그루의 야자나무. 그 책들은 영원히 무인도에서 은둔할 자가 가방에 넣고 갈 책이어야만 했다. 은자는 그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내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먼 곳으로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그 때의 서재에서 견딜 수 없었던 한 가지가 바로 문학의 빈자리 였습니다. 작업내용이 논문에 가까워 거의 대부분이 전문서적에 가까웠고, 근근히 디지털로 향수를 달래며 접하는 의식으로는 저의 허기진 시각적 심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최근 인스타에 올린 사진들에서의 북카페 감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끔 한국에 방문하면 어김없이 문학분야에서 설래이는 마음을 다독이며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을 서성입니다. 예를들어 오랜만에 외식을 나와 뭘먹으면 좋을까,라며 내심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언하자면 그 때 당시의 허기의 편린들이 당신이 지금 우연처럼 보이는 결실로 맛보는 상아망대epithet입니다.

그것은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했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묻는 거라면,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은빈 씨. 전 플롯을 정해 놓은 후 래디컬한 문장에서 청자에 따라 구성을 떠나 대상이 수용할 수 있는 어휘에 걸맞는 옷을 입힙니다. 감성이 간절한 청자에게는 마음이 벅차오를 미사여구로 오성을 자극하고, 짧고 경쾌한 문구에 갈증을 호소하는 부류에게는 지리함의 되풀이를 해체합니다. 하나 혹자의 번복의 가능을 경계함으로 반복이라는 각인을 통해 호소하고자 하는 잎맥을 그에게 강하게 주입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이를테면 묘비 위의 이름이 지워져서 판독할 수 없는 무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묘지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그 책은 역사상 유명한 작가들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내용이나 방식에 그다지 설득되지 못한 상태로 번역을 마쳤다. 번역 행위에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은 내가 사로잡히지 못한 텍스트를 옮겨야 할 때였다. 심지어 그 텍스트에 대한 역자 후기를 써야 할 때는 회의감이 극에 달했다. 프로페셔널한 번역가라면 언어의 전이 그 자체에 집중할 줄 알고 그것을 이루어냄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 한번도 프로페셔널한 번역가였던 적이 없다. 나는 오직 번역을 시도하는 독자였을 뿐이다. 그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지만 마치 열병과 같은 모종의 욕망에 사로잡혀 나는 번역을 계속했다.

가끔 글을 쓰다보면 외국작가들의 텍스트나 원서를 인용해야할 경우가 있는데, 내용이 와닺지 않아 원서를 뒤져 제가 직접 번역을 시도한 적이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만 봐도 문장이 짧고 단조롭지만 깊은 뜻을 내포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문학작품의 경우 새롭게 번역된 책들이 많아 쉽게 비교가 가능한데, 번역가에 따라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얻기도 합니다. 만약 은빈 씨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선조들과 대화를 시도한다면 아마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언어도 생명처럼 진화를 거듭하는데, 50만개의 영어 단어들 중 일상에서 시들어버린 98 퍼센트의 단어들에서 비밀의 구슬hidden gem을 발굴해내는 일이 작가나 번역가의 역량이 아닐까요? 만약 즐거운 내일을 기다린다면 라온하제를 바라는 별밤에라든가, 연인에게 당신의 포롱거리는 사나래라는 표현, 혹 나무꾼이 숨긴 선녀의 아련나래라는 순수 한국말은 어떠신가요? 뉘앙스란 말의 소리, 색조, 감정, 음조를 뜻하는데, 언어도 진화의 과정에서 강한 유전자, 즉 뛰어난 뉘앙스의 소유가 생존경쟁에서 유리합니다. 우리의 미각은 쉽게 피로를 느끼므로, 밀의 경우 우리는 국수나 밀떡을 만들어 먹고, 피자나 빵을 구워 지친 감정을 회복합니다. 언어도 그와 마찬가지 입니다.

자두잼 이외에도 우리가 함께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 그것은 빵이다. 그런데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매일 빵집으로 가야 하지만 정원 오두막에서는 그것이 힘들고 또 우리는 그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않다. 나는 간혹 직접 빵을 굽는다. 물론 빵집에서 산 빵처럼 모양이나 맛이 좋지는 않고 항상 다른 이유로 실패하는 바람에 뭔가가 살짝 모자라는 빵이 만들어지곤 한다. 오두막에는 빵틀이 없기 때문에 나는 뚜껑이 달린 커다란 무쇠솥에 빵을 굽는다. 모양은 엉성하지만 오븐에서 꺼내 조금 식힌 뒤 아직 따뜻한 상태로 소금과 올리브기름을 뿌려 먹는 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은빈 씨, 아마도 제가 제일 많이 만들어 본 빵은 브라우니와 머핀, 그리고 마들렌입니다. 머핀과 브라우니는 적어도 천개 정도, 마들렌은 아마도 500-700판을 구웠지 싶습니다. 머핀이나 브라우니는 코코아 가루, 식용유나 버터, 계란, 밀가루, 베이킹 소다 등등이면 끝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빵이 바로 식빵과 바케트입니다. 바케트의 경우, 철틀이 없으면 광목천을 접어서 틀모양을 잡아야 하는데, 여러차례 반죽을 부풀리기 위한 팽화와 발효과정에 정말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합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퍼프 페이스트리처럼 반죽에 적당량의 공기와 수분의 양도 굉장히 중요하고, 겉을 바삭하게 만들기 위해 굽는 과정에서 분무기로 물을 분사해 주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어려운 빵이 케익입니다. 파운트 케익을 굽고 설탕가루로 크림을 만들어 겉에 입히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화이트나 다크 초코릿을 케익 위에 입히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바로 초코릿 템퍼링 부분에서의 완벽한 노하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속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누리는 많은 것들을 무심코 지나쳐 버립니다. 보스턴에 가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 있는데, 초월주의를 실천한 그는 2년간 호수 앞에 자신이 설계한 집을 짓고 야생과 자연과의 깊은 교류를 시작합니다. 거기서 그는 자급자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모르고 누리며 지나쳐 온 많은 것들을 깨닮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만의 나름 초월주의의 성과가 바로 은빈 씨가 아직 못 먹어본 피자입니다.

기다림의 고통을 책으로 쓴 자의 고통이 있다. 기다림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상태다. 안개 속에 있는 그 무엇을 기다림. 아무도 안개 속을 보지 못한다. 기다림은 영혼을 느리게 죽인다. 마침내 한 사람이 돌아온 후, 돌아온 자나 기다린 자 모두, 세계의 종말과 인간성의 붕괴를 체험하고 목격한 자들 모두 더이상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치유되었을까? 안개가 부유하듯 지상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들판을 뒤덮은 안개의 이불 위로 고통의 검은 이마가 떠가는 것이 보이다가 사라진다. 검은 자우어암파들이 달아나듯 멀어진다. 우리는 마치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한 번도 고통을 겪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고통을 잊었다. 그러다 햇빛이 비치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안개가 들판을 덮듯이 다시금 우리는 고통을 각성한다. 고통이 곧 우리의 대지였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거기서 피어난 서리이고 안개, 그리고 자우어암파들이다.

은빈 씨는 기다림이 왜 고통인지 아시나요?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을 몹시 기다린다,라고 말하면 나는 내일 있을 어떤 약속이나 계획을 머리속에 간절히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고통은 어디서 올까요? 만약 은빈 씨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갔지만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실에서 의사를 기다립니다. 여기서 이 기다림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만약 배가 무척 고픈데 애써 찾아간 식당에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프다 못해 넘치는 위액분비로 육체적인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림으로부터 결국 체념한 자는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비구름을 동반한 천둥과 벼락, 그리고 밤새 대기를 떠돌던 수분과 아침이슬이 맺은 짙은 안개는 더이상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기다리는 자도 목격한 자도 결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란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바로 일상으로 지친 오감을 신선함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만족시킬 환희와 환열은 무궁합니다. 다만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기다리는 그같은 희락에 가까워지기에는 말초적이고 관능적인 쾌락을 쫓는 일로 너무 바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아마도 축복받을 아름다운 만남이 주는 기쁨이 아닐까요?

책 읽어주는 남자 #3 - 인간의 본질

은빈 씨, 우리는 왜 음악에 열광할까요? 노래나 시를 통해 뇌에 신경분비물질이 우리에게 쾌감을 전달해주고, 감상을 통해 특정한 주파수가 공진을 일으켜 우리의 세포들이 그것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별을 노래할까요? 알빠노라고 하신다면 누칼협은 아니니 그냥 소행운運을 떠올려 보십시오. 고독에 몸부림치며 OTT에 하루를 꼬박 내맡기는 우리는 종종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읆어 보기도 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어디일까요? 과학은 생명을 우연히 반죽되어 진화된 것으로 간주하고 영장류 중 인간은 그저 말을 좀 잘하는 동물로 치부합니다. 그럼 작금의 현실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길의 표지판을 투명하게 제시해주고 있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는 담론은 소크라테스가 마신 극약과 함께 따분한 역사책 속으로 사라졌고, 심리의 편리와 자본의 시녀로 전략한 철학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한가히 나쁜사자를 관찰합니다. 플라톤의 저서 중 국가론이 있긴 하지만 그는 정약용의 문민심서처럼 올바름, 영혼론, 이데아, 사회철학, 예술철학, 인식론 등등 여러가지 테마로 우리에게 다양한 교훈을 줍니다. 어린왕자에게 군주론을 가르치는 무모함에서 벗어나 과학철학은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은빈 씨, 저는 가끔 왼손잡이 입니다. 그래서 가끔, 왼손은 거들 뿐’.

잠깐, 과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실천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도덕적 지식이 있고, 예술, 문학, 음악의 영역인 감정적 지식도 있다. 게다가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초월적 지식도 존재할 수 있다. 왜 과학만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특권을 부여받는가?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집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른 분야에는 왜 무게를 싣지 않는가?   

과연 만능주의가 간과한 것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과학이라는 연금술이 오즈의 마법사를 지금껏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학은 아직 모든 동물이 태생적으로 지닌 모성애나 우애조차 설명하지 못하며, 인간의 박애란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이나 Psy의 강남스타일과도 같은 밈Meme, 즉 비유전적 전달요소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질된다고 비하합니다. 철학 또한「군중심리」에서 똑똑하면서 무지한 생명을 오독합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계란과 닭 중 무엇이 먼저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럼 초월적인 종교는 배부르고 등 따스한 식곤증에 빠진 식충이들의 푸념섞인 의식행위로 보아야 하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더이상 종묘제례악을 연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만원권의 초상 역시 차라리 도지Doge로 바꿔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목수였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자신의 공방에서 레고를 탄생시킵니다. 아마도 창조주 또한 그와 비슷한 규칙을 태초에 제창하지 않았을까요?

레고의 십계명

1. 놀이의 기능성이 무한할 것 (무한한 단백질의 조합, 예: Foldit)
2. 남녀 아이 모두를 위한 것
3. 모든 연령의 아이들에게 맞는 것
4. 일년 내내 가지고 놀 수 있는 것 (봄, 여름, 가을, 겨울)
5. 아이들의 건강과 편안함을 고려할 것
6. 적당한 놀이 시간을 지킬 것 (아침과 저녁, 해와 달)
7. 발전, 환상, 창의력을 증대 시킬 것
8. 더 많은 놀이의 가치를 증폭시킬 것
9. 쉽게 보충할 수 있을 것 (물, 불, 공기, 흙)
10. 품질이 완전할 것 

과학은 아마도 창조주가 뚝딱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갖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 허수시간에서 4가지 (싸가지가 아닙니다) 힘이 분리되는, 시공을 초월하는 힘의 원리는 그 누구도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조합과 가능성이 이 레고의 규칙처럼 기능성이 무한하고 아이들의 발전, 환상, 창의력 증대에 그 목적을 두었다면, 사과때문에 인생이라는 고해로 매일 여러차례 break-fast하는 인류에게 어느정도 설명이 될까요? 네, 사자는 각성됐으나 어느 날 넌 나쁘다,는 이유로 망각에 빠졌다면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는 코끼리와 그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주는 그의 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이유로 이기적인 유전자는 설명될 수 없으며, 우연이 없는 간헐적인 동물의 관성적 습관과 이타적이고 협동적인 집단 역시 쉽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정언명령에 대한 칸트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보편적 준칙을 지향하도록 해주는 공리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끔 명령할 것인데, 그 독립적인 충분조건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성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인격이라는 유형에 속하며, 인격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스스로 인식하는 이성적인 행위자로, 이성에 복종하며 도덕 법칙에 구속되는 존재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이론이 인간 존재를 '지구상 다른 존재들보다 무한히 우월하게끔' 올려놓는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 역시 우리와 같은 유형에 속할 여지를 준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은빈 씨는 봄이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철새를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그럼 고향을 찾아 귀향하는 연어의 영원회귀에 대해 의문을 갖으신 적이 있을까요? 동일한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는 그같은 행위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Break-fast는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야 할까요? 어차피 일상에 찌들어 시간이 되면 허기지니 가식적이나마 위장을 채워야하고, 때가되면 생성된 부산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니 복잡한 원리를 떠나 이 모든 것은 결국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왜 배출에서의 쾌감이 생명에게 존재할까요? 저만의 답을 알려 드리기 전에 은빈 씨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해답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심리학적인 해답을 원하시면 프로이트나 융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단 지금은 농담하는 아침이 아닙니다. 노을이 꽤 예쁘네요.) 바쁘시다는 이유로 이유식처럼 떠먹여 드릴 마음은 추후에도 없습니다. 드넓은 우주를 낭비라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떠벌리는 인류에게 절실한 한가지가 있디면 바로 실아있는 모든 것을 깊이 감상하고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김춘수의 꽃처럼 하나의 존재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하나의 꽃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군가가 그런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리하여 당신은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처럼 그 또한 우리에게 무엇이 되고 싶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파 하는 것이 창조주의 섭리일 것입니다.

“안나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두 젊은 사람을 만족시키고 늙은 사람 하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한 늙은이를 실망시키고 젊은이들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나아. 말하자면 2.5대 1이지. 고로 나는 떠나겠노라. 이런 식이었다면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가 도덕적으로 진지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채식주의자」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 저는 설계된 「바다」를 마무리하는 과정과「Gott ist tot」의 최종설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회사에서 받았던 고충과 괴로움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깊은 강」후 소금물에 흠뻑 절여진 우리가 꺼내든 책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였습니다. 톨스토이 작품들 중 그의 사상들 외 「전쟁과 평화」를 제외하면 제가 손꼽는 작품은 아니였지만 유독 그가 이 작품을 좋아하더군요. 한강 작가님에게 제가 「바다」의 교정을 부탁드렸던 이유가 이제 설명되시나요? 정념이나 관능으로 인해 특정 이성에 끌리는 일은 누구도 어쩔 수 없지만 우리를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말하자면 10명의 기쁨을 위해 한명을 희생시킨다면 그걸 공동체를 위한 정의로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수차례 보부아르의 심정을 알려주고 「꿈의 해석」에서의 쾌락을 말해주었으나 그는 허무맹랑한 초콜릿 맥주에 빠지더군요. 그래서 초대받지 못한 남자는「언어의 정원」에서 목수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너무 관념적이라 느끼실지 모르지만 플라톤 역시 추상적으로 산파술을 시도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현실에서의 일마레는 은빈 씨와 찍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람처럼 누워 자는 강아지를 보시면 콜라야,라고 한번 불러보세요. 왜 귀족들이 사교모임에서 가면을 썼을까요? 쉽고 가볍게 얻은 쾌락으로부터 권태를 느껴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화와 재능에는 늘 긴장과 경계심이 요구됩니다. 곧 출국인데 제가 은빈 씨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은빈 씨에게 은빛 당나귀「플라테로와 나」를 선물하는 이유도 이제 설명되나요? 넌 할 수 있다. 모든 된다. 다음은 제가 어떻게 설계를 하는지 짧게 그 일면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 100명의 직원이 있다. 51명은 초콜릿 케익을 좋아한다. 49명은 바닐라다.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은 하나의 케익값이다. (소수는 화가 난다.)
- 서로에게 험한 말이 오가고 처절한 논쟁이 벌어진다. 
-- 더 이상 케익에는 관심이 없는 다수와 소수, 서로 필리버스터를 한다. 
--- 베이커리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회사 직원들로 인해 장사가 안된다. 화가난 베이커리 사장은 초콜릿 케익과 바닐라 케익을 메뉴에서 지워 버린다. 
-- 100명의 직원이 있다. 20명은 초콜릿, 20명은 바닐라, 20명은 딸기, 19명은 사과, 21명은 바나나 케익이 좋다.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은 하나의 케익값이다. (다수는 바나나 케익을 살 수 없다.)
- 그럴까? 만약 다수가 로비스트를 고용한다면?
-- 로비스트를 고용함에 따라 지출되는 비용은?
--- 여러 부류가 베이커리와 몰래 일종의 거래를 튼다.
----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지역신문은 ‘케익 사건’을 일면에 다룬다.
----- 검찰은 이 어이없는 일에 수색영장을 발부하고, 회사는 회계감사를 당한다. 시급하게 통과되어야 하는 긴급 안건들은 모두 묻혀버리고 의회와 여야는 ‘케익법’을 꺼내든다. 
--- 100명의 직원이 있다. 100명 모두 각기 좋아하는 자신만의 케익이 있다. 지출 할 수 있는 금액은 하나의 케익값이다. (다수도 소수도 없다.) 
- 어떤 케익을 시켜도 그 누구하나 크게 불쾌하거나 동요되지 않는다. 
-- 직원들은 퇴근 후 자기가 좋아하는 케익을 사러간다. 베이커리는 정신이 없다. 
--- 베이커리가 성행하자 상권이 살아나 실업률도 덩달아 하락한다.

당신과 나는 마침내 수줍은 비너스의 탄생에 봄의 정령을 몰아왔습니다. 매일밤 흘리는 그대의 눈물같이 촉촉한 이슬과 아직은 서늘한 저의 마음과도 같은 봄바람이 수많은 이별들을 간직한 이 도시의 애상을 두두리고, 거절당한 우리의 이기적인 정념은 눈부신 봄의 화사한 활력을 이내 시기하기에 이릅니다. 예정된 축복이 피어나는 봄의 해안에 순수한 그대의 미소가 간절하다면, 저의 가식적인 Heart of Gold는 맞이할 수 없는 우리의 봄을 추앙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제피로스의 플라토닉과 호오이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소행성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히페리온의 해-바라기


Just the label, 'Elephant House' purchased by trefresher
THIS IS US, NOT MINE. THIS IS US, OURS. THIS IS US, OUR OUTCOME. THIS IS US, WHAT WE DESERVE. THIS IS US, WHERE WE SHOULD GO.
EH1 - Canada, Home, 4205 Shipp Dr: (Completed) *On Major Construction
EH2 - Canada, Home, M City M7: (In Progress), *4th Installment
EH3 - Korea, Jeju: Samsung (Phone, Laptop: Lawyer & Deposit) *Done Picking the Spot
EH4 - Korea, Jeju: Shilla (Jeju: Lawyer & Deposit) *Done Picking the Spot
EH5 - Cuba, Havana: 7 cards (Need Sponsor, *Jinro Chamisul, I pay Deposit)
EH6 - Cuba: 7 cards (Need Sponsor, *Lotte, I pay Deposit)
EH7 & EH14 - New YTO & Soul: 7 cards & wallets, Havana Club (Lawyer & Deposit)
EH8 - Taiwan: 7 cards (Need Sponsor, *Seoul Milk, I pay Depos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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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0) 2022.07.28
Posted by trefresher :

 

“작은 자본가가 되어버린 서글픈 이웃들에게 전하는 철학자의 생각, 철학자의 마음 그는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름다움(knowledge)을 추구하는 것, 즉 사랑이다. 

사랑에는 에로스(로맨틱한 사랑), 필리아(우정), 스토르게(가족의 사랑), 루두스(장난스러운 사랑), 매니아(집착하는 사랑), 프라그마(지속적인 사랑), 필로티아(자기사랑), 그리고 아가페(조건없는 사랑)가 있다. 

필로스(philos, 사랑함)소피아(sophia, 지혜),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낭독하는 사랑의 기쁨Liebesleid을 들어보자.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던 사람이 맹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구속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데 일정 정도 부자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8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어기기 시작해요. 그리고 독립을 하려고 해요.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방을 만나고 싶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생기면 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 자유롭지 않은 상태인지를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생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1, 2년간 모은 돈을 배낭여행 하는 한두 달에 쏟아붓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가령 신자유주의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우리를 자유로부터 구속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에로스의 환상이 매니아로 전의되어 기어이 필로티아의 사랑의 슬픔Liebsfreud을 위로한다.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아름다움(앎)이 ‘「자기 앞의 생」(삶) La vie derant soi’과 다르다는 것에 너와 나의 저널리즘은 사랑과 자유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한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우리들-주체nous-sujet의 완성에 있어 나의 자유를 위한 사디즘과 너의 자유를 위한 마조히즘은 정령 불가피한 선택인가,  존재와 무」. “그것은 숨겨진 불이자 즐거운 상처에 달콤한 독약이자 감미로운 비통함이며, 유쾌한 고통이자 상처에 즐거운 격정이고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상처이며 부드러운 죽음이지요. 「셀레스티나」”

 

우리가 간과한 것이 무얼까. 응,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사랑의 결핍은 더 이상 조명되지 않아,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따뜻하게 해서 옷을 벗기는 방법이 있고, 바람을 일으켜서 벗기는 방법이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서 벗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벗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햇볕을 비추는 방법이 좋겠죠.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황혼이 저물어 미네르바가 그 날개를 펴면 우리의 로빈 굿펠로우가 무사히 신탁을 실행하겠지.  

 

 

고통스러운데 왜 사느냐고? 고통이 완화되는 그 느낌이 행복이거든요.   

부디 행복만! - 아니,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우니까. 

 

작은 일들, 우리는 그 작은 일들을 해야만 해. 우리는 그걸 알고 싶어하는 거야. 왜 그것이 그 무엇보다 어떻게 다른지, 왜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지, 왜 일상이 달라야 하는지.. 누구도 너에게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너의 자연스러움 때문이지. 우리는 너를 의식하지 않게 돼, 너는 자연스러움이거든.. 인지부조화, 까뮈는 다른 걸 본 거야, 일상적이지 않은 것, 不條理,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거지.. 활력은 비스켓과 차와 커피와, 앞서 나열된 이런 것들로 채울 수 있어. 푸르스트가 기억해 낸 것들은 잊혀진 것들이야. 그리고 우리는 활력을 통해 그것을 되찾고자 해. 여기까지가 (부조리없는) 언어(의식)의 흐름이고, 너는 곧 강이야. 바다 中   

 

사랑으로 진리에 도달했어. - 응, 정의로운 Zero State은 작별하지 않는다. 

 

 

니체의 사자는 나뻐? - 어린아이가 혁명에 성공할까. 나쁜 사자는 없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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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 한병철

2023. 11. 30. 05:59 from 書評

 

Die Krise der Narration ―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보라, 이야기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나는 왜 인스타를 시작하는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나의 서사를 정리하기 위해, 삶을 앎이라는 정보로 기록하고자하는 마지막 여정이라 하자. 또 다시 죽음을 예습하지 않기 위해, 아웃사이더인 나는 거센 인사이더 파도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개시한다. 

 

 

왜 우리는 정보에 목매고 있는가. 우선 정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정보란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이같은 정보가 지식이 되려면 사물이나 사건에서 얻은 자료가 그 개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삶에서 ‘서사적 진폭’을 얻기 위해선 그 정보가 앎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식을 원하는가. 우리는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고자, 미각으로부터 더 심미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갈망한다. 누군가가 멋진 옷을 입고 스토리셀링하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공감으로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한 텅 빈 삶이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무엇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가. 월터 벤자민Walter Benjamin은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고 토로한다. 다시말해 리포터의 설명과 견해가 부재하므로써 서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자연스럽게 산파술maieutike이 커뮤니티에서 형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출산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자.” 계약결혼을 승락한 ‘초대받지 못한 여자’도 결국 여자였다. 그렇다면 즉자와 대자 중 누가 「구토」를 느꼈는가. Le Premier Sexe ∨  「Le Deuxième Sexe」?

 

그 대상들, 그것들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사용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두며, 그것들 사이에서 산다. 사물들은 유용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나를, 나를 그들은 만진다. 그것이 참을 수 없다. 나는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구토」

 

그러므로 「타자의 추방은 가속화된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화자가 자기가 원하는 스프를 장성인 청자에게 포크로 떠먹여주는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 이같이 근접성이 발현한 현상에서 인스턴트 정보는 곧바로 진부해진다. 하지만 100억 년이 지난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신비롭고, 우리의 관조적 머무름은 그곳에 존재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장미로 불러야 하나.

 

스마트한 신자유주의는 알고리즘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소득불평등으로 자유를 더욱 고립시킨다. 칸트의 보편적 가치와 환대가 불가피한가. 

 

이제 성년식은 결혼식과 동시에 치루어진다. 


 

정보를 통해 생채기 성형이 성행하는 작금의 시대, 오해와 갈등과 화해는 사라졌다. 혐오와 증오와 미움만이 남은 사회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경험의 빈곤은 순수한 미학적 가치로 추앙되며, 변질된 파토스는 백치미의 탐미를 청자에게 호소한다.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이가 아직 존재하는가? 떠나는 이들로부터 남겨진,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는 반지와 같이 견고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격언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월터 벤자민에로스의 종말인가. 

 

“「유리 건축물Glasarchitektur」에서 셰어바르트는 세상이 온통 유리로 지어졌더라면 생겨났을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한다. 유리 구조물은 세상을 ‘마치 눈부신 장신구로 뒤덮은 것처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구에서 ‘천일야화의 정원보다 더 멋진 것을 누렸을 것’이다.” 

 

유리 천장을 동경하던 우리는 「유리알 유희」에 빠져 자신이 서있는 유리바닥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한채 투명사회」 속 좋아요’와 함께 고립된다. 바야흐로 우리가 스스로 설계한 파놉티콘은 자유 시장의 화폐로 등극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봄의 지나침pleonexia은 여름이고, 가을의 모자람endeia은 겨울이다. 너는 나의 가능성이다, 겨울에서 나는 너의 여름이고 싶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셀카는 오로지 순간만을 드러낸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짧은 인식 후 영원히 사라진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궁극적으로 운명과 역사가 담긴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실제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순간에 예속된다.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삶의 폭을 감싸고 자기의 역설로 그 폭을 채우는 ‘전체 존재의 신장성’이 낯설다. 포노 사피엔스는 이야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의 셀카는 죽음의 부재를 드러낸다. 관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죽음마저도 ‘좋아요’를 유도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합법적인 에로티즘에 잠식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화자에게 고료와 이상을 병행하라 권유한다. 비로소 학습을 마친 AI는 천개의 고원을 완성시킨다. 이에 스토리셀러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냥 하는 것뿐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전례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이론의 종말」

 

멘델이 말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아폴론이 되었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한나 이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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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2023. 11. 21. 08:00 from 書評

 

“누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떤 때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고, 또 어떤 때는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소설, 제주 4·3에 대한 소설이라고도 답했다. 그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란 말을 고르고 싶다.”

 

 

모호하고도 성글성글한 계절, 우리는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으로 내리고 있는 그런 성근 눈을 기다리고 있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가장 예리한 칼을 집어든 나는 틈과 마디 사이에서 임계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던 ‘사랑’이라는 가장 여리고 연한 부분을 베어내어 ‘우리’를 차가운 개체로 분리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은총을 기대하고 나는 의욕을 갈망할 뿐, 그렇게 어긋난 우리의 눈부신 환상. 만약 그런 우리의 낭만이 알맞게 개화開花한다면 화사한 계절의 인사는 애석한 푸르름을 시사하고, 이제야 떠오른 새하얀 봄빛은 어색한 마음과 떨리는 시선에 탄식을 토로하며 새로운 울림을 위한 부질없는 떨림을 가정할 것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한숨과 뒤섞인 날숨을 몰아 내뱉는 그런 날이면, 차분한 봄볕이 내려와 당신의 일상에 아롱거리는 작은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자라나는 애틋함을 뒤로 전해지는 봄바람에 격양된 오늘의 한칸에 은은한 환희가 잠시나마 당신곁에 깃들길 조금은 기대해 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잠시 질문해 보자. 그러니까 너가, 또는 내가 삶을 원하는 이유가, 도대체 그 목적이 생리적 욕구와 물질적 집착 이외는 없는 것일까. 너는 설계자를 꿈꾸지 않고 나는 한낮 말초적 욕구에만 집중하는 기능공에 불과한 초라한 미물이라고? 포환같은 찰라의 하루, 만성적 애정결핍 증상을 띠는 우리는 총망지간에 대상행동이라는 인스턴트 몽환의 쾌락에 젖어 소실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자아초월 역시 이루어내질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천상에 기록되고 있는가.        

 

 

하지만 인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단 부위를 꿰매기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을.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되며, 계속 피가 흐르고 분리된 너와 나는 통증을 느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나는 너가 필요하다고, 너는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환지통에 대해 의사는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말한다. 묶어놓은 신경줄이 자칫하면 다시 풀어져버리고, 신경을 찾으려면 전신마취를 하고 어쩌면 패혈증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은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이 맞아. 

 

 

4·3,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너가 오른쪽에 서면 나는 왼쪽에 자리하지만, 서로가 돌아서면 너는 언제나 왼쪽에 나는 언제나 오른쪽Right에 서있어. 죽음과 삶 사이, 어둠과 빛 사이, 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의 공백 위 텅 빈 공간에 내리는 그런 신의 섭리,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되고,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하는 거지. 하지만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벼워.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거지. 또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이는 거지. 눈에도 무게가 있다, 너와 나 사이 맺음의 무게. 새처럼 가볍지만 수없는 만남이 가져온 결속으로 커져버린 눈송이가 개체가 되어버린 너와 나의 얼굴에 얇게 덮여서 얼어버리는 거야. 바람이 되어버린 숨소리 조차 사라져 버린 그 고요함.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속솜허라.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을 지켜내라는 것일까. 디케의 칼이 우리를 가른다, 정의just-ify라는 이름 하에 가까스로

 

뭐랄까, 너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난 바닐라를 좋아하는 것일 뿐. 정의가 카카오를 고른다는 것은 막대자석을 가르는 것처럼 왠지 무의미해.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너도 알지, 전국에서는 최소한 십만 명이 죽었다고 하잖아.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이 뻗어나가 표지를 연다.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부위별로 추려진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진들을 넘겨간다. 수천 개의 정강이뼈. 수천 개의 해골. 수만 개의 늑골 더미. 수백 개의 목도장들, 혁대 버클들, 중中 자가 새겨진 교복 단추들, 길이와 굵기가 다른 은비녀들, 유리알 속에 날개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구슬치기용 구슬들의 사진이 사백여 페이지에 걸쳐 흩어져 있다.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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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 - 處暑

2023. 8. 20. 12:41 from 六十干支

 

봄이냐, 여름이냐, 가을이 문제로다. 가혹한 겨울의 운명의 화살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환난의 조수에 맞서 결연히 싸우다 쓰러질 것인가. 죽는다, 잠잔다 ― 다만 그것뿐.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며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이며, 그렇다면 죽음, 잠, 마술피리,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목신의 풀피리가 살아나는 느린 서곡에 여름의 신비로운 잇자국 사라지고, 환영幻影에 사로잡힌 백조는 무익한 유배로 포효하는 바다에서 경멸의 차가운 인상Impression을 꿈꾸는가. Hommage: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말라르메, 모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맘 속에 눈물 내린다. 가슴 속에 스며드는 이 외로움은 무엇이런가? 속삭이는 비 소리는 땅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의 노래 소리여! 역겨운 내 맘 속에 까닭 없는 눈물 흐른다. 무엇,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 없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거리에 조용히 비가 내린다」, 아르튀르 랭보”

 

쪽빛 하늘이 펼쳐진 아침결, 환승하는 계절이 혼란스레 교차하면 앳된 가을빛으로 결속되는 오후의 햇살과 황금빛을 잇는 수풀의 물결은 노을의 춤사위에 성큼 찰나의 애착으로 내닫는다. 매마른 들판에서 타작마당으로 디케이의 설된 곡식 간신히(just) 천칭에 올려지면(-ify), 잿더미 도회지 언저리에서 에이레네이의 덧없는 샬롬(Salam) 허공에 부질없이 울려오고, 화환으로 혼란스런 여름의 심연에서 에우노미아 다가오는 계절의 레시피 다급히 손질한다. 중천에 떠오른 시리우스 스틱스강의 맹세 오리온에 알려오면, 가죽부대에 담긴 설 익은 포도알들이 ‘바바번개개가라노가미나리리우우뢰콘브천천둥둥너론투뇌뇌천오바아호나나운스카운벼벼락락후후던우우락누크!’ 소리에 흥겹게 익어가고, 더블린산 감자를 주무르며 애석해하던 너와 나 ‘마크 씨에게 세 쿼크를!’ 주기위해 엘뤼시스 제전 수선스레 기약하고 퍽과 함께 이 밤을 지새우네. 

 

“가을에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 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싸늘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 하얗게 들어나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벌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큰 곰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가을의 유서」,  파블로 네루다”

 

치열했던 너의 여름 울긋불긋 들썩이는 정원에 태양의 황금빛을 한가득 투영하고, 후드득 지평선에 부딪치는 투명한 빗방울 형형한 얼룩들로 완연한 가을빛 수채화를 골목마다 장식한다. 그림자같은 여름의 숨결 뒤 한껏 자라나는 가을의 욕망이 당신의 발치에서 깨어나면, 요원한 대지의 신념 이슬의 입맞춤에 결실을 애원하고 비상하는 건들마에 그대 무르익은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차분히 떠올리네. 

 

“멀쟎아 우리들 잠기리, 차디찬 어둠 속에. 잘 가거라 너무나 짧았던 여름의 강렬한 빛이여! 벌써 들리나니, 안 마당 깔림돌 위에 음울한 소리내며 떨어지는 나무 토막들. 가슴 속에 온통 겨울이 되살아오리니, 분노, 증오, 전율, 공포, 강요된 고된 일 나의 심장은 북극 지옥에 매달린 태양처럼 붉게 얼어 붙은 한 덩어리 혈괴(血塊)에 불과하리니. 몸서리치며 귀기울리며 툭툭 떨어지는 장작 소리, 사형대 세우는 울림이 이보다 더 무딘걸까. 내 마음은 무거운 파성목(破城木)의 연타 아래 무너져내리는 성탑과도 같아. 단조롭게 부딪치는 소리에 흔들리며 듣나니. 어디선가 서둘러 관 뚜껑에 못박는 소리. 누굴 위하여? ― 어제는 여름; 어제는 가을, 이 신비의 소리는 마치 출발인 양 울리네. 「가을의 노래」, 샤를르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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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 - 立秋

2023. 8. 6. 23:59 from 六十干支


오후로 스미는 햇살이 궁핍한 하루의 공복을 채우며 혼미한 일상의 선와에 태풍의 눈같은 고요를 안기고, 오늘의 어떤 의미와 같잖은  ‘살아 있음’을 비추어 작은 소신을 연상하게 한다. 불타버린 감정의 잔허 속 남겨진 어제의 표상은 들판에 불어오는 경향에 회색빛 일색의 도시를 자아내고, 후두둑 비꽃이 내리는 검푸른 언덕으로 질곡의 세월은 기어이 오채의 생을 피어보려 거듭 몸부림친다. 희극과 비극으로 치닫은 폭풍우가 끈적한 눈물을 훔쳐 달아나고, 어제의 영광스런 망령들을 뒤로한 해맑은 청공이 다시금 네메아의 사자의 용맹함을 대적하도록 우리를 부축이는 그런 날, 나는 그대에게 그렇게 물어본다. ‘당신의 한 여름 밤의 꿈은 어떠셨습니까.’ “고된 일로 기진맥진했던 농부들이 깊은 잠에 빠진 채 꿈길이 구만리이고, 활활 타다 남은 장작은 벌겋게 남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처량하게 누워 있는 환자라면 부엉이 울음소리에 수의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내 빗자루와 함께 먼저 여기에 온 이유는 먼지 수북한 궁전 뒷마당을 쓸기 위함이니...... 온 세상을 하늘거리는 불빛으로 밝혀주리라. 졸 듯이 꺼지는 모닥불 주변에서 꼬마 요정, 큰 요정 가리지 말고 모두들 나와 덤불 속을 뚫고 나온 새처럼 경쾌하게 춤추고 노래하라. 나를 따라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발걸음도 가볍게 춤을 추어라.”

 

“오오, 찬란하다. 자연의 빛 해는 빛나고 들은 웃는다. 나뭇 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 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 넘쳐 터지는 가슴의 기쁨. 대지여, 태양이여, 행복이여, 환희여, 사랑이여, 사랑이여, 저 산과 산에 걸린 아침 구름과 같은 금빛 아름다움. 그 기막힌 은혜는 신선한 들에 꽃 위에 넘친다. 한가로운 땅에. 소녀여, 소녀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오오, 반짝이는 네 눈. 나는 너를 사랑한다. 종달새가 노래와 산들바람을 사랑하고 아침의 꽃이 공기의 향기를 사랑하듯이. 뜨거운 피 설레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게 청춘과 기쁨과 용기를 부어라. 새로운 노래와 댄스로 나를 몰고 간다. 그대여, 영원히 행복하여라. 나를 향한 사랑과 더불어. 「내가 죽으면」, 괴테”

 

나는 봄을 품었고, 너는 여름을 피웠고, 우리는 가을을 가슴에 담는다.  그대의 지향과 나의 결탁과 우리의 향유, 다시금 일상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계절의 매력에 빠진 우리의 일과는 정련된 감정의 기복으로 문득 찾아온 애상에 나의 초라한 어제를 경쾌한 너의 오늘에 고백한다, 우리의 숲은 다사로이 우리의 지난 계절을 사소한 나뭇잎에 허심탄회 젂어내고 있기에, 지친 대지는 또 시의적절 하염없이 편지를 기다리는 어느 날이면.  

 

잎이 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들듯 저기 아득한 곳으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모든 별들로 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한없는 추락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가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별을 노래하던 그대 어디 쯤에, 은하수에 담긴 별빛으로 충만하던 그대의 초롱한 눈동자에 순백의 별꽃 개화하고, 새벽에 안긴 달빛이 그대의 내일 그윽이 비추던 그런 날이 시나브로 밝아오면, 나는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언덕길에 서서 다소곳이 그대 더없이 기다려 보기로 작정합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가슴은 까닭없이 저며 오고, 바람과 한숨과 설움의 시간에서 지쳐 방황하는 나의 영혼 울분을 호소하면, 스며드는 소추立秋의 고아한 정취를 배회하는 빛바랜 추억들이 가만가만 우리의 기억들 넌지시 거슬러 당시의 희열을 차분히 보습해 옵니다. 

 

“오, 거센 서풍 ― 그대 가을의 숨결이여, 보이지 않는 네게서 죽음 잎사귀들은 마술사를 피하는 유령처럼 쫓기는구나. 누렇고, 검고, 창백하고, 또한 새빨간 질병에 고통받는 잎들을, 오 그대는 시꺼먼, 겨울의 침상으로 마구 몰아가, 날개 달린 씨앗을 싣고 가면, 그것들은 무덤 속 시체처럼 싸늘하게 누워 있다가 봄의 파란 동생이 꿈꾸는 대지 위에, 나팔을 크게 불어 향기로운 꽃봉오리를 풀 뜯는 양떼처럼 공중으로 휘몰아서 산과 들을 생기로 가득 차게 만든다. 거센 정신이여, 너는 어디서나 움직인다. 파괴자며 보존자여, 들어라, 오 들어라! .. 나로 너의 거문고가 되게 하라, 저 숲처럼 내 잎새가 숲처럼 떨어진들 어떠랴! 너의 힘찬 조화의 난동이 우리에게서 슬프지만 달콤한 가락을 얻으리라. 너 거센 정신이여, 내 정신이 되어라! 네가 내가 되어라, 강렬한 자여! 내 꺼져 가는 사상을 온 우주에 몰아라. 새 생명을 재촉하는 시든 잎사귀처럼! 그리고 이 시의 주문에 의하여 꺼지지 않는 화로의 재와 불꽃처럼 인류에게 내 말을 널리 퍼뜨려라. 내 입술을 통하여 잠깨지 않는 대지에.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 것이랴? 「서풍의 노래」, 퍼시 비시 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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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 - 大暑

2023. 7. 23. 06:59 from 六十干支

 

캐나다 산불 (Wildfire 2023), ©The Star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빛을 비추고 있구나, 하늘의 태양이여! 그대는 여전히 푸르구나, 성스러운 대지여! 아직도 강물은 소리 내며 바다를 향해서 흐르고, 그늘 짓는 나무들은 한낮에 살랑거린다. 오 기쁨에 찬 자연이여! 내가 그대의 아름다움 앞에 눈을 들어올릴 때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천국의 온갖 기쁨이 내가 그대 앞에서 흘리는 눈물 가운데, 연인이 연인 앞에서 흘리는 눈물 가운데 모두 들어 있다. 대기의 감미로운 물결이 내 가슴을 에워싸고 노닐 때면 나의 온 존재는 침묵하고 귀 기울인다. 먼 푸르름 안으로 마음을 빼앗긴 채 나는 자주 천공을 올려다보고 또 성스러운 바다를 들여다본다. 그러면 나는 친밀한 정령이 나를 향해 팔을 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독의 고통이 신성의 생명 안으로 녹아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신성의 삶이며 인간의 천국이다. 살아 있는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것, 행복한 자기 망각 가운데서 자연의 총체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은 사유와 환희의 정점이자 성스러운 산봉우리이며 영원한 휴식의 장소이다... 그곳에는 한낮이 그 무더위를, 그리고 천둥이 그 소리를 잃고, 끓어오르는 바다도 밀밭의 물결과 같아진다. 자연은 펼쳤던 팔을 거두고 나는 마치 이방인처럼 자연 앞에 서서 그 자연을 의아해하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 곁에서 진정 이성적인 인간이 되었고,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철저히 나를 구분해 내는 것을 배웠으나, 이제 나는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고립되고, 내가 성장하고 꽃피웠던 자연의 정원으로부터 내동댕이쳐져 한낮의 태양 볕에 시들고 있는 것이다. 「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이집트 크기의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 (Great Pacific Garbage Patch), Size of Egypt

 

 

“나는 얼마나 산들과 해변을 정처 없이 떠돌았던가! 아 나는 얼마나 자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티나의 산정에 올라가 앉아서 매들과 학들을 바라다보고, 수평선으로 가라앉아 사라져버리는 그 용감하고도 즐거운 배들을 바라다보았던가! 저기 저 아래로!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곳으로 그대도 언젠가는 방랑해 가리라... 내가 자주 꽃들 사이에 누워서 부드러운 봄볕을 쬐며 따뜻한 대지를 껴안고 있는 해맑은 창공을 올려다보았을 때, 생기를 돋워 주는 비가 내린 후 산의 품 안에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었을 때, 하늘의 건드림으로 나무가지들이 떨고 이슬방울 짓는 숲 위로 황금빛 구름이 떠돌아 갈 때, 금성이 나이 든 젊은이들, 하늘의 다른 영웅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정신으로 가득 차 떠오를 때, 그리하여 내가 그들 사이의 생명이 영원하고도 힘들지 않는 질서 가운데 천공을 지나 움직여 가는 것을 보고, 세계의 평온이 나를 에워싸고 기쁨을 주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 채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을 때, 나는 그대 하늘에 계시는 선한 아버지시여, 저를 사랑하시는가,라고 나지막하게 묻고는 그의 대답을 내 가슴으로부터 그처럼 확실하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이다. 「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뉴욕의 오후 (New York 2023), ©CNN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Dusk Storm

 

 

우리가 지난 시대의 망령들처럼 긍지와 환희, 분노와 비통함을 안은 채 아토스 산을 거쳐 위쪽으로 올라가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헬레스폰트 해협으로 들어서고, 이어서 로토스 섬의 해안과 테나룸의 협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고요한 섬을 모두 거쳐 갔을 때, 동경이 해안을 넘어 옛 펠로폰네소스의 황폐한 심장부 안으로 우리를 몰아가 에우로타스 강의 고독한 강변과 아! 엘리스와 네메아와 올림피아의 생기 잃어버린 계곡으로 데리고 갔을 때, 우리는 거기 잊혀진 주피터의 사당 기둥에 기대어 서서 들장미와 상록수에 둘러싸여 알페이오스 강의 거친 바닥을 내려다보았으며, 봄의 생명과 영원한 젊은 태양이 우리에게도 인간 역시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져 버렸으며 인간의 찬란한 천성이 이제는 사당의 파편처럼 겨우 남아있거나 죽은 자의 영상처럼 기억 속에 겨우 남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을 때, 그때 나는 그와 나 자신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Dry River, ©BBC

 

“물과 피를 받고 태어나 대도시의 원시림 속에서 길들여졌다네. 정글은 문명의 칼에 동강나서 또다른 정글과 경계를 이루었다네. 빛의 꼭대기에서 날아다니다가 독약 섞인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마지막 어머니여, 공기여, 우리는 공기를 살해한다네. 「마지막 어머니」, 로제 아우스랜더”

 

 

세계 4대 호수 아랄해의 비극 (Aral Sea Tragedy)

 

 

“한밤중에 뜨거운 가슴이 나를 뜰로 끌어내려 이슬 맺은 나무들 아래로 몰고 갔을 때, 샘물의 자장가와 다정한 대기와 달빛이 나의 감각을 달래어 주었을 때, 그처럼 자유롭고도 평화스럽게 나의 머리 위에 은빛 구름이 떠가고 먼 곳으로부터는 바다 물결의 메아리치는 소리가 나에게 울려 왔을 때, 가슴속 사랑의 거대한 환상은 얼마나 다정하게 나의 마음과 함께 어울려 유희했던가! 「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Before and After Corona - Italy, ©Skynews
Before and After Corona - India, ©The Guardian
Before and After Corona - Hong Kong
Before and After Corona - Venice

 

 

“왼쪽에서는 거인처럼 물줄기가 내 머리 위에 있는 대리석 바위로부터 숲 속으로 떨어져 내리며 환호했다. 그 대리석 바위 위에는 독수리가 새끼들과 함께 노닐고 있었으며, 그 눈 덮인 산정은 푸르른 대기 가운데로 빛을 뿜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시피러스 산맥의 숲 너머로 먹구름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구름을 몰고 오는 폭풍우를 느끼지는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내 머리채 사이로 미풍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미래의 목소리를 듣듯이 천둥소리를 들었고, 예감된 신성의 먼 빛을 보듯이 그 불길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계속 걸었다. 거기에는 진정 낙원과 같은 대지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카이스트로스 강이 그 대지를 꿰뚫고 흘렀는데, 자기를 에워싼 풍요로움과 사랑스러움 가운데에서 아무리 머물러도 충분하지 않기하도 하다는 듯이 매혹적인 우회로를 거쳐 흘렀다. 마치 미풍처럼 나의 영혼은 이 아래 산자락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낯설지만 평화로운 마을로부터 메소기스 산맥의 연속된 산이 가물거리는 저 안쪽까지 이 아름다움에서 저 아름다움으로 행복하게 헤맸다. 「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의 배경이 된 그리스 (Greece in July 2023, which served as the backdrop for Hyperion), ©AP Photo/Petros Giannakouris

 

산호 백화현상 (Coral Bleaching), ©Brett Monroe Garner / Greenpeace via Reuters file

 

 

헤세가 사랑한 알프스 (Bloody Alps by microalgae), ©BBC

 

 

과도한 지하수 채취로 인한 싱크홀 발생 (Sinkhole was caused by excessive groundwater withdrawal), ©AFP, "만약 우리가 오늘과 같이 지하수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2040년 쯤에는 사용할 물이 고갈될 것입니다. (There will be no water by 2040 if we keep doing what we're doing today.) Professor Benjamin Sovacool, Aarhus University, Denmark"

 

호주 캔버라, 2주 간격으로 찍은 사진 (Australia Canberra two weeks apart)

 

멕시코의 여름 (Mexico Summer Hail Storm), ©Extra.ie

 

이탈리아 베네토에서 발생한 때 아닌 여름 우박 (Unseasonal summer hail in Italy Veneto July 2023), ©LetItShine69

 

야훼의 10가지 재앙 中 (Fish raining from the sky, much like the ten plagues of Yahweh in Honduras)

 

죽은 물고기가 흐르는 브라질 아티바이아의 호수 (A lake flowing with dead fish in Brazil Atibaia), ©Ana Perugini

 

노르웨이 트롬소 청어때의 죽음 (Mass mortality of herring in Norway Tromso), ©Jan Peter Jorgensen

 

뉴질랜드에 위치한 477 마리의 고래 무덤 (Graveyard of 477 whales in New Zealand), ©Tamzin Henderson AP

 

인도에서 발생한 메뚜기 재앙의 역습 (Counterattack of the locust plague in India), ©PTI

 

케냐에서 촬영된 사막 메뚜기 떼 (Desert locust swarm filmed in Kenya), ©FAO

 

쇼핑을 하면서도 플로리다 러브-벅스의 사랑스러운 매력에 매료되시나요? (Do you find yourself captivated by the allure of the Florida Love-Bug while you indulge in your shopping endeavors?)

 

 

“네가 태어난 하늘을 기억하라. 밤하늘의 별들, 그 각각의 이야기를 알라. 달을 기억하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라. 새벽의 먼동을 기억하라. 그때가 하루 중 가장 신성한 시간임을 알라. 해가 서녘으로 지는 순간을 기억하라. 해가 밤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그 순간을 기억하라. 대지를 기억하라. 그 피부가 바로 너임을 기억하라. 붉은 흙, 검은 흙, 노란 흙, 흰 흙, 갈색의 흙 우리는 대지이며 흙이다. 식물들, 나무들, 그리고 동물들을 기억하라. 그들 또한 그들의 가족과 부족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라. 그들은 살아 있는 시이다. 바람을 기억하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그녀는 이 우주의 기원을 알고 있다. 우주의 네 방향과 중심에서 부르는 춤의 노래를 너는 모든 사람들이며 모든 사람들이 너라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이 우주이며 이 우주가 너라는 것을 기억하라.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너라는 것을 기억하라. 언어가 그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언어는 춤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조이 하르요”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린 빙하가 아닌, 절벽을 오르던 멸종 위기에 처한 바다코끼리들이 동료들에게서 밀려나 낭떨어지로 떨어지게 됩니다. (Instead of melting glaciers, endangered sea elephants plunge and tumble off cliffs to their deaths)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 생명에게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까? (What more words are needed? Can there be comfort we can offer to this life?)

 

“생명의 하느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 주소서. 그들이 숲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겠나이다. 그들이 도시에서 겪는 푸대접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보호자, 섭리자의 역할을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 주게 하소서. 우리가 들짐승을 잔인하게 대하지 않도록 금지하소서. 존경심에서 나오는 부드러움을 우리에게 주소서. 나보다 약한 피조물을 경애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모든 생명의 물줄기는 당신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 생명이란 지금도 우리에게는 신비일 뿐, 우리가 짐승과 새와 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 피곤함과 추위, 집을 잃고 헤매는 고통에 공감하도록 도우소서. 우리의 기도 속에 그들의 어려움도 끼워 넣도록 도우소서. 「자연을 위한 기도」, 조지 마테슨”

 

 

이 비참한 재앙이 어떻게 발생되었을까요? (What brought forth this tragic calamity amidst the fires of California?)

 

여기는 세계의 정상입니다 (This is the pinnacle of the world), ©Impactscool Magazine

 

그 많던 오물은 누가 다 먹었을까? (Who takes care of the garbage on Everest Mountain?) ©Martin Edstrom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떠러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끝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처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떠러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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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 정원오

2023. 7. 13. 06:59 from 書評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 활동을 사회 보장이라고 하며,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 국민의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국가를 복지 국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태가 국민의 복지를 보장하는 상태이며, 이를 위해 국가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가? 복지 국가이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활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가, 국민의 최저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정도의 국가 개입이 필요한가. 적절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정도의 국가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불공정한 소득 격차가 없는 평등한 생활 수준까지 국가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복지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국민의 생활에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상승폭이 1위인 대한민국의 경우, 2021년 출생한 아이가 경제활동을 시작할 27세인 2047년에 그가 부담해야할 국가채무는 2억 1046만원이다. 낮은 출산률은 사대주의(아이비리그 엘리트 세습), 허장성세(Barbie), 시험위주의 경쟁(SAT), 그리고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경제적 불안(연준) 때문이다. 위와 아래의 그래프들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복지비율 상승과 출산률은 대략 아무런 연관이 없다. 노력해서 얻지 않는 재물은 가치있게 쓰여지지 않는다. 스노비즘snobbism과 탈세자만을 위한 복지인가. 최저임금이 오르면 빅맥지수도 오른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포플리즘(15 minutes of foopuli$m)이 아니라 주거지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와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의욕과 행복이다. 좌절한 전세계 청년들은 뻐꾸기가 되어야 하는가. 기득권인 기성들이 이 '무더위'에 지성들과 자정에 커피를 끓여야 한다는 의미다.

 

 

 

 

자료: 통계청, 기획재정부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 2022년 이후는 전망치

 

 

국가가 제공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환경’, 즉 복지Welfare를 누려야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1순위 대상은 군인, 참전유공자, 국가유공자, 장애인, 비행청소년, 노숙자, 노인, 경찰, 소방관 등이 아닐까. 그 외의 불우한 사람들은 자선 전문 단체들이 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업같은 종교단체 역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소꿉놀이에서 벗어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그들에게 더욱 너그럽고 겸손하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몇세기동안 수많은 지성들이 가꾸어 놓은 ‘자본주의’에서 가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다. 분명 노동은 ¨아름답다¨. 

 

스웨덴에서는 강력한 노조의 힘과 노조 조직률을 바탕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민당이 일찍부터 의회의 다수당으로 진출했고, 1930년대 초반 이후 사민당이 지속적으로 집권하는 독특한 정치적, 이념적 지형이 만들어졌다. 영국에서도 일찍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인 노동당의 의회 진출도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웨덴에 비해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 계급의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고유한 정치적 성향과 이데올로기의 특성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이 다수당이 되어 집권당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스웨덴 사민당은 1920년대에 이미 집권을 경험했지만, 영국노동당은 복지 국가가 출범하는 1945년에 처음으로 다수당으로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노동당이 지속적으로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당과 노동당이 권력을 주고받는 시소게임을 벌이게 된다. 영국 노동당은 항상 권력을 내어줄 준비를 해야 했고, 정치적 파트너인 보수당과 타협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영국의 경우 노동당 중심의 복지 국가를 실현했다기보다는 노동당이 보수당과 함께 복지 국가를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스웨덴과 같이 사민주의 주도의 복지 국가를 형성하기에는 영국의 정치 지형과 이념적 토양이 적절하지 않았다.지역마다 날씨가 다르고 나라마다 언어가 상이하다는 점, 즉 탈상품화 정도’de-commodification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통장에 들어온 합법적 불로소득이 과연 의미있게 사용될까. 이것은 벌써 20년동안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겨우 경제활동을 시작한 젊은이들의 피눈물과 땀의 댓가다. 하지만 그들의 장래를 위한 보험은 유용하게 녹아 없어져 버린다. 저축의 권장이 금리하락으로 이어지는데, 오직 소비라는 구호만을 외치는 자본주의 정권의 Welfare가 누구나’의 Saving Account가 되어버리면 결국 IMF의 혹독한 이율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이미 자카트와 바티칸은 존재하니, 비만한 자본주의가 구지 테레사 나라를 건설할 필요가 있겠는가. “맹목적인 선의와 윤리는 허울뿐인 영광, 그뿐”, “그래도 사랑하라.”

 

첫 번째는 복지 국가의 확대로 공공 부문에서 사회 복지 지출이 과도하게 증가하면, 그 사회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가는 산업 생산 부문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이 줄어들어 경제 성장이 위축된다. 두 번째는 과도한 사회 복지의 확대로 인하여 근로 동기가 약화되어 노동 공급이 줄어든다. 세 번째는 과도한 복지 급여가 위험에 대비할 필요성을 약화시켜 저축 동기를 떨어뜨린다.

 

건강한 사람이 낸 돈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치료받는 것을  ‘사회 보험의 재분배’라고 하는데, 분쟁의 원인은 노동할 수 있는 자가 지불한 돈으로 노동할 수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고 싶은 자의 돈으로 노동하기 싫어하는 자의 교묘한 편법을 용인하는 눈먼 복지다. “스웨덴 복지 국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빈곤 해소에 머물지 않는다. 스웨덴 복지 국가는 과도한 불평등이 없는 사회, 즉 불평등의 완화를 목표로 한다.” 케인스는 시장의 효율성에 문제가 발생했을 시 국가 개입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도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유지시켜 주는 동시 박애정신으로 그들이 낙인효과Social Stigma에서 벗어나게 해주자는 전제인데, 우선 임금 격차를 줄여주는 정부의 개입이나 정책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상을 침해하게 된다. 한편 평등으로부터 빈부의 격차가 적어진다는 의미는 ¨앎¨을 위한 경쟁의 이유를 무색하게 하고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하지만, 산업의 과도한 팽창을 방지하여 기후변화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에 입각한, 국가의 역할은 국방과 질서 유지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제한되는 경향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민주적인 학자들은 이같은 평등한 사회가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유를 수호하는 진보가 복지를 주장한다는 점에 이율배반적이자 논리적 모순이 작용한다. 자유사회주의 공존(즉 자유를 수호하는 헌법 제 「1984」호)이 과연 가당한가. 그런즉 결미의 요지는 ¨사과¨로 상환Matière et mémoire된다.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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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며,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사회적 자산 등을 얻는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이 ¨부富¨라면 그것은  “눈먼 부가 아니라 지혜와 함께하는 시력이 날카로운 ¨부富¨, 「법률」, 플라톤”일 것이다.  

 

 

「의회의 보스들」, 조지프 케플러

 

“원시 경제의 특징은, 교환이나 생산에서 이윤을 남기려는 어떤 욕망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공동체의 경제」, 투른발트” 

문명화된 공동체에서는 이익이 간혹 노동의 동기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결코 노동하려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서태평양의 향해자들」, 말리노프스키”

 

 

「강도 귀족」, 새무얼 에르하트 (귀족, 왕족, 그리고 독재자를 제외한 세계 50명의 기업가들이 2.957경[29,570조 혹은 295,700,000억]을 소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평균 591,400억[59조 1,400억]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액수를 은행에 넣어두면 하루에 최소 7.5억이라는 이자를 받는다. 수도권 중심지 고급 고층콘도에 10억짜리 1,000가구가 입주할 수 있다면 59조 1,400억으로 이같은 60개의 빌딩을 소유할 수 있고, 밴츠CLS 450을 59만 1,400개 소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택을 입고 사는 우리는 이에 대해 의의를 갖을 수 없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조너선 그루버, 윌리엄 더들리, 폴 크루그먼, 찰스 플로서, 벤 버냉키, 나라야나 코처라코타, 제임스 블러드, 로버드 시러, 앨런 그린스펀, 페트르 프레이트, 에른스트 페르, 앤드류 할데인, 토마 피케티, 로렌스 서머스, 그리고 대니얼 카너먼 같은 지성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이같은 현실이 우습기만 하다. 참고로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의 하루 생활비는 300원이다. “‘일론 머스크, 당신 재산 2%면 세계 기아 문제 해결’ 지적에, ‘설명하면 내겠다.’” ‘향신료’에서부터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는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37조 8,870억이면 1년동안 심각한 기아와 기근에 처한 3억 4천 600만명의 아이들이 충분히 영양소를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들에게 신이 부여한 1퍼센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축복받은 우리가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테슬라가 하루에 날린 돈이 10조다. 탄소배출량이 비행기의 100배인 우주여행시 1톤당 118억이 든다. 단순히 계산한 우주선 무게가 1,500톤이라면 177,000억[17조]이 소요된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화석연료 사용과 탄소배출로 기후문제를 일으킨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부국富國의 편의주의와 형이하학적이고 관능적인 심미美만을 조장하는 미디어의 환상이 만든 대상행동의 폐해다.  우리는 앞다퉈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지는 않는가.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맷돌에 갈아 셀렌산(酸)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상상력이 오늘날 피로의 기색을 띠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제 원시 시대부터 지니고 있었던 재능, 즉 사고의 탄력성과 상상력의 풍부함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장중심의 사회는 토니 R. H. Tawney가 경고한 ‘물욕에 병든 사회sickness of an acquistive society’를 만들어 버렸고, 재화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민들은 산업질서와 경제의 회복을 위한 신 뉴딜정책에 의해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간과되어 자유방임적(Laiseez-faire) 자본주의를 침해당하고 있다. 마치 대공황처럼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으로 인해 시중에는 돈이 넘쳐나고, 투자할 곳을 잃은 자본이 주식에 몰리자 시장의 파동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급하게 화폐를 발행하던 연준Federal Reserve System이 하락하는 실업률을 금리인상으로 잡으려는 한편, 최근들어 겉으로는 ‘자유시장’을 외치는 정부가 추진하는 중상주의와 신 뉴딜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고물가상승, 실업, 그리고 경기 후퇴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실소를 자아낸다.  “물론 어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질서를 잡아줄 체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사회에 분리된 경제적 제도들이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경제 질서란 사회적인 것들the social의 한 기능일 뿐이며, 그 사회적인 것들 속에 경제 질서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부족 사회든 봉건 사회든 중상주의적 조건 아래서든 사회에서 경제 체제가 분리된 적은 없었다.”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게 되면 사회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밭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방향으로 사회를 위태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하여 시장 체제의 발전이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 마침내 그 시장 체제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을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거대한 변형The Great Transformation」”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다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환경일 뿐이다.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을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허구적인 상품인 토지, 노동, 그리고 화폐는 한낱 자본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인간의 순수한 노동은 거대한 세계 자본 시장과 세계 외환 시장의 메커니즘에 구속된 것이다. 우리가 가꾸고 즐겨야 하는 토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묘사처럼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구매력의 징표였던 화폐와 함께 거대한 자본 메커니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로버트 오언은 ‘만약 시장 경제가 자신의 법칙대로 진화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거대하고 영구적인 악을 낳을 것’이라고 통찰한 바, 우리는 매일같이 무자비한 산업이 배출하는 탄소로 인해 가뭄, 산사태, 홍수, 해수면 상승 등의 기후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이룬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행적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비너스¨를 탄생시켰으나 결국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가 될 것인지 인류는 수년 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결속시키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배타적 경제활동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한 칼 폴라니는 획일주의, 순응주의, 평균주의의 경향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으며, 발달된 기술 문명이 인간을 비인격적 주체로 내몰고 있다고 경고한다. “「햄릿」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연극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한 우리는 모두 살게 된다. 하지만 삶이 우리를 초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본질적인 경건함으로 삶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에 완전히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미루고 있다 … 인생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기회이다. 칼 폴라니”

 

맑스의 「자본론」을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에서 노동자가 더 이상 생산기관과 생산물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소유와 자본가가 없고 노동협동조합만이 존재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쉽게 자본주의 관성慣性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절대적 잉여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를 하락시키지 않는 현 구조와, 착취를 통해 얻은 불로소득의 투기가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에 추가된 포퓰리즘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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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반대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전체주의는 개인이 민족, 국가, 이념과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무솔리니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핵심이다. (개미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꿀벌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목적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파시즘을 내세우는 당의 일부가 되어 빅브라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같은 ¨바벨탑¨을 세우며 ‘불멸의 전능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인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말했다. “당신의 말과 내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만큼은 끝까지 옹호하겠소.” 무질서하게 보이는 혼돈 상태에서도 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카오스 이론에서 처럼, ¨앎¨은 팽창Cosmic Expansion하고 있으나 ¨아름다움¨으로의 ¨삶¨은 수축Strong Interaction하고 있으며, 다양한 관념들에 대한 자율을 통제하는 유일 사상은 우주와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을 거스른다. (¨¨은 죽음으로써 ¨희게¨i된다.  i: 「Theaetetus」)

 

 


“전체주의는 역사 속에 벌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끝까지 분석해보면 이는 기계론적 사고, 그리고 인간의 합리성이 전능하다고 여기는 망상적 믿음이 초래하는 논리적 결과다.”

 

계몽주의 전통은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낙관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포부에서 비롯되었지만, 몇몇 측면에서 이는 정반대의 결과인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이렇게 인간은 고독한 상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끊어지고, 사회적 구조와 연결성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깊은 무의미감이 초래하는 무력감을 느끼고, 상상할 수 없는 파괴적 잠재력을 지닌 막연한 상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심리적, 물질적으로는 행복한 소수에 의존하는데, 그 소수는 신뢰하지도 않거니와 나와 동일시할 수도 없는 이들이다.. 과학은 현실에 맞추어 이론을 조정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이론에 맞게 현실을 조정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이론적 허구에 맞게 현실을 조정하고자 시도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자연과 세계의 최적화를 목표로 삼는다. 유전자 조작 동식물, 실험실에서 만든 고기, 그 외 인공 제품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기계론적 이데올로기의 여파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유토피아적 낙관론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에 산업화는 귀족주의적 계급사회 및 이와 연관된 지역별 사회 구조의 소멸을 예고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자연적 맥락에서 떨어져나왔고 이 과정에서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탈주술화된disenchanted’ 기계적 세계(막스 베버Max Weber)에서 삶은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이며a-teleological(우주라는 기계는 의미도 목적도 없이 운행된다), 종교적 참조틀 역시 일관성을 잃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와 함께 우리가 전체주의의 저류를 확인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결함 없는 휴머노이드humanoid와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순진한 신념 말이다. 우생학과 사회적 다윈주의를 기반으로 순종純種의 초인을 만들어내겠다던 나치의 생각, 역사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스탈린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의 이상은 모두 그 원형적인 사례들이며, 현재 부상하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실성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우생학이 자신의 이상 국가에 존재하는 훌륭한 관행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20세기는 이 관행이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한나 아렌트가 논했듯이,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 과학에 대한 일반화된 집착, 인공적 천국에 대한 신념의 논리가 확장된 형태다. “과학은 실존의 악들을 마법과 같이 치유하고 인간의 본성을 변형시킬 우상이 되었다.”

 

독일 철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우리가 아직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를 창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료가 아직 확실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료를 모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로서 우리는 끝없는 수치 행렬에 매료되어 정작 중요한 것―수치 해석의 토대가 되는 주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참조틀에 관한 열린 논의―에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대한 암묵적인 긴장, 공포, 이견이야말로 수치의 안정화를 가로막고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질문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우리는 인간을 기술적으로 감시하고 의약품으로 조정해야 할 생체 기계로 보는가, 아니면 타자 및 영원한 자연의 언어와 신비로운 방식으로 공명하는 데서 목적을 찾는 존재로 보는가? .. 하지만 이 밖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들이 또 있다. 바로 대중 여론의 압박에 짓눌려 뭔가 단호한 행동을 해야 할 것만 같다고 느끼는 정치인들, 통제력을 상실한 탓에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는 지도자들, 자신의 무지를 숨겨야만 하는 전문가들, 자기주장을 펼칠 기회를 엿보는 학자들, 히스테리와 드라마를 선호하는 인간의 선천적 경향, 돈의 냄새를 좇는 제약회사들,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성공하는 매체, 그리고 우리 시대에 도무지 풀지 못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기술관료에 의한 전체주의 체계에서 찾는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정치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부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주관적 허상이 실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실체가 타인의 허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어떤 수단을 써서든 자신의 허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지게 된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확증하는 수치를 끊임없이 대중 매체에 공급하고, 그 결과 대다수 국민이 확실히 믿는 대체로 허구적인 실체를 내놓게 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수치를 바탕으로 내려지는데, 몇 달이 지나서 보면 이 수치들은 매우 상대적이고 때로는 누가 봐도 잘못되었거나 기만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 수치들은 가장 광범위한 대응 조치를 부과하고 인간의 기본적 신조를 모두 제쳐놓는 데 계속 이용된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목소리들은 ‘팩트체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참다운 진실부Ministry of Truth에 의해 낙인찍히고, 검열과 자기 검열 속에 발언의 자유가 축소되며,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은 강요된 예방접종에 의해 침해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적 배제와 분열을 일으킨다.

 

집단만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에서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인종적으로 뛰어나고 자가당착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한 자만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사명이라고 외치는 논리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신속한 결정과 집단의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빠른 조치와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점은 사실이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독재자의 영달을 위해 사용되고 개인의 자유가 심하게 회손되는 경우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디스토피아 성향의 시녀 이야기에서 나타난 전체주의의 위험성으로, 제법 논리적인 이론을 내걸은 정권의 모순과 폐단에 대적하는 반항적인 사람들(파르티잔partisan: 당원, 동지, 당파, 일명 빨갱이)이 무기징역자가 되거나, 방사능 폐기물 처리반, 혹은 사형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상위 1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는 부에서 들어나는 불평등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지만,  적폐 논란에 빠진 사회주의의 대안인 시장주의보다 더 그럴듯한 이념이 자리하기에는 우리사회가 좀 더 심충적인 토론과 통상적이며 윤리적인 실험을 거친 후, 개인의 사유와 사생활이 보장되는 하에 새로운 이상理想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 체계는 대개 사람들이 대규모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가족적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이를 유일하게 허용되는 유대―개인과 전체주의 체계(즉, 집단)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은 나치 독일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훨씬 더 체계적으로 이행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화 과정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지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블렌델 고스초크 모델 ©findhappy.net

 

 

코로나19로 인해 격리 중일 때는 알코올을 얼마나 섭취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호주에서는 하루에 맥주 6병), 공공장소에서는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표지는 의무화한다(QR 코드가 없다면 상점 문을 닫아두어야 한다).. 또한 살충제를 금지하면서도 농부들에게는 관리들을 보내 이런 살충제를 탐지해내는 검사를 피해갈 방법을 일러준다(이사벨 사포르타의  「와인 비지니스Vino Business 」는 이를 적절히 설명한다).. 새로운 불안 대상테러리즘, 기후 문제, 바이러스이 나타날 때마다 더 큰 기술적 통제를 요구하고 나선다. 때로 이 통제는 날카롭고도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 2016년 브뤼셀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이후, 앤트워프의 유대인 지역에는 테러리스트에 대항해 보호를 강화하고자 카메라 수백 대가 설치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 이 카메라들은 유대인들의 회당 방문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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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덕은 정부와 대중 모두에 의해 점점 더 공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자유로운 발언, 언론의 자유, 예술적 자유, 기본적인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지지가 우려스러울 만큼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 말인즉슨 강권이나 지배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급조된 규제나 통례가 너무 지나치거나 부조리하며, 혹 비일관적인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권을 제외한,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다는 강령을 과연 민주주의로 볼 수 있는가. 입헌국가에서 다수의 자유와 권리를 즉흥적으로 유행하는 도덕과 충동적인 사회적 여론으로 제한하는 것은 법치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민주주의란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다수는 소수의 의견과 성향을 존중하나, ‘소수의 의견을 따르라’는 무리한 유행성 규제를 다수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서명된 계약을 통해 쌍방이 사전에 동의를 표한 후에 맺은 성관계만 합법이라는 법을 도입했다. 또한 플랑드르 미술의 거장들이 그린 누드화를 더는 소셜 미디어에 게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넷플릭스Netflix 기업은 직원들이 서로 5초 이상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고, 직원 간에 먼저 질문해도 되는지 허락받지 않고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묻지 못하도록 명시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새로운 규준은 너무도 엄격해서 남녀 사이에 신체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성적 무결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간주할 정도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사회에 불어온 계몽주의 전통은 난폭한 규제와 원칙으로 우리의 창의성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악화시켰고, 나아가 심리적인 고립과 무력감을 초래했다.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코로나 사회 이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보면, 기계론적 사고와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더 많은 불확실성을 확산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도한 규제는 대체로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채 발전해왔다. 이것이 숨이 막힐 듯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대개는 우리의 인식 밖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규제 기계가 한 단계 수준을 높일 때마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릴 존재의 공간은 조금씩 줄어든다. 이렇게 일종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사회적 공간에서 불편함과 좌절을 줄이려고 더 많은 규제, 프로토콜, 절차를 만들어내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때문에 더 많은 불편과 좌절을 경험하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에 대응하겠다며 훨씬 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규제망이 조금 더 촘촘해질 때마다 인간의 숨통은 조여든다. 과도한 규제 사회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지속될 때,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것은 논리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사고의 궁극적 결과는 안락사 기계―헬륨 가스를 마시며 고통 없이 삶을 놓을 수 있는 상자―가 될 것이다.

 

광기 어린 파괴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났든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신성한 이름으로 일어났든 죽은 이나 고아, 노숙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