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반대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전체주의는 개인이 민족, 국가, 이념과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무솔리니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핵심이다. (개미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꿀벌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목적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파시즘을 내세우는 당의 일부가 되어 빅브라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같은 ¨바벨탑¨을 세우며 ‘불멸의 전능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인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말했다. “당신의 말과 내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만큼은 끝까지 옹호하겠소.” 무질서하게 보이는 혼돈 상태에서도 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카오스 이론에서 처럼, ¨앎¨은 팽창Cosmic Expansion하고 있으나 ¨아름다움¨으로의 ¨삶¨은 수축Strong Interaction하고 있으며, 다양한 관념들에 대한 자율을 통제하는 유일 사상은 우주와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을 거스른다. (¨¨은 죽음으로써 ¨희게¨i된다.  i: 「Theaetetus」)

 

 


“전체주의는 역사 속에 벌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끝까지 분석해보면 이는 기계론적 사고, 그리고 인간의 합리성이 전능하다고 여기는 망상적 믿음이 초래하는 논리적 결과다.”

 

계몽주의 전통은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낙관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포부에서 비롯되었지만, 몇몇 측면에서 이는 정반대의 결과인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이렇게 인간은 고독한 상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끊어지고, 사회적 구조와 연결성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깊은 무의미감이 초래하는 무력감을 느끼고, 상상할 수 없는 파괴적 잠재력을 지닌 막연한 상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심리적, 물질적으로는 행복한 소수에 의존하는데, 그 소수는 신뢰하지도 않거니와 나와 동일시할 수도 없는 이들이다.. 과학은 현실에 맞추어 이론을 조정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이론에 맞게 현실을 조정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이론적 허구에 맞게 현실을 조정하고자 시도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자연과 세계의 최적화를 목표로 삼는다. 유전자 조작 동식물, 실험실에서 만든 고기, 그 외 인공 제품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기계론적 이데올로기의 여파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유토피아적 낙관론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에 산업화는 귀족주의적 계급사회 및 이와 연관된 지역별 사회 구조의 소멸을 예고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자연적 맥락에서 떨어져나왔고 이 과정에서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탈주술화된disenchanted’ 기계적 세계(막스 베버Max Weber)에서 삶은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이며a-teleological(우주라는 기계는 의미도 목적도 없이 운행된다), 종교적 참조틀 역시 일관성을 잃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와 함께 우리가 전체주의의 저류를 확인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결함 없는 휴머노이드humanoid와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순진한 신념 말이다. 우생학과 사회적 다윈주의를 기반으로 순종純種의 초인을 만들어내겠다던 나치의 생각, 역사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스탈린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의 이상은 모두 그 원형적인 사례들이며, 현재 부상하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실성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우생학이 자신의 이상 국가에 존재하는 훌륭한 관행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20세기는 이 관행이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한나 아렌트가 논했듯이,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 과학에 대한 일반화된 집착, 인공적 천국에 대한 신념의 논리가 확장된 형태다. “과학은 실존의 악들을 마법과 같이 치유하고 인간의 본성을 변형시킬 우상이 되었다.”

 

독일 철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우리가 아직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를 창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료가 아직 확실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료를 모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로서 우리는 끝없는 수치 행렬에 매료되어 정작 중요한 것―수치 해석의 토대가 되는 주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참조틀에 관한 열린 논의―에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대한 암묵적인 긴장, 공포, 이견이야말로 수치의 안정화를 가로막고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질문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우리는 인간을 기술적으로 감시하고 의약품으로 조정해야 할 생체 기계로 보는가, 아니면 타자 및 영원한 자연의 언어와 신비로운 방식으로 공명하는 데서 목적을 찾는 존재로 보는가? .. 하지만 이 밖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들이 또 있다. 바로 대중 여론의 압박에 짓눌려 뭔가 단호한 행동을 해야 할 것만 같다고 느끼는 정치인들, 통제력을 상실한 탓에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는 지도자들, 자신의 무지를 숨겨야만 하는 전문가들, 자기주장을 펼칠 기회를 엿보는 학자들, 히스테리와 드라마를 선호하는 인간의 선천적 경향, 돈의 냄새를 좇는 제약회사들,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성공하는 매체, 그리고 우리 시대에 도무지 풀지 못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기술관료에 의한 전체주의 체계에서 찾는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정치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부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주관적 허상이 실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실체가 타인의 허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어떤 수단을 써서든 자신의 허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지게 된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확증하는 수치를 끊임없이 대중 매체에 공급하고, 그 결과 대다수 국민이 확실히 믿는 대체로 허구적인 실체를 내놓게 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수치를 바탕으로 내려지는데, 몇 달이 지나서 보면 이 수치들은 매우 상대적이고 때로는 누가 봐도 잘못되었거나 기만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 수치들은 가장 광범위한 대응 조치를 부과하고 인간의 기본적 신조를 모두 제쳐놓는 데 계속 이용된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목소리들은 ‘팩트체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참다운 진실부Ministry of Truth에 의해 낙인찍히고, 검열과 자기 검열 속에 발언의 자유가 축소되며,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은 강요된 예방접종에 의해 침해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적 배제와 분열을 일으킨다.

 

집단만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에서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인종적으로 뛰어나고 자가당착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한 자만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사명이라고 외치는 논리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신속한 결정과 집단의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빠른 조치와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점은 사실이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독재자의 영달을 위해 사용되고 개인의 자유가 심하게 회손되는 경우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디스토피아 성향의 시녀 이야기에서 나타난 전체주의의 위험성으로, 제법 논리적인 이론을 내걸은 정권의 모순과 폐단에 대적하는 반항적인 사람들(파르티잔partisan: 당원, 동지, 당파, 일명 빨갱이)이 무기징역자가 되거나, 방사능 폐기물 처리반, 혹은 사형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상위 1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는 부에서 들어나는 불평등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지만,  적폐 논란에 빠진 사회주의의 대안인 시장주의보다 더 그럴듯한 이념이 자리하기에는 우리사회가 좀 더 심충적인 토론과 통상적이며 윤리적인 실험을 거친 후, 개인의 사유와 사생활이 보장되는 하에 새로운 이상理想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 체계는 대개 사람들이 대규모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가족적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이를 유일하게 허용되는 유대―개인과 전체주의 체계(즉, 집단)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은 나치 독일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훨씬 더 체계적으로 이행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화 과정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지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블렌델 고스초크 모델 ©findhappy.net

 

 

코로나19로 인해 격리 중일 때는 알코올을 얼마나 섭취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호주에서는 하루에 맥주 6병), 공공장소에서는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표지는 의무화한다(QR 코드가 없다면 상점 문을 닫아두어야 한다).. 또한 살충제를 금지하면서도 농부들에게는 관리들을 보내 이런 살충제를 탐지해내는 검사를 피해갈 방법을 일러준다(이사벨 사포르타의  「와인 비지니스Vino Business 」는 이를 적절히 설명한다).. 새로운 불안 대상테러리즘, 기후 문제, 바이러스이 나타날 때마다 더 큰 기술적 통제를 요구하고 나선다. 때로 이 통제는 날카롭고도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 2016년 브뤼셀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이후, 앤트워프의 유대인 지역에는 테러리스트에 대항해 보호를 강화하고자 카메라 수백 대가 설치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 이 카메라들은 유대인들의 회당 방문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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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덕은 정부와 대중 모두에 의해 점점 더 공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자유로운 발언, 언론의 자유, 예술적 자유, 기본적인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지지가 우려스러울 만큼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 말인즉슨 강권이나 지배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급조된 규제나 통례가 너무 지나치거나 부조리하며, 혹 비일관적인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권을 제외한,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다는 강령을 과연 민주주의로 볼 수 있는가. 입헌국가에서 다수의 자유와 권리를 즉흥적으로 유행하는 도덕과 충동적인 사회적 여론으로 제한하는 것은 법치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민주주의란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다수는 소수의 의견과 성향을 존중하나, ‘소수의 의견을 따르라’는 무리한 유행성 규제를 다수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서명된 계약을 통해 쌍방이 사전에 동의를 표한 후에 맺은 성관계만 합법이라는 법을 도입했다. 또한 플랑드르 미술의 거장들이 그린 누드화를 더는 소셜 미디어에 게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넷플릭스Netflix 기업은 직원들이 서로 5초 이상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고, 직원 간에 먼저 질문해도 되는지 허락받지 않고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묻지 못하도록 명시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새로운 규준은 너무도 엄격해서 남녀 사이에 신체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성적 무결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간주할 정도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사회에 불어온 계몽주의 전통은 난폭한 규제와 원칙으로 우리의 창의성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악화시켰고, 나아가 심리적인 고립과 무력감을 초래했다.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코로나 사회 이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보면, 기계론적 사고와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더 많은 불확실성을 확산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도한 규제는 대체로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채 발전해왔다. 이것이 숨이 막힐 듯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대개는 우리의 인식 밖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규제 기계가 한 단계 수준을 높일 때마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릴 존재의 공간은 조금씩 줄어든다. 이렇게 일종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사회적 공간에서 불편함과 좌절을 줄이려고 더 많은 규제, 프로토콜, 절차를 만들어내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때문에 더 많은 불편과 좌절을 경험하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에 대응하겠다며 훨씬 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규제망이 조금 더 촘촘해질 때마다 인간의 숨통은 조여든다. 과도한 규제 사회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지속될 때,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것은 논리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사고의 궁극적 결과는 안락사 기계―헬륨 가스를 마시며 고통 없이 삶을 놓을 수 있는 상자―가 될 것이다.

 

광기 어린 파괴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났든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신성한 이름으로 일어났든 죽은 이나 고아, 노숙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