癸卯 - 處暑

2023. 8. 20. 12:41 from 六十干支

 

봄이냐, 여름이냐, 가을이 문제로다. 가혹한 겨울의 운명의 화살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환난의 조수에 맞서 결연히 싸우다 쓰러질 것인가. 죽는다, 잠잔다 ― 다만 그것뿐.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며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이며, 그렇다면 죽음, 잠, 마술피리,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목신의 풀피리가 살아나는 느린 서곡에 여름의 신비로운 잇자국 사라지고, 환영幻影에 사로잡힌 백조는 무익한 유배로 포효하는 바다에서 경멸의 차가운 인상Impression을 꿈꾸는가. Hommage: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말라르메, 모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맘 속에 눈물 내린다. 가슴 속에 스며드는 이 외로움은 무엇이런가? 속삭이는 비 소리는 땅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의 노래 소리여! 역겨운 내 맘 속에 까닭 없는 눈물 흐른다. 무엇,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 없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거리에 조용히 비가 내린다」, 아르튀르 랭보”

 

쪽빛 하늘이 펼쳐진 아침결, 환승하는 계절이 혼란스레 교차하면 앳된 가을빛으로 결속되는 오후의 햇살과 황금빛을 잇는 수풀의 물결은 노을의 춤사위에 성큼 찰나의 애착으로 내닫는다. 매마른 들판에서 타작마당으로 디케이의 설된 곡식 간신히(just) 천칭에 올려지면(-ify), 잿더미 도회지 언저리에서 에이레네이의 덧없는 샬롬(Salam) 허공에 부질없이 울려오고, 화환으로 혼란스런 여름의 심연에서 에우노미아 다가오는 계절의 레시피 다급히 손질한다. 중천에 떠오른 시리우스 스틱스강의 맹세 오리온에 알려오면, 가죽부대에 담긴 설 익은 포도알들이 ‘바바번개개가라노가미나리리우우뢰콘브천천둥둥너론투뇌뇌천오바아호나나운스카운벼벼락락후후던우우락누크!’ 소리에 흥겹게 익어가고, 더블린산 감자를 주무르며 애석해하던 너와 나 ‘마크 씨에게 세 쿼크를!’ 주기위해 엘뤼시스 제전 수선스레 기약하고 퍽과 함께 이 밤을 지새우네. 

 

“가을에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 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싸늘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 하얗게 들어나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벌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큰 곰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가을의 유서」,  파블로 네루다”

 

치열했던 너의 여름 울긋불긋 들썩이는 정원에 태양의 황금빛을 한가득 투영하고, 후드득 지평선에 부딪치는 투명한 빗방울 형형한 얼룩들로 완연한 가을빛 수채화를 골목마다 장식한다. 그림자같은 여름의 숨결 뒤 한껏 자라나는 가을의 욕망이 당신의 발치에서 깨어나면, 요원한 대지의 신념 이슬의 입맞춤에 결실을 애원하고 비상하는 건들마에 그대 무르익은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차분히 떠올리네. 

 

“멀쟎아 우리들 잠기리, 차디찬 어둠 속에. 잘 가거라 너무나 짧았던 여름의 강렬한 빛이여! 벌써 들리나니, 안 마당 깔림돌 위에 음울한 소리내며 떨어지는 나무 토막들. 가슴 속에 온통 겨울이 되살아오리니, 분노, 증오, 전율, 공포, 강요된 고된 일 나의 심장은 북극 지옥에 매달린 태양처럼 붉게 얼어 붙은 한 덩어리 혈괴(血塊)에 불과하리니. 몸서리치며 귀기울리며 툭툭 떨어지는 장작 소리, 사형대 세우는 울림이 이보다 더 무딘걸까. 내 마음은 무거운 파성목(破城木)의 연타 아래 무너져내리는 성탑과도 같아. 단조롭게 부딪치는 소리에 흔들리며 듣나니. 어디선가 서둘러 관 뚜껑에 못박는 소리. 누굴 위하여? ― 어제는 여름; 어제는 가을, 이 신비의 소리는 마치 출발인 양 울리네. 「가을의 노래」, 샤를르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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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