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전기의 생산과정에서 구리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물질이다. 은은 구리보다 전기 전도성이 높기는 하지만 강도가 떨어지고 희귀하여 앞으로 새로운 연금술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인프라에 투자되기 그 효율성이 무척 낮다. 빛이 있으라,는 말로 빅뱅이, 아침과 저녁이 있으라,는 말로 초힘이 4가지 힘으로 분리된 후 힘들에 의해 천체의 궤도에 섭동이라는 교란이 시작되어 태양과 행성을 도는 달들과 은하계가 생겨났을지 모른다. 레고블럭처럼 우리는 다시한번 설계자의 의도를 따라보기로, 이에 레고 십계명을 떠올리며 빛이 있으라,를 외치기에 이른다. 프로메터우스가 신들로 부터 불을 훔쳐오자 인류는 동굴 속 그림자 놀이 Allegory of the Cave를 개시했고, 그리하여 조셉스완은 필라민터를 발명하고 에디슨은 전구내의 산소를 모두 제거하여 진공상태에서 전구를 밝히게 된다. 여기까지가 과학자의 역할이고, 그것을 필요로 하여 산업화시키고 인프라를 구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상에서 불가피한 우리의 몫이다. 디옥시리보핵산은 프리드리히 미셰르에 의해 발견되었고, 다시 과학자들은 DNA나 RNA를 분리하여 insert DNA를 증포시킨 후, 벡터에 삽입하고 재조합한 DNA를 세포에 도입하고 선택한 유전자를 복제하기에 이른다. 왜일까,라고 질문한다면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는 설계자의 뜻대로 우연의 거듭으로 발생한 미토콘드리아가 진화를 거듭해 지적생명체로 발전한 과정을 재현해 보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연한 플러스 알파는 아마도 더불어 발전된 의학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복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의 지식이 시생누대에서 고생대로, 중생대에서 신생대로 가기위한 여정은 까마득 멀기만 하다. 한편 캄브리아기의 생물대폭발시기인 5억 4200만 년 전의 기적을 과학자들이 재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엄청난 우연이 필연적으로 현인류에 주어져야 한다. 아말(األمل مسبار, 희망), 티엔원(天問, 하늘에게 묻는다),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 인내), 우리는 물과 소금과 철과 구리의 흔적을 찾으며 ¨각성¨하고 또 다시 ¨각성¨되길 기도하며 왜 지적생명체라는 인류가 내장감각계통을 인지하거나 자율신경계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지 의문을 품는다.
세계의 80% 구리는 추키카마타 광산의 동정광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호주, 인도네시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중국의 정제소로 향해 공정을 거친 후 99.9%의 순수한 구리로 탄생한다.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선 철광석과 비교해 훨씬 많은 토양을 퍼내는 과정을 거치며, 이 과정의 무한 반복은 자연과 환경을 철저히 파괴시킨다. 환경뿐만이 아니라 채굴장 근처의 마을은 늘 파괴되고, 지역민들은 높은 니켈, 납, 그리고 비소와 같은 독성으로부터 고통과 질병을 호소한다. ‘천천히 서두르라’, 설계자가 만든 자연의 ¨부¨와 ¨아름다움¨을 보면 시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太陽曆은 그에 비해 너무나 짧다. 우리는 몇일만을 살다 짧은 사랑을 나누고 떠나는 매미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설계자도 우리를 그렇게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반복되는 일과에서 ¨불쾌¨하지 않기 위해 아드레날린C₉H₁₃NO₃과 도파민C₈H₁₁NO₂으로 ¨쾌¨, 즉 교감신경의 흥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삶¨은 설계자의 자연을 연구하여 물질(구리Cu, 철Fe, 나트륨Na)을 파낸 후 지금껏 얻은 정보와 과학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 하지만 인류를 먹이기 위한 과학은 이미 충분한 시점을 넘어섰고,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경제공식을 철학이 다시 ¨정의¨하기엔 그에 맞서야하는 사회적 갈등과 반발로 인해 무척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해야 할 과제는 잉여가치를 통한 안락과 편리의 유지가 아닌, 자연법에서 배울 수 있는 정의로움으로 빈곤과 기아문제를 용광로가 아닌 뜨거운 심장에서 벼려내야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각성¨되어 설계자에 의해 다시 본능을 제외한 지적능력이 ¨망각¨된 개미나 벌과같은 생명체’가 아닌, 자주성으로 스스로를 지배하는 법칙을 관리하고, 반복된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모인 정보를 다시 복제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본능과 욕망에 더 의존하여 정해버린, 시대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교정과 보수를 반복해야하는 법憲法이 아닌 순수이성으로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과 생명체의 이유를 정확히 직시하는 시각이 중요하다. 그럼 사과에 대한 고해말고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설계자의 월요일에서부터 일요일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빛이 있고, 우주가 생기고, 자연법칙이 탄생하여 궁창이 나뉘고, 다음으로 생명이 탄생하여 진화를 거듭하고, 그리하여 사랑하고 자연Gaia을 가꾸었던 것이 설계자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럼 혹자가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직 요일의 순서를 정하지 못한채 모두는 각자의 요일에서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다만 모두가 잘 따르는 요일은 주말에 휴식을 즐기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에게 물질은 부족할 수도, 부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우리의 뛰어난 설계자들이 다 함께 모여 빅픽쳐를 그려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커다란 분쟁을 겪고 인류는 캄브리아기처럼, 혹 폼페이의 한 장면처럼 역사 속 영원히 잊혀진 문명으로 전락될 수 있다. 석유가 없으면 친환경에너지를 사용하면 되지,라는 우리의 망상을 훗날 새로운 인류에게 발견되어 비웃음 당할지 모른다. 친환경에너지를 위해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고 그러자면 광석을 캐내어야 하는데, 이 채굴과정에서 다시 엄청난 탄소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가르강튀아처럼 많이 먹고 많은 탄소를 배출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지적 ¨아름다움¨과 그에 부합한 ¨부¨를 상대보다 많이 창출해야 할 것이다. ¨유능한¨, 즉 ¨아름다운¨ 화자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가난한’ 청자의 아폴론적 고통을 함께하며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탈탄소 사자후the roaring of a lion는 소음에 불과하며 우리의 요일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로 남을 뿐이다. 말하자면 가난한 그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부유하고¨ 디오니소스적일 나는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이 부족하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우아함이 결여된 인상적이고 냉랭한 ¨아름다움¨이다.” 인정되는 ¨아름다운¨ 공인公人의 ¨부유함¨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납득할 수 없는 부유함이 가져오는 우월감, 가식, 허세,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져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사회적 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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