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자의 본질적인 다름이 익숙한 것에 맞서 자신을 드러낼 때 고통이 발생하며, 경험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인지상정, 집단사회에서 남을 의식하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이자 통속적인 일반의 가치라면, 구성원이 속한 조직의 ¨척도¨에 따라 자신에게 익숙하지 못한 경험은 기쁨, 혹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럼 오유지족,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에게 만족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자 이에 따른 부당함과 불편을 감수하라는 의미로,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 같다.
그렇다면 피로사회에서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같은 고통은 우리의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곤한 시각은 주관적인 자연의 풍광을 바라고, 피곤한 청각은 기분을 새롭게 만들 감성적인 음악을 갈망케 하며, 피곤한 후각은 신상품으로 나온 은은한 향수를 구입하게 하고, 피곤한 미각은 식욕을 자극할 외식으로 이어지거나, 피곤한 촉각은 안락한 스파나 족욕을 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나의 고단한 시각은 널 바라보려 애쓰고, 너의 피곤한 청각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만약 우리의 피로한 후각이 문제였다면 손잡고 거리를 나선 우리가 아기자기하고 코지한 카페로 발걸음을 돌리고, 브라질산 산토스나 콜롬비아 수프리모가 우리의 후각을, 시큼달콤한 딸기 치즈케이크나 화사한 몽블랑이 우리의 미각을 치료해 줄지 모른다.
그런데 정도가 지나친 오감의 환충 또한 고통을 불러온다. Your eye is bigger than your stomach.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살펴보자. 뇌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뇌수막, 혈관, 근육, 그리고 신경분지들이 수축하고 확장하면서 말초신경이 자극되어 머리가 아플뿐이다. 뇌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조작하고 있어서 일까. 영장류 중 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피엔스가 공교롭게도 가장 연약하다. 자연과 멀어져서, 자연을 지배하려 해서, 그리하여 자연의 저주로부터 면역력을 회복하기 위해 치료를 받고 무수히 많은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것인가. ¨망각¨된 동물과 벌레들의 고통은 그저 육체적인 고통일 뿐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척도¨는 분명 무의미하다. 슬픔이 없다면 어떨까. 전제적 조건으로 인해 행복이라는 의미는 덧없거나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경지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고통을 겪을 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Nebeneinander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Miteinander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는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고통을 느낀다. 프시케Psyche(나비)를 사랑하기 위해 (¨알기위해¨) 에로스(Cupid)는 화살의 고통을 감수한다. ‘네가 나비인가.’
고통은 자신을 알게한다. Know thyself. 이같은 자기 성찰은 폰 바이치제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나는 무엇이 내 것이고 내가 무엇을 다 가지고 있는지를 고통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나의 발가락, 나의 발, 나의 다리,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땅에서부터 위쪽으로 내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나는 고통을 통해 알게 되며, 뼈와 허파, 심장, 골수가 지금 있는 거기에 있다는 것 또한 고통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고통의 언어를 갖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기관의 방언’을 쓴다. 물론 나는 내가 이것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인지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결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지쳐간다. 과연 ¨각성¨된 당신의 뇌는 이같은 사실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들을 지켜보며 아픔과 고통을 느낀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립써비스조차 귀찮아진 우리는 벙긋벙긋 립씽크만 반복하고 있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무릎이 아프다, 고로 나의 발은 존재한다. 나의 이웃이 아프다, 나 역시 아프다, 고로 ‘의자는 나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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