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며,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사회적 자산 등을 얻는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이 ¨부富¨라면 그것은  “눈먼 부가 아니라 지혜와 함께하는 시력이 날카로운 ¨부富¨, 「법률」, 플라톤”일 것이다.  

 

 

「의회의 보스들」, 조지프 케플러

 

“원시 경제의 특징은, 교환이나 생산에서 이윤을 남기려는 어떤 욕망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공동체의 경제」, 투른발트” 

문명화된 공동체에서는 이익이 간혹 노동의 동기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결코 노동하려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서태평양의 향해자들」, 말리노프스키”

 

 

「강도 귀족」, 새무얼 에르하트 (귀족, 왕족, 그리고 독재자를 제외한 세계 50명의 기업가들이 2.957경[29,570조 혹은 295,700,000억]을 소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평균 591,400억[59조 1,400억]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액수를 은행에 넣어두면 하루에 최소 7.5억이라는 이자를 받는다. 수도권 중심지 고급 고층콘도에 10억짜리 1,000가구가 입주할 수 있다면 59조 1,400억으로 이같은 60개의 빌딩을 소유할 수 있고, 밴츠CLS 450을 59만 1,400개 소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택을 입고 사는 우리는 이에 대해 의의를 갖을 수 없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조너선 그루버, 윌리엄 더들리, 폴 크루그먼, 찰스 플로서, 벤 버냉키, 나라야나 코처라코타, 제임스 블러드, 로버드 시러, 앨런 그린스펀, 페트르 프레이트, 에른스트 페르, 앤드류 할데인, 토마 피케티, 로렌스 서머스, 그리고 대니얼 카너먼 같은 지성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이같은 현실이 우습기만 하다. 참고로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의 하루 생활비는 300원이다. “‘일론 머스크, 당신 재산 2%면 세계 기아 문제 해결’ 지적에, ‘설명하면 내겠다.’” ‘향신료’에서부터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는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37조 8,870억이면 1년동안 심각한 기아와 기근에 처한 3억 4천 600만명의 아이들이 충분히 영양소를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들에게 신이 부여한 1퍼센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축복받은 우리가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테슬라가 하루에 날린 돈이 10조다. 탄소배출량이 비행기의 100배인 우주여행시 1톤당 118억이 든다. 단순히 계산한 우주선 무게가 1,500톤이라면 177,000억[17조]이 소요된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화석연료 사용과 탄소배출로 기후문제를 일으킨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부국富國의 편의주의와 형이하학적이고 관능적인 심미美만을 조장하는 미디어의 환상이 만든 대상행동의 폐해다.  우리는 앞다퉈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지는 않는가.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맷돌에 갈아 셀렌산(酸)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상상력이 오늘날 피로의 기색을 띠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제 원시 시대부터 지니고 있었던 재능, 즉 사고의 탄력성과 상상력의 풍부함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장중심의 사회는 토니 R. H. Tawney가 경고한 ‘물욕에 병든 사회sickness of an acquistive society’를 만들어 버렸고, 재화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민들은 산업질서와 경제의 회복을 위한 신 뉴딜정책에 의해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간과되어 자유방임적(Laiseez-faire) 자본주의를 침해당하고 있다. 마치 대공황처럼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으로 인해 시중에는 돈이 넘쳐나고, 투자할 곳을 잃은 자본이 주식에 몰리자 시장의 파동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급하게 화폐를 발행하던 연준Federal Reserve System이 하락하는 실업률을 금리인상으로 잡으려는 한편, 최근들어 겉으로는 ‘자유시장’을 외치는 정부가 추진하는 중상주의와 신 뉴딜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고물가상승, 실업, 그리고 경기 후퇴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실소를 자아낸다.  “물론 어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질서를 잡아줄 체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사회에 분리된 경제적 제도들이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경제 질서란 사회적인 것들the social의 한 기능일 뿐이며, 그 사회적인 것들 속에 경제 질서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부족 사회든 봉건 사회든 중상주의적 조건 아래서든 사회에서 경제 체제가 분리된 적은 없었다.”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게 되면 사회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밭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방향으로 사회를 위태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하여 시장 체제의 발전이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 마침내 그 시장 체제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을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거대한 변형The Great Transformation」”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다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환경일 뿐이다.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을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허구적인 상품인 토지, 노동, 그리고 화폐는 한낱 자본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인간의 순수한 노동은 거대한 세계 자본 시장과 세계 외환 시장의 메커니즘에 구속된 것이다. 우리가 가꾸고 즐겨야 하는 토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묘사처럼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구매력의 징표였던 화폐와 함께 거대한 자본 메커니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로버트 오언은 ‘만약 시장 경제가 자신의 법칙대로 진화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거대하고 영구적인 악을 낳을 것’이라고 통찰한 바, 우리는 매일같이 무자비한 산업이 배출하는 탄소로 인해 가뭄, 산사태, 홍수, 해수면 상승 등의 기후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이룬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행적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비너스¨를 탄생시켰으나 결국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가 될 것인지 인류는 수년 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결속시키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배타적 경제활동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한 칼 폴라니는 획일주의, 순응주의, 평균주의의 경향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으며, 발달된 기술 문명이 인간을 비인격적 주체로 내몰고 있다고 경고한다. “「햄릿」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연극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한 우리는 모두 살게 된다. 하지만 삶이 우리를 초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본질적인 경건함으로 삶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에 완전히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미루고 있다 … 인생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기회이다. 칼 폴라니”

 

맑스의 「자본론」을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에서 노동자가 더 이상 생산기관과 생산물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소유와 자본가가 없고 노동협동조합만이 존재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쉽게 자본주의 관성慣性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절대적 잉여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를 하락시키지 않는 현 구조와, 착취를 통해 얻은 불로소득의 투기가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에 추가된 포퓰리즘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