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ephant

2020. 3. 5. 05:47 from 隨筆

2040

 

고통이나 감정과 같은 인간의 의식은 현재 나에게 없는,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의식주, 또는 안식이나 사랑같은-, (알지 못하나 이미 알고 있는 것, 호흡의 원리를 모르나 호흡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산소과다증은 천천히 숨쉬며 자신이 내뱉은 공기(이산화탄소)를 다시 호흡하면 되고, 고산지대에서 산소결핍에 처할 경우는 코카차를 마시면 된다. 물에서 산소를 분리해 낼 수도 있지만 쉽지는 않다. 산소는 광합성 작용으로 만들어 지는데 대양의 식물성 플랑크톤과 조류가 75%, 육상 식물이 25% 산소를 만들어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전자를 이끄는 산소가 에너지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화작용으로 APT를 저장하고 분해하며 포도당과 같은 유기물질을 분해해 에너지를 만든다. 이산화탄소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에서 함류된 탄소와 수소가 산화됐기 때문이다. 산소호흡으로 혈액중의 산소농도가 증가하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증가하고, 혈류량이 증가하고, 혈관벽에 불순물을 제거한다.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약 2,000리터의 혈액이 뇌에 유입되고 전체소비량의 산소는 25%를 차이한다.】것을 들어내는 표현이다. 의식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필요한데, (모든 생물들이 갖춘) 본능과 기본욕구를 추월한 인간의 의지가 생이 가져다준 죽음에 주이상스(Jouissance: 무의미한, 고통스러운 즐거움)를 선사한다. 죽어가는 자신은 행복할 수 없는데, 망각으로 인해 삶이 착각되고 한편으론 즐거운 것이다. 그렇게 망각된 사건은 희극이나 비극이 되어 기억의 바다에서 줄곧 회상되고 (여기서 재생된 기억은 피그말리온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감성을 자극한다), 잡을 수 없는 크로노스의 뒷머리처럼 현재에 이끌려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곧 빛인데, 시간이 없는 무는 시시포스(저승의 신 하데스를 농락한 코린토스의 왕)의 영원한 반복과 같은 죽음의 상태다. 욕망이 사랑이라면, 나의 여백을-죽음이라는 실체- 채우기 위한 이같은 에로틱한 행각이 이끌림으로(원자들 사이의 중력, 중력이 없다면 모든 것은 흩어진다) 깨어날 때(믿음이 거울효과Mirror neuron로 각성을 시작하게 되므로) 삶은 다시 시간속에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도덕을 기초로 한 정언명령은 니체가 말했듯이 조물주의 뜻과 다를 수 있다. 도덕의 시초는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유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후부터 도덕은 사회적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이미 형성된 계층을 더욱 곤고히 다져갔다. 한마디로 빈부의 격차는 도덕의 작품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사랑에서 비롯됐다. 조물주가 (죽음이 존재하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면 도덕은 덜 사랑하라고, 반 에로스적인 미덕을 외친 것이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말한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장 칼뱅이 통치한 제네바의 첫 5년은 도덕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이 징역형에 처해졌고, 길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사람은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예배를 몇번 이상 빠지면 사형시키고 연극, 춤, 축제, 남녀간의 교제, 적포도주, 친구들과의 선물 교환 같은 모든 형태의 쾌락이 도덕에 의해 금지되었다. 결국 겁에 질린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모순적인 사회체제를 만들어 버렸다. 「*칼뱅 참고: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칼뱅 - 나무위키」 조물주의 완전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 시공을 초월한 '완전(없는 것이 없는)', 경외의 대상이자 미의 결정체이므로.- 인간의 성격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인간의 태고적 최대의 자질은 원래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처럼 '최대다수를 위한' 도덕과 '최대다수를 위한' 행복은 평행을 유지할 수 없는 조건으로 향하고 있다. 허전함을 채우려는 욕망 때문이다.

 

도덕은 정의와는 다르다. 정의란 최대 다수의 행복이 아니라 최대 다수가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은 것이 정의롭다면 인간은 감성을 버리고 본능만으로 적자생존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공리적이기도한 권력은 정의를 정의하기 위해 앎에 취할 수 밖에 없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시선과 대상에 주어지는 실존이라는 증거의 실종이다. 실존이 욕구에 의한 복종이든지 자유를 향한 자율적인 의지인지는 삶의 무게가 주는 의미에 달렸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그러므로 삶 또한 계속 반항하게 된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권력은 앎이라는 귀납적 과정을 철학하고 학습해야 한다. 가까스로 상태를 유지하는 정의'just-ice'는 앎으로 간신히 정의'just-ify'되어 최대 다수의 삶을 정의하는 것이다. 「just: 간신히·가까스로, -ify: 하게 하다, -ice: 상태·성질·행위 *참고: 무엇이 인간인가 - 오종우」 그것은 소유하고 있지 않은, 욕구하나 소유되지 않는 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삶에 중용을 베푸는 일이다. (타자의) 불행이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경우는 (아름다움으로의) 환상이 상상으로 이상(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을 목표삼지 않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이란 숨결의 일정한 흐름이기도, 낙관적인 자세의 실존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의 허무이거나 까뮈의 이방에서의 하루를 구분하는 것은 삶을 주관하는 '시선에 내리는 대상의 관심'이다. 숨쉬고 사는 것과 호흡이 간절한 것의 차이는 모두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대중의) 관심은 약간의 디오니소스적인 쾌락을 요구한다.

 

창조라는 것은 상상으로 (초월된 의지와 각성으로) 암흑(무)에서 빛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능성은 무에 있다. 우파니샤드가 설명한 씨앗의 핵심처럼 오감에 감지되지 않는 가능성이 생성과 해체의 핵인 무에 존재하는 것이다. 삶이 결과라면 인중유과론(결과가 원인에 잠재되어 있다는 이론)처럼 이미 먼저된 삶이 나중된 삶의 원인 가운데 들어 있을 것이고, 인중무과설(결과가 원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에 비유하자면 새로운 삶의 탄생-인생이라는 주체로부터-은 '삶과 죽음'의 원인이자 산물이지만 하나의 완전한 실체가 되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가 매력적인 것은 '너무 인간적인' -호모 사피엔스적, 사회적인- 그들의 박애와 희생정신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어야만 했고, 그들은 인간일 수 밖에 없었다.

 

-

 

죽음이라는 과정에서 '삶'의 엔트로피(entropy: 물질의 상태를 나타내는 양)가 감소(열 에너지 감소)하여도 우주라는 장(field)에서 엔트로피(질서와 균형,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앎'으로 귀결)는 증가한다. 【문제는 빛을 소모하는 '삶'이 아니라, 빛을 흡수하는 역동적인 블랙홀과 의문에 쌓인 암흑물질에 있다. 인체에는 1000억개의 뉴런, 신경세포가 있는데, 우리 은하에도 1000억개의 별이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은하에 존재하는 블랙홀 수는 대뇌피질에 존재하는 뉴런 수와 같은 100억개다. (대뇌피질은 기억, 집중, 사고, 언어, 각성, 의식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블랙홀은 중력이 매우 강한 별이 힘의 균형을 무너트리고 수축되어 한 점으로 집중된 것을 말한다. 모든 은하에 태양질량의 수십만배에서 수십억배에 이르는 초대질량의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우리 은하의 초대질량의 블랙홀은 궁수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우주가 공간(장)이라면 빅뱅은 빛(빛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이다.)으로 만들어진 삶이라는 계(system)다.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적인' 삶(양자역학에서 에너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볼 때 점이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 은하수처럼 이어져 있다.)은 이렇게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며, 질서를 위한 도덕률을 요구하는 앎으로 희석된다.

 

'힘에의 의지'란 나를 상실하므로써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의미(자기 밖에서 자기로 영원히 돌아온다는 것)인데, 이 명제는 엔트로피의 에너지 법칙과도 유사하다. 여기서 힘이란 물리학자 톰슨(Joseph J. Thomson)의 자석과 같다. (그는 자석실험을 통해 정삼각형, 정사각형, 그리고 정오각형을 발견했다.) 우주속 삶의 엔트로피가 감소하여도 그것을 무질서로 볼 수 없다. "무질서란 통계학적 관찰의 대상인 낱낱 요소들이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막스 플랑크"이다. 삶이라는 것은 개별 질서들이 사회라는 우주 속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앎이라는 기하학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로 비추어보면 삶이라는 결과는 어떠한 원인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때 우리의 행동은 명료하다. 하지만 다가올 결과가 불투명할 때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수많은 우연적 경험들을 바탕으로 기술을 쌓고 원인을 찾아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다루면서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를 초월하여 투명한 미래로 자신을 던지고 싶은 '기투'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의지free will를 담은 삶이라는 가변적인 '길'은 인과적 결정론Causal determinism으로 앎이라는 '숙명적인 공간'을 피력하게 된다.

 

빅뱅이 '완전'한 우연이라면 사물들에게는 주체가 없고 목적을 요하는 생존의식은 구차하며, 삶은 실존적(주체적 존재로 실재하는)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연을 '인위적인 개념'(프리츠 마우트너)에서 보면 아침이 오고 저녁이 찾는 것은 대상에게 있어 극히 필연적인 선택이자 목적을 지향하는 자연현상이다. 어떠한 대상과 우연히 마주쳤다는 사실은 과거 습득한 학습의 인지 가능성과 확률이 포함되므로 인식은 힘에의한 우연한 질서의 개념을 떠받치게 된다. 결국 서로(주체-우주, 실체-별)와의 이해와 적합한 조화 없이는 우연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솔베이 회의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반대하고 신은 결코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보어는 왜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지 생각해보라고 그에게 반박했다.) 전자의 위치를 알면 그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알면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없듯이 삶과 앎은 서로 보완적(상보성 원리: Complementarity principle)이다. 우연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관찰(시선)이라는 의도적인 계획이 필요하고, 관찰이란 대상에 (빛에 의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므로 우연은 무엇에 목적을 둔 자연적인 결과다. 길을 가다가 번쩍이는 물체를 보고도 모른척 지나친다면 그것은 그저 독립적인 즉자에 불과하다. 반면 자유의지의 도출과 그에 따른 감정적 상황 대처는 반복된 실패 속 계획된 발명이며-필연이 된다-, 인과적 결정론, 즉 연출된 우연에 속하게 된다.

 

루돌프 아른하임(엔트로피와 예술)의 설명처럼 질서는 정보라는 '앎'을 통해 측정되기 때문에 "극도의 질서는 극도의 무질서를 통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삶의) 엔트로피 값이 높을 때 질서는 낮고, (삶의) 엔트로피 값이 낮을 때 질서는 높게 나온다. 그렇다면 과연 질서는 파놉티콘을 창안한 법학자 벤담의 도덕과 무관한가. -어제에서 정의된 '나'라는 존재는 질서있게 오늘을 살고, 현재를 보고 내일을 꿈꾼다. 그렇게 수많은 상상을 하지만 그 중 몇개 만이 이상(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으로 남겨진다. 이상의 잣대는 때로는 외골수 사랑을 만든다. 대상이 나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향이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그러나 거울효과로 깨어난 각성은 모든 상상을 소화할 수 없다. 인간은 이웃을, 서로를 의지하며 더불어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보관된 각각의 식재료들은 요리를 통해 '이화적 파괴'이자 순수한 형질의 변형, 즉 자신의 질서를 잃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리고 '앎'으로 요리된 식재료들은 다시 '삶'에 기여된다.) 여기서 질서(삶의 엔트로피 값이 낮을 때)라는 것은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시작되어 앎 속 미적 여백-죽음이라는 실체-을 배치한다. 삶이라는 계가 도덕을 통해 우주라는 장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고 알맞은 구조를 갖출 수 있는 것은 모두 '힘'에 달려있다. 「전체에서 어떤 부분을 계로 나누어 연구하면 그 계가 우주 전체에 미치는 특성을 놓칠 수 있다. *참고: 막스 플랑크 - 물리철학」 에너지가 불균형할 때 무질서가 발생하고, 삶은 빛을 얻어 -중력을 통해 중심을 잡고- 【중력이란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중력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4가지 힘인 '미시적인'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거시적인' 강력 중 하나다. 인간에게는 이 4가지 힘, '중력-낙하, 전자기력-화학반응, 약력-베타 붕괴, 강력-핵작용'이 모두 존재한다. 4가지 힘은 '당기는 힘인 인력'과 '밀어내는 힘 척력'을 발휘하는데, 이것은 간단히 말해 서로에게 이끌리는 애로틱한 행동인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거시적인 강력에 대응하는 미시적인 중력으로 별은 탄생하게 된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된다. (F=mg, E=mc2, E=hv)

 

이러한 물질과 운동의 분화와 통합이 마지막 단계인 평행상태에 이르는 것을 하버드 스펜서는 "지고의 완전함과 그지없이 온전한 행복"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힘에 의해 활동하고 나아가 (내게 없는)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완전과 행복의 단계에 이르기 위한 변화의 상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횔덜린이 훼페리온 단편에서 말하듯 "우리는 평화로운 세계의 '하나이자 모두인 것'을 우리 자신을 통해서 생성해 내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중심을 벗어난 궤도"에서 자연과 반목하며, 삶의 투쟁과 삶에 대한 고무적인 호기심에 휩싸여 사고(의식)의 침전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쾌락 원리의 저편'에서 긴장 감소(혼란속에서 질서를 얻으려는 충동)이자 '무기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명체의 본능적 욕구'(죽음)로 보았다. 상상속에 갖혀 끊임없이 충족되고자하는 쾌락의 애로스적 충동과 이상으로 향하려는 근원적인 욕망, 이같은 충동과 욕망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살아 있는 유기체에 내재하는 열망적 힘(Drang), 프로이트", 즉 생명체의 목표인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공간속 무의식이 전의식(의식되기 이전의 정신 체계로 무의식을 걸러서 의식 쪽으로 보낸다)을 통해 이상적인 현실 원리인 의식의 길로 회귀하는 것이다. 곧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앎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자 (애로스적) 자극과 욕구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로장생이 있다면 "완전성을 향한 충동, 프로이트" 앎은 무의미해 진다.

 

-

 

'운동의 원인은 에너지다. 목적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오직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 삶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본능적으로 앎이라는 대상을 끝없이 욕구하기 때문이다. 앎을 완전히 소유했다면 더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자기애적 아름다움으로 향한 쾌락(쾌적)은 아름다움의 잔향을 칸트가 말한 '제약된 만족', 즉 '감각적 욕구에 의해 제약된 만족'으로 남기는 과정에 불과하다. 객체라는 삶이 주체라는 앎에 저항하는 숭고한 죽음만이 그 노동의 댓가로 오감과 '대상이나 현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느끼는' 직관과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인 오성으로 빗은 미에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 삶은 앎을 향한 숭고를 목격한 도덕이 노동이라는 고통이 안겨주는 부정성에 (생산에 대한 만족과 물질적 보상에 대한 자부심) 긍정이라는 활기를 불어넣으므로써 선이라는 '제약적 만족', 즉 '도덕적 개념에 의해 제약되어 있는 만족'을 얻는다. 아름다움의 잔향은 향수를 불러온다. 향수는 다시 앎으로의 삶을 재촉한다. 아름다움은 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이라는 자극으로 신경에 전달되어 욕망을 부르게 된다. 오감을 만족시키지 못한, 혹 지나친 자극은 고통이나 불쾌와 같은 의식으로 들어나는데,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인 삶의 의지, 객관적인 의지', 나에게 없는 것을 들어내는 표현인 충동과 투쟁과 욕망으로 발전한다. 선험적이며 후험적인 '오감과 오성'을 종합한 직관intuition(칸트 - 이론이성: 감성과 오성을 바탕으로한 사고)은 이 과정에서 (단조롭거나 복잡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삶에 여섯번째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직관일 것이다. 직관이란 감각의 경험을 분석하고 연역적 추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한 것이다. 【유전체genome은 후험적인 가능성과 선험적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 감각 기관은 표상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한다. *선험적 - 분석적 판단, 필연성 ∥ 후험적 - 종합적 판단, 우연성】 삶은 빛의 아름다움을 시각, 미각, 촉각, 후각(원자의 진동수)로 느낄 수 있다. 남은 것은 청각 뿐이다. 그래서 삶은 직관적으로 별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삶은 완전이라는 베일에 쌓인 미로 도약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미를 통한 '자유로운 만족', 즉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완전한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삶은 앎의 중력장에서 미의 궤도를 끝없이 돌게된다. "미에는 은폐가 본질적이다. 투명성은 미와 화합하지 못한다. 투명한 미란 형용모순이다. … 숨김은 미에 본질적이다. … 그러므로 미는 옷을 벗지도, 폭로되지도 않는다. 벗길 수 없음이 미의 본질이다. … 베일에, 덮개에 싸여 있을 때, 은신처에 숨어 있을 때 대상은 아름답다. 덮개가 벗겨지면 그 대상은 무한히 보잘것없게 되어버린다. - Die Errettung Des Schonen(아름다운 구원), 한병철"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비스마르크는 1,870년 독일 통일을 목적으로 보불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50억프랑의 배상금을 도이칠란트에 지급하게 되고, 철공업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던 도이칠란트는 이 자금을 철을 제련하는 기술에 투자하게 된다. 곧 베를린에서 국립물리공학연구소가 세워지고, 연구소 조교로 채용된 빈 키르히호프는 가열되는 온도에 따라 물질이 여러 가지 파장의 빛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후 키르히호프는 빛이 전달되는 물질은 자신의 빛과 같은 빛의 파장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온도에 따라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것이 바로 검은 물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청색 - 짧은 파장, 적색 - 긴 파장; 철을 낮은 열에 달구면 빨갛지만 높은 온도에서 달구면 파랗다) 자신의 생각을 확인시켜줄 검은 물체를 찾던 키르히호프는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갈 수 있는 '어두운 검은 상자'를 이용해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킨다. 그는 검다는 것은 어떤 파장의 빛이라도 흡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험결과 짧은 파장에서는 자신이 예측했던 결과가 나온 반면, 긴 파장에서는 예상을 빗나가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1,900년 키르히호프의 연구를 발전시킨 플랑크가 물체가 지닌 에너지의 한계때문에 짧은 파장에게 청색을 돌려줄 수 없다는 원인을 마침내 밝혀내게 된다. 물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너무 적으면 덩치가 큰 짧은 파장과 서로 맞교환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플랑크는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관문을 열게 되었고, 이로인해 아인슈타인은 빛이 물체에서 전자를 튀어나가게 하는 광전효과를 관찰하며 광양자라는 입자를 과학에 추가하게 된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발명한 원자로 인류는 천체관측을 통해 얻는 시간 대신, 보다 정확한 원자의 물리반응으로 절대시간을 역사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곧 인류는 밤하늘 반짝이는 별을 보며 별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파장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는 빛깔의 띠)을 통해 그 별의 나이, 성분, 온도, 밀도 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도플러 효과(청색 - 파장이 짧다, 적색 - 파장이 길다)를 통해 별이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블랙홀과의 거리와 속도(경찰이 사용하는 스피드 건)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 양자역학의 세계 -가다야마 야수히사)

 

2,018년이 되면 인류는 '사건의 지평선'과 '특이점', 즉 블랙홀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가속도가 없고 속도가 일정한 '등속운동'이 '가속운동'으로 바뀌면 관성력이 생긴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가속하며 올라갈 때 정지해 있을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래로 끄는 힘이 바로 관성력이다.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 떠있는 이유도 지구의 중력과 그 중력을 수직으로 도는 우주정거장의 원심력(관성력)이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등속원리에 따라 관성력을 만든 가속도는 중력과 같다. 그렇다면 가속이 더해진 좌표계의 시공간은 정지해 있던 좌표계의 시공간과 다르게 되고, 중력에 따라 시공간이 뒤틀리는 것이다. 태양의 10억 배의 질량을 갖은 블랙홀의 사상의 지평선에서 중력으로 인해 시간이 느려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예로 위성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지상보다 시간이 팽창하고(특수상대성이론), 고도가 높아 중력의 영향을 적게 받으므로 시간이 지상보다 빨리간다(일반상대성이론). 여기서 질량을 갖은 모든 물체는 빛의 속도를 넘지 못하므로 '탈출 속도'가 광속도를 넘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엔트로피 증가) 가상의 화이트 홀로 빠져 나가게 되는 것(엔트로피 감소)이다. (호킹복사란 열을 갖은 물체는 빛을 내기 때문에 블랙홀 역시 특정한 온도로 열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호킹은 블랙홀이 질량을 잃으면서 입자를 방출한다고 설명했다.) 고대에는 천체의 운행에 의한 시간을 사용해 생활해 왔다. 달의 기조력 때문에 지구의 자전이 차츰 느려져 오늘 날 우리는 365일동안 하루에 24시간을 쓰고 있다. 산호화석을 조사한 결과 4억 1,000만 년 ~ 3 억 6,000만 년 전에는 1년이 400일이였고, 하루는 22시간이였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어린왕자의 별 B612처럼 하루가 짧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나이가 140억 년이라면 95억 년 전에는 (지구나이 45.43억 년)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처럼 광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얽혀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은 우주의 절대량이 아니며, 이는 우주의 근본적인 속성과 전혀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참고: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수많은 발견들을 통해 인류는 '별은 어떤 사건이자 현상이고, 별은 삶에 주어진 시간이라는 점'을 깨닮았다.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여 -우연은 필연이 된다- 그 결과를 계산하는 것은 어떤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또한 과학이라는 연역적 추리와 수단으로 현상이 담고 있는 인과적 원인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발견된 원인은 다시 과학의 도구로 사용되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목표로의 수단과 성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때 삶은 목표를 향한 갈망의 결여로 존재로써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렇다면 삶의 목표는 아름다워지는 것인가, 혹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가. "어떤 수단이든 그 뒤에 살아 있는 정신이 없다면, 그 수단은 무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목표의 성취를 향한 갈망이 우리 내면에 살아 꿈틀거린다면, 우리는 그 목표에 닿는 수단을 발견하고 그 수단을 행동으로 바꿔놓을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아인슈타인"

 

상자안에 들어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양자중첩이다. 모든 물질은 두 가지 성질, 즉 파동과 입자를 지니고 있는데, 입자성을 관측하려는 동시 파동성(파동함수 붕괴)이 사라진다. 관찰에 의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어 있거나 살아있는 양자택일 상태가 되는 것과 같다.【슈뢰딩거의 실험에 필요한 도구들은 고양이, 방사성 물질, 방사선 측정기, 망치, 독가스 장치가 마련된 밀폐된 상자다. 방사능 물질이 나오면 측정기가 돌고, 기계장치는 망치를 동작시켜 독가스가 든 병을 깬다. 그러면 독가스를 마신 고양이는 죽게 된다. 방사성이 나올 확률이 한시간에 50%라면, 한시간 뒤에 고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슈뢰딩거의 실험은 두가지 결과를 갖고 있다. 죽어있는 고양이, 그리고 살아있는 고양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운명은 상자를 열기 전까지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따라서 앎을 쫓는 실험의 원인은 관찰이다.】 과학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라는 것은 관측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는 것으로, 여러번의 관찰로부터 얻는 통계적인 예측만이 가능하다. 관찰 수단에 작용하는 양자 효과는 관찰하는 현상을 방해해 불확정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현실과 물자체(경험을 초월한 대상, 언젠가 도달할 것이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사이에 간극을 두고 빛을 통해 얻은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 잊혀진 '레테의 강'을 기억하고 선험적인 의지로 간극 넘어로의 '앎'을 향해 도약해야 하는 삶의 운명, 그것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앎을 욕구하는 즉자'(그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에 관찰, 즉 시선이 주어지므로 객체는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찰을 간섭하게 되는 것과 같다. 관찰하는 것은 '상상속에 갖혀 끊임없이 충족되고자하는 쾌락의 애로스적 충동과 이상으로 향하려는 근원적인 욕망, 무기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명체의 욕구'다. 여기서 확인되는 확률이란 숙명적인 공간에서 들어나는 가변적인 우연한 경험들로 종합된 앎으로의 가능성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은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정(주제, thesis)반(-대조, antithesis)합(통합, synthesis)과 같다. '정'을 부정하여 모순을 버린 상태를 '반'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순적 면모를 지닌 '반'이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한 상태가 '합'이다. 그러나 '합' 또한 모순적 한계로 다시 '정'이 된다. "합은 정으로의 회귀, 반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합'은 정확히 반과 똑같은 것이다. 그것의 유일한 차이는 관점의 변환에 있다. - 지젝"

 

"빅뱅은 사실상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빛이란 게 아직 없었으니까요.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그때는 공간 역시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므로 밖이란 건 없었습니다. 그때 존재한 유일한 공간은 내부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너무나 작은, 극도로 뜨거운 안개 상태의 에너지였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팽창이 있었죠. 매 순간순간 크기가 커지고 온도는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되는 동안에 우주의 순수 에너지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물질이 생성됐는데 무수히 많은 수조 개도 넘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 형태였죠. 최초로 생겨난 물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력이 생성됩니다. 빅뱅이 일어난 직후의 우주는 단지 가스에 불과했으며, 우주 공간에 거의 균일하게 퍼져있었습니다. 그 뒤로 2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력이 다시 가스를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구조가 만들어졌으며 거기서 다른 모든 것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우주에 균일하게 퍼져있던 가스가 '우연한 불규칙성'에 의해 질서를 잃고, 질서의 부족으로 중력이 작용해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 지금으로부터 135억 년 전의 우주는 대부분이 수소 가스로 가득했습니다. 그에 합당한 성질대로 중력이 작용을 하면서 수소 가스를 응집시켜 서서히 거대한 구름을 형성합니다. 수소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가스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죠. 그건 엄청난 동력원이라는 겁니다. 1,000만 도 정도가 되게 수소를 가열하면 에너지를 생성하기 시작하는데, 별이 빛나게 만들어주고 우주 공간에 온기와 빛을 공급해준 에너지였습니다. ... 【별과 원소의 탄생과정】 우연히도 별은 간단히 말하면 거대한 공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소 원자들의 융합반응이 일어나면서 헬륨이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별의 에너지가 생산됩니다. 그러나 헬륨은 수소에 비해 약간 무겁습니다. 그래서 헬륨은 별의 중심부로 가라앉게 되죠. 이제 헬륨의 원자가 별의 중앙 무대를 차지합니다. 헬륨끼리 융합이 일어나면서 더욱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또 다른 새로운 원소도 형성하게 됩니다. 탄소죠. 모든 생물에 없어서는 안 될 기본 구성요소가 탄소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이 거듭거듭 되풀이되면서 별은 마치 양파와 같이 층을 이루게 됩니다. 별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무거운 원소들이 자리하는데 네온, 산소, 그리고 무엇보다 철과 같은 원소가 그것들이죠. 철은 융합이 되더라도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죠. 따라서 연소가 중단이 됩니다. 점점 더 많은 양의 철이 별의 중심부에 쌓여나가다가 결국에는 남아있던 연료의 거의 전부가 바닥나게 됩니다. 【별의 죽음】 이제 중력이 우세해지면서 별이 내부를 향해 찌그러지게 만듭니다. 별의 중심부가 점점 압축이 됨에 따라서 온도가 치솟게 되고 급기야 우리 태양 중심부보다 100배 이상이 되게 상승하죠. 최종적으로는 별이 붕괴되면서 폭발합니다. 이것이 초신성입니다. 이는 별의 죽음이며 동시에 새로운 것들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100만분의 몇 초인 이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강력한 충격파가 별을 관통하게 되는데 그 폭발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철의 일부를 융합시키게 되고 더 무거운 원소들이 생성되죠. 그런 경로를 통해 중원소들, 예컨대 금이나 백금 또는 납과 같은 것들이 폭발하는 별의 심장부에서 생성이 되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같은 금속은 수십억 년 전에 눈부신 섬광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신성 중심부 깊숙이에서는 중심이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우리가 '중력 우물'이라 부르는 게 형성됩니다. 중력 우물은 별이 한 점으로 찌그러지도록 만들죠. 블랙홀이 탄생한 것입니다. - 스티븐 호킹과 우주 속으로"

 

-

 

"'신은 어디있지?' '내가 가르쳐주리라.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였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전부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쓸어내어 버릴 스펀지라도 주었는가? 우리가 이 지구를 해로부터 풀어주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이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는가? 우리는 끝없는 허무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빈 공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하진 않는가? 계속해서 추워지지는 않는가? 밤이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사토장이들이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신이 부패해 가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 또한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 즐거운 학문, 니체"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시작되어 (중력에 의해) 끝없이 추락하는 삶은 앎속 미적 여백, 즉 빈 공간에서 추위와 허무(욕망의 빙점)를 느끼며 서로 멀어지고 팽창하면서 각성을 통해 힘에의 의지로 초인이 되고자 한다. 세상이 어두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어서 객체는 낮에도 디오게네스처럼 등불을 켜고 다닌다. 아름다움을 위해 신은 죽어야만 했다. 삶이 아름다움을 피워내기 위해 신은 부패해야만 했다. 【'규칙을 벗어난 돌연변이'는 단백질의 변화를 생성하고 (천재성은 진화에 목적을 둔다), 바이러스는 유전형질 변화를 가져와 초인RNAi을 만든다. RNA(리보핵산)는 DNA가 자체 유전정보로 단백질을 생산하게 만든다. RNAi(RNA 간섭)는 이중나선 구조의 RNA가 Dicer 효소에 의해 siRNA로 전환한 후 mRNA가 특정유전자를 절단, 분해시키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RNAi는 희귀질환이나 바이러스 단백질이 발현하는 것을 억제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바야흐로 삶은 앎을 통하여 (분석된 염기서열과 인위적인 siRNA를 삶에 주입하므로) 인위적인 간섭으로 초인의 초안을 무심코 그려내고 있다. siRNA로 색소 주머니melanosome나 특정한 유전자를 건들인다면 의식없이도 어떤 대상의 흉내나 의태mimicry, 어떤 대상으로부터의 위장camouflage (식물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녹색을 반사하고 나머지 색들은 흡수), 발광동물처럼 bioluminescence 열이 없는 냉광을 드러내거나, 완보동물tardigrade 같이 진공상태에서나 10년동안 수분없이 섭씨 151도와 -273도를 버티며 (부동 단백질antifreeze protein), 혹은 냉혈동물cold-blooded animal 같이 외부의 온도에 따라 체온조절이 (인간의 삶은 섭씨 37도다)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왜 초인이 되고자 하는가. "그대가 바로 신을 살해한 자로구나! 멈추어라! 신을 죽인자, 신을 살해한 자의 기분이 어떠한지를. 멈추어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신은 죽었다. (결과는 삶이다.) 물(物, thing-in-itself, 이데아Idea)은 초인으로 살기 위해 아름다움을 벗어 던지고 긍정을 부정해야 했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아이가 되기 위해서(생존을 위해 자연은 도태natural selection하고, 인간은 인위 선택artificial selection으로 인위 도태를 조장한다. "유전 형질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돌연변이는 순종을 낳는다. 그러므로 돌연변이가 진화의 동인이 된다. 수많은 돌연변이들 중에서 생존율을 증대시킬 수 있는 소수만이 선택되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물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The Origin of Species요 진화의 실현이다. - 코스모스 , 칼 세이건").

 

미는 스스로를 은폐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어내려고도 한다. 폭로되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발설하려 한다. 은신하지만, 극도의 질서를 벗어나기 위해 극도의 무질서를 실현하며 빛이 연출하는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삶은 각성Übermensch으로 앎을 파헤치지만, 어느세 망각으로 아름다움에서 멀어진다. 【앎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망각'(anodynia,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은 기억의 바다넘어Lethe 삶으로부터 잊혀진 것을 깨우는 것이다. (고통이 일상이 되어 신경이 무감각, '허무'해질 때 삶은 비로소 초인을 외쳐왔다.) 도덕의 관심과 억압을 벗어나 무의식(uncertainty, '통계적 예측의 심연')으로 가려는 충동, 이전의 평온한 상태(빛이 없는 암흑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것이 바로 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삶의 중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 빛나는 별을 관찰하는 것은 원인에서 결과priori를 향한 시간으로의 기약이자 결과인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중독이란 망각으로 수없이 길들여지는 것이다.)】 삶이란 내게 없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나의 아름다움을 들어내는 것, 밀어내는 '부끄러운' 애(哀)와 잡아당기는 '열망하는' 애(愛)가 앎의 중력장에서 미의 궤도를 그리는 것trade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닮은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꿈꾸던) 사피엔스는 도구를 발명한다. 앎이라는 사과를 발견한 것이다. X라는 행복을 원했던 사피엔스는 가언명령에 따라 Y라는 운동('운동의 원인은 에너지다. 목적은 아름다움이다.')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리하여 애로스를 따른 부의 축적으로 소유를 보호하고자 명분이란 탄력을 얻은 권력이 탄생하고, 반애로스적인 도덕이 생겨났다. 그리고 사회적인 사피엔스는 모순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주적인(공리적, common wealth) 정의just-ify를 도모한다. "어떤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이다'하고 선언할 생각을 가졌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시민 사회의 진정한 창립자였다. - 사회계약론, 루소" 루소의 설명처럼 본래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평등했던 것이다. 전서구라고 불리는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있는데, 이는 머리뼈와 뇌경막 사이에 있는 자석 조직이 지구자기장과 반능하여 나침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배에 자성을 가진 개미도 몸속 철을 이용해 이주한다. 몇몇 종류의 박테리아, 꿀벌, 도롱뇽, 달팽이, 돌고래, 연어, 거북, 철새들 역시 생체자석으로 지구자기장을 이용하여 방향을 정하고 생존을 위해 이동한다. (*생체자석 참고: 전기기학 편, 김달수) 하지만 진보적 변화를 두려워 하는 사피엔스는 보수적 사회계약으로 (간극을 뛰어 넘을 수 없는, 날 수 없는) 제한적인 이동을 하고, 이는 생물학적 진화과정에 모순을 가져왔는지 모른다.

 

소유라는 행복은 타자의 불행과 불평등을 초래했으므로 사피엔스는 무조건적이며 선행적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 정언명령, 즉 도덕으로 사회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 정언명령, 칸트" 그렇게 도덕과 행복(부, 아름다움, 앎으로의 과정)은 평행을 유지할 수 없는 조건을 향했고, 삶은 정의로움으로 일상을 만족시킬 수 밖에 없었다. 허전함을 채우려는 욕망, '내게 없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사랑, 즉 무한적인 앎을 갈망하는 유한적인 삶은 단지 미의 일부분이자, 그저 단편적인 앎에 속할 뿐이다. 완전이라는 전체의 일부, 혹은 찰라에 지나지 않는 삶은 앎의 순간을 담은 한장의 사진에 불과하다. 미의 도그마(독단적인 신념)인 사랑은 죽음이라는 3차원적 삶의 패러독스("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 파르메니데스", 세빌리아의 한 이발사는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 모두의 수염을 깎고, 그 외의 사람의 수염은 깎지 않는다.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 이발사는 스스로 수염을 깎아야 하는가. 러셀의 패러독스 참고)로부터 실존을 외칠 뿐이였다. 3차원적 삶인 실존은 본질을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으로의 삶에서 본질은 실존을 앞선다. (끈이론에 의하면 4~11차원이 우주다.) 그리고 남겨진 욕망의 흔적으로부터 예측될 수 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3차원 논리로 명제화할 수 없는 미래속에 존재하는 불확정성(양자론)이 되었다.  

 

-

 

선하다는 것은 나에게(또는 어떤 대상에게) 좋은 것good, 앎(아름다움)이 기다리는 미래로 뻗어가는 것이다. 악하다는 것은 나를 앎으로부터 퇴보, 역행하게 만드는 나쁜 것evil, bad(망각; 중독이란 망각으로 수없이 길들여지는 것이고, 여기서 업karma이 쌓인다)이다.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접할 수 있듯이 선과 악은 종종 플러스와 마이너스에 비유된다. 【지구는 자석과 같다. 초기 생성된 별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내부에 철을 쌓게되고, 지구의 자전으로 외핵이 회전하여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속 원자핵(+)과 전자(-) 사이 전기력이 발생하여 자기장을 만든다. 《물질(Matter; 나-self)은 분자(Molecule; 물 혹 이산화탄소 혹 포도당 etc)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는 원자(Atom; 수소 혹 산소 혹 질소 etc)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 속에는 원자핵(Nucleus; 인력)을 도는 전자(Electron; 척력)구름이 있다. 원자핵 속에는 중성자(Neutron)와 양성자(Proton)가 있고, 그 속에는 업 쿼크(Up Quarks)와 다운 쿼크(Down Quarks)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다음이 끈이론(String Theory)이다.》 우주의 기본입자 전자가 띠우는 음전하가 양전하로 철 주위 도선에 흐르면 자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치 남성의 양기陽氣와 여성의 음기陰氣가 만나 물리적인 압력(자연계에는 4가지 힘 '중력-낙하, 전자기력-화학반응, 약력-베타 붕괴, 강력-핵작용'이 존재한다. 탄성, 점성, 마찰력, 압력은 입자들 간의 전기적 상호작용의 결과다.)에 의해 장(field)을 이루는 것과 같고, 더하고 나누어도 남성의 무의식 인격의 여성적 측면인 '아니마anima'와 여성의 무의식 인격의 남성적 측면인 '아니무스animus'가 끊임없이 작용하는 상태와 같다.(아니마, 아니무스: 카를 융)】 물리학의 상보성 원리처럼 나쁜 것bad은 재고된 앎으로 우월, 정복, 이기를 들어내며 타자와 분쟁하게 된다. 선을 후퇴하게 만드는 악은 '삶'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지엽적 욕망과 말초적 쾌락을 내세우는 것이다. 여기서 악이 선으로 비약되지 못하면 푸코가 설명한 가학적인 광인의 발병으로 이어진다. (이같은 경우 벤담의 판옵티콘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선악의 존재유무는 모두 '앎'이라는 사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앎은 도덕과 정의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사피엔스는 자연에 선하지 못하므로 (e.g. 동식물복제) 도덕과 정의는 자연의 섭리, 생명윤리에 이율배반적이다. 보편적인 정의가 관습적인 윤리etiquette보다 크다는 뜻이다. 사피엔스의 윤리는 미의 희소성에 의해서만 응답하거나 작동한다. 인간중심주의를 표상하는 사피엔스는 자연보다는 자연의 희소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코끼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플라스틱은 코끼리의 문제다'라고 단정하지만, 희소성이라는 모순을 발견한 사피엔스는 정(주제, thesis)반(-대조, antithesis)합(통합, synthesis)의 원리대로 바이오 플라스틱bioplastic을 만들었다. 그렇다. '폐쇠적이면서 개방적인' 사피엔스는 가끔 엉큼하다.

 

"내-존재(안에-있음) 그 자체, 내-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일단 이 표현을 더욱 보완하여 '세계 안에서'의 내-존재로 받아들이고 이 내-존재를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이 어법이 가리키는 것은 컵 '안의 물이라든가 장롱 '안'의 옷처럼, 다른 어떤 것의 '안'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이다. 이 '안'이라는 말로 생각되는 뜻은, 공간의 '안'에서 어떤 넓이를 지닌 두 존재자가 이 공간에서 그들의 장소에 관련된 상호간의 존재관계이다. 물이나 컵, 옷이나 옷장은, 함께 공간 '안'의 어떤 '위치'에 '있어서' 같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관계를 넓혀, 예를 들면 강당 안의 의자, 대학 안의 강당, 도시 안의 대학 등에서 '우주공간 안'의 의자에 이르기까지 확장할 수 있다. 이처럼 서로가 '안'에 있는 이들 존재자는 모두 세계의 '내부에' 나타나는 사물로서 객체적 존재라는 동일한 존재양상을 지닌다. 어떤 객체의 '안'에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와 동일한 존재양상을 가지는 어떤 것과 함께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들 모두가 특정한 위치관계의 의미로서 거론되는 존재관계는, 우리가 범주적이라고 부르는 존재적 성격이다. - 존재와 시간, 현존재의 근본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마르틴 하이데거" 뛰어나게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사피엔스 이외 감정과 의식기능이 미비한insufficiency 동식물들은 비록 우주라는 범주에서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없지만 지구라는 존재, 지구라는 객체에서 하나의 윤리적인 객체, '세계-내-존재'(가족안의 존재자, 사회안의 존재자, 민족안의 존재자, 세계안의 존재자, 우주안의 존재자, 즉 시간속 과거와 미래의 나를 완성, 나를 실현시키는 '나의 가능성')로 당당히 존재할 수 있다. (*윤리적 주체 참고: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박이문) '신은 죽었다.'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 푸코"이다. 그리하여 앎을 경험하는 윤리적인 객체는 다시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주탐사는 '나의 가능성'이라는 계(system)다. 우주(공간, field)가 거대한 블랙홀이라면 특이점(웜홀)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지평선이라는 '나의 가능성'은 즉자적대자를 완성시킨다. 그럼 시간이 '흐른다'stretch는 것은 중력 때문이다. 삶은 '완전이라는 전체의 일부', 찰라다. (관찰은 3차원에 멈춰있다.) 시선은 탐구한다. 곧 외계인은 즉자(발전되지 못한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을 때 더 발병의 징후를 깨닫는다고 말했다. '의식'이라는 현실에서 억압되어 있는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욕구, 감정, 그리고 충동들이 '무의식'을 통해 더 넓고 깊게 지각, '소망충족'되는 것이다. 사피엔스는 이중생활을 한다. 하나는 삶이라는 '의식consciousness', 다른 하나는 앎이라는 '무의식unconsciousness'이다. 프로이트가 설명한 '의식'이란 감정을 통해 느끼고 깨닫는 모든 행위와 감각이다. '무의식'이란 욕구와 감정과 충동들이 억압되어 있는,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는 힘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이어주는 '전의식preconsciousness'란 망각이 감각에게 가져다주는 피로감이다. (반의: 완화, 무의식에서 정화된 삶은 다시 의식으로 돌아간다. 피로가 풀리면 잠에서 깨어난다.) 초인이 되고자 각성할 때 엔도르핀이 발생(runner’s high)한다. 엔도르핀은 인체를 쇼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기분(氣 기운 기, 分 나눌 분)이란 선험적이며 후험적인 '오감과 오성'을 종합한 직관이 직면한 어떤 욕구적 상황을 칸트의 '제약적인' 쾌와 불쾌陰陽로 분류하는 것이다. 기분은 늘 감각을 통하지 않는다. 상상으로도 기분은 전환된다. 망각은 기억의 바다넘어 삶으로부터 잊혀진 것을 깨우는 것이다. 'Che에게 시가는 앎으로의 향수다.' Morphai - 모양을 빚는 자, Morphine - 모르핀, Endogenous Morphine - 엔도르핀, Morpheus - 삶을 앎으로 인도하는 꿈의 신, 그리스 신화의 신 '모르페우스'】 헤겔에 따르면 수면은 활동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혼이 "자신의 단순한 보편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자신의 전체성을 회복하고 자기 괴리의 치유, 헤겔의 영혼론 - 메레이 그린"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적 정신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으며, 이따금씩은 자기 존재가 뿌리를 두고 있는 무의식적 정신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 - 바이마르의 로테-괴테의 독백, 토마스 만" '현실'속 상상이 환상으로 이상(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을 목표삼지 않을 때, 초자아(양심, 윤리)는 현실이라는 자아ego(원초아ID와 초자아super-ego 중재)로 원초아(본능)를 구속한다. 반면 '꿈'은 조건없는 상상을 실현한다. 그래서 무의식에서의 초인은 모순inconsequence이 된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의식에서 불가능했던 것을 무의식, 즉 꿈은 실현시켜 준다. 의식은 '길'을 위한 숙명적인 '공간'을 모두 채우지 못한다. 그래서 '앎'으로의 무의식-음陰氣에서 양陽氣으로-은 의식이 충족시키지 못한 '자유의지를 담은 삶이라는 가변적인 길'들을 성취하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처럼 꿈은 수면 중에도 (음에서 양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생각'인 것이다. (기린은 24시간 동안 10분에서 2시간 정도 수면한다.) 무의식은 통상적, 기압(氣 기운 기, 壓 누를 압)으로 인해 억압된 신체(삶으로의)에 반응하고, 의식은 통상적, 기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앎으로의)에 반응한다. "모든 사람은 꿈속에서 자신의 성격대로 이야기하고 행동한다. 쇼펜하우어" '성격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윤리와 도덕은 사유하고 의식하는 사피엔스의 의지다. 자유로운 인간은 아름다움을 향한다. 꿈(무의식)은 의식의 화이트 홀과 같다. 꿈이라는 우연한 불규칙성에서 미학적 취향과 도덕적 판단은 질서를 잃는다. "꿈에는 직접 도달할 수 없는 태고적 인간 본성이 작용하고 있다. 니체" 이와 달리 의식으로 돌아온 꿈은 기억이 주관하는 이성의 틀에서 심리적 검열에 의해 소실, 생략, 압축, 편집, 왜곡, 착각되어 다의적으로 해석된다. 삶은 DNA를 수시로 복제하지만 원리를 자유롭게 구상하지 못한다. 【E=hv, 인간은 뉴런(시냅스)를 사용하고, 기계computer는 전하(전기장)를 사용한다. (기계는 DNA의 언어를 분석하고, 삶은 앎이라는 우주comsos의 언어를 분석하고 있다.) 시냅스synapse란 한 신경세포neuron에서 다른 세포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지점을 말한다. 뉴런은 빛(전기의 속도)보다 느리다.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정보DNA는 대락 '1,000권의 책' 50억비트에 들어있고, 두뇌의 정보량은 '2,000만 권의 책' 100조 비트다.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50억비트를 포함한 100조 비트가 상상에 의해 조합되어 만들어낼 수 있는 정보, 즉 앎이다. 이 과정에서 기시현상(dejavu; 이미 본), "무의식에 의한 행동이나 망각된 기억이 유사한 경험으로 되살아 나는 것, 위키"이 일어난다. *DNA 정보 참고: 코스모스】 하지만 꿈은 이성으로부터 자유롭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의식은 무의식의 단계를 거치고, (전형적인 일상은 모두 무의식 속에 전개된다) 무의식은 스스로 존재하는 심리적인 것이다. 오늘도 사피엔스는 백일몽daydream을 꾼다.

 

-

 

사피엔스는 어두운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지하의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빛으로 향해 동굴의 폭 가득한 통로가 입구까지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손발이나 목도 속박되어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쭉 동굴의 안쪽을 보면서, 되돌아 보는 것도 할 수 없다. 입구의 아득한 윗쪽에 불이 불타고 있고, 사람들을 뒤로부터 비추고 있다. 불과 사람들의 사이에 길이 있어, 길을 따라서 낮은 벽이 만들어져 있다. 벽을 따라서, 여러가지 종류의 도구, 나무나 돌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나 동물의 상이 벽 위에 옮겨져 간다. 옮겨 가는 사람들 속에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있으면서, 입다물고 있는 것도 있다. - 국가, 플라톤" 누군가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 (지동설) 덕에 삶은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앎을 깨우쳤다. 그러나 삶에게 앎은 여전히 두려운 대상이다. 삶이 본 그림자는 앎의 실체가 아니였던 것이다. 괴테가 말했다. "만약 우리의 눈이 태양의 속성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빛을 볼 수 있겠는가?" 족쇄에 묶여있는 삶은 각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피엔스는 무거운 족쇄를 풀고 태양이 내려찌는 동굴 밖으로의 탐험을 나서기에 이른다. 태양의 존재를 의식consciousness한 사피엔스는 아폴론 신전Delphi을 지었고, 무의식적인 동기unconsciousness하에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oracle을 신전 앞마당에 새겼다. ["'그들이 풀려나서 불과 지나가는 물건들 쪽으로 머리를 돌리도록 강요받지만, 눈부심 때문에 똑바로 볼 수도 없다. 그들이 밖으로 끌려가지만, 햇빛을 대할 수 없고, 그들 주변에 있는 자연적인 대상들도 어느 하나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그것들의 그림자들이나 반사물들을 본다. 그런다음에, 그 대상들을 직접 보고, 별들과 달을 보고, 태양을 본다.' 위쪽 세계의 사물들을 보기 위해 오르는 것을 자네는 혼이 가지적인(옳을 가可 알 지知) 것의 (하늘 위의 신들의 영역, 파이드로스) 영역으로 오르는 (휘페리온의) 여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도 좋을 걸세. - 국가, 플라톤"]《물질(Matter; 나-self)은 분자(Molecule; 물 혹 이산화탄소 혹 포도당 etc)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는 원자(Atom; 수소 혹 산소 혹 질소 etc)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 속에는 원자핵(Nucleus)을 도는 전자(Electron)구름이 있다. 원자핵 속에는 중성자(Neutron)와 양성자(Proton)가 있고, 그 속에는 업 쿼크(Up Quarks)와 다운 쿼크(Down Quarks)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다음이 끈이론(String Theory)이다.》 사피엔스는 자신을 알고 싶었다. 결국 나르키소스는 연못을 찾았고, 비춰진 타자를 통해 거울효과Mirror neuron를 얻어 각성하고, 그 결과를 (DNA에) 각인하기 시작했다. (삶은 타자를 통해 나를 부정하고, 다시 나를 긍정DNA replication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 바로 경험과 학습이다. 21일 동안 자신의 습관을 바꾸면 DNA 유전자 구조도 변경될 수 있다. "'DNA makes RNA makes protein.' 생물이 지니는 정보는 DNA에 저장되고 복제되어 자손에게 전하여진다. 또 정보를 발현할 때는 DNA의 정보는 먼저 RNA의 형태로 전사되고, 다음에 단백질의 형태로 표현.번역된다. (...) 단백질의 분자는 거대분자다. 단백질은 DNA와 RNA의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한편 DNA와 RNA를 만드는 데는 효소작용을 하는 단백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원시의 지구 위에서 생명이 탄생 하였을 때, 단백질이 먼저 생겼을까? 핵산이 먼저 생겼을까? - 단백질이란 무엇인가, 후지모토 다이사부로") 태양을 보고 양력陽歷solar calendar을 만들던 사피엔스는 기어코 달빛아래 그림자 놀이를 하며 음력陰歷lunar calendar을 고안해냈다. ('해가 뜬다'가 아니라 '지구는 돈다'. 이것이 관습이다.) 망각이 감각에게 가져다주는 피로감에 어둠이 깃들었다. 삶을 비춰주던 태양이 지고 별(칸트가 명명한 섬우주island universe, 'M31')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한창 사피엔스는 아폴론적 세계에서 인상(일출 해돋이)을 배웠으며, 하나의 조각배를 띄우고 신념과 원리와 고독에 사로잡혀 우주력cosmos calendar(cosmos - 질서, chaos - 혼돈)을 찾아 나섰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에 광자를 추가했다. 빅뱅에서 원시우주의 구성까지의 과정 (10^-33 cm)은 아주 짧은 시간(0초 ~ 10^-43초 사이)인데, 이것을 재기 위해서는 '광자가 빛의 속도로 플랑크 길이를 지나간 아주 짧은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플랑크 시간이라고 한다. 광자가 전자기력이고, 이웃인 W보손과 Z보손은 약한 상호작용을, 글루온은 강한 상호작용을 한다. 광자, W보손, Z보손, 글루온은 모두 '힘을 매개하는 입자'다.》

 

"(LHC에서) 신의 입자, 힉스(힘을 매개하는 마지막 입자)를 발견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뭘 할 것인가? 리사 랜들" 《에너지가 우주라는 장(field)을 자극하면 장의 파동이 만들어져 입자가 생성된다. 에너지가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를 자극하면 '빛'의 파동으로 광자라는 입자가 생성된다. (질량이 없는 광자는 빛의 속도가 가능하다.) 에너지로 힉스 장(Higgs field)를 자극하면 힉스 보손이라는 입자가 생성될 것이다. (광자 대신 약력 게이지 보손이 약력 전하를 가리면 약력 게이지 보손은 원자핵보다 작은 영역에서 질량을 갖게 된다. 힉스 장은 약력 전하를 띠지만 중성이고, 광자는 약력 전하와 상호 작용하지 않아 중성으로 남는다. '약력 대칭성'이 '긴 거리에서', '저에너지 상태에서' 깨지면 힉스 메커니즘은 고에너지 상태의 입자 질량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참고: 이것이 힉스다 - 리사 랜들》 힘을 매개하는 입자 '게이지 보손'에서 가상입자 '중력자'를 발견했다. 그럼 '힘'의 마지막 수수께끼, 중력의 원천으로 어떻게 무엇을 할까. (우주선을 가속하면 인공중력을 얻을 수 있다. Interstellar나 The Martian을 보면 우주선이 Inception의 팽이처럼 기울지 않고 끊임없이 돌고 있다. 그래서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은 무중력상태를 벗어나 내부를 순조로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된다.) 전자기력, 약력, 강력으로 사피엔스는 무엇을 이루었나.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에서는 암흑 물질 연구도 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4가지 힘들 중에 가장 약한 중력은 그 위력이 가장 엄청나다. 파도가 치기위해 달이 지구를 도는 '중력'(질량을 갖은 물체가 서로 당기는 힘: 태양의 중력이 미치는 가장 먼 곳이 오로트구름지대, 지구의 평균 공전 속도는 29.783km/s)이 필요하고, 전구를 밝히기 위해 '전자기력'이 필요하고, 원자력을 얻기위해 중성자와 양성자를 변화시키는 '약력'이 필요하고, 원자 속 원자핵이 뭉쳐있기 위해 (분자로 구성된 나를 유지하기 위해) 퀴크끼리 결합시키는 '강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블랙홀의 중력은 빛도 쓸어간다. '힘에의 의지'란 나를 상실하므로써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너 자신을 알라'했고, 그리하여 '태양' 계(system)에서 원을 그리는 중력에의 의지란 어떤 미래(삶의 공간, field)를 가져올 것인가. 힉스의 정확한 성질을 알고 중력자를 분석하면 새로운 에너지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새로운 '삶의 공간'은 새로운 입자를 생성할 것이다.

 

'운동의 원인은 에너지다. 목적은 아름다움이다.' 삶이 운동하게 만드는 ("근육 및 운동 제어를 돕는" - 뇌과학자 김대식) 신경전달물질 도파민dopamine은 뇌신경세포 흑질subtantia nigra과 뇌의 여러 영역에서 생성된다. 웃을 때 뇌는 기분을 향상시키는 긍적적인 요소 세로토닌, 도파민, 엔돌핀 등을 유발한다. 망각 또한 뇌에 일시적인 충격으로 도파민, 아드레나린, 세로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신을 분비한다. 성욕과 관련이 깊은 세가지 신경물질은 도파민, 세로토닌, 그리고 가바Gaba라 부르는 감마아미노낙산이다. 즐거움은 사피엔스가 모르던 앎이다. 사피엔스가 운동하는 것은 도파민 때문이고, 도파민을 생산하기 위해 웃음과 농담을 상대와 나누고, 그래서 망각과 이성異性에서 쾌락을 보충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삶의 공간'을 자극하면 파동으로 입자가 생성된다. 입자가 공간에 그려내는 인상impression은 사피엔스가 보기에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삶이 현재 알고 있는 앎이다. 현재의 앎은 앎의 앎이 아니고, 삶이 아는 앎이다. '세계-내-존재'인 윤리적 객체는 앎이라는 주체를 경험하며 '자아 확장', self-expansion으로 (아바타처럼, 환상통phantom pain처럼 '나의 가능성'에 참여하는 것들 *참고: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 김대식) 새로운 주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사피엔스의 삶은 현재 섭씨 37도다. 그리고 사피엔스의 시선은 가시광선, "보.남.파.초.노.주.빨"에 고정되어 있다. 분자가 진동하면 열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태양의 적외선(사피엔스는 가시광선만 볼 수 있지만 보어뱀류와 방울뱀류는 다른 동물에서 나오는 적외선 열을 감지할 수 있다.)은 공기의 분자를 진동시키거나 물의 분자를 진동시켜 지구의 온도를 높여준다. 사피엔스는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분자가 활동을 멈추는 경우는 절대영도Absolute Zero에 도달했을 경우다. 절대영도란 섭씨 -273.15도, 엔트로피는 0이 된다. 절대영도가 가능하다면 객체는 '세계-내-존재'에서의 지위를 상실하는가. '나'라는 기준은 자아에 달렸다. *참고: 빛과 색의 이야기 - 윤실》아름다움을 노출시킨 앎, 하지만 앎은 여전히 자신을 은신한다. 잃어버린 언어는 윤리(인류 윤倫, 다스릴 리理)였고, 나, '사피엔스의 가능성'은 타자의 시선이였다. '성격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결정되므로' 방언이 생겨났고, 언어의 정원은 앎을 피워냈다.

 

-

 

Ophiuchus (intermission)

 

-

 

2050

 

몸과 마음의 기능이 경지에 도달하여 완벽하게 발휘된 상태를 덕virtus, 아레테arete라 한다. 미덕(arete; 소크라테스의 덕이란 지행합일, 즉 진리와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아는 것, 앎을 의미한다. (앎에는 의무와 행동movement이 뒤따른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미덕(용기를 가지고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platonic(정신에 집중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신nous이란 나를 이루는 몸과 영혼과 이성(logos)에서 '신적인 이성'을 말한다. (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영혼 안에]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정신nous'의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 엔네아데스, 플로티노스" 있었으나 없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회상), 소멸되었으나 다시 생성되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상상), 계절은 변화가, 빛은 어둠이, 소리(진동)는 진공이, 아침이 아름다운 것은 저녁 때문이다. 기쁜 것은 슬픔 때문이고, 그것은 이성이 질료에 부여하는 질서, 우주적 질서인 로고스(이성)에 의해서 이다. [빛의 속성을 갖은 물질(나)은 빛에 의해 쌍생성되어 물질matter과 반물질anti-matter로 나뉜다. 그리고 물질인 전자(-)와 반물질인 양전자(+)가 만나 쌍소멸되어 다시 빛(광자)이 된다. 그 후 빛은 다시 물질과 반물질로 쌍생성된다. 만약 암흑물질과 반암흑물질이 쌍소멸되어 암흑광자를 만든다면, 중력에 반응하는 암흑광자에서 보이지 않는 중력이 무엇으로부터 (암흑물질) 질량을 얻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 질량을 알아내면 힘의 마지막 비밀의 빗장이 풀린다. 그리하면 힘을 매개하는 입자 '게이지 보손' 속 가상입자 '중력자'를 추적할 수 있다.]

 

'우리의 눈이 태양의 속성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빛을 볼 수 있겠는가.' 우주(주체)에서 물질(삶의 주체이자 우주적 객체)을 제외하면 반물질(질량을 가지고 우주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객체)이다. 나를 제외시키면 나머지는 반물질이다. 미덕을 앎에 대한 삶의 사랑eros이라 하고, (에로스는 부당하지 않다. 에로스는 강제 당하지 않고 어떠한 완력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에로스는 공정하고 절제심이 있으며, 쾌락을 지배한다.) 물질과 반물질의 질서를 다루는 것을 '신적인 이성', 정신nous이라 가장하자. "그러므로 만일 신을 보고 싶어 하고 또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한다면, 정녕 처음부터 신을 닮고 또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엔네아데스, 플로티노스" 아름다움(미의 결정체)을 보고 싶고, 또 보려 한다면, 로고스(이성)에 의해 정신에 이르고 '온갖 아름다운 형상들eide'에, 아름다움에 끌리게 된다. 앎의 주체가 되는 빛, 객체가 되는 어둠, 계(system)가 되는 정화, 장(field)이 되는 삶에는 아름다움의 속성이 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없다면 밝음은 무의미하다. 일몰과 일출의 쌍소멸 후 찾아든 여명은 앎으로 다가가는 삶의 약동이다. "오로지 신을 보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그와 반대의 경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 빵세, 파스칼"

 

아름다움(앎)이 변하면 아름다운 것(지식의 기준)이 변한다. "눈이 어떻게 해서든 태양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눈에는 태양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이 생겨났다고 말해야 하듯이 그처럼 영혼도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영혼이 전혀 아름다운 것으로 태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엔네아데스, 플로티노스" 없음이 있음으로 우주적 질서 로고스를 정의하는 것, 여기서 미덕은 질료를 다듬는 제작자의 이성이다. 시선은 아름다움(형상)을 포착하고 그와같이 아름다워지려는 복제의 기제다. "아름다운 것은 늘 아름답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 안에는 결코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각각 흡사하면서도 낯선 지반 위에서 방황하지 않고, 저마다 현재의 그 자리가 곧 존재하는 그것이다. - 엔네아데스, 플로티노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에서 발단된다. 앎에는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아는 미덕이 필요하고, 제작자의 시선은 앎이 보여준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운 것을 창조한다. 향연에서 나오는 신들의 음료 넥타nektar가 '정신적인 물질 hyle noete'이라면 그것이 윤리인가. 「'신의 고결하고 숭고한 향연Symposium을 위해' 반죽되고 부드러워진 빵은 욕망이란 화덕에 알맞게 익혀진 후 비로소 아름다운 연회에 사용된다. 비록 우리가 속한 삶이 '공포로 가득한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하나의 작은 조각배만을 의지하며' 고독에 잠기는 아폴론적 세계이거나, 철학(지혜를 사랑함)과 앎을 경험하기 위해 지각을 버리고 슬픔을 지우려 망각에 빠지는 디오니소스적 세계인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껏 중용 뒤에 감춰진 '고결하고 숭고한 빵'을 나누며 '비극의 탄생'이 들어나는 향연에 "디오니소스를 심판관"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따라서 '착하지 못한 본능'은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윤리를 품은 권력'은 기쁨과 쾌락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피엔스는 철학을 철학한다. 소멸과 생성 속 '앎에 대한 지성의 욕망'으로 사피엔스는 (쌍소멸과 쌍생성을 위해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의 - 미토콘드리아: 모계, Y염색체: 부계)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을 지혜로 사랑한다. (역설적이게도 상스러움vulgar에 매료되는 것〈부조리〉은 질서로 인한 질식과 향수 때문이다. 그리고 질료를 다듬는 제작자는 이것을 상품화하고 소비〈부조화〉하게 만든다. 미래의 '그 무엇'은 현재에 무척 상스러울 것이다. 선험적이며 후험적인 직관으로 앎을 답습하는 과정은 짧아질 것이다. 알지못하는 앎의 부분은 상스러울 것이다. 고전은 여전히 읽힐 것이고, 카뮈는 부조리를 외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넥타다.) 요컨대 질서를 다루는 이성과 윤리로써 사피엔스는 '너 자신을 알고', 정신은 사랑platonic love을 한다. 사피엔스가 찾아헤메는 에로스eros, 그것은 조각배에게 등대가 되어준다는 것, (romance,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낭만과 로망과) 애정의 시작이고, 그리하여 언젠가 스스로 빛나 바다의 별Stella maris이 되어준다는 것, 영원한 우정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한낮 불장난에 불과한가. 빛의 속성을 갖은 자는 타오르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City of stars, there's so much that I can't see. 별들의 도시여, 그대 나만을 위해 빛나는 것가요? 별들의 도시여,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군요. - 라라랜드"

 

"사진의 기술적인 기원 때문에 그것을 어두운 통로 (암실/어두운 방: camera obscura)의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밝은 방(camera lucida)을 언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선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의 본질은 내밀함 없이 전적으로 바깥에 있으나 내면의 사유보다 더 접근할 수 없고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의미는 없지만 가능한 모든 의미의 깊이를 부른다. 그것은 세이렌(반인반어의 요정)의 매력과 매혹을 만들어 주는 그 존재-부재를 지니고 있음으로써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뚜렷하다. 블랑쇼' - 밝은 방, 롤랑 바르트" 앎은 삶의 권리인 동시, 삶에 의무를 요구한다. 세이렌을 향한 율리시스의 시선은 자유롭다. 아름다움을 향한 시선은 자유롭지만 그것에는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스러운 즐거움)가 따르고, 자신을 돛대에 묶지 않고는 망각(기억의 바다넘어 삶으로부터 잊혀진 것을 깨우는, "생명이 영원히 고정되는 장소, 즉 세이렌들이 거주하는 바로 그 장소, 레나타 살레츨")이 가져온 매혹적인 세이렌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고통스러운 즐거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삶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기투(기투란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를 가지며 스스로 자유로울 책임이 있다. - 사르트르" '밝은 방'light house은 쌍생성하는 것(물질matter과 반물질anti-matter)에서 쌍소멸(어두운 통로를 지나 빛이 되는 것)을 이루며 '존재-부재를 지니고 드러나지 않으면서 뚜렷한' 찰라를 만든다. (예술이란 이 찰라를 담은 인위가 보편성을 뛰어넘어 승화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과거와 현재는 상호 침투하고 그 각각은 에워싸는 것인 동시에 에워싸이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살flesh'이라고 표현했다. 유전체는 후험적인 가능성과 선험적 지식을 갖고 있고, 감각 기관은 표상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한다. 그리고 색채를 다루는 화가는 대상object인 사물을 단순히 지각(시선)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체subject가 되어 '세계-로의-존재', 회상과 이상과 상상이 상호 침투하는 한 덩어리의 '살flesh'을 확대하거나 축소해 보여준다. 이 화가의 시선을 퐁티는 '봄의 나르시시즘'이라 말한다. *퐁티【 세계-로의-존재 etre-au-monde】와 하이데거【세계-내-존재 In-der-Welt-sein】 모두 에드문트 후설의 영향을 받았다.) 빛은 대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즉자에 불과한 대상은 무질서에 빠져있고, 관찰자의 시선, 즉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감정의 돌발은 질서를 요구한다. 질서란 사피엔스의 의무다. 윤리(나의 가능성)의 부재는 무질서를 만들어 이성(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새로운 것을 정의(just-ify)하게 한다. ['세계-내-존재', 공간 '안'의 어떤 위치에 함께하는 키에르케고어의 "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윤리적인 것인 한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인 한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 일체the whole에 대한 텔로스(완전함teleios을 위한 목적telos)는 자기 바깥에 있지 않으나 자기 바깥에 가지고 있는 목적이다. 윤리적인 것은 늘 보편적인 것인데, 예술이 이 같은 보편성을 뛰어 넘는 경우(승화)는 각성이 진화의 동인이 되어 칸트의 도덕률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륜적humanity인 것에 대한 숭고한 변명을 전해야 하는 것은 원칙적인 채식주의자로서 죄책감을 느끼며 고기를 섭취《운동을 위한 부조리, 운동의 원인은 에너지, 목적은 아름다움》하는 아인슈타인의 고뇌《삶은 그에게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영혼의 대장간에서 벼리어 내라고 주문한다. *참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때문이다. 헬레네(아름다움)를 되찾으려 트로이 원정에 나선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희생의 재물로 바친 것에 비유된다. *아인슈타인 참고: 인생의 발견, 시어도어 젤딘) 객체라는 개별자가 보편적인 세계가 가져다 주는 유혹Anfechtung으로부터 자신을 부정하고 주체라는 보편성을 찾을 때 텔로스는 보존된다.]

 

-

 

저승에 있는 다섯 개의 '깊은 강'은 아케론(슬픔과 비통함), 코퀴토스(후회스러운 기억에 대한 탄식), 플레게톤(불로 이루어진 강. 이 강을 지나는 동안 영혼이 정화된다. 인간에게 플레게톤을 뿌리면 올빼미owl가 된다. 한편 '올빼미의 눈을 가진glaukopis' 미네르바<로마식: 미네르바, 그리스식: 아테네>의 부엉이owl는 지혜의 상징이다.), 스틱스("자욱한 안개 속으로 스튁스 강이 느릿느릿 흐르고 강 옆으로 난 이 길로 갓 죽은 망령들, 갓 묘지에 묻힌 인간의 그림자들이 내려간다...... 바다가, 세상의 강이라는 강은 모조리 받아들이듯이 이 저승 궁도 망령이라는 망령은 모조리 받아들인다. - 변신이야기" 오케아노스Oceanus는 3,000개의 강과 3,000명의 딸들을 낳았는데, 오케아노스의 장녀 스틱스Styx는 열망Zelos, 승리Nike, 힘Kratos, 완력Bia을 낳는다. 증오의 강 스틱스는 아킬레우스가 발꿈치만 제외한 나머지 몸을 담가 불멸의 힘을 얻은 곳이다. 그래서 발꿈치는 아킬레우스의 치명적인 급소였고,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아폴로의 도움으로 그의 급소를 명중한다.), 그리고 망각의 강 레테Lethe다. 흐르는 레테의 강 위로 잠의 신 휘프노스hypnotism<솜누스insomnia>의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솜누스의 맏아들이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다.

 

나르키소스(강의 신 케피소스의 아들, 나르키소스는 망연지실이라는 뜻)는 스틱스강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르키소스의 시선은 '봄의 나르시시즘'이다. 나르키소스의 이성(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즉 직관【칸트의 이론이성; 전두엽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이나 수의 운동의 결과를 예측한다. 전두엽은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전두엽은 근심과 불안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두엽을 절개하면 환자의 불안감이 줄어든다고 한다. 아폴론에게서 예언의 능력을 받았으나 그의 구애는 거절한 카산드라는 훗날 파리스가 스파르타에 가면 트로이에 재앙이 올 것을 예언한다. 하지만 아폴론의 저주로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 얼마 후 파리스는 베일에 쌓인 헬레네(아름다움)를 탈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헬레네로 인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빛나는 자'(아폴론; 태양신)로 인해 발설된 아름다움은 다시 은신하고자 한다. 미는 은신처에 숨어 있을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전두엽 참고: 에덴의 용, 칼 세이건】은 동시적인 오감의 부재로 실재에 적용되지 못한다. 불만족스러운 (욕구불만) 나르키소스는 예민해hysteria진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보는 내 사랑에, 나는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마침내 닿지 못하는구나. - 나르키소스, 변신이야기" -비춰진 타자를 통해 거울효과Mirror neuron를 얻어 각성한- 나르키소스는 슬픔과 비통함에 빠졌고, 후회스러운 기억에 대한 탄식에 젖어들었으며, 사랑의 불길에 자신을 휠휠 태워가고 있었다. 나르키소스의 사랑은 손을 내밀어도 마침내 닿지 못하고, 그의 사랑(나 안의 타자, "[이념으로서의 생명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생명이 주체가 되는 제 자신의 운동이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의 타자로 만들고...... 자신에게 귀환하고 또 자기로의 귀환을 완수하고자 그 자신에게 대상의 형식을 부여한다. - 자연철학, 헤겔")은 그를 피하며 그를 증오한다. "신들이시여,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소서. 아, 슬픔이 내 힘을 말리는구나. 내게 이제 생명의 기운이 얼마남지 않았구나. 나는, 내 젊음의 꽃봉오리 안에서 죽어가고 있구나. 죽음과는 싸우지 말자. 죽음이 마침내 내 고통을 앗아갈 것이니...... - 나르키소스, 변신이야기" 죽어가는 나르키소스는 행복할 수 없었으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망각으로 (주이상스) 즐거웠다. 내게 없는 것, 소유하지 못한 것을 충족하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Narcissism이다. '앎, 아름다움'으로 도약한 삶의 운명, '삶을 위해 존재하는 앎, 아름다움을 욕구하는 즉자'는 마침내 수선화를 피워낸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자존심, 자부심, 고상함, 사랑을 다시 한 번"이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 아름다움을 피위내기 위해 (완성을 위해) 신은 죽어야만 했다.

 

고독에 잠기는 아폴론적 세계에서는 '태양을 향하는 꽃' 해바라기가 핀다. 젊음의 꽃은 피워지고, 평화로운 세계의 '하나이자 모두인 것'을 자신을 통해서 생성해 내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영혼은 '높은 곳을 달리는 자', 휘페리온hyperion(태양신 헬리오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의 아버지)이 된다. 포이니코스(피닉스, 스스로 재생하는 동물)는 아버지의 무덤이자 자신의 요람인 둥우리를 물고 '태양의 도시'(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 "하늘 위쪽의 영역hyperouranios topos - 플라톤")로 날아가 휘페리온 신전 문 앞에서 그것을 태워버린다. (생성에서) 형상이 있으면 그것의 질료가 되는 원소는 자신을 헬리오폴리스 앞에 내려 놓으므로써 (플레게톤으로 정화됨으로써) 오롯이 자신에게 깃드는 것이다. *참고: - 휘페리온, 횔덜린, - 퓌타고라스-불사조, 변신이야기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영혼을 두 마리의 말(욕망과 의지)이 끄는 마차(이성)에 비유했다. 칼 세이건은 이 두 마리의 말을 각각 '생존을 위한 파충류의 뇌'인 R복합체와 '포유류의 오래된 뇌'인 변연계로 보았고, 마부를 '사고와 언어를 당담'하는 신피질로 비유했다. R복합체, 변연계, 그리고 신피질을 합친 것을 영혼triune brain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플라톤의 삼분법은 욕망epithymia, 감성thymos, 그리고 이성logos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과 의지'는 운동의 목적인 아름다움에 이르기 위해 우주적 질서 로고스를 사용한다. 영혼은 원인인 잠재태(씨앗; 잠재적인 능력 또는 힘)가 목적인 현실태(열매; 실제의 또는 실질적인 작용)로 아름답게 피어나도록 만드는 도구다. "질료는 잠재태이며, 형상은 현실태다. 아리스토텔레스" 질료(앎)가 잠재태(씨앗)이며 형상(삶)은 현실태(열매)일 때 "신체는 영혼의 현실태(열매)가 아니며, {오히려} 영혼이 어떤 신체의 현실태(열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원인은 영혼이고 목적은 아름다움(앎)이며, 생물(삶)을 구성하는 '영혼과 신체'의 결과는 고통스러운 즐거움Jouissance(죽음)이다. 아리스트텔레스는 (헤겔 역시 「자연철학」에서) 영양섭취능력, 감각능력, 욕구능력, 장소이동능력, 사유능력 등의 "감각"이 영혼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영혼이 만드는 아름다움의 크기는 나를 이루는 '세계-내-존재',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질료는 형상의, 앎은 기억의 소산이다. 다시 (인중무과설에서의 인중유과론) 아름다움이 실현되었을 때 목적은 달성된다. 《몸과 마음의 기능이 경지에 도달하여 완벽하게 발휘된 상태가 덕virtus이고, 이것은 영혼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기(귀신 神 기운 氣)를 몸을 돌아다니면서 작용하는 양기(볕 陽 기운 氣) 혼(넋 魂)이라하고, 정기(정할 精, 기운 氣)를 농축된 음기(그늘 陰 기운 氣) 백(넋 魄)이라고 하면, 신체를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 혼백, '이성'적 정신(정할 精 귀신 神)은 신체의 변화에 결부되어 있는 '욕망'적 감각(느낄 感 깨달을 覺; sensation)과 '감성'적 지각(알 知 깨달을 覺; percep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망각(잊을 忘 깨달을 覺)하고 인식(알 認 알 識; cognition)하고 각성(깨달을 覺 깰 醒)한다. *참고 영혼론 입문, 이정우》 "마음이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고, 합리적인 이성은 마부와 같다. 감정은 이성이라는 마부에 의해 멈춰져야 하는 야생마 같은 존재다. - 파이드로스, 플라톤" 원초아ID와 초자아Ego에서 에너지를 얻어 마차를 끄는 것, 그리하여 '힘에의 의지'에서 지력으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해석에서의 이성consciousness이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unconsciousness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삶의 동기다. "영혼의 모든 기능과 능력은 하나의 공통된 토대에서 도출된 세 개의 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인식의 능력(이성 logos), 쾌락과 고통의 느낌(감성thymos), 욕망의 능력(욕망epithymia)이다. - 판단력 비판, 칸트" 깊은 수면에 빠지면 노르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이 중지되고 변연계 부위와 간뇌의 교뇌피개 등이 활성화 된다. 웃거나 움직일 때 세로토닌, 도파민, 아드레나린이 증가하는 것과 대조된다. '삶'을 집행하는 의식이 측두엽 아래 변연계의 억제중추를 켰다면, 무의식속의 '앎'은 활성중추를 작동해 파충류의 뇌인 R복합체를 활성화시켜 사피엔스를 (보는 것 - "상상": 생각 想 형상 狀, "imagination") 꿈꾸게 만든다. *뇌 참고: 에덴의 용, 칼 세이건, 임지원

 

이성은 윤리적이다.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던 시대가 지나고 사피엔스의 앎, '지능'은 윤리적 판단이 두루 통용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6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강 부피는 430~600cm³였으나, 20만 년 전 발원한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강 부피는 1,100~2,200cm³다. 늘어가는 지식을 수용하기 위해 두개골의 부피가 점차 커졌던 것이다. 실제로 수백만 종의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분만의 고통을 느낀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을 훔쳐 지상으로 가져가 문명을 이뤘고, 제우스는 불의 댓가로 "모두 자신의 재앙을 껴안으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게 -일과 날, 헤시오도스" 올림포스의 공예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판도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플레게톤'의 불같은 사랑의 정화는 '최초의 여인' 판도라에게 희망을 안긴다.】 어찌보면 그것은 헤스페리데스의 동산Garden of Eden 헤라의 과수원에 열린 '아름다움(앎)의 상징' 황금 사과나무 탓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씌여있는 황금사과를 갖기 위한 올림포스의 세 여신 헤라<유노>, 아테나<미네르바>, 아프로티테<베누스>의 결투로 비롯된다. 파리스가 심판을 보았는데,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뽑아주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헬레네였다. *참고: 일리아스, 호메로스

 

-

 

델포이의 명령 '너 자신을 알라' 는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알라'는 의미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바로 그런 신적인 (지적인) 것이 있음을 알라'는 것을 뜻하며, 이 '신적인 것theion'은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이성logos과 지성nous을 소유하고 있음을, "신의 선견과 배려에 의해서 '그 안에 혼(생명)을 지녔으며 또한 지성을 지닌 살아 있는 것', 플라톤 - 티마이오스, 박종현 김영균 공동 역주"을 지적한다.【삶은 무질서하고, 신적인 앎은 망각과 각성에서 질서를 다룬다. "신은 언제나 측정하고 있다. 플라톤" '우주를 구성한 이'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의 설명처럼) 본(밑, 근본 本)들 가운데서 어떤 영원한 형상,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어떤 영원한 모상(대상을 본떠서 만든 것)을 만들었다면 (삶을 창조했다면, 그래서 앎이 형태를 갖췄다면), '언제나 존재하는' 이것은 생성을 갖지 않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 '영원'이라는 본성을 따라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합리적 설명과 함께 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삶"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쌍생성과 쌍소멸을 반복하는 '비이성적인 감각'과 함께하는 의견(판단)의 대상이 된다. '아름다움'을 비유해 부족함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 하면, 삶이라는 것은 개별 질서들이 무질서한 사회라는 우주 속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앎이라는 기하학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아름다움은 「생의 한가운데」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 무엇이 영원하다는 것은 "신이나 진실성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다음사전"이다. "불은 흙의 죽음을 살며, 공기는 불의 죽음을 살고, 물은 공기의 죽음을, 흙은 물의 죽음을 산다...... 불의 죽음은 공기한테 탄생이고, 공기의 죽음은 물한테는 탄생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입체(모두 정다각형, 모두 합동, 각각의 꼭지점에서 만나는 도형의 숫자가 같다)에서 불은 정4면체(원자, 메탄분자, 암모늄이온), 흙은 정6면체(소금이나 광물의 결정), 공기는 정8면체(다이아몬드의 결정), 물은 정20면체(포진 바이러스)이고, "다섯 번째 것fifth element이 '에테르는 12면체(황도대 12궁)' 남아 있는데, 신은 이것을 우주를 위해, 우주를 다채롭게 그려 내느라 이용하였습니다. 티마이오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그대는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다', 즉 그대는 욕망epithymia, 감성thymos, 그리고 이성logos이란 성향과 성분을 지녔으니 이 사유능력(감각)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영혼의 아름다움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기예에 대한 사랑' philotechnia) 진.선.미를 갖추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진을 과학으로, 선을 철학으로, 미를 예술로 구분했는데, 세 가지 모두 지식과 지혜에 연관되어 있다. 'science'는 지식이라는 라틴어 scientia에서, 'philosophy'란 사랑이라는 의미의 '필레인'과 지혜라는 의미의 '소피아'의 조합어이며, 'art'란 학문과 지식과 지혜라는 라틴어kunst '알고있다'(ars, techne: 기술, 솜씨)에서 기원했다. "철학은 [......] 배울 수 없으며, 이성과 관련해서는 기껏해야 철학함을 배울 수 있다. 칸트"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실체의) 원인은 영혼이고 목적은 아름다움이며, 나를 구성하는 '영혼과 신체'의 결과는 주이상스다. 인상(일출 해돋이; 시간)을 배운 (타인지향적) 「고독한 군중」의 지성(nous; 정신, 영혼)은 슬픔이였고, 아름다움은 행복이였다. 그리고 "영혼의 아름다움 - platonic",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잠재적 고도성장 사회 : 전통지향형 → 인구성장기 사회 : 내부지향형 → 인구감퇴 사회 : 타인지향형)

 

'욕망과 의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고, 감각하게 하고, 생각할 수 있게, 아리스토텔레스" 한다. 따라서 영혼은 형상(형식)이 되고, 앎(질료)을 사용할 수 있는 삶(형상)은 현실태가 된다. "실체(어떤 대상의 진정한 정체)는 '형상, 질료, 그리고 그 두 가지로 구성된 것'의 세 가지 의미로 말해질 수 있다. 이 가운데 질료(앎)는 잠재태potentiality(씨앗)이며, 형상(삶)은 현실태actuality(열매)이다. 그 두 가지로 구성된 것은 '영혼을 가진 것'(앎에서 삶으로 운동하는 것)이므로, 신체는 영혼의 현실태(열매)가 아니며, {오히려} 영혼이 어떤 신체의 현실태(열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신체는 영혼의 형상이 아니며,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원인은 삶이고, 목적은 아름다움이다.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이것들은 여러가지 의미로 말해진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가 구분했던 바와 같이 세 가지 의미에서 {신체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운동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능동인 또는 작용인)', 무엇을 위해(목적인), 그리고 '영혼을 가진 신체의 실체로서(형상인)' {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파이드로스」에서 "스스로 움직이는to hauto kinoun" 혼은 사멸하지 않고 불멸한다. [정신spirit(nous)은 사멸하지 않는다. 정신에는 생성과 소멸이 없지만, 정신(앎)을 따르는 "자기 안에서 자기로부터 운동의 원천을 갖는 물체, 파이드로스" 삶에는 생성과 소멸이 존재한다.] 신들의 말들(욕망epithymia, 감성thymos)과 마부(이성logos)는 모두 훌륭하고 혈통이 좋지만, 다른 종족들의 말들은 뒤섞여 있다. [플라톤은 '사멸하는 부류의 혼'을 몸통 위쪽에 자리한 흉강(감성)과 몸통 아래쪽에 자리한 복강(욕망)으로 보았고, '불사의 혼'을 뇌(이성)라고 보았다.] 사피엔스의 마부(이성)가 모는 한 쌍의 말 중 한 필은 훌륭하지만, (앎으로의 욕망,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한 필은 그와 반대여서 (격정thymos에 끌려) 혼의 날개를 오그라들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fly", 영원으로의 각성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날개는 본래 무거운 것을 신들의 종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높이 들어 올리는 힘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몸에 속하는 것들 중에서 신적인 것에 가장 많이 관여한다네. 그런데 신적인 것은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하고 그런 종류의 자질들을 모두 구비하고 있어서 이런 것들에 의해 혼은 날개가 무럭무럭 자라고 커지지만, 추함과 사악함 같은 그와 반대되는 자질들에 의해서는 혼의 날개가 오그라들고 사라진다네. - 파이드로스" 온전한 날개로 높이 날기 위해 (그래서 행복이 슬픔의 공간을 채우도록) 휴식을 취하는 말들에게는 암브로시아(신들이 먹는 음식, 불멸의 능력을 지녔다)와 넥타르(신들의 음료 넥타nektar가 '정신적인 물질 hyle noete'이라면 그것이 윤리)가 필요한데, 이것을 섭취하지 못한 말은 (지식만을 쫓아, 아름다움만을 쫓아) 생을 살고 (정신을 전승시키지 못한체) 혼을 잃는다. "하늘 위의 영역은 혼의 키잡이인 지성에 의해서만 볼 수 있고 모든 참된 지식이 관여하는 실재다. 혼은 회전운동에 따라 같이 돌며 정의 자체와 절제 자체와 지식 자체를 본다. - 파이드로스" 혼(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은 진실로 실재하는 진정한 지식을 보고 즐긴 뒤,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Hyperion, 가지적(옳을 가可 알 지知)인 세계에서는 스스로 지배자가 되어 지성과 진리를 제공, 국가, 플라톤"한 후 집에 도착해 넥타르를 마신다. 그리하여 자연의 법칙을 따라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도道(마땅히 지켜야 할 이치)의 움직임이다. 도덕경, 노자" 장자 역시 "도와 덕의 힘을 입어" "정신"이 쓸모 있음(탄생 → 삶)과 쓸모 없음(죽음 → 앎) 사이에 처하는 것, (있는 것, 있지 않는 것, 있음과 있지 않음 사이에 있는 것platonic. 국가, 플라톤) '너 자신을 알고'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삶의 '일정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라 설명한다. (도道 참고: 중국철학사 - 펑유란) "모든 사물이 변하는 상태에 있고 (삶을 살고)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앎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실이라네. 앎이 그것이 앎이라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앎으로 머무르고 (이데아 -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관념이자 정신nous, 아름다움 - 목적) 앎일 테지만, 앎의 바로 그 본성이 변한다면, 그것은 앎과 다른 본성으로 변하고 더는 앎이 아닐 테니까 말일세. 그리고 변화가 계속해서 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 때에는 앎이 있지 않을 것이고, 이런 견해에 따르면 아는 사람도 없고 알려지는 것도 없을 것이네. (그러나 삶이 있고 신은 죽었고 각성으로) 아는 사람과 알려지는 것이 항상 있다면, 그리고 아름다움과 좋음과 여타 모든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이것들이 우리가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이라 이름한 것이 항상 아름다운 것인지) 변화의 과정(흐름이나 움직임)을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크라튈로스, 플라톤"

 

신(진리)은 죽었고,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한다'(존재론). 삶은 아름답고(방법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한다'(인식론). 영혼의 아름다움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철학으로 현실을 사랑하고Actuality, 과학으로 운동의 가능성을 보고Possibility, 예술로 아름다움의 필연성을 깨닮는 것Necessity이다. (원인되는) 삶이 아름다운 것은 노동이 "미"에 값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참고 - 생명이론, 군지 페기오-유키오 "철학은 생성의 현실성에 닻을 내린다. 과학은 가능성에 닻을 내린다. 예술은 필연성에 닻을 내리는 장치다.") 「무엇을 함으로써 어떤 상태가 되는 것, 무엇을 함으로써 열이나고 어떤 상태가 되는 것, 무엇을 알고 빛이있어 열이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무엇이 지나치고 빛이있고 열이나고 살아가며, 무엇이 모자라고 빛이있고 열이나고 목마름에 살아가고, 무엇을 사랑하고 빛이있고 열이나고 목마르고(nektar) 살아가고, 너를 사랑하고 빛이있고 열이나고 목마르고 희로애락을 살아가고...... 봄의 지나침pleonexia은 여름이고, 가을의 모자람endeia은 겨울이다. (너는 나의 가능성이다), 겨울에서 나는 너의 여름이고 싶다. 존재와 시간」

 

-

 

"정"기(정할 精 기운 氣)를 농축된 음기 "백"이라 하고, "신"기(귀신 神 기운 氣)를 몸을 돌아다니면서 작용하는 양기 "혼"이라 하면, "정신"은 (빛으로 쌍생성하고) "자기 안에서 자기로부터 운동의 원천을 갖는 삶", 원인은 에너지 목적은 아름다움, 즉 신체의 변화에 결부되어 있는 감각과 지각으로 "혼백"(넋 魂 넋 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망각하고 인식하고 각성하여 (쌍소멸하고 빛이되어) "올바름과 절제와 절대적인 앎"을 보게한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안에서 생각하는 것', {신(진리)은 죽었고,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한다'(존재론). "생각하는 존재자들 이외에 다른 것은 없으며, 우리가 직관에서 지각한다고 믿는 여타의 사물들은 단지 생각하는 존재자들 안의 표상symbol들일 뿐이겠고, 사실 이 표상들에는 생각하는 존재자들 밖의 어떠한 대상도 대응하지 않는다. - 형이상학 서설, 칸트, IV289, 백종현" 삶은 아름답고(방법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한다'(인식론). "우리에게는 사물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우리의 감관(감각기관)들의 대상들로 주어져 있으며,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단지 그것들의 형상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우리 감관들을 촉발함으로써 우리 안에 결과하게 한 표상들을 인지할 뿐, - 형이상학 서설, 칸트, IV289"}, 신["진리"]은 죽었고 (관념론: 사물은 정신의 산물) 삶은 존재하고 (실재론: 인식하는 대상이 의식이나 주관과 관계없이 독립적 존재하는 것, 즉 관찰없이 절대적인 실재가 존재하는 것) 고로 삶은 생각한다["존재론": Cogito ergo sum] 그러므로 삶은 아름답고["방법론": 일정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길] 앎은 생각하고 (유물론: 정신은 물질의 산물) 고로 앎은 존재하는["인식론": 인식의 기원과 본질], 모든 사물의 원인이 되는 이데아idea(물자체 - 만물 物 스스로 自 몸 體, thing-it-self)다. 【실재론realism이란, real(실제의; 진리) -ism(이론, 주장, 주의), 거울을 통해 "나 안의 타자"를 보고, 자신에게 귀환하고자 자신에게 대상의 형식을 부여하며 진리를 보려 노력, 실존(진리주의)하는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의 지지자 아인슈타인은 '내가 달을 보고 있지 않아도 달은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재론 참고: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진정한 앎이 관련되어 있는 바로 그 존재가 남네. 이것은 색도 행태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본질이고, (신체를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 혼백) 혼의 안내자인 정신에만 보일 수 있네...... 순환 속에서 (빛의 쌍생성과 빛의 쌍소멸이라는 순환의 논리circular reasoning에서 삶은 앎의 기준이, 아름다움은 삶의 기준이 되어 시간을 형성; 나의 기준은 시간속 과거와 미래의 나를 완성, 나를 실현시키는 "나의 가능성"들) 혼은 올바름과 절제와 절대적인 앎을 보네. 이 앎은 사람들이 존재라 부르는 생성이나 관계의 형태로 있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 안에 있는 앎이네. 파이드로스" 이데아(플라톤)인 "미"는 형상(아리스토텔레스)이고, 있으면서 없고(니체), 포괄적(야스퍼스)이며, 은폐(하이데거)하고, 물자체는 "움직이므로" 알 수 없다(칸트).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아이디어다. ('불의 이데아, 공기의 이데아, 물의 이데아, 흙의 이데아'가 앎에서 비롯됐다면, '무엇'의 이데아는 아이디어, '앎을 소유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랑의 이데아는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Let there be Light') 쓸모 있음과 쓸모 없는 사이에 처하고, 있는 것(포로스)과 있지 않은(페니아) 사이에 있는 것(에로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티테'의 생일 축하연 계기로 부유, 풍요, 방책의 신 '포로스'와 궁핍, 가난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의인화 형태 '페니아' 사이에서 잉태 - 향연), 정신(혼)이 앎(아름다움)을 사랑platonic하는 것, 삶이다.  

 

 

1741년 셀시우스Celsius는 스웨덴의 웁슬라 왕립학회에서 물의 끓는 점(비등점)을 0도로, 어는 점(빙점)을 100도로 정했다. 【들룩1727-1817은 실험장치를 통해 물의 비등점을 105도까지 올린다. 얼마 후 그는 끓인 물을 플라스크에 담아 밀봉한 뒤 4주간 쉴새없이 흔들어 공기를 빼내고 (흔든 탄산음료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원리), 다시 그 물을 가열하여 비등점을 112도까지 올렸다. *등산시 저기압에서 물을 끓이면 비등점이 낮아진다.】 그러나 1745년 식물학자 린네에 의해 편의상 물의 비등점을 100도로, 빙점을 0도로 바꾸어 정의하게 된다. 셀시우스 당시 온도가 올라간다는 것은 추운 것을 의미한다. 신체는 추우면 열을 내고(온도가 올라가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하여 열을 내고), 더우면 체온을 식힌다. 인간의 삶은 섭씨 37도다. 앎의 온도가 내려가면 삶은 뜨거워지고, 더워지면 삶의 온도는 반대로 내려간다. 기후의 변화로 인간은 고뇌(괴로울 苦 괴로워할 惱)하기 시작했다. "지나친 열뿐 아니라, 지나친 추위도 우리에게 고苦를 낳는다. - 인간지성론, 로크" 우주는 춥고 광활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고뇌Le Pensevr한다. (빛이 있었고, 중력이 존재했고, 지구는 돌고, 인간은 고뇌하기 시작했다. 달의 로망은 대지였고, 파도는 로맨틱했다. 하루[중용]가 지나고 샛별[Venus - 아프로티테]이 빛났다. 에로스[넋]는 고뇌[슬픔]하므로 쾌락[행복]을 지배한다.) 삶의 비등점water boyles vehemently은 아름다움(열전도)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늘 0도에서 끓지 않는다. *비등점 참고: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여보게. 우리는 모두 자기의 고뇌밖에 모르는 거야...... -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우선 형이상학(metaphysisch: 초자연적/초물리적/초감성적/영혼)적 인식의 원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이 경험적일 수 없음은 이미 그 인식의 개념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리들-이에는 그 원칙들뿐만 아니라 기초개념들도 포함된다-은 결코 경험에서 취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이하적(physisch: 자연적/물리적/감성적)이 아니라 형이상적인, 다시 말해 경험 저편에 놓여 있는 인식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물리학의 원천을 이루는 외적 경험도 경험 심리학의 토대를 이루는 내적 경험도 형이상학적 인식의 기초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 바꿔 말해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으로부터의 인식이다. - 형이상학 서설, 칸트 1783" 그럼 '1기압하에서 물의 비등점은 100도다'라는 명제는 경험 전 보편적 인식을 통한 '선험적 종합판단'이 되고, '기압에 따라 물의 비등점은 달라진다'라는 것은 경험을 통한 '후험적 종합판단'이 된다. 여기서 형이하적 삶의 비등점이 아름다움(앎)이라면 선험적인 필연성과 후험적인 우연성, 즉 물자체의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가 설명된다. 반면 공간과 시간을 경험이전의 형식인 선험적 형식【칸트철학에서 공간과 시간은 경험 이전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나무위키"이며, 지식을 넓혀가기 위한 '순수한' 매개체이자 모두에게 공통된 조건이다. 칸트에 따르면 '오감과 오성'을 종합한 직관intuition들에서 모든 경험적인 것들을 제거한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은 선험적 종합인식이 가능하다. "무릇 사람들이 물체들과 그 물체의 변화들(운동)에 대한 경험적 직관들에서 모든 경험적인 것, 곧 감각에 속하는 것을 제거할 때, 그래도 '공간과 시간'(현상들의 순수 형식)은 남아 있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저 경험적 직관들의 기초에 선험적으로 놓여 있고, 그래서 그 자체가 결코 제거될 수 없으되, 그러나 바로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순수 직관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은 모든 경험적 직관, 다시 말해 현실적 대상들의 지각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 형이상학 서설, 칸트"】으로 보아도 특수상대성이론1905에서 ("운동하며 경험하는" 관찰자에 따라) 이것은 뒤집힌다. 현재 특수상대성이론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미래 이 이론(앎)은 후험적 종합판단(삶)이 (신은 죽었고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은 아름답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무한하고, 모든 것은 단순하지만 합성된 것이고, 자유에 대한 원인들이 있으나 모든 것은 자연이고, 원인들에는 필연성이 있으나 그것들은 우연에 의해서다. * 형이상학 서설, 우주론적 이념들에 네 가지 순수 이성의 변증적 주장들 참고 IV340)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해가 뜬다'가 아니라 '지구는 돈다'. 그렇다면 돌고 있는 지구 안에 관찰자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다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순수이성비판」이 필요해진다.

 

(무엇을) 사랑하고 있다는 슬픈 기다림은 행복했다. 이데아는 슬픔에서 행복을 그렸고, 너를 아는 슬픔은 행복에 이르렀다. 또 그런 (한숨섞인) 시간은 아름다웠고, (상실된) 우리의 슬픔과 행복의 공간에 정신이 남겨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바라는 것이다. "너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칸트 {너가 타자(이웃)에서 바라는 것(권리)을 너도 타자(이웃)에게 하라(의무).} 너를 타인들의 한갓된 수단으로 만들지 말고, 그들에게 동시에 목적이 되어라. - 윤리형이상학정초, 칸트" 정언 명령, 슬픔에서 행복은 "동시에 의무인 목적, 자신의 완전함[성]과 남의 행복, -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 윤리형이상학정초" 나의 슬픔에 너의 행복과, 나의 행복에 너의 슬픔으로 우리는 자유롭다natural. 나에게 행복할 의무는 없다. 나의 목적은 아름다움이고, 그것은 나의 윤리("나의 가능성")다. '너의 완전함'은 너의 윤리("너의 가능성")에 달렸고, 너의 윤리가 아름다움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너없이 나의 행복할 권리는 없다. "울게 놔두오 내 슬픈 운명. 한숨을 짓네 나 자유 위해. 나 한숨 짓네 나 한숨 짓네 나 자유 위해. 울게 놔두오 내 슬픈 운명. 한숨을 짓네 나 자유 위해.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내 이큰 고통 다 끊어 주소서. 자비를 내려 다 끊어 주소서. - 헨델, 울게하소서"

 

로크는 "인식의 기원과 본질"인 인식론을 "이성보다 경험이 지식의 원천"인 경험론으로 본다. "같은 사물이 있으면서 없는 일은 일은 있을 수 없다. It is impossible for the same thing to be and not to be. - 인간지성론, 로크" 존재하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성을 지식의 제일의 근원"으로 보는 합리론이 있다.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성이란 진위,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 그런데 같은 사물이 있거나 없을 수 있으므로 "나의 가능성"이라는 질문(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 발생한다. "만약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와 '같은 사물이 있으면서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두 명제가 생득적(타고난, 천성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면, 아이(백지)들은 이들 명제를 모를 리가 없다. - 인간지성론, 로크" ("우주의 상태로 보아 분명히 있어야 하는 질량이지만 아직 관측되지 않은, 나무위키" 암흑물질은 있으면서 없다.) 삶은 아름다워야 하므로 생득적 각인(뇌가 얻은 지식이 DNA에 각인되기 앞서)은 "환경변화"(지동설로 앎은 새로운 앎이 된다)에 정의just-ify된다. 따라서 아름다울 진리만 각인된다. "원리는 검토되어야 한다. [...] '같은 사물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을 수는 없다'는 (만약 타고난 원리나 그 무엇이 있다면) 절대 확실하게 타고난 원리이다. - 인간지성론, 로크" 원리는 검토just-ify되어야 하고, 타고난 원리, 즉 타고난 관념(이데아)은 절대 확실한 "앎"이다. (삶은 로크의 "백지"에 "아이디어"를 적는다. 그렇게 삶은 "하루"에 "인상"을 그린다. 어제가 더해진 오늘의 "하루"는 어제의 "하루"와 분명 다르나 같은 "백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비등점은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

 

태양으로부터 받는 에너지가 많으면 공기(빌 空 기압 氣)의 밀도가 낮아져 기압도 내려간다. 【저기압 - 공기가 팽창하고, 수증기가 상승하고, 비가온다. 1기압 - 100kPa, 정기(정할 精 기운 氣)를 농축된 음기 "백"이라 하고, 신기(귀신 神 기운 氣)를 몸을 돌아다니면서 작용하는 양기 "혼"이라 하자.】 기가 파동을 감지하는 것이다. 분명 오감없이 직관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다', 직관인가, 아니면 산소가 희박해서, 그렇다면 과다 이산화탄소 증상인가. 그럼 기7는 오감5과 직관6없이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가. (어떤 순간변화율, 미분이 필요한가.) 힘의 정의, 힘이란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시간이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상대성이론) 생긴다. 고뇌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다. 그렇다면 '암흑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작용은 무엇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추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보다 완전한 지식과 커다란 행복을 지닌 것인 (신체와) 다른 영들은 우리가 지닌 사상전달의 방법보다 (기호나 음) 완전한 방법을 반드시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인간지성론, 로크" 무선인터넷, 라디오, 전자렌지, 음악 등의 파동들이 삶에 간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00Hz - 1초에 100번 진동, 2.4Ghz - 1초에 24억 번 진동, 도레미 "도" - 1초에 263Hz, 가시광선 - 1초에 600조 번 진동, 빨간색 - 1초에 460조 번 진동) 물을 냄비에 끓인다는 것은 (달궈진 냄비가) 간접적으로 물을 데우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렌지(파동)로 물을 데운다는 것은 물의 분자를 전기장의 움직임으로 회전하여 다른 물분자와 충돌시켜 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은 운동하여 열을 낸다.) 우주만물의 본질은 파동이고, 인간은 37도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하여 각자 고유의 파장을 발산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파동과 입자(양자중첩)를 지니고, 입자성을 관찰시 파동성이 사라진다. 그런데 사피엔스는 입자성을 확보하려다 보니 '같은 것이 있으면서 없다'. (플라토닉이 있으면서 없다.) 슈뢰딩거가 말했다. 'To be, or not to be,' 로크의 독백은 다음과 같다. 'It is impossible for the same thing to be and not to be.' '나의 가능성'을 짐작해 본다.

 

(삶은 아름답고,) 정신은 꿈을 꾼다. '영혼과 육체'를 매개하는 정신은 "무의식" 속 실현 불가능한 헛된 공상을 꿈꾼다. "내가 나비 꿈을 꾼 사람인가, 아니면 지금의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가. 장자" 【꿈속에 투영된 현실성reality은 삶에게 무다. 그렇다면 꿈속에 투영된 영성spirituality, 즉 '정신적 경향이자 신성'은 유가 된다. '그는 잠들었다. 그러나 그를 잊지 않았다.' 플라톤은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와 잠의 신 휘프노스의 궁전 아래로 흐르는 '망각의 강(lethe)'을 합쳐 알레테이아(a-letheia), 잊지않는 것(하이데거: 비은폐성), '진리'로 불렀다.】 한편 육체는 "의식" 속 실현 가능한 아름다움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따라서 현실에 투영된 영성은 무가 된다, "망각은 기억의 바다넘어 삶으로부터 잊혀진 것을 깨우는 것")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다시 (전승, "문화의 깊이") 정신이 된다. "순진무구함은 무지다...... 무는 불안을 낳는다. 순진무구가 동시에 불안이라는 것, 이것이 순진무구함이 갖는 심오한 비밀이다. 꿈을 꾸면서 정신은 꿈속에 자신의 현실성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 꿈의 현실성은 무이므로 다시 이 무는 스스로의 밖에서 쉴 새 없이 순진무구함을 보는 것이다...... 정신이 적을수록 불안도 역시 적기 때문이다...... 불안이 크면 클수록 그 문화는 깊이를 갖게 된다. - 불안의 개념, 키에르케고르" 순진무구하다는 것은 (아직)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중력에 끌리는 자유)를 거부하는 삶은 모순이고, 무엇을 욕망하는 것, 앎을 욕망하는 것은 현재 없는 것에 대한 불안을 가져온다. (시험에 앞서 불안한 이유는 앎을 욕망, 합격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고, 행복하고 싶은 삶(물질)의 욕망은 빛을 향해 공전하는 원운동과 같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의식이 필요했다. 일주일이 만들어졌다.) "욕망은 불안함이다. 로크" 평온serenity, 정적, 침착에서 기원하여 앎으로 (빛이 있으므로) '고뇌pensiveness하는 '슬픔에 잠긴' 삶은 생동적이다. (참고: 로버트 플루칙, 감정의 수레바퀴) 태양의 입자가 자기권, 자기장을 빗겨나 대기 중 분자와 반응하는 것, "잃어버린 모든 불안들이 거기에 다시 놓여 있는 것이다. 이불 가장자리에서 빠져 나온 털실이 딱딱하다는, 마치 철로 된 바늘처럼 딱딱하고 날카롭다는 불안감. 내 잠옷의 단추가 내 머리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는 불안감. 지금 내 침대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가 유리같이 조각조각 아래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영원히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걱정스러움. 찢어진 편지 조각이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금지된 것이고 형용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인양, 책상 안에 두고도 도저히 안심이 안 되는 불안감. 잠이 들 때면, 난로 앞에 있는 한 웅큼의 석탄을 내가 삼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내 뇌 속에 있는 어떤 숫자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해서 마침내 내 몸 속에 더 이상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불안. 내가 누워 있는 곳이 화강암이라는, 회색 화강암이라는 불안. 내가 고함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 비밀을 누설할 수도, 내가 무서워하는 모든 것을 말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불안. 혹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그 밖의 불안, 불안들, 「말테의 수기」" 오로라를 만든다. 빛 주위를 공전하는 자유로운 원운동은 낮과 밤을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생동적이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물질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운동하는 삶은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 "완벽의 상태에 있는 것들은 운동하지 않은채 자신의 선함을 유지한다. - 하늘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무의식unconsciousness 속 정신은 현실성이 없는 이상을 상상한다. 꿈 속에 투영된 현실성은 무지(없을 無 알 知)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앎을 추구하는 순진한 삶은 불안해지는 것이다. 삶은 코기토로 의식하고 앎으로 무의식에 빠진다. 그러므로 진공상태(에너지가 0인 상태, 압력의 차이를 없애주는 상태)이자, 「숨결이 바람 될 때」, 무중력상태인 우주의 '그 무엇인가'가 불안하다는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무지'를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진공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바닥상태ground state인 영점에너지zero-point enery 로 채워져 있다. 비록 열역학 절대영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지만, 파동적 성질 때문에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인 바닥 상태에서도, 즉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에서도 운동(카시미르 효과)이 일어날 수 있다.】

 

화학자 파울 에를리히는 '생명은 하나의 화학적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이 절묘하게 조립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물활론animism은 모든 자연 현상에 생명과 영혼이 있다고 인정한다. 무엇이 '자연적인 것'은 물활론이 설명하는 자연계에 속한 4원소나 계절같은 모든 자연 현상들을 뜻한다. '인위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힘이 작용하나 생물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은 생기론이 주장하는 '생물에는 무생물과 달리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는 생명력이 있다'는 활력설로 해석될 수 있다. '화학적 사건'인 생물, 사피엔스를 구성하는 원소로 산소, 탄소, 수소, 질소,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칼슘, 인, 포타슘, 유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 그리고 미량의 불소, 옥소, 붕소, 규소, 비소, 브롬, 바나듐, 철, 아연, 망간, 구리, 니켈, 코발트, 은, 칼륨 등이 있다. "진화(정향진화orthogenese: 생명체의 형태 변화가 정해져 있는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면서 보다 완성된 형태를 갖도록 점차적으로 개선되는)란 곧 생명의 약동이자 {우연적으로} 인간에게 도달하게 될 것이 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고 하나, 원인(혼백)이 있으므로 삶은 어떤 목적인("운동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이나 작용인("무엇을 위해")을 갖게 된다. 진화를 '창조자체를 위한 창조'로 표현한 베르그송은 생명의 본질적인 자발성을 거부하고 삶에는 목적이 없으며, "진화란 어떤 목적인이나 작용인도 갖지 않으며, 결코 인간을 목적{아름다움, 앎이란 필연적인 이유}으로 지향하여 이뤄지지 않았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고 덧붙인다. 【이중나선인 디옥시리보스 핵산DNA는 리보오스 핵산RNA에 비해 산소원자 하나가 부족하다. 외가닥인 RNA는 -OH를 하나 더 가지고 있어 화학적 반응성이 DNA보다 높다. 두 가닥double helix으로 조직되어 있는 DNA는 손상시 반대사슬이 상보적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다시 복구될 수 있다. 그와 달리 RNA는 불안정한 핵산을 가지고 있어서 변이가 쉽고, DNA에서 부분적으로 복사되어 단백질을 만든 후 사라진다. 돌연변이란 단지 표준을 벗어났다는 것이고, 변이는 진화의 동인이 된다. (변이를 갖은) 핀치새는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한 사람의 질병이 다른 사람의 정상 상태라면, 누군가에게는 강화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방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자연선택, 즉 진화론이라면 RNA가 먼저 존재한다. 돌연변이가 너무 많으면 정보가 손실될 수 있으므로, 원본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나선 핵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단백질이 핵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DNA는 해독될 수 없고, 그럼 단백질을 생산할 수 없다. 단백질이 없으면 DNA는 스스로 복제될 수 없다. '의식'은 생각한다, 고로 앎AUGC과 삶ATGC 사이에 생이 존재한다. '무의식'(생각의 억압된 부분, 프로이트)은 존재하고, 고로 정신은 혼과 육체로 고뇌한다. (그리하여 불안하므로 '있으면서 없는 것'이 설명된다.) 결국 단백질이 먼저인가. 주체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라깡은 "당신의 사고냐, 아니면 당신의 존재냐", 결심하라고 외친다. "생각하면서 존재하는 것은 같은 주체가 아니다. 존재하는 우리는 생각하는 우리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존재하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결코 주체가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무의식일 뿐이다. - 믈라덴 돌라르, 무의식의 주체로서의 코기토"】 삶, 생명이란 광합성(photo-sysnthesis)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 유지된다. 식물은 이산화탄소(6CO2)와 물(H2O), 그리고 빛(photon)으로 설탕(C6H12O6)과 산소(6O2)를 동물에게 공급한다. 당(C6H12O6)은 에너지를 제공하고, 지방(C6H32O2)은 에너지를 저장한다. 단백질(NH2CHRnCOOH)n은 "생화학적 과정의 속도를 촉진하고 통제하는 생명 세계의 배전반 역할을 함으로 생리학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그리고 혈액의 산소운반자 헤모글로빈(C3032H4816O872N780S8Fe4)은 때에 따라 산소와 결합하거나 산소를 풀어놓는다. 이와같은 생명의 사건에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빛이다. 그럼 빛은 파동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어떤 의식으로 길들여지는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삶이 앎의 궤도를 돌고 있는 것, 시간, 그것은 고뇌의 시작이다. 그리고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아름다워지고자 진리로 다가서는 선은 미에게 악이다. 「선악을 넘어서」,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파우스트' (잊는 것lethe, 빛이 없는 것,) 무엇이 아름다운가. (참고: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삶을 '의미하는 것'(기표, signifiant)은 삶이 '의미되어진 것'(기의, signfie)으로 나와 너의 외시적denotation 기호를 만든다. (삶이 의미하는 것이 분명 생이라 믿지만, 삶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이다.) 낯설은 나를 의심하는 나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울을 통해 자신을 수시로 확인한다. (내가 변하지 않았나), 나의 현재가 과거의 나와 무엇이 다른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거울에 비춰진 나의 오른손은 나의 왼손이다. 나는 왼손을 보고, 타자는 오른손을 본다. 만족할 수 없는 나는 타자의 시선을 쫓는다. 타자의 시선은 미를 요구한다. 너의 시선, (빛이 있으므로), 곧 앎은 공시적connotation 기표가 된다. (코끼리를 보고 느끼는 것은 데노따시옹이고, 코끼리를 이해하는 것은 꼬노따시옹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모자가 아니다.) 공시적 앎이 의미하는 것과 공시적 앎이 의미되어진 것은 다시 하나의 공시적 "기호"가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이다. (기호 참고: 롤랑바르트의 의미작용단계, 거울 참고: 강신주)

 

-

 

 

"모자가 뭐가 무섭다는 거니?"

 

- 생텍쥐페리

 

 

"아이가 꽃병을 넘어뜨렸고, 고양이가 꽃병을 살펴보고 있구먼."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묘하게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l 고양이가 꽃병을 넘어뜨렸다.

l 고양이가 꽃병에서 뛰쳐나와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l 고양이에게 쫓기던 아이가 탈출용 밧줄을 들고 서랍장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l 도둑 고양이가 집에 들어오자 누군가가 고양이에게 꽃병을 집어던졌다.

l 고양이는 꽃병 속에 미라 상태로 들어 있었는데, 아이가 마법의 밧줄로 건들리자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l 꽃병을 매달아 놓았던 밧줄이 끊어졌고, 고양이는 꽃병을 다시 조립하려고 노력중이다.

l 꽃병이 폭발하자 아이와 고양이가 달려왔다. 아이는 꽃병이 또 폭발할까 봐 보호 차원에서 모자를 쓰고 있다.

l 뱀 1마리를 잡으려고 아이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아이가 뱀을 잡았고, 그 뱀으로 매듭을 만들었다.

 

- 위험한 과학책, 랜들 먼로

 

-

 

"선이 움직이면 면이 생기고, 점이 움직이면 선이 생긴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미분}, 예컨대, 평면은 물체적 공간의 한계이고, 그러면서도 그 자신 한 공간이고, 선은 평면의 한계인 한 공간이며, 점은 선의 한계이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공간 안의 한 장소이다. (형이상학 서설 A170),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 {칸트의 이율배반이란}, 1 -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시초가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정된 것이다. 2 -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이다. {시선은 (양자를) 탐구한다.}" 빅뱅, 점이 움직이면 선이 생기고, 선이 움직이면 면이 생기고, 면이 움직이면 입체가 생기고, 입체가 움직이면 춤추는 별이 된다. "모든 사물의 근거와 배후를 보려면 자신을 넘고 올라가야 한다. 위로, 저 위로, 그대가 바로 별 위에 올라갈 때까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아직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슬프구나! 인간이 더 이상 별을 낳지 못하는 때가 오다니. 슬프구나! 나 자신과 나의 가장 은밀한 의지를 준비하도록. 자신의 화살을 찾아 욕정에 불타는 활처럼, 자신의 별을 찾아 욕정에 불타는 화살처럼. 자신의 정오를 맞을 준비를 한 성숙한 별처럼,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태양의 화살 앞에 이글거리며 꿰뚫린 행복한 별처럼. 승리를 위해 초토화할 준비를 하는 태양 자체와 무자비한 태양의 의지처럼! 오, 그대 의지여, 역경의 전환이여, 그대 나의 필연이여! 하나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 나를 보호해 다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상의 가상, - 니체, 비극의 탄생 4"에서 (무의식에서 꿈꾸듯) 고독을 제거하고 공포를 극복한 '아름다운 상을 관장하는 빛나는 자'der Scheinende는 자신의 별을 찾는다. 아주 오래 전 어느 (한 개 이상의, 쌍성) 초신성의 몸부림, 초인이 되기위해 각성하는, 뛰어넘을 超-새 新-별 星이 (고통스러운 즐거움Jouissance으로) 폭발하여 흩어진 기체들이 회전하고 모양을 갖추면서 지금의 태양이 생성된다. 우주의 모든 것, 지구의 모든 물질은 초신성 안에서 만들어진다. 과거 동료별(쌍성)을 가졌던 태양은 수소 원소를 모두 소진한 후 러브록의 「가이아」속 표현처럼 "찬란한 불꽃의 섬광"을 밝히며 폭발했고, 우주로 산산히 흩어진 파편들은 성간 먼지와 구름들을 형성한 뒤, 주위 가스 덩어리들과 서로 혼합되고 수축되어 지금의 태양과 여러 행성들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간 먼지와 구름들을 형성하는 것들을 분광학적으로 분석하면 생물을 구성하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러브록은 "생물이란 개방적 또는 연속성의 시스템으로서 외부 환경으로부터 취한 자유에너지와 물질을 사용, 더불어 이의 분해산물을 체외로 배출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부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는 구성원"이라고 설명했다. 생물이란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태를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생물과 유사한 별 또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수명을 다하면 빛을 잃는다. 즉 운동하는 물질은 아름다움으로 삶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는 것, 불명료함을 감소시키는 것, 불명료함을 적게 하는 것, 가이아", "나를 상실하므로써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힘에의 의지'"에 따라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된다. "사망의 운명mortality은 생물체가 개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이다. 가이아"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운동하는 삶은 37도이므로) '정신Zeitgeist'이 깃든 공간(우주)은 폐쇄 시스템(고립계)이 된다. *참고: 제임스 러브록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가이아

 

초신성이 되려면 동반성.쌍성을 거느리거나 태양질량의 10~20배(홑별)가 되어야 한다. 중력적으로 서로에게 속박되어 있는 쌍성은 조석력은 물론, 상대로부터 가스와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 점점 팽창하는 태양은 결국 붉은거인(적색거성)이 되는데, 핵융합과정을 마치고 다 타버린 태양은 백발난장이(백색왜성), 즉 (백색왜성이 식어 흑색왜성이 되면 내부의 탄소들이 결정화되어) 지구만한 거대한 우주의 다이아몬드가 된다. 이 백발난장이는 헤라의 우윳길Milkyway에만 240억 개나 있다. 대다수의 별은 짝을 지어 궤도를 도는데, 그 중 하나가 죽어 백발난장이가 되면 남은 별은 상대에게 물질이 흡수되어 초신성이 된다. 쌍성 초신성과는 달리 홑별 초신성은 많은 원소를 만든 후 수소를 헬륨으로, 헬륨에서 탄소로, 다시 탄소에서 산소로 바뀌기 때문에 백발난장이가 되지 않는다. 연금술사인 초신성은 쌍성으로 철을 만들고, 홑별 초신성은 무거운 원소인 금, 은, 우라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장 무거운 원소 우라늄이 깨져 2개의 가벼운 원자핵이 되면 사피엔스는 '핵분열 에너지'를 만들 수 있고, 가장 가벼운 원소 수소의 핵 2개가 결합해 무거운 원소의 핵이 되어 질량 결손이 생기면 '핵융합 에너지'를 얻는다. 보통 초신성이 폭발해 질량이 태양의 2배 이상이면 블랙홀이 되는데, 【별의 표면에 미치는 중력이 강해지면서 빛조차 이탈할 수 없게되고, 이 단계에서 사건의 지평선이 형성된다. 그리고 별 주변의 공간이 휘고, 블랙홀이 생겨난다. *참고: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질량이 태양의 2배 미만인 경우 펄서(푸른 광선)를 만드는 우주의 등대 중성자별이 되고, 그것이 쌍성계이면 태양 질량 40배인 마그네타가 된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천체이자 자석인 마그네타는 티스푼 하나에 10억 톤의 질량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이무익비以无翼飛, 날개가 없음(망각과 비움)으로 날기(도약과 각성)에 에너지는 충분하다. 직면한 문제는 (덧차원을 옮겨 다니는) 중력graviton, "별 위에 올라갈" 탈출속도다. 【리사 랜들이 비틀린 5차원이라고 말하는 세계를 덧차원이라고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공간을 3차원이라고 하고, 시공간을 4차원이라고 한다. 랜들의 ADD 모형은 중력이 4차원 막을 둘러싸고 있는 5차원 세계에 속한 힘이기 때문에 4차원에서는 중력이 약하고, 덧차원에서는 두 차원 사이 곡률 때문에 중력이 강하다. 블랙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력이 필요한데, 덧차원이 있다면 플랑크 에너지를 낮출 수 있어서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참고: Discovery Channel - Supernovas, 블랙홀과 고에너지 현상 - 고야마 가쓰지 / 미네시게 신)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 내가, {또 우리가 고통스러운 즐거움으로} 세상에 남긴 흔적{시대정신Zeitgeist}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연(변이)에서 필연(자연선택)으로}, 그렇게 지고한 행복을 예감하며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본다. 파우스트"

 

양자역학의 "양자"란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성질을 의미하며, "역학"이란 '힘의 학문'을 뜻한다. 양자론에는 관찰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본래면목, "너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럼 직관적 통찰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존 휠러는 관찰자 '슈뢰딩거'가 대상 '고양이'의 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 대상의 세계에 개입하므로, 관찰자 대신 참여자를 제시했다. 데이비드 봄은 우리가 참여하고 관찰하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상을 담고 있고, 전체라는 우주는 대상들을 품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려거든, 그대 손바닥 손에서 무한을, 한 시간 속에서 영겁을 붙잡으라. 윌리엄 블레이크" (*참고: 홀로그램 우주 - 마이클 텔보트) 삶들이 모여 앎이 되고, "너 자신을 알라"는 삶 속에 앎(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 존재한다. 불교에서 만물은 상호의존하는 존재(제법무아, 제법무상)이며, 우파니샤드에는 "그에게서 하늘과 땅과 대기가 엮어지고 바람과 목숨 있는 모든 생명이 엮어진 것을 하나의 영혼인 그 만이 알고 있네"라고 적혀있다. 대상과 관찰자의 구별이 사라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는 것이다. "이완성(풀려 느슨한 성질)이 있는 곳은 말하자면 하나가 다른 것을 보고, 하나가 다른 것을 냄새 맡고, 하나가 다른 것을 맛보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곳에서는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냄새 맡는다는 것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맛본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동양사상 참고: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나를 바라보며 대칭을 이루는 거울속 관찰자 나는 상대적이다. 빛의 속도로 빛이 빗여낸 형상, 거울에 비춰진 나의 오른손은 나의 왼손이다. 관찰자 나는 나의 과거를 보고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처럼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에 의해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고전 물리학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자"의 삶들이 모인) 앎이 관찰하는 삶과, 삶이 관찰하는 (삶 속에 존재하는) 앎은 상대적이고, 신체와 영혼 또한 상대적이다. 화엄경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주관과 객관 사이에 더는 구별이 없는 해탈의 경지를 시공이라 강조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Form is nothing other than emptiness;Emptiness is nothing other than form (색form - 물질, 공emptiness - 성질), 시간이 없는 공간이나 공간이 없는 시간, (EPR 역설의) 비국소non-locality 연결로 삶의 "가능성"이 되는 앎, 즉 앎이 없는 삶이나 삶이 없는 앎은 상상할 수 없다. 입자의 위치를 구하면 파장의 확산을 증대시켜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더욱 커진다. 입자와 파장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는 것이다. "색은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 불경", 즉 대상을 사물이나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 여기면 그 무엇인가가 불안하다는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무지"를 설명할 수 있다. (*화엄경 참고: Suzuki, Mahayana Buddhism, 동양사상 참고: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그림자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면 위에 투영된 것이며, 그래서 그 길이는 투영의 각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4차원적인 시공 속에 있는 점들이 3차원 공간에 투영된 것과 같으며, 그것의 길이는 관계 구조에 따라서 달라진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그럼 덧차원에 있는 점들이 힘과 물질이 통일된 4차원적인 시공에 투영된 것이 바로 중력인가.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속도가 빠르면 시간이 팽창하고, 속도가 느리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일반상대성이론 따라 중력이 강하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중력이 약하면 시간이 빨리간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슬픔"은, ("우렛소리 희미하고, 만요슈" "슬픈 너, 비 위로 내리는 비의 슬픈 소리, 밀로즈의 시",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모차르트" 있고, "언어"langue는, word, 여백 안에 있다. "가능성", 진리는 침묵parole과 침묵 사이에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위한) 질서는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시작되어 앎 속 미적 여백을 배치한다. "{공간 두기, ま['공간적인' 사이, 間, 간격], 사이의 범주,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는} 물질 사이에 공간이 없다면 모든 인간은 골무(비좁은 공간) 안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롤랑바르트" 괴테의 짧은 '시와 진실'은 롤랑바르트의 '진리의 유도체'다. 블량쇼는 침묵과 침묵 사이의 "존재"langue를, 롤랑바르트가 말하는 '언어의 공', "부분에서 부분으로 넘어가는, {언어란,} 아무런 혼란도 없이 전체적이고, 조용하고, 은밀한, 결국 통일된 빛{앎}, 그리고 그 어떤 특수한 것도 무한을 파괴하지 못하는 공간의 창조, 모든 것이 소위 허무 속에서 현전하는 공백의 공간의 창조, 즉 장소 외에 그 무엇도 발생하지 않게 하는 장소의 창조"라고 했다. "소를 싣고, 조그마한 배가 강을 건너네, 저녁 비를 맞으며, 쉬키(하이쿠)" 하이쿠(일본 정형시)란 우연성의 예술contingere이다. 우연이란, 아름다워서 "우렛소리 희미하고",【아름다움은 うつろい퇴색된.한창때가 지난, "활짝 핀 벚꽃이 아니라, 만개한 벚꽃이 시들어 가는 순간, 롤랑바르트", 행복은 슬픔을】, (빛이 있으라, 기압이 내려가고, 공기가 팽창하고, 수증기가 상승하고) 필연이란, "더럭더럭 운다, 8月 소나기. 늙은 부처가 낮잠을 깬다, 김명배", 비가 내린다.

 

태초에 카오스Chaos가, 그 다음 가이아가, 그리고 에로스가 있었다. (참고: 신통기) 베일에 쌓인 '예수가 취한 길, 헤겔이 부른 퇴각의 길 "아름다운 영혼"'*해겔, 찰스 테일러, 사피엔스는 행복하기 위해 질서Cosmos를 정한다.

 

열반경涅槃經은 말한다, 군맹무상. 무리 군群 소경 맹盲 어루만질 무撫 코끼리 상象.

 

2045

눈먼 플루토스Plutos는 왜 평화의 여신Eirene(행운의 여신Tyche)의 품에 안겨 있는가. 좋은 것이 부富라면 그것은 "눈먼 부가 아니라 지혜sophia와 함께하는 시력이 날카로운 부 - 플라톤, 법률 631c"다. 건강hygeia, 아름다움kallos, 체력ischys은 부의 의뜸인 지혜sophia를 통한 절제, 용기, 정의에 의해 결정된다. 나쁜 것은 없는 것, 채워지기 전, 비워진 상태死다. 비워진 상태란 모음과 자음이 만나기 전, 그리하여 언어의 구개음화, "자음이 다시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모음이 다시 열리도록, 그렇게 해서 {매질인} 자음과 모음이 완벽하게 울리도록(울림), 그 말들이 다시 내 입술 위를 거쳐 갈 수 있도록(숨결), 파괴된 최초의 관계들이 복구되도록, 그리고 문제들이 해결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마음이 담긴 말의 파편들(입자들)이 되도록} - 말리나" 한마디가 쓰여지고 언어가 완성되도록 만드는 문제의 발단, 어떤 시점이다.

언어의 기원은 혼에 있으며, (부르크하르트) 언어는 정신의 표현이자 정신의 가장 특별한 발현이다. 언어는 정신의 이상적인 상이며, "정신적 삶의 실체가 특히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들의 단어들 속에 적혀 있는 지속적인 기록 - 세계사적 고찰, 부르크하르트"이다. 플루토스盲의 언어가 의미하는 것signifiant과 플루토스盲의 언어가 의미되어진 것signfie에서 정신7은 명시적인 데노따시옹으로, 또 암시적인 꼬노따시옹이 되어진다. 그런데 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백이다. 아름다움富의 침묵은 공간을 의미하고, 양자화 자아Quantified self에서 나타나는 뉘앙스로 그것이 담은 외시적, 공시적 은유를 짚어볼 수 있다. '생각이 상대적이라면, 은유가 담긴 한마디는 미묘하거나 불확실하다.' '아니오'에 담긴 베드로의 부정, 거기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의 "의지와 열망은 '눈이 멀어'盲 있어야만,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내적인 힘에 따라 살고 행동할 경우에만 완전히 발전한다. 그래야만 미래가 형성된다. 미리 알게 된 미래란 일종의 자가당착이다. 세계사적 고찰, 부르크하르트" 그렇다면 자가당착自己矛盾에 빠진 '예'는 어떻게 사용되어 지는가. 노자의 말처럼 직관6이란 "밝은 길은 어둑한 듯하고, 앞으로 나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며,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고, 가장 훌륭한 덕은 계곡 같으며, 정말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정말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고,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고" 안인 듯한 것이 밖인 듯하다. 랑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롤, "의문의 여지"가 남겨진다.

핵심은 "질문"이다. '정의가 행복인가.' 부를 예기Elpis(미리 예豫, 기약할 기期; 희망, 사변적인 '지혜')라고 말한다. 고통의 예기를 두려움으로, 쾌락의 예기를 자신감이라고 한다. 길들여지는 것을 즐거움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을 괴로움으로, 그 중 어느 것이 좋고 나쁜지를 헤아리는 것이 플라톤의 "법률 644d"이다. "그러한 인식은 언어{혹 이성logos, 그리스인들은 언어와 추론을 나타낼 때 로고스를 사용}를 통해 주장하므로", 그것은 인간이 "자연적으로(by nature)" "자연에 따르는 것(according to nature)", 바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구별하고,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하는 것을 가려내며,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언론의 자유'이자 "생존하려는 욕구로 최선의 방식"을 찾는 "언어에 대한 그의 능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입문,  J.A. 스완슨, C.D.쾨빈"이다. 길들여지지 않는 행위를 명상, 금식, 금욕이라 하면, 여백Space이란 아름다움富의 침묵을 찾는 것이다.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에 따른 침묵은 죽음死이다. 그러나 자유Free-falling롭지 못함을 느끼는 침묵은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이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보다 충실하게 됩니다. 스티븐 잡스" 그리고 깨어난 직관은 질문을 던진다. 파이안(아폴론 찬가)과 뒤튀람보스(주신 디오뉘소스의 탄생), '시인은 괴로움과 즐거움 중 어떤 언어choros를 재현nomos해야 하는가.' "내 가슴은 쑤시고, 나른히 파고 드는 마비에 감각이 저린다. 마치 방금 독당근 즙을 마신 듯, 또는 어지러운 아편일랑 찌꺼기까지 들이키고 망각의 강쪽으로 가라앉은 듯이, 이는 너의 행복한 신세가 샘 나서가 아니오, 오직 너의 행복에 도취되는 나의 벅찬 행복에서 솟는 아픔이란다.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노래, 존 키츠" 피로한 (연로한) 그는 흐르는 피처럼 붉은 바카스 주신의 잔을 받아, {혼7의 의기소침을 털어버리고, 혼이 불속에 넣은 무쇠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플라톤 법률 666b} 옳고 그름의 기로에서 '한잔에 침전과 두잔에 기백과 석잔에 철학으로' 감상에 젖고 망각에 빠진다. "두려움"과 "자신감"은 "잔가에 방울방울 구슬진 거품"처럼 증발해 버린다.

"괴롭고" "즐거운" 언어 사이에 조화롭지 못한 불협화음이 있다. (플라톤 법률 689b) 제피로스의 서풍과 호라 여신의 기운이 비너스의 모피를 벗겨낸다. 마조히즘의 즐거움이 계절따라 식상하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가 유토피아다. '(미래를 사는 너의) 행복에 도취된 나의 벅찬 행복에서 (오늘의) 아픔이 솟는다. 언어langue quantum, 미래(앞으로 될 것)를 사는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카르페 디엠seize the day, 미래avenir(앞으로 닥칠 것)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 상기anamnesis(생각 상想, 일어날 기起)하는 것, "혼이 몸과 더불어 한때 겪었던 것을 몸 없이 혼 자신이 홀로 가능한 한 확실하게 되살릴 때, 필레보스, 플라톤 34b", 영혼이 머물렀던 이데아idea계를 떠올리는 것, 그것은 "유출된 지혜의 유입, 플라톤 법률 732c"이자 'Götter-dämmerung신들의 황혼'이고, '신은 죽고,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하는', 혼7이 모든 사물의 원인이 되는 이데아를 얻는 과정이자, 지나간 일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신화는 하나의 파롤parole, 현대의 신화, 롤랑바르트"이 된다. 

(플라톤 법률에서) 정부politeuma라는 최고 권력Force은 다수(just-ify)인 mg,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체polity다.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가장 이상적인 철인정체("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자, 플라톤 국가")에서 시작해 명예정체(전사의 지배), 과두정체(소수의 귀족, 부자의 지배), 민주정체(자유롭고 평등한 자들의 지배), 참주정체(1인의 독재자, 힘센 자의 지배), 혼합정체(군주제, 귀족제, 민주제가 혼합된 정치 체제)가 있다. "본래 그 누구도 권력을 점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며just-ify, 그들이 다시 흩어지자마자 사라진다. 하버마스, Philosophiscb-politische profile" (물리학에서) 권력力이란 헤아릴 양量과 만유인력이다. '가까스로 얻은just-ify' 아름다움(앎)을 향한 "권력"의 행위를 행복을 향한 슬픔, 사랑이라고 한다. 그럼 인간이 자연적으로 자연에 따르는 것, 그것은 언어의 질량과 언어의 광속, 즉 "데노따시옹, 느끼고", "꼬노따시옹,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당기는 힘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질량 에너지 동등성에 의해) 사랑, 에너지가 된다. (F=ma, E=mc2, ma=mc2, F=E)

사랑하는 자父(에라스테스)는 사랑받는 자子(에로메노스)를 친애(필리아)한다. 그래서 에로메노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하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를 간섭한다. 에로메노스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받는 친구(필리아, 사랑)가 성립되려면 "앎"을 가져야 한다. '좋은 것과 좋은 것'a, '나쁜 것과 나쁜 것'b,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c들은 상대에게 얻을 것(앎)이 없으므로 친구가 될 수 없다. 나쁜 것은 친구가 될 수 없으므로 '나쁜 것과 좋은 것'd은 친구가 될 수 없고,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나쁜 것'e 역시 친구가 될 수 없다. 남은 것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훌륭한 것"의 조합이다. 그럼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 몸은 '나쁜 것'이자 적인 질병 때문에 '훌륭한 것'이자 친구인 건강을 위해 "훌륭한 것"인 의술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훌륭한 것"이 친구가 되려면 반드시 '나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건강은 "훌륭한 것"을 위해 '나쁜 것'이자 적인 질병과 친구가 되고, 의술은 단지 "나쁜 것을 위해서" 질병과 친구가 된다. 결국 의술scientia과 몸이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나쁜 것'viru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에 나쁜 것, 괴로운 것은 분노, 무서움, *사랑, 그리움, 비탄, 질투, 악의 등등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향한 것을 (d, 모순, 패러독스를 무릅쓴) 행복을 향한 슬픔이라고 한다. "그런데 적이 떠나가 버리면, 참으로 친구인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친구가 아니고, 플라톤 뤼시스" 나쁜 것이 소멸되면 아무 것도 더이상 다른 것에게 친구가 될 수 없다. ("각 사물은 자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을 욕구하므로, 건조한 것은 습한 것을, 찬 것은 뜨거운 것을, 쓴 것은 단 것을, 날카로운 것은 무딘 것을, 텅 빈 것은 채움을, 꽉 찬 것은 비움을 욕구하고, 뤼시스 215e"), 이같은 "욕구"는 빼앗긴 것, 자신에게 속한 것, 가까운 것을 되찾기 위해 발생하고, 그러므로 문제의 발단,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욕망"은 '내게 없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사랑이다. (인용, 참고: 플라톤 뤼시스, 강철웅 옮김)

【빅뱅 후 135 억 년 전의 우주는 수소 가스로 가득했고 응집된 수소 가스가 거대한 구름 형성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6억 년 전 암석덩어리가 혜성과 충돌해 물과 가스를 생성한 후, 대기에 수증기,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질소, 염소, 수소 등이 형성되었다. 그 후 녹조류가 물을 분해하여 지층과 지표면에 산소와 오존층을 만들었다. 붉은 별을 거친, 푸른 별pale blue dot의 기원이다. 그리하여 35억 년 전에서야 비로소 생명체가 숨쉬기 시작했고, 핵산이 단핵세포로, 이중나선의 핵산은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을 결정하는 유전자로 진화했다. 그 뒤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는 변이가 자연선택의 과정을 겪거나 환경 조건에 의해 유전자 발현으로 살아 남아 지금껏 번식해 왔다고 본다. 지난 1만 년의 세월동안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친 인류는 풍부한 자원으로 물직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이뤄냈다. 그러나 인류는 짧은 기간에 변화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환경과 유전자의 "조화와 균형"을 무너트렸다. 빙하기를 거친 인류는 온난해진 기후로 농사짓기가 수월해져 수렵채집 보다 안정된 집단거주를 선택했으나, 숲을 목초지로 개간하여 생태계를 교란함으로써 새로운 병원체를 얻거나 밀폐된 구역에서 목축을 함으로 동물과의 접촉이 늘어 병원균이 전파되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었다. 외부 환경으로 유전적인 변화나 생물학적 방어기전이 나타나는 생물학적 진화는 몇 천 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따라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기에 맞춰져 있는 현인류의 대립유전자는 1만 년이라는 짧은 문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감염균을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몸을 구성하는 세포수는 10조이며, 몸 안에 있는 미생물과 세균은 100조에 이른다.) "술은 1만 년 전쯤에 농경 사회로 진입하면서 생산된 새로운 물질이고, 사람들이 술을 그 이후에 처음 접하기 시작했다면 우리의 유전자는 술에 대하여 적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적응이 되지 않은 물질이라면 술은 많이 마실수록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술을 소량 마셨을 때 건강에 좋은 결과들이 나타난다면 이는 술에 대해서 이미 유전자의 적응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수렵채집인에서 농경목축인으로 도약한 인류는 부락을 이루어 군집 생활을 시작하면서 지배와 피지배 계급을 형성("권력")했고, "삶"("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 즉 "앎"("훌륭한 것")을 얻기 위해 권력으로 이웃 국가를 정복하거나 침략하면서 새로운 환경을 맞거나 새로운 환경(감염성질환, "나쁜 것")을 전파했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화가 빨리 진행되었고, 생산품을 교역하는 지역은 감염성질환(인간을 숙주로 삼은 병원균)에 취약했으며, 새롭게 등장한 여러 "화학물질"들을 적응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삶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리한 '유전자 변이'가 살아남는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지만, 유전자는 급격한 변화와 낯설은 환경에 부적응하게 되어 곧 "질병"으로 이어졌다. 예로 중세에 유행한 페스트의 경우 숙주인 쥐와 페스트균이 서로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야생쥐는 자연적인 병원균의 숙주로 서로 적응되었으나 야생쥐와 만난 집쥐가 병원균을 옮겨왔다.) 거대한 재앙을 불러온 것을 들 수 있다. "그들 스스로의 변화, 위키", '후생유전학적 변화'란 환경 노출로 DNA가 메틸화되는 정도에 따라 유전자를 보호하면서 세포 안에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여 유전자 세포는 같아도 세포의 모양과 기능이 서로 다른 경우다. DNA만이 오직 유전정보의 주체라는 관념을 깬 후생유전학적 변화는 유전자 변이에 비해 유연성은 크나 안정적이지 못하다. *인용, 참고: 질병의 탄생, 홍윤철】

-

즐거움 자체는 '한정되지 않은 것'이다(플라톤 필레보스). 그럼 즐거움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정의로움just-ify이 참된 즐거움, "적도(맞을 적適 법도 도度, to metrion)의 기준"으로 합당한가.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한정되지 않은 것', 더 뜨거움과 더 차가움, 더 건조함과 더 습함, 더 많음과 더 적음, 더 빠름과 더 느림, 더 큼과 더 작음, 더 강력함과 더 유약함에는 서로와 대립되는 불화 상태를 멈추게 하는 균형과 조화(한정자, to peras)가 필요하다. 이 같은 한정되지 않은 온냉건습을 일정 비율로 조합하는 것을 '혼합된 것'(to meikton), '혼합된 부류'(to meikton genos)라 한다. 그리고 이 혼합된 것이 생성되고 유지되는 원인은 질서짓고 배열하는 '지성과 지혜'(앎)다. 몸이나 혼의 상태와 관련해 생기는 세 종류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 몸과 관련된 괴로움이란 몸 속에 있는 조화 상태가 해체되어 느끼는 배고픔이고, 즐거움이란 다시 체움의 먹는 행위로 몸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다. (갈증이란 '내게 없는 것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와해이자 괴로움에서 오는 내게 없는 것의 채워짐에 대한 욕구, 회복, 채워짐에 미치게 되는 혼의 기억이다.) 혼과 관련된 즐거움이란 즐거움에 앞서 예상하게 되는 혼의 즐겁고 고무된 상태며, 괴로움이란 괴로움에 앞서 예상되는 혼의 무섭고 고통스럽거나 두렵고 괴로운 상태다. 몸과 혼에 관련된 즐거움과 괴로움이란 기억에 의해 채워짐을 혼이 기대하며 즐거워하지만 비어있음을 몸이 괴로워하는 것이고, 몸이 비워져 있고 혼의 기억에 의해 채워지리라는 기대조차 없는 경우다. ("그 외에도 몸에는 즐거움이 있으나 혼에는 괴로움이 있는 경우가 있고, 몸에도 혼에도 동시에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플라톤 필레보스, 이기백 옮김") 거짓된 즐거움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옳은 판단과 지식에 뒤따르는 참된 즐거움"과 상반되는 "거짓과 무지에 뒤따라서 우리들 각자에게 종종 생기는 즐거움"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avenir에 대한 기대와 착각에서 발생하는 즐거움, (혹은 미리 괴로워하는 일)이다. 둘째, 몸은 괴롭지만 혼은 욕구가 충족될 것이라 기대하는 즐거움이다. 셋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료한} 중간적인 삶"에서 괴롭지 않은 상태를 즐거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큰 즐거움을 살펴보고자 할 경우, 건강이 아니라 질병 쪽으로 향해서 찾아야 한다. 몸이나 혼의 좋은 상태(arete)에서가 아니라, 어떤 나쁜 상태(poneria), 열병에 걸린 사람들과 그런 유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더 목말라하고, 더 추워하고, 더 크게 결핍을 느끼며, 채워질 때는 더 큰 즐거움을 갖는다. 플라톤 필레보스" 따라서 혼과 몸의 좋은 상태가 아니라 나쁜 상태에서 더 큰 즐거움과 더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괴로움과 혼합된 즐거움이란 비극적인 장면을 관람하면서 동시에 즐거워하는 것, "비탄과 그리움 속에 있는 괴로움과 섞인 즐거움"이다. 위에 거론된 즐거움 외, 플라톤은 세 가지 종류의 참되고 순수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적으로 자연에 따르는) 모양들의 아름다움, 냄새와 같은 "덜 신적인(hetton theion) 종류의 즐거움", 그리고 배움(mathema, 앎episteme), 즉 "배우는 것에 대한 굶주림과 관계가 없고, 배움에 대한 굶주림에서 비롯된 고통과도 관계가 없는 즐거움, {비록 망각을 통해 앎을 상실하여도 고통이 없는 것}"이다. "즐거움만을 지닌 삶이란 인간 이하의 삶일 것이요, 다른 한편 사유 내지 지성만을 지닌 삶이란 비인간적 내지 {모든 삶 중에서도 가장 신적인 삶},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삶일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적도 상태를 유지하는 "양쪽을 다 겸비한 충족적이고 택함직한" 혼합정체, 진실성이 있는 훌륭한, 즐거움과 분별을 지닌 삶, "옳은 판단과 지식에 뒤 따르는 참된 즐거움"을 '가장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인용, 참고: 플라톤 필레보스)

"{지각은 (우리에게) 언제나 있는 것, 앎이 틀리지 않는 한 152c, '(우리가) 지각을 통해 어떤 것이 영혼의 가슴에 찍혀 표시가 될 때, 그의(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밀랍이 두껍고 널찍하며 보드랍고 적절하게 무른 것일 경우' (밀랍 서판 191d), 그것은 대상에 감각이 있어도 기억이 빗맞힘hamartanein이 없고, 기억상과 감각상의 엇맞춤parallage이 없으며 '지혜로운 자이자 있는 것이 되고', 알고 있으나 착각으로 인한 거짓된 판단(새장의 비유 197c)과 "은유"와 물체의 우유적 속성을 지닌 이름에 어떤 대상의 우유적 속성을 부여하는 것(우유적 속성·우유성: 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이 없는 한,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앎은 지각aisthesis이다." 지각은 감각5에서 시작해 직관6으로 대상, "움직이고kinesis 변화하고alloiosis 운동하는phora, 152e" 삶을 인지하는 것이다. "앎은 참된 판단doxa이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의 척도이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의 척도다.' 감각5이 주관적 경험이기에 아포리아aporia가 생긴다. 그래서 '정의just-ify'가 필요하다.) (오늘은 행복이 존재한다고 슬픔이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은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슬픔이 생각하는 곳에 존재한다. *인용, 참고: 신화의 알리바이, 롤랑바르트) 행복에 도취된 미래avenir(앞으로 닥칠 것)에 대한 믿음보다, 미래futur(앞으로 될 것)를 사는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인간은 만물의 척도, {판단의 상대주의, 믿음의 상대주의}이다.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있다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고 하는 척도이다. 152a" 따라서 오늘의 "정의just-ify"는 어제와 내일의 척도이다. 다수의 행복에 슬프다는 것self-application, (삶은 산고를 겪는, 148c) 행복을 향한 슬픔(욕망, 내게 없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사랑)이다. 어제와 내일의 척도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오늘의 흐름 "크거나 희거나 뜨거운 그런 것, 154b", 즐겁거나 괴로운 삶의 온도(상태)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앎은 설명logos을 {언어logos를} 동반한 참된 판단이다." 환기hypomnesis(부를 환喚 일어날 기起), 즉 '기억의 적바림'memo에 의존하는 인간은 '감각할 때 사용하는 수단5'과 '감각적으로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능력6'을 모아 삶은 아름답고('자음과 모음'인 음소와 '음의 높낮이·길이·세기'인 운소가 음운이되고), "고상하고 건장한 산파이신 파이나레테Phainaarete(덕arete) 149a"로 여러 감각(운소)들이 "어떤 하나의 종idea(음절: 하나의 종합된 음), 혼 {또는 정신7}"이 되어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한다. (*인용, 참고: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삶"神이란 있을 수 없다. 설령 "삶"이 있어도, 그것을 지각할 수 없다. 설령 "삶"을 지각할 수 있어도,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 첫째, "앎"이란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DNA) 영원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한계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시 아무 것도 "앎지 못하는 것"이 돼버린다. 둘째,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날개달린 인간, 바다 위를 달리는 마차는 "앎"이지만 사고되는 것이다. "앎"이 인식된다면 반대 개념인 "삶"은 인식될 수 없다. 또한 순수하고 완전한 이성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완벽한 지식은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인간은 개별적이고 유한한 존재이므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인식의 어떤 것도 참되다고 할 수 없다. 셋째,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전달 수단인 언어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를 전달해주지 못한다. 로고스(logos)는 내적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감각의 구성물 즉 '언어'이다. (귀신 신神, 말할 화話는 하나의 파롤이다.) 따라서 언어를 뛰어나게 구사하는 수사학은 현실에서 가장 중요해진다. (*인용, 참고: 고르기아스 -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자연에 관하여; 비존재 - 앎, 존재하지 않는 것 - 알지 못하는 것, 존재 - 삶, 존재하는 것 - 살아가는 것)

"눈{삶}이, 그 눈{삶}에 들어맞는 것들 가운데 접근해 오는 다른 어떤 것과 함께, 흼白{앎}을 그리고 그것과 '쌍생'하는 지각을 낳을 경우(뒤의 이것들은 앞의 것들 중 한쪽이 다른 것과 만났더라면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것들인데), 그때에는 눈{삶}으로부터의 봄{살아가는 것}과, 눈{삶}과 짝을 이루어 색깔{미}을 출산해 내는 것으로부터의 흼{앎}이 그 사이에서 운동하게 되지. 그리하여 눈{삶}은 봄{살아가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되어 그때서야 보게 되고{생을 살아가게 되고}, 단순히 봄{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생을 살아가는 삶}이 되며, 눈{삶}과 짝을 이루어 색깔{미}을 낳는 것은 흼{앎}으로 가득 차게 되어 그 역시 흼{앎}이 아니라 흰 것{아름다운 것}으로 되네." (156e) 코기토 에르고 숨,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은 아름답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하며, "작용을 가하는 쪽{앎}에 대해서도 작용을 받는 쪽{삶}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따로따로 취해서 어떤 것으로 있다고 단정적으로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157a" 삶으로부터의 살아가는 것과, 삶과 짝을 이루어 미를 출산해 내는 것으로부터의 앎이 그 사이에서 운동하므로, 그것은 '생겨나는 것',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소멸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이고, 운동의 원인은 사랑이고, 힘의 목적은 아름다움이다. (*인용, 참고: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지혜, 건강, 부가 "좋은 것"이고, 좋은 것과 반대되는 것을 "나쁜 것"라고 한다. 그런데 "중간적인 것"은 "어떤 때는 좋은 것에 참여하고 어떤 때는 나쁜 것에 참여하며 어떤 때는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앉는 것이나 걷는 것, 달리는 것, 항해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돌이나 나무 등과 같은 그런 것들"을 말한다. 그런데 "중간적인 것", 즉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 삶은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을 출산하고자 걷고 달리고 항해하고 운동하고 산고를 겪는다. 그리하여 삶은 질병을 얻고, 삶은 좋은 것인 앎으로 가득차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다. (*인용, 참고: 플라톤 고르기아스 468a)

"그런데 뭔가를 보고 자기가 본 것에 대해 아는 자{환기}로 된 사람이, 만일 눈을 감고 나면 그것을 기억은 하지만 보지는 못하네{상기: 정신7, 영혼이 머물렀던 이데아를 떠올리는}. 그렇지? 그런데 '그가 본다'는 게 정말 '그가 안다'는 것이라면, '그가 보지 못한다'는 건 '그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네." 그런데 삶을 살고 자기가 살아온 것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낀 사람이, 만일 침묵死하면 그것을 기억은 하지만 살아갈 수는 없네. 그런데 '그가 살아가는' 게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가 살아갈 수 없다'는 건 '그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네. 164a "뜨거움이나 흼 또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의 생성에 대해 그들이 이런 어떤 식으로 주장한다고 우리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것들 각각은 작용을 가하는 것{앎}과 작용을 받는 것{삶} 사이에서 지각과 함께 운동을 하며, 작용을 받는 것{삶}은 지각이 아니라 지각하는 것{앎episteme이 아니라 배우는 것mathema, "앎은 지각이다"}으로 되고, 작용을 가하는 것{앎}은 성질이 아니라 어떤 성질의 것{미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으로 된다고 말입니다. 작용을 가하는 것{앎}은 뜨거움도 흼도 아니라 뜨거운 것이나 흰 것으로 되며, 다른 모든 것들의 경우도 그런 식으로 됩니다.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하나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는 작용을 가하는 것{앎}이나 작용을 받는 것{삶}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 양자Quantium가 서로 어울림으로써 '지각들과 지각되는 성질들'{삶과 살아가는 것, 미와 아름다운 것}을 출산해 내며, 그렇게 태어난 지각되는 것{살아가는 것, 아름다운 것}들은 어떤 성질의 것들로 되고 지각들은 지각을 하는 것들로 된다고 말입니다." 182a 그러므로 어떤 것을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기보다 삶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기보다 다른 어떤 앎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들이 온갖 방식으로 운동하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182c 만일 모든 것들이 운동한다면, 무슨 물음을 대상으로 해서든 '그렇다'고 하는 답변이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답변이나, 또는 (언어의 양자, 그것들을 말로 정지시키지 않으려고 '된다'는 표현을 쓰길 원하면) '그렇게 된다'는 답변이나 '그렇지 않게 된다'는 답변이나, 모든 답변이 마찬가지로 옳은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183a (*인용, 참고: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모든 사고의 근원은 감각5이고, 어떤 대상의 움직임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5을 자극하면 환상이 생긴다. 미에 대한 감각의 의도가 앎으로 가득하여 대상을 욕구하거나 욕망하는 것, 선을 예상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 하고, 침묵으로 삶을 거부하는 것을 악이라 한다. 그런데 움직이는 물체에 끌어당기는 중력, 욕구나 욕망이 없으면 관성에 의해 물체는 영구히 움직인다. 중력에 의한 어떤 대상의 운동, 움직이고kinesis 변화하고alloiosis 운동하는phora, 즉 건조한 것과 습한 것, 찬 것과 뜨거운 것, 쓴 것과 단 것, 날카로운 것과 무딘 것, 텅빈 것이나 꽉 찬 것, 즉 감각으로부터 흐려지는 것,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미해지고 '쇠퇴해 가는 감각'을 '환상', '상상', '기억' 또는 '상상이 환상으로 이상'을 빗여낸 것이라고 하고, 그 대상의 기억을 '경험'이라고 한다. 그러나 감각으로부터의 이상을 목표삼지 않으면 초자아(양심·윤리)는 현실이라는 자아로 원초아(본능)를 구속한다. 한편 조건없는 상상을 실현하는 꿈은 감각기관을 흐리게 할 수 있는 움직이는 대상이 없으므로 생각은 더욱 명료해 지고, 수면 중 신체의 상태나 잠들기 전 정신상태에 따라 (대적할 적)敵의 영상을 만든다. 사고의 흐름에는 두 종료가 있는데, 하나는 유도하지 않고, 의도도 없으며, 일정하지도 않은 열정적인 사고의 결여이며, 두 번째는 욕구와 의도가 지배하는 사고다. 욕구와 의도가 지배하는 사고를 고대 로마인들은 '통찰력', 혹은 '탐구력'이라 불렀으며, 통찰과 탐구를 통해 과거를 재검토하는 것을 '회상', 혹은 (플라톤의) 보는 것을 통해 기억하는 '환기'(후천적인 미), 기억은 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상기'(선천적인 미)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결과를 예측하는 선견지명을 '분발력', 혹은 '지혜'sophia라고 부른다. "현재만이 {자연적으로 자연에 따르는,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자연 속에 존재하며 과거는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행복에 도취된} 미래avenir는 아직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될 것'인} 미래futur는 과거 행동의 결과가 현재의 행동에 적용되어 나타나는 마음속의 {슬픔}·허구일 뿐이다." 예측이 기대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분별력, "과거의 경험을 통해 집약된 미래에 대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가정일 뿐이고 미래의 사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섭리{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라고 하며, "예언은 오직 신富에게서 나오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기적),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예측에 필요한 징후, (원인), 즉 앎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래는 현재의 기적이고, 현재는 과거의 기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는 감각·사고·사고의 흐름 이외에는 그 어떤 운동도 없기 때문에, 이런 능력은 모두 언어가 발명됨으로써 생긴 것이다. 진정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내려진 정의를 검토하고, 소홀하게 규정된 것이 있을 경우 정정하거나 스스로 새로운 정의·{justice·definition}를 내릴 필요가 있다." 직관6이라 함은 욕구와 정념으로 인해 지혜로운 것이 두려울 수 있고, 잔인한 것이 정의로울 수 있고, 낭비가 아량이거나, 한편 위엄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온냉건습을 다스리는 혼합정체, 비록 리바이어던은 상대적인 강함을 억제하기 위해 권력으로 불가피하게 존재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부터의 정의로움just-ify이 참된 즐거움, 적도로 합당하다.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는 묵시적 침묵에서 명시적으로 저항하는 것, 자유인으로써 움직일 힘과 지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유富를 추구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정의의 열정, 발견된 (그리고 소외되었던, "지구는 돈다"라는) 새로운 아름다움은 시대정신으로 격상된다. (*인용, 참고: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

생명이란 "얼어붙은 순결을 비밀스럽게 휘젓는 열정이자, 생물학과 미, 토마스 만" 나를 상실하므로써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힘에의 의지'다. 나의 과거를 상실함으로써 나의 장래futur에로 향하는 영원회귀, "순간 안에 서있는 나는 두 방향 HG vol.43, p48"으로 '시작과 변화를 상징하는 야누스'적인 삶을 산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정신7}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헤겔의 절대정신}뿐. 움베르토 에코,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하며, 장미는 꽃이 피기 때문에 꽃이 핀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 오늘의 삶은 어제로부터 독립된 주체이고, 내일은 오늘의 앎으로부터 분리된 개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러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고, 하늘은 더 이상 하늘이 아니다. (수소는 수소고 산소는 산소다. 그러나 let there be light, 산소는 더 이상 산소가 아니고, 수소는 더 이상 수소가 아니다.) "생명은 태양 광성의 변환이다." 삶은 앎의 변환이다. 생명은 '한계가 없는' 永<길 영永 - 시간이 길다> 세균(미생물; 병균을 포함한 상위 계념)이고, 세균이 아닌 생명은 세균인 생명에서 진화하여 세균 연합체를 이루었으며, 합병된 세균은 원생생물에서 균류, 식물, 동물, 포유류로 진화하여 질병(미생물; 병균), 그리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원생생물은 노화되어 세포자멸사Apoptosis하는데, 성性 구분이 있는 개체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죽음死 또한 진화되었고, 그것은 의식있는 생물에서 ('정신'을 남기고) 다시 한계가 없는 미생물 상태로 돌아가는 것, 바로 질병이다. 아이번 월린의 제안처럼 "질병과 관련 있는 생물인 세균이 종의 기원에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 공생과 종의 기원"한 것이다. "동일한 상태로 머물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생산의 핵심이다. 이는 세포뿐만 아니라 생물권에도 적용된다. 종에 적용되면 진화가 일어난다." 위벽은 닷새마다, 지방조직은 3주마다, 피부는 6주마다, 간은 2개월 마다, 혈구재생은 3개월마다, 뼈는 200일마다,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해마다 98퍼센트 교체된다. (그럼 이같이 활발한 재생가운데 무분별하게 촉발하는 질병이란 무엇인가. 질병이란 새로운 병원균에 유전자가 아직 적응되지 않은 것이자, 앎으로 향하는 삶이 중용을 벗어나 '유전자 변이와 후생유전학적 변화'의 속도를 월등히 추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병은 신호다.) 생명이란 그리스 어근에서 나온 "자기 생산autopoesis", 자기(auto)와 만들기(poiein)다. 블라지미르 베르나드스키는 모든 생물이 물질적으로 하나가 된 장소, 하나의 거대한 유전체이자 생물권에 살고 있으며, "지구의 생명체는 별의 에너지가 생물로 전환되는 물질계이자", 생물이란 생물권에 '살아 있는', 어떤 사건이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DNA와 바이러스는 '살아가지만' 물질대사를 못한다.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증식하고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또는 단속적으로 재배열되고, 파괴되고 재생되고, 부서지고 수선되면서 이루어지는 활기찬 자기유지"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생명없는 물체로부터 동물로 조금씩 옮겨가므로" 일부 작은 생명들이 전체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는 것을 '프랙털'fractal이라 하고, 아서 케스틀러의 표현처럼 보다 큰 전체를 이루는 작은 생물들의 공존을 '흘러키'라 일컬으면 대지는 "가이아"이자 "생물권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전위 예술"이다. "예컨대, 흙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스러진 바위, 꽃가루, 곰팡이의 균사, 섬모층의 포낭, 세균의 포자, 선충류를 비롯한 여러 미생물들이 뒤섞여 있는 혼합물이다." (*인용, 참고: 생명이란 무엇인가 -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한정되지 않는 것, 욕구로부터 비롯된 '힘에의 의지'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seize the day, 오늘을 즐길 것인가. 진화가 있다면 퇴화가 있겠고, 과연 오늘이 그 기준인가. 그럼 오늘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생명의 기준을 푸름이라 하고 삶의 기준을 오늘이라고 하면, 망각이 필요한 삶에 "앎"은 기준이 될 수 없다. "걱정"은 ("잠이 들 때면, 난로 앞에 있는 한 웅큼의 석탄을 내가 삼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충분한가. 【식물(이산화탄소6CO2와 물H20)이 "빛"을 받으면 당C6H12O6과 산소6O2가 된다. 당C6H12O6은 에너지를 제공하고, 지방C6H32O2은 에너지를 저장한다. 그러나 한정자to peras가 없으면 당분C6H12O6은 발효되어 알코올2C2H5OH(환각)이 되고, 다시 효소분해(미생물, 균, 발효, 환각)된 알코올2C2H5OH은 아세트산CH3COOH(식초)이 된다. "균류는 다양한 환각제와 독소를 구비하고 있어서 동물의 신경계를 자극하고 속이고 혼란시킬 수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언어란 디오니소스적 쾌락을 동반한 진통제(anodynia; 망각)이고, 그리스어로 "치료"와 "독"를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글 쓰는 일, 플라톤 파이드로스)이다. 세균들의 과두제는 한계에 도달한 (망각된Lethe) 삶의 부富를 해체하고 부식시킨다. 삶이 '살아가도록' 치유되는 이 과정에서 (대지와 혼합된) 정신이 남겨진다. 그것을 슈뢰딩거의 언어가 표현한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Bread and Game'에 길들여진) 오늘의 몫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정의just-ify"는 어제와 내일의 척도가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데미안, 헤세, {詩, 정신에서는 한정되거나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기준이 된다.}" 문명 속의 아폴론적 불만은 (지리학적 공평하지 못한 "앎", 광자photon로 인해) 증식되는 C6H12O6에서 비롯된 일탈을 넘어선 디오니소스적 2C2H5OH이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소비되는 CH3COOH가 아니다. "생명은 피할 수 없는 열역학적 평형의 순간(죽음)을 무한정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거칠고 난폭한 물질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길잃은 자본'富은 미지에 튜유립을 심지만, 삶은 생을 살아가지 않고 "열역학적 평형의 순간을 무한정 연장하기 위해" 앎을 얻으려 한다. 대공황 때 자본은 부를 불태웠다. 그 모순은 삶의 본성이였고, 여전히 유효한 현재진행형이다. 결과인 '살아가는 것'에 나쁜 영향을 준다면 유전자는 원인에 앞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을 향한 휘페리온이 부(광합성)를 거부하는 것은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원자는 광합성 의존에 자유를 부여했다. 광합성 식물에 의존하지 않는 "삶"이라면 꿈과 무의식, 그리고 그의 thesis는 족히 실현 가능하다. "지금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장자" 정신이 나비라면 삶은 "주말"이다.) "현존하는 문명들 가운데, 다수 계층을 억압해야만 소수 계층에 만족을 줄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문명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문명은 억압당한 계층의 노동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음에도, 그 문명이 소유하고 있는 부에서 그 계층이 차지한 몫은 너무나 적다. 억압당한 자들이 문명에 대해 강한 적의를 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부에 대한 금지와 박탈, 본능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태를 문명 속의 좌절, 불만,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가져다 준 언어logos의 해택을 고려할 때 '문명은 벗어던져야 할 멍에'는 아니다. 다만 문명의 발전으로 질병이 줄어들고 수명이 길어지면 생명의 핵심인 리비도性도 (원생생물이 진화하는 과정의 산물인 사디즘과 마조히즘 역시; 앎을 얻고 삶을 잃는 것, 에로스에서 죽음으로, 곧 주이상스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을 '의지의 초점'으로부터의 구원자, 성으로부터의 구원자로 찬미한다-미 속에서 그는 '생식 충동'{리비도}이 부정되고 있다고 본다...... 도대체 어떤 목적 때문에 아름다움은 자연의 소리와, 빛깔과, 향기가, 율동적인 움직임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무엇이 아름다움을 나타나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1889, 니체,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 22")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인용, 참고: 프로이트, 환상의 미래Die Zukunft einer Illusion, 문명 속의 불만 Das Unbehagen in der Kultur)

사바나에서 기원한 인류는 기후에 맞춰 차츰 이주해 나갔다. 지역에 따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멜라닌 색소가 늘어났고, 몸을 식히기 위해 땀샘이 더 많은 쪽으로 차츰 진화되거나 피부에 털이 줄어들었다. 역동적인 기후는 시간을 구분했고, 파도치는 온도의 변화는 선과 악을 구별하게 만들었다. '선하다는 것은 좋은 것, 앎이 기다리는 미래로 뻗어나가는 것이고, 악하다는 것은 앎으로부터 퇴보, 역행하게 만드는 나쁜 것이다.' 성선설이란 인간의 본성은 선척적으로 착하다고 믿는 것이고, 선악설이란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라는 것은 홍익인간, 도덕을 기초로 한다. 도덕이란 예의바름, "Morality"이다. 현인류의 진화가 기구를 사용하거나 서로 돕는 수렵채집인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도덕률을 기초로 삼는 것은 정당하다. 반면 식물과 동물의 대다수는 영장류(사람,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대형 유인원)인 인간과는 달리 단순하다. 식물과 동물에게 악이란 단순히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고, 선이란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인류가 그리는 선악의 벤 다이어그램Venn diagram은 생명이 그리는 선악의 벤 다이어그램과 완연히 다르다.) 사피엔스에게서 악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에게 지나치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너무 깊이 심취하는 성향을 찾을 수 있다. 더 뜨겁고, 더 습하고, 더 많고,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강력한 것에 매료되는 상태는 '한정되지 않은 것', 즉 우주적 속성이다. 이 상태를 '생겨나는 것',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학문, 예술, 운동, 오락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우주적 속성에 맞추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선이고 타자에게는 악이다. 무엇에 대한 열정, 무엇에 대한 욕망은 삶이 생명의 '아름다움'과 짝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자 '알아가는 것'이다. 우주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생명은 복잡한 관계의 생명권을 이루는 하나의 유기체이자 삶이다. 더 차갑고, 더 건조하고, 더 적고, 더 느리고, 더 작고, 더 유약함 역시 우주적 속성인 '소멸해가는 것'이자 '변화하는 것'이다.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에게 선이고 나에게 악self-application이다. 공인의 열정, 공인이 지닌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리는 선을 '기대'한다. 기대는 사실 선을 바라는 마음이지만 시선의 대상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부의 원인이다. 시선의 대상이 타자를 위해 자신이 축적한 부를 나눌 때 그것을 공리에 대한 선이라 하고, 부의 결과라고 한다. 누가 선하다는 것은 열정에 비례해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하는 것이거나 열정이 부족한 탓이다. 누가 악하다는 것은 열정이 지나쳐 사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직 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강한 유전자를 다음세대에 전달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본분이다. 그래서 부는 선이되거나, 그래서 부는 악이 된다. '너는 너 자신에게 선하다. 그래서 보기 좋다'는 것이 바로 유행trend이다. 다른 동물보다 복잡하고 민감한 인간의 감정은 타인의 열정이 부른 유행에서 흥을 느끼고 행복해 한다. (이 흥이 자신의 미래futur를 기대하는 금요일이다.) '유행한다trending', 유행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무리에 속한 어떠한 대상이 자신의 유전자와 비슷한 매력을 충분히 타집단에게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증하는 것, "정신적 동질성mental homogeneity"과 유대감, 집단의 만족과 공감, 그로부터 얻는 "감정의 고양이나 강화exaltation or intensification of emotion(*인용: 프로이트,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다. Trending하는 나르키소스가 행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면 부는 이기적인 성향으로 건너간다. Trending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bullying을 만드는데, 자타가 공인한 소크라테스, 니체, 고흐의 삶이 그렇다. "가장 강하고 가장 행복한 자들도 조직화된 가축떼(군축) 본능을, ...... 적으로 돌릴 때에는 약한 것이다. [유고 II. 11. 128, 니체]"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무리에 속한 상대가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지적해야할 대상이 아닌 그가 아직 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자신을 가꾸는 것, 자신을 꾸미는 것은 정령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너는 중요한 사람이다'라고 함구하는 의미다. 자신이 비춰진 타자의 모습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 타자의 유전자의 우월성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앎은 삶에 가죽옷을 입혀주었다.     

무엇을 정의just-ify하는 한정자는 생명을 생장하고, 물질대사를 하고, 움직이고, 닮은 개체를 생산하는 생식기능있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불"이 살아있고, 생식 능력이 없는 "mule"가 있고, "바이러스"는 성장하지 않는다. 생물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생명을 정의한다. (그것이 사상ism 혹 "주인 주主, 옳을 의義"이다. 그리고 행복하거나 슬픈 신세계nature를 보고 노래하는 것이 시다. ism은 공간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e.g. Foot vs. Meter) 인류가 그리는 생명의 벤 다이어그램은 mule를 포함한다. 그럼 물, 공기, 불, 흙의 언어가 정의하는 "무엇이" 인간을 포함하는가. "새가 없다면 빈 종이일 뿐이나 새를 한 마리 빈 종이에 그리면 그것은 하늘이 된다. 원효의 기호학적 통찰과 예술적 변용, 이도흠" (언어는 죽음을 질병으로 양자화시킨다. 언어는 편의상 범주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 식물과 모든 생명을 포함한', 동물을 자웅동체, 자웅이체, 강장, 극피, 선형, 연체, 절지, 척추, 편형, 환형, 두족류, 부족류, 복족류, 수관계, 외투막, 다지류, 갑각류 등등으로 나누었다. 시선에 담긴 태양은 8분 전의 빛이다. 그러므로 언어로 표현된 태양은 왜곡Quantified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神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진여(절대의 진리)의 절대적 의미'란 있을 수 없는 것}, 원효의 기호학적 통찰과 예술적 변용, 이도흠"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처럼 '지붕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세계神의 실체], 즉 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 생물을 탄소로 이루어진 유기체라고 하는데, 생물은 에너지와 물질을 필요로 하고, 체온을 조절하거나 산성도와 알칼리도를 조절하는 항상성이 있다고 하며,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고, "나쁜 변이를 솎아내고 좋은 변이를 보존하는, 다윈" 진화가 있다고 말한다. 물物-자체는 빛이 있어야 가능하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시간팽창과 길이 수축만 있다.) 첫째, 하나의 "운동"을 관찰하는 같은 공간의 두 관찰자에게 시간(빛)은 똑같이 흐른다. 둘째, 하나의 운동을 관찰하는 다른 공간의 두 관찰자에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단 관찰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공간에 있을 경우다. 사실 (빛의 속도인 경우) 관찰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일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빛에 대한 시각과 촉각"으로 시간(빛)을 판단하는 것은 어떤 전달대상, 매개체光合成가 필요한 "청각, 후각, 미각"과 별 다르지 않다. 결국 빛은 직관6으로 이해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빛과 소리는 모두 그것에 상응하는 감각 기관5에서 번역되어 최종적으로는 신경 자극이라는 동일한 것"이 되고, 신경은 그것이 빛에 관한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에 관한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 서로 다른 이유는, 뇌가 내부 모형을 사용할 때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 냄새나는 세계에 각각 다른 종류의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쥐는 시각이 아닌 청각, 소리를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인간의 시각 2, 독수리 5, 타조 25)】 그런데 앞서 말한 빛은 앞으로 가기만 (시간팽창) 한다. 말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 가지 않는 빛이다. "그 대상"이 어디에나 가능하다고 정의just-ify는 생각한다. 그 대상은 대상의 "길이를 '찟어지게' 팽창"시킨다. 셋째, '모든 가능성'物自體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가능성'은 열역학적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삶이 탈출속도라면 사상의 지평선은 진화론의 이중나선(약한 인류 원리Weak Anthropic Principle, 지구가 갈라파고스 제도라면 나머지 오대양 육대주Goldilocks Zone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지구가 오대양 육대주라면 갈라파고스 제도Goldilocks Zone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을 설명하고, 신은 죽었고 삶은 존재하고 고로 삶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은 아름답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한다. "'신이 죽었다'라는 것은 니체에게는 신이 없다는 무신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니체와 하이데거, 박찬국" (The Double Helix, 의미되어진 것signfie은 의미하는 것signifiant이 되고, 기표signifiant는 다시 기의signfie를 만나 외시적denotation 기호가 되며, 외시적 기호인 공시적connotation 기표는 공시적 기의를 만나 다시 공시적 기호7가 된다.) 그래서 넷째, '모든 가능성'은 전부를 포함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모든 가능성' 역시 포함해야 한다. "어떤 과학적 사실도 100퍼센트 확실하게 입증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어떤 것이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합당한 의심을 뛰어넘어 입증된 경우 이것을 사실로 보는데, 진화는 이 기준에 맞는다. 진화가 일어난 과정을 굳이 의인화한다면 어떤 사람이 적당할까? 그는 설계하는 자가 아니라, 변화에 금방 싫증을 내거나 만족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하는 진화자가 적당할 것이다. 누가 되든, 그가 {다양한 가능성}들을 시도하고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지적 설계자가 아니라, 서투르지만 '일관된 진화자', 혹은 '적응적 변화자'가 더 적당하다. 사실 딱 맞아떨어지는 해석은 물론 진화다. 리사 랜들" 

-

'하나의 유령이 삶을 배회하고 있다. 앎이라는 유령이.'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 the spectre of commun"ism". 앎을 사용하기 위해 삶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앎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삶을 이해해야 한다. 행복이 없을 때 슬픔을 돌아본다.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피지배계층)는 항구적인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를 말하고, 첫째, 하나의 운동을 관찰하는 같은 공간의 부르주아지(지배계층)에게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능동적인 언어의 경우, 둘째, 관찰자에 따라 그것은 의미되어진 것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서로가 안에 있는 이들 존재자는', 셋째, 모든 가능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가능성은 열역학적 평형, 윤리적("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해택, 롤스")이여야 한다. 공시적 기호7는, 넷째, 부르주아지의 부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맑스의 "부르주아로서의 인간"을 포함해야 한다. 포이어바흐에 (미래철학의 원리들) 따르면 절대적인 앎은 삶 속에 재배치 되었고, 개체적 유한성의 한계는 "무한자를 유한자 속에 두는 것", 순수한 사고나 이성만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사변철학의 역전, 술어가 주어로" 바뀌는 것, (맑스의 표현처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현재가 과거를 지배하는"), "그것은 자신이 분리시키는 것과 다시 동화되지만, 오직 분리되고 매개된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富, 라틴어에서 파생된 '형태를 갖춘'informare, 고대그리스 form이란 모양morph, 모양을 빚는자morphai, 모르핀morphine) ism은 공간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주어가 술어로 바뀌는 것을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시간아 멈추어라, "소모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기를 그치고 그의 본질로 되돌아와서 모든 속성들과 마음껏 개화시키며, 그들 자체의 완성 이외에 다른 어떠한 이유도 찾지 아니하며, 순진하게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 무죄의 순간이다. 공간에 적합한 것, 부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 ism이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우유성이 있는 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다. 언어의 변이[전자기파, 방사선, 화학물질, 외부.내부 유전자 등]는 문학의 기교[은유; 우유성], 혹 ism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생명은 ism에 갖혀 있는가. 생명의 정의를 묻는 것이다. Objection, '관성inertia, 기계는 하나의 문門이 되었다.' 역域, Domain, 계界, Kingdom[1865-1900], 문門, Phylum, Division, 강綱, Class, 목目, Order, 과科, Family, 속屬, Genus, 종種, Species. 슬기로운 사람Homo Sapiens의 언어는 수렴진화인가, 열역학적 평형에 따라 혹 우주적 공진화coevolution의 산물인가.)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은 lucrative langue, 언어도단이다. 'A, B, D, F, G,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가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All the powers of old Europe have entered into a holy alliance to exorcise this spectre.

문학은 '무'에서 사물의 '고유한 존재와 진리'를 들어나게 함으로써 '의식'을 만든다. (*참고: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그러나 물은 물이다. 롤랑바르트는 '언어는 압제적인 체계이고 문학은 언어의 대한 반역'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인의 열정은 수소와 산소의 성격을 언어로 표현한다. 이제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문학에 의해 언어가 된) 분자 H2O은 문학의 반역으로 원자를 표현한다. "존재자는 알레테이아alētheia다." (진리는 그리스 낱말로 알레테이아alētheia, 라틴어 베리타스veritas, 독일어 바르하이트Wahrheit) 망각(lethe)하지 않는 것(a), 존재자는 비은폐적(alētheia)이고 비은닉적이다. 존재자는 인지하고 의식한다. 존재자의 무의식은 예술을 통해 의식으로 확장된다. 색을 출산해 내는 것, 예술은 '보는 작용', 이데인idein이고, 존재자의 인식은 '보이는 것', 이데아idea다. '살아가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to see고, 삶과 짝을 이루어 색깔을 낳는 것은 앎으로 가득 차게 되어 그 역시 앎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영혼의 눈으로 보는 플라톤의 에이도스to see가 된다. "본질, 즉 이데아는 통-찰{美}된다. 통-찰하는 것(Er-sehen)은 끄집어-내는 것(Hervor-bringen)이고, 빛 아래에 가져오는 것이며, 시야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끄집어-내는 것{무의식, 앎}은 끄집어-내어지는 것{의식, 삶}에 근거하면서 통-찰된 것을 근거로서 정립한다. 이렇게 본질을 통-찰하는 것은 그 본질을 근거 짓는(begrunden) 어떤 작업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idea} 그 자체가 근거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 짓는 작업은 본질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Hervor-bringen이며 이는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앞으로-꺼내어 놓음Hervor-holen이다. 박찬국, 니체와 하이데거-본질 파악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Ibid, p96" 무의식에서 의식을 현출하는 것, 꿈에서 예술로 표현되는 것, "앞으로-꺼내어 놓음Hervor-holen Ibid, p96", 살아가는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 자연에서) 경이Er-staunen와 경외awe를 느낀다는 것은 다시 꽃이 꽃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샤갈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무의식이 의식에 의해 조절되고, 남성의 무의식 인격의 여성적 측면인 아니마anima와 여성의 무의식 인격의 남성적인 면인 아니무스animus를 표현하는 "인격의 전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대극쌍들의 결합", 곧 살아가는 아름다운 것,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교류에 의해 서로와의 정서적 관계를 맺는 성격을 띤다. 자신을 '의식적-무의식적 화가'라고 부른 샤갈은 보는 이로부터 정서적 공감을 유발하는 「도시 위에서」 세상과 무관한 자신과 벨라, 무의식을 상징하는 염소와 의식을 상징하는 사람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정신을 이루는 기하학적 「나와 마을」, 회색빛 도시 「비테프스크 위에서」 날아다니는 슬픈 방랑자, 「파란 서커스」에서 무의식의 몽확적인 면을 표현하는 꽃다발을 든 물고기와 북치는 수탉과 달의 바이올린 연주와 우주를 유영하는 여인,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고 일체를 이루는 「곡예사」 손에 걸쳐진 암시적 시계, 평화시 문을 닫고 전쟁시 문을 열어두는 야누스의 시작과 변화를 상징하는 「두 얼굴의 신부」, 원근법을 벗어난 「당나귀가 있는 (휘어진) 에펠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붉은 염소, 허공에 떠 있는 녹색 얼굴, 꽃다발 속에 요정처럼 숨어 있는 한 쌍의 남녀, 뱃속에 송아지를 품은 채 공중에서 회전하는 염소, 신성과 세속,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공간에 동시에 공존하고 모든 만물이 구별 없이 일체를 이루며, 심지어는 동물의 머리를 가진 인간과 인간으로 형상화된 동물이 서로의 역할을 교환하고, 세속의 인간이 신을 대신하고, 반대로 신이 세속의 인간을 대신하는 등 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장면"들로 "현대인의 의식이 접촉을 잃어버린 무의식의 언어", 즉 의식이 지녀야 할 결핍된 무의식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융은 "무의식 속 아직 의식에 도달하지 못한 정신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며, 인류의 정신이자 철학을 표현하는 집단무의식은 예술을 통해 "시대정신"의 성숙과 미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리하여 "정신의 균형을 꾀하고자하는 무의식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명 무의식은 모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으나, 현실에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샤갈의 작품에서 처럼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상호작용할 경우에 가능하다. (*인용, 참고: 샤갈Chagall 작품에 나타난 무의식의 상징에 관한 연구 - 강미화)

정념이란 "강하게 집착하여 감정에서 생겨나는 생각"이다. 테카르트는 영혼과 몸의 결합 현상이 바로 정념이고, 정념이 곧 지각이라고 말한다. (앎은 지각aisthesis이다.) 지각이란 감각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작용이다. 지각은 경험에서 시작한다. 생명이 깨어나면 삶은 정신과 결합하고, 삶은 앎을 의식하여 의욕을 불태워 지각하고 운동한다.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시작했을 때 영혼이 갖는 최초의 정념은, 생명의 원리인 열을 유지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양소였던 피나 어떤 즙이 심장 안으로 들어갈 때 생겨났어야만 하는 것으로 본다. AT XI, 407, 정념론" 데카르트의 첫 번째 정념은 "경이"를 통해 어떤 대상을 선한 것과 악한 것,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한다. "영혼이 몸에 해로운 것과 몸에 유익한 것을 즉각적으로 경각시키고 알리기 때문이다. 이 경각을 통해 처음에 슬픔이 생기고, 이어서 이 고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미움이, 그리고 세 번째로 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욕망이 생긴다." 데카르트는 두 종류의 "의지"가 있다고 해석한다. 하나는 대상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물질적으로 원하는 (운동의) 경우다. "영혼이 관념적이지 않고 상상적인 어떤 생각을 결정하기 위하여 의지를 사용할 때, 이 생각은 뇌에 새로운 인상을 만든다. 이것은 영혼 안에서는 정념이나 상상이라고 고유하게 불리는 작용이다. AT IV, 311. 정념론" 미래futur의 정념과 미래avenir의 정념은 다르다. 경이를 통해 얻어진 정념은 미래avenir를 가능케 하지만, 모든 가능성에서 분리된 환상은 미래futur를 상상한다. 의식하지 않은 나머지 행동들이 잠재의식이고, 전의식(이용가능한 기억)으로 정화된 무의식이 의식이다. 지각이 감각에서 가져오는 활력(살아 움직이는 힘)이 (잠에서 깨어난) 의식이고, 망각(잊어 버림)이 감각에게 가져다주는 피로가 (잠으로 빠져드는) 무의식이다. (태초, 창발ermergent property[기존 요소의 재편성,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생기는 경우], 지각이 감각에서 가져오는 활력은 무엇인가. 정신이 있었다면 "내가 나비인가." 삶의 목적이 정신이라면 생명은 살아남아야 하고, 질병은 죽음에 가까워진다. 새로운 질병은 발견일 뿐이다. 마지막 질병이 죽음이다.) 초인이 되고자 각성할 때 엔도르핀(Endogeneous Morphine, 모양morph, 모양을 빚는자morphai, 모르핀morphine, 잠의 신morpheus)이 발생(runner’s high)한다. 어둠에 반응하여 눈의 레티나, 위장관, 피부에서 생성되는 "멜라토닌"은 세로토닌에 의해 제 3의 눈으로 불리는 "송과선"에서 만들어지고, "빛"에 반응하여 생성되는 행복을 관장하는 "세로토닌"은 "긍정적인 도파민 신경"과 "부정적인 노르아드레날린 신경" 사이에서 삶의 평온함을 유지시킨다. (몸이나 혼의 상태와 관련해 생기는 세 종류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 작은 솔방울과 비슷하여 솔방울샘이라고 불리는 송과선은 사춘기가 시작되면 일정한 크기에 머물러 질량만 확대되고 석회화(몇몇 연구결과 치매와 알츠하이머 환자에서 더 높이 측정)가 진행된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영혼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라고 믿었다. (*인용, 참고: 데카르트에서 무의식, 이진화) 

과학은 우연을 길들인다, 언어는 우연을 길들인다. 대상을 의식하는 순간, 대상은 무의식이 된다. 언어는 의식을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상이 언어가 되는 순간(1AU, 8분 19초), 언어에 모순이 발생한다. 언어는 원자다. 원자핵(+)과 전자(-)가 전기력을 만들고, 언어는 자기 모멘트magnetic moment를 형성한다. 자기장magnetic field은 어떤 대상을 당기고 밀어낸다(인력과 척력). 시선에 의해 분리된 타자(쪼개진 자석)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언어, 원자란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궤도orbital를 말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았다. 알은 세계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므로,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눈을 깜박이다'라는 것은 (빛차단과 안구 건조증), 망각이 감각에게 가져다주는 피로다. (감각적응sensory adaptation이란 감각기관의 피로다. 감각은 변화에 지각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으로 멘델라예프는 주기율표를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다. 지성은 감각에서 가져오는 활력으로 하루라는 의식을 치룬다. 의식tradition.celebration이 반복되면 의식에서 무의식의 전환이 점점 빨라진다. 장인은 "기술과 타이밍을 익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기술과 신경표상neural representation이 신경계에 깊이 스며들어 제2의 천성으로 자리 잡는다.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신경표상이란 신경세포들이 정보를 나타내는 양식이다.) 의식이 반복되면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된다. 이것이 경지에 이르면 시간에 대한 의식은 압축되거나 확장되고, 무의식에 갇힌 기술은 기교에 자리를 내어준다. 기교가 무르익으면 (결정론에 따라) 그것은 다시 기술이 된다. (죽음은 질병이다. 질병이 없다면 꿈도 없다. 죽음이 없다면 잠도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기교와 우유성은 의식의 반복에서 발생한 무의식으로 발견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아름다움은 우유성이 있는 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다. "인식의 문을 깨끗이 닦는 순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히 드러난다. 잠, 베르나르 베르베르" 언어는 날숨, 언어는 들숨, 그 숨결이 현현하다.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마릴린 먼로, 빈센트 반 고흐, 마르셀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워즈워스,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마가릿 대처, 아이작 뉴턴, 토머스 에디슨, 셰익스피어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뇌파에는 명상, 무의식 상태의 델타파 0.2-0.3.99Hz | 졸음, 잠에 빠져드는 세타파 4-7.99Hz | 휴식, 안정적일 때 알파파  8~12.99Hz | 불안, 긴장, 활동할 때 베타파 13~30Hz | "고뇌", 극도의 각성과 흥분하는 감마파 30~45Hz가 있다. *참고: 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직관6은 오감5의 굴절된 이미지를 경험한다. 생명의 공간frame이란, "(공간은) 정신7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물질}7은 공간 속에 절대적으로 연장된 것étendue은 아니지만 그 속에 펼쳐져 있다는 것s'étend"이다. 우리는 "생명적 흐름 자체"가 아니라 이미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분자, "물질의 영결된 부분들로 채워져 있는 흐름"이다. 【베르그송의 공간에서 물질, 즉 종Species은 기하학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다양한 순간들" 위에서 각 종들은 완벽하게 유사하지 않다. 베르그송의 지속적인 시간은 공간에 담기는 것이고,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움직이는 공간 속 상대적인 시간이다.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송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논쟁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 원자 시간 vs. 플랑크 시간, 하나의 운동을 설명하는 같은 공간의 두 관찰자가 만났다. 마침맞게 하나의 운동을 관찰하는 다른 공간의 두 관찰자에게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그리고 열역학적 평형을 위한 나의 가능성과 모든 가능성이 남았다.】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를 보았다. 베르그송은 '지성은 의식을 향해 본능은 무의식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지성"의 간절함은 부동적인 것, 즉 불연속적인 것을 바라고, 지성은 생명이 없는 무기적인 것(활력이 없는 것)을 명확하게 표상한다. 능동적인 "의식"이란 "본능"이다. 본능의 채워짐에서 우리는 피로하다. (본능이란 의미욕구, 자기표현욕구, 안전욕구, 지속욕구, 생존욕구를 가르킨다. 매슬로우의 욕구로는 자아실현의 욕구, 존경의 욕구, 소속과 사회적 욕구, 안전의 욕구, 생리적 욕구가 있다.) 이제 욕망하지 않는 망각들은 "무의식"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지성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유기적인 것{organism, 생물}을 무기적인 것으로 분해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자신의 자연적 방향을 뒤집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비틀지 않고서는 {Double Helix} 진정한 연속성과 실제적 운동성, 상호 침투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해 생명 그 자체인 이 창조적 진화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물질적인 생명력vital impetus, 생은 약진한다 élan vital.} 지성은,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해 외화된 생명이다." 미래futur는 제 2의 멘델레예프를 기다린다. 진화가 생명의 기원이라면 기계는 감정과 자아를 얻게 될 것이다. 기계가 자아의식을 갖추면 인간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는다. 【우연에는 변이가 있고, 우연에는 자연선택이 있으며, 지성에게는 우유적 진화라는 우연이 존재한다. 그런데 "질료"로 사유하여binary 진화하는 지성은 (무한한 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원래 "형상"에 주어질 필연적인 운명인가. 지성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 ("질료는 잠재태이며, 형상은 현실태다. 아리스토텔레스" 초인이 현실태라면 정신은 그에 걸맞는 잠재태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성이 우연이라면 생명은 mule다.】(*참고, 인용: 창조적 진화, 앙리-루이 베르그송)

 

402

외력에 의해 변형된 물체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탄성이라하면, 탄성이란 레테를 건너는 것, 가소성이란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는 것ecology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정신이란 표현형 가소성이 외력인 자연선택을 받는 라눈쿨루스 아쿠아티쿠스Rammculus aquaticus(매화마름과 비슷한 종)와 같은 것이다. (겉으로 성질을 들어내는 "표현형"Phenotype의 반대는 "유전형"Genotype이다.) 그럼 C < rB가 진화의 산물이거나 본성이라고 가정할 때, 이타성이 본성이라면 가이아를 넘어선 원인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호혜적 이타성이란 개념에 따라 이기적인 것이다. 비록 인간은 개미와 벌들의 사회같은 강한 집단선택, 즉 이타주의적 집단인 유토피아를 꿈꾸나, 결국 한 집단의 협동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보상과 이득을 위함이다. 시대적 감성, 지역, 그리고 문명에 따른 변이와 자연선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가진 지성은 특별하므로, 범사회적 집단의 구성원들이 가진 적합도는 비슷하거나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진화는 약한 집단선택으로 기운다.), (캄브리아기의 시작과 끝은 5억 4500만 년 전과 4억 9000만 년 전, 구지 541백만년 전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을 강조하지 않아도) 포괄적으로 무엇이 "살아가는 것,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현재로써 알고 있는) 살아있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곳, 시계와 달력의 저편에 영원히 존재하는 완벽한 고요, 시간에 쫓겨 허덕이던 인간적 존재가 조용히 머무는 곳, 시간의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이 작은 비시간적 공간이여! 한나 아렌트, 정신의 삶" 

정신을 진화의 유산이라하고, 시간을 산파라고 가정하자. 하면 정신을 뺀 나머지를 나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란 신체와 정신을 합한 것이다. 지성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하고, 초인이 현실태라면 정신은 그에 걸맞는 잠재태(앎)가 필요하다. 영웅hērōs, 초인이란 반신半神이다. 헤로스hērōs란 에로스erōs로부터 태어났고, 우리가 초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질문erōtan(erōs)하기 때문이다. [프쉬케(정신)는 지각이 감각에서 가져오는 활력으로 사랑했고erōs, "아름다움"을 범한 프쉬케는 결국 망각이 감각에게 가져다주는 피로로 수면에 빠져든다. "정신은 생명의 산물이고, 생명은 정신 속에서 진정한 삶을 영위하는 거야. 정신과 생명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서로에게서 삶의 자양분을 얻는 거야.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토마스 만"] "헤로스hērōs는 에로스erōs-바로 이 에로스(사랑)로부터 영웅들이 태어났네-의 이름에서 조금 변형된 형태임이 자네한테 분명해질 테니까. 그들이 영웅들이라 불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영웅들hērōes은 질문erōtan하는 데 능숙한 지혜로운 자이자 능란한 연설가이고 변증술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네. 크라튈로스 398c-398d, 플라톤" 사랑하는 우리는 질문erōtan한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혼인가.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 정령 정신인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자연을 따르는 것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인가. 자연이 자연스럽기에 운동하는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움인가. 그렇다면 삶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배하는가. 영웅hērōs의 생은 비록 제한적이나 능히 우주적 속성(지나친 것)을 발휘하는가. 우리는 생명(가이아)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이제 곧 생명을 지배하려 드는가. 정신은 자연을 지배하는가.'

정신과 시대정신은 다르다. (태초에 빛과 진화가 있었을 것이고)우선 정신은 유전자를 필요로 한다. 주어진 초기값이 어떤 정신으로, 그리하여 정신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공진화하고, 정신은 신체를 만드는 유전자에 따라 초기와는 다른 값을 제시한다. 정신은 시대정신의 주류로 스며들거나 새로운 줄기로 진화하여 삶은 아름답고(음소와 운소가 음운이되고), "고상하고 건장한"시간은 여러 감감들(운소들)에 의해 어떤 하나의 종(음절)이 되고, 앎이 필요한 정신(종種, Species)은 새로운 문(문단)이 되며, 문은 강(문장)이 되고, 강은 목(구절)이 되고, 목은 과(어절)가 되고, 과는 속(단어)이 되어, (질료가 잠재태이며 형상은 현실태일 때), 생겨난 새로운 종(형태소, morpheme, morph모양, -eme최소단위)은 새로운 씨앗(잠재태)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정오를 맞이할 각오를 지닌) 초인의 삶(부동의 원동자, ho ou kinoúmenon kineî, "움직이지 않는채 움직이는 자")을 구성해 나간다.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unique, 유일한, one of kind}를 휩쓸어 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hērōs에게 시간은 찰라의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에로스의 금화살이다. 강물이란 멈추지 않는 생을 살아가는 삶이다. "그대는 같은 강에 두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크라튈로스 402a" 여기서 강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름"이고(앎), 흐르는 강을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앎"이란 "정의"된다.) 어떤 순간, 어떤 찰라를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웅의 사랑erōs, 앎을 알아가는 것은 빙켈만의 비유처럼 '엄밀히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단 한순간'일 뿐, 아름다움은 덧없다는 것Götterdämmerung(고대 노르드어 라그나로크Ragnarǫk/Ragnarøkkr는 '황혼'이라는 뢰크røkr/røkkr, 혹은 '어둠이 자라다'라는 뢰크바røkkva)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 '너 자신을 알라', 곧 '너 자신을 보라'는 플라톤의 명령은 맞은편 상대의 눈동자에 비춰진 나 자신, 눈부처를 통해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 나를 의심하는 나 (거울을 보고), 시선을 통해 '나 안의 타자'를 보는 것이다. 붓다가 불타로, 불타가 부텨로, 부텨가 부처가 되었고, 부처(부처 불佛, 험할 타陀)란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눈부처란 라틴어 pupilla에 어원을 둔 눈동자pupil를 의미한다. 나 자신을 보는 것, "들여다보는 사람의 영상 113a"은 질문erōtan하는 것, "단순히 봄이 아니라 보는 눈이 되는" 흰 것으로 된다. "그러니 눈은 눈을 보면서, 특히 눈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자 눈이 보는 수단으로 삼는 바로 이것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볼 것일세. 알키비아데스 I 133a"】 "정말이지 어떤 앎도 어떤 상태를 전혀 유지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앎은 아니네. 그러나 크라튈로스, 만약 모든 사물이 변하고 아무것도 지속하지 않는다면 앎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네. 만약 앎 그자체가 앎임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한다면 앎은 언제나 지속할 것이고 그래서 앎이 있게 될 테지만, 앎의 형상 자체가 변한다면 그것이 앎의 형상과는 다른 형상으로 변하는 순간 앎은 있지 않을 태니까 말이세. 크라튈로스 440a-440" 플라톤은 국가에서 '어떤 앎도 그 앎의 대상이 어떤 상태를 전혀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대상)을 알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의 효소enzyme가 삶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앎, 아름다움에는 입자와 파동이 있다. 

감각은 크게 "특수감각"과 "일반감각"으로 분류된다. "표면감각"과 "장기감각"을 합하여 "일반감각"이라고 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감각"에는 12쌍의 뇌신경과 관련된 "특수감각"인 시각·청각·후각·미각 외에도 "표면감각"인 촉각·압각·온각·냉각·통각, "장기감각"인 공복감·오심·장기통각, 그리고 "특수감각"에 속한 "평형감각"인 회전·가속도·직선 가속도가 있다. 척추동물에 있어서 장-뇌gut brain는 제 2의 뇌라고 할 수 있는데, 작은 창자에만 1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장은 척수나 두뇌의 지시없이도 상황에 따라 반사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의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 (행동과 결정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의미다.) 장에 분포하는 신경세포는 척수신경세포보다 많고, 말초신경계 전부를 합한 것보다도 많다. 장의 신경계에는 내장감각신경과 부교감신경, 그리고 내장신경절의 내장신경이 돌림근 주위에서 근육층신경총과 장막밑신경총을 형성하고 있다. 두뇌와 유사성이 매우 강한 장-뇌는 두뇌에서 사용되고 발견되는, 현재까지 알려진 200가지 이상의 신경물질들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화학물질창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나 다름없다. 흔히 알려진 화학물질로는 아세틸콜린,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엔케팔린, 클루타메이트, 가바 등등이 있다. 반면 "의식할 수 없는 감각"에는 근의 길이·근의 장력·동맥혈압·간정맥혈압·폐의 팽만·두부의 혈액온도·동멱혈의 산소분압·뇌척수액의 수소이온 농도·혈장의 삼투압 및 포도당의 동정맥혈차 등으로 분류된다. 「뇌과학 공부」에서 저자는 "개별 감각은 각각의 형식인 고유한 에너지 양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은 빛 에너지를 감지하고, 청각은 공기 분자에 의한 압력 에너지를 감지하고, 후각은 공기 속 화학 분자를 감지하고, 미각은 액체에 용해된 분자 에너지를 감지"한다. 따라서 "표면감각"(체감)에 속하는 촉각·압각·온각·냉각·통각은 (내수용기interoceptor, 즉 근육·건·관절·내이inner ear을 통한 자극의 고유수용기proprioceptor와 통증·공복감·목마름·질식감·충만감·오심을 통한 자극의 내장수용기visceroceptor으로부터; 삶은 우주적 속성이므로) 내부 에너지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펑유란은 이것을 마땅히 지켜야 할 이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즉 길-도道라고 말한다. (펑유란의) 도道란 어떤 사물이 극단에 이르면 반대로 언제나 되돌아간다Der Wille zur Macht는 자연의 법칙이다. 잊고 싶었으나(망각) 다시 알고 싶은 것(각성), 비만 관련 호르몬인 오렉신orexin은 수면을 억제하는 물질인데 수면 연구자들은 이 호르몬을 하이포크레틴hypocretin이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세 가지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형성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도파민, 옥시도파민(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빛의 세로토닌은 운동하게 만들고, 어둠의 멜라토닌은 수면을 유도; 세타파에 빠져 델타파로 렘수면Rem하려면 렘온세포Rem-On가 켜져 노르아드레날린이 줄어들어야 한다. 렘온세포Rem-Off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만든다.)이라고 한다. 주위를 집중하고 각성할 때 뇌에 노르에피네피린이 분비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의 분비되지 않아 꿈은 기억되기 힘들다. 도파민(쾌락, 긍정, 성욕, 식욕)에서 옥시도파민(노르아드레날린: 흥분과 불안, 부정, 스트레스)이 만들어지고, 옥시도파민에서 매틸옥시도파민(아드레날린: 흥분과 분노)이 생성된다. 반대로 메틸옥시도파민에서 생성효소인 단백질의 작용으로 도파민과 옥시(산소)도파민이 생성된다. "생성효소인 단백질은 거대 분자이기 때문에 만드는 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단백질을 탈락시키고 점차 노르아드레날린과 도파민 위주로 신경계를 구성하면 에너지 관점에서 이득이 된다. 그래서 포유류, 특히 인간에서 {미를 추구하는 속성} 도파민이 주요한 신경물질이 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뇌과학 공부」"】 사물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미에 대한 강한 애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뇌는 뇌밖, 즉 장-뇌gut brain라는 환경에 자극되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외수용기(extroceptor, 시각·청각의 원격수용기teleceptor와 미각·후각·피부감각의 접촉수용기contact receptor)에서 직관을 얻고 정신을 생산한다. 삶은 자양분인 앎(입자와 파동)을 감지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크라튈로스440a-440에게 말하는 앎은 지속하는 입자이면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 파동이다. 【미에 대한 감각의 동경이 감정이고, 그 간절함에서 삶은 살아가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어 그때서야 진정 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봄이 아닌 흼을 보는 눈이 되고, 보는 눈은 (산파인 시간의 도움으로) 색깔을 낳아 흼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보는 것은 흼이 아니라 흰 것이 된다. (테아이테토스 156e) 감각에 각각의 형식인 고유한 에너지 양식이 존재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정신(앎)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피상적이던 사고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게되고,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대화하고 텍스트를 남기게 만든다. 그리하여 열의에 찬 담론은 언어로 정의된다.】 위와 같은 과정을 고려하면 과학혁명을 토대로 진화에 걸린 시간의 척도에서 언어는 아주 최근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언어 사용이 인간을 동물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속성으로 보았다. 가령 다섯가지 감각만 존재한다면 현생인류는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균형이 재배열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늘 감각이 있었고, 언어학자 촘스키의 의견처럼 비교적 최근 갑작스러운 대약진으로, 즉 특정한 감각의 축소나 확장으로 인해 인간은 "한없이 창의적인 사고의 토대를 제공"받은 것이다. 촘스키의 대약진이란 담론을 통해 범주화된 미의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각도에서의 지각 항등성과 색채 항등성, 혹은 공감각)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사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제 3의 뇌 존재여부다. (인용.참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 촘스키, 뇌 100가지 새로운 지식 - 모리 아키다네, 뇌과학 공부 - 박문호)

"생각은 언어로 표현된 기억이며, 꿈은 시각으로 표현된 기억이다. 생각은 언어로 표상되고 꿈은 이미지로 표상된다. 생각은 언어로 구성되며 언어는 상징이고, 상징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환각과 같다. 생각은 현실을 반응하는 환각이란 관점에서 꿈과 같고, 나아가 생각은 언어에 의한 상징적 표상이므로 실제가 없는 환각과 같다. 결국 내면에만 몰입된 생각과 꿈은 실제 감각입력이 배제된 환각의 세계다. 지각은 그 자체로 세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뇌가 만들어낸 환각이며, 대상에 대한 지각을 상징인 언어로 표상하는 과정이 생각이다. 그렇다면 생각도 그 자체로 환각이다. 생각에는 생각나기와 생각하기가 있다. 상상은 생각나기고 회상은 생각하기다. 생각은 언어로 표상된 지각의 한 형태다. 뇌과학 공부 - 박문호" 눈부처로 나는 타자의 시선 속 나를 본다. 나를 의미하는 것은 네가 의미되어진 것으로 우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코기토 에르고 숨, (라캉의 설명,) 하나의 의미하는 것(기표)은 다른 의미하는 것들(공시적 기표)에 대해 주체를 표상(외시적 기호)한다. "나의 무의식 또한 나의 바깥, 즉 내가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타인 속에 존재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있는 모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네가 네 안에 가지고 있는 나의 이 부분 때문이다. 무의식은 반복이다, 장-다비드 나지오" 뇌는 렘수면에서 시각 주도적 의식 상태로 (흼이 아닌 흰 것을) 생각하고, 뇌는 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감각이 반영된 청각적 언어로 생각한다. 각성하는 생각(모양morph, 모양을 빚는자morphai, 형태소, morpheme)은 언어로 표현되는 기억이고, 망각하는 꿈, 즉 물리적 감각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가상세계에 몰입하는 생각은 시각이 주도하는 생각이다. 지각한다는 것, 생각은 감각으로 의식하지만 이미지로 표상된 꿈은 감각이 없는 무의식이다. ["의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어떤 사건에 주어진 시간 동안 "감각적 표상을 맡고 있는 뇌의 영역에 의미 있는 정보를 기호화"하는 것이다. *인용: 신경망 정보 처리 과정 모델의 주요한 요소들 - 랄프 호프만] 고고학자 스티븐 미슨에 의하면 사피엔스는 자연지능, 언어지능, 사회지능, 도구기술지능이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발달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이들이 상호연결된 후, (행위자로써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상대와 공유할 필요성을 느끼므로), 대략 3만년 전부터 '인지의 유동성'으로 "정의"의 "상징"인 "언어", 즉 "상호간의 합의"가 출현하여 문화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생각은 언어로 구성되며 언어는 상징이고", 여기서 상징이란 개별의 것들이 정의된, 담론을 통해 범주화된 미를 의미한다. 이 "아름다움"을 뇌과학에서 '돌출성'salience, '눈에 확 들어오는 자극'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 눈에 확 들어오는 자극인 '현저성'에 의해서다. 보편성을 띤 언어에 의한 상징적 표상은 실제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분명 환각이다. 그러나 감각의 교란이 없는 정신을 '생각하기'는 '생각나기'를 위한 것일 뿐, 생각은 격정적이고 도발적인 우주적 지나침을 추구한다. "우리는 현재 실행되고 있는 우리의 과거{이마엽을 통한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다. 실재란 시간 속에서 반복의 골격을 이루는 미지의 것이다. 실재는 미지의 과거이자 미지의 미래이다. 실재는 과거 무한대이고 미래 무한대이다. 무의식은 반복이다, 장-다비드 나지오" 생각나기를 실행하는 것은 생각하기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생각은 계획이다. 다윈의 물고기 - 존롱" 계획이란 "감각입력을 통해 행위를 산출, 다윈의 물고기 - 존롱"하는 생각하기다. 디오니소스적 생각나기는 '현실속 상상이 환상으로 이상'을 아폴론적 생각하기다. 그것은 종種을 정의하고 각성하기 위함이다.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souvenir pur이란 데자뷰Déjà Vu(이미 기旣, 볼 시視, 느낄 감感)를 의미한다. 데자뷰는 의식 중 언어로 표현된 기억이자 무의식(Rapid Eye Movements, 의식되지 못한 기억) 중 시각으로 표현된 기억이다. 언어로 표현된 기억은 생각하기고, 시각을 통해 이미지로 표상하는 것이 생각나기다. 【대략 5만년 전부터 시작된 인류의 문화는 뇌 크기와 관련된 마이크로세팔린과 ASPM 언어 유전자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약 2만년 후부터 인지의 유동성이 발탁되어 Fox2유전자를 필요로 하는 현재의 언어로 발전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언어의 의미는 라캉의 "언어 없이는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언어가 무의식의 전제 조건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조건에 있어 무의식은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속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의 실제적 조건', 즉 쾌락신경이라는 A10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자면 감각기관을 통해 도파민이 생성되어야 한다. 예컨데 마이크로세팔린과 ASPM 유전자의 변화가 "진화"이고, A10 신경의 "발달"이 경험에 의해 변화하는 신경가소성(혹 뇌의 가소성)인 대자적 "공진화"다. 즉자적 "발달"이란 후생유전이다. "발달과 진화 둘 다 시간에 따른 변화현상이지만 두 변화는 같지 않다. 지나치게 단순화하자면, 발달에서 변화하는 것은 유전체가 아니라 유전체가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진화에서 변화하는 것은 유전체 자체다. 유전체에서 변화가 일어나 진화적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변화가 정자나 난자에서 일어나{A10}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뿐이다. 「다윈의 물고기」"】 생각하기는 의식하기이며, 의식하기는 생각나기를 위한 관찰하기다. 앎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상을 표상하기 위해 행위에 앞서 (souvenir pur, 잠재적 무의식을 감각적 성질들이) 기억하고 의식하는 것이다. 연역적 추론에 따라 시각적 이미지는 빛나는 것이다. 라틴어 이마고imago, 즉 이미지image란 어떤 것을 닮아 있거나 본뜬 것, 물건의 생김새나 모양을 의미하는데,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우리 의식의 상태"인 동시 "우리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다. 의식의 상태란 (독립적으로) 빛나는 것, 반사된 것, photosynthesis, 즉 아름다운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의식함에서의 순수 기억, 순수 과거, 순수 생명은 공간 속에 절대적으로 연장되어 있지 않으나, 감각으로 여과된 삶이라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목적지향성이 사라지고 어떠한 귀납적 내지 논리적 전제 조건도 성립되지 않은 상태, 이를테면 감각입력이 차단되고 일화기억이 반영되지 않는 "무의식"으로 이어진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앎(지성)은 의식을 향해 삶(본능)은 무의식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베르그송의 원뿔 「물질과 기억, 1889」은 특이점 「창조적 진화, 1907」을 지나 피라미드 「사유와 운동, 1934」로 이어진다. 들뢰즈가 「존재의 함성」에서 거론한 시간(영원한 생성, 永遠回歸)은 베르그송의 이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처럼 이중창조의 형태로 자기 분열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나Cogito는 타자인 생각나는 나를 정의하지 못하며, 그러므로ergo 삶은 아름답고 앎은 생각하고 고로 앎은 존재해야sum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래의 위대한 이론적 발견을 통해서 물리학자들은 파동{유기체, 생명체}과 입자{무기체, 물체와 닫힌 체계} - 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동과 실체{물질의 흐름flux; 크라튈로스 440a-440, 양자역학 1926} - 사이에 일종의 융합을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사유와 운동」"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파동은 입자를 닮아가고, "진동자의 입자적 성질이 주로 관찰"된다. 그런데 빛의 정지질량은 0이다. 파인만의 강의) 현재라는 시점은 수축된 "과거"를 포함하므로 의식되는 것은 무의식의 산물이 된다. (가령 사르트르의 개별적인 과거 그 자체Le passé 가 있고,) 순수 과거는 시간이 전개됨으로써 수축되고, 시간은 흐르므로 물질(신체)은 팽창하게 된다. '나란 신체와 정신을 합한 것', 주관적인 무의식(잠재)과 객관적인 물질적인 세계(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의식(삶)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은 지속의 수축과 긴장의 경향이고 물질은 지속의 팽창과 이완의 경향, 「배르그송의 잠재적 무의식」"을 보인다. 베르그송은 "공간이란 정신이 수를 구성하는 질료이며, 정신이 그것을 위치시키는 장소"라고 말했으나 「지속과 동시성」에서 "단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정신과 정신사이Relative의 통속적 시간과의 타협(아인슈타인과의 대화)은 하지 못했다. 「배르그송의 잠재적 무의식」에서 저자는 이것1889을 "지각된 물질세계가 바로 나의 신체를 꼭짓점{singularity}으로 하여 둥글게 말리면서 원뿔의 부풀어 가는 내면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물질로 현실적인 것actuel을 의식하면서 잠재적인virtuel 무의식 상태(즉 souvenir pur)를 향하는 것이다. 생각하기는 뇌-신경체계가 기억의 현실화를 돕는 도구고, 생각나기는 현실화된 기억을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뇌-신경체계의 손상이란 기억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현실화를 돕는 능력(운동 -도식이schéma-moteur란 반복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행위 습관, 즉 "지각과 운동 사이의 연결 습관", 「배르그송의 잠재적 무의식」)이 약화되어 생각하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브로카 중추의 손상 없이도 실어증이 있을 수 있으며, 실어증의 가장 핵심적 요인은 일반적인 지적 능력의 축소에 있다. 피에르 마리 - 해부학적 증명, 피에르 자네 - 신경쇠약 연구" 뇌의 좌반구에 위치한 "베르니케 영역"은 청각피질과 시각피질로부터 전달된 언어정보를 해석한다. 뇌의 좌반구 전두엽에 위치한 "브로카 영역"은 말을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실제로 푸르스트가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짧고 통통한 과자 '프티트 마들렌'를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시각을 통해 얻는 정보의 비율은 87%이고, 청각이 7%, 촉각이 3%, 후각이 2%, 그리고 미각이 1%이다.) 그러다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푸르스트의 입천장에 닿는 순간schéma-moteur 마들렌은 그의 기쁨이 되었고, 그는 "정신에게, 사라져 가는 감각을 붙잡을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 달라고 부탁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제 그는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건네주던, 매주 반복적으로 만난 수많은 마들렌의 범주화된 맛의 형태를 접한다. 곧 푸르스트에게 잊혀져 있던 집 정원의 모든 꽃들, 스완 씨 정원의 꽃들, 비본 냇가 수련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춘 기억의 고리로 되살아난다. 베르니케 영역으로부터 마들렌이라는 감각언어가 해석되었고, (감각적 정보를 분석한 해마에서 신경회로의 활성으로, 신경활성에서 대뇌피질로 전달되어 되살아난) 사건기억과 사실기억을 통해 갑자기 모든 기억이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로카 영역은 푸르스트로 하여금 언어를 통해 시간을 되찾게Le Temps retrouvé 해주었다. 만약 뇌-신경체계의 손상으로 현실화의 길이 차단되었다면, 피상적 일상을 반복하는 푸르스트가 마들렌이 가져다준 맛과 향을 일반화했을 것이고,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참고: 물질과 기억 - 앙리 베르그송,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 - 김재희)

현재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의 나'를 정의한 '현재의 나'는 이미 '미래의 나'다. 현재의 나는 수축하는 과거를 보고, 미래의 나는 팽창하는 과거를 본다. 나는 공간 속에 절대로 연장되어 있지 않고 그 속에 펼쳐져 있다. 데카르트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시지프스는 라이프니츠의 순간화정신을 ("자신의 과거를 전혀 보존하지 않는 의식, 「정신적 에너지 」") 표상하고, 「기억의 영속」은 늘어져 있다. 【정조(뜻 情, 잡을 操)affection란 신체내부에서 느끼는 감정과 감각, 즉 쾌와 불쾌다. 따라서 정신 활동인 정조는 "몸 안"에 있고, 물리적인 상像을 지각하는 현재는 "몸 밖"에 있다. 촉각도, 청각도, 후각도, 미각도, 시각도 몸 밖에서 물질을 (개별적인 신경특수에너지가 있다지만, 외연적 의미에서의 자극,) 만지는 것이다. "어떻게 색깔이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제국 속의 제국"은 공간 속에 절대적으로 연장된 것은 아니지만 정신7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눈의 영혼은 시각이다.】 지나간 것의 현재, 현재적인 것의 현재, 다가올 것의 현재 이 세가지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것이다. 그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지나간 것의 현재, 직관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인 것의 현재, 기대 속에 존재하는 다가올 것의 현재가 있다고 말한다. 회상은 지나간 것의 현재고, 지각은 현재를 위한 현재고, 상상은 다가올 것의 현재라는 의미다. 흘러간 시간이 과거이고, 흐르는 시간이 현재이고, 흘러갈 시간이 미래다. 현재는 과거에 기울어져 있고 미래를 침범하고 있으며, 나의 현재라는 심리적 상태는 "동시에 직접적 과거의 지각이자 직접적 미래의 결정, 「물질과 기억」"이다. "과거란 지각된 한에서 감각, 「물질과 기억」"이며 "직접적 미래는 스스로를 결정하는 것인 한에서 행동, 「물질과 기억」" 또는 운동(물질의 흐름flux)이다. "현재의 감각"이 시작되는 순간 "순수" 기억(, 활자로 각인된 "과거 한 순간적") 기억은 멈춘다. 그것은 더이상 "이미 본"Déjà Vu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순수 기억"이 될 뿐이다. "우리는 지금의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며, 현재들을 가지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과거 자체 안에 위치해 버린다. 들뢰즈 - 푸르스트와 기호"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요소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존한다고 보고, 현재는 끊임없이 지나가며, 계속해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는 무의식적인 기억을 통해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해석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현재는 과거라는 원자와 미래라는 원자가 공존하는 분자인 셈이다. "{Déjà Vu,} 저 세 그루 나무를 어디서 보았었지? 작은 길이 저런 식으로 뚫려 있는 곳은 콩브레 부근에는 한 곳도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푸르스트는 세 그루 나무가 "생각나는 상상"인지, 혹 "생각하는 기억"인지 혼동하고 비자발적인 기억의 모순에 빠진다. 이것을 (들뢰즈가 말하는) 푸르스트의 기억의 착오라고 보기보다는 "의식되지 못한 기억"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 "두 가지 경우 모두에 있어서 양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가 있는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플라톤 - 소피스트 243e" 페레퀴데스Pherekydes에 따라 있는 것은 세 개이고, 현재에 어제와 내일이 있다면 그것은 습한 것과 마른 것, 뜨거움과 차가움, 즉 둘이 아니라 하나(적도to metrion)가 있는 것이 된다. 빛의 정지질량은 0이므로 빛은 없는 것이다. 모든 수는 있는 것이고 플라톤의 "있지 않은 것들"은 하나의 수에 덧붙여질 수 없다. 있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올바르게 언표될 수도, 말할 수도, 사유될 수도 없기, 플라톤 소피스트238a-238c" 때문이다. 있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언표될 수 없는 "참된 것이 아닌 것"이라 함은 "참된 것"을 믿기 때문이고, 따라서 Cogito, 삶은 존재하므로 "거짓인" 상image을 만드는 빛은 비존재absolute nonentity가 된다. "하나는 하나에 대한 이름이고, 그리고 역으로 하나는 그 이름에 대한 것입니다. 244d"그래서 빛은, 단지 빛에 대한 빛이라서, 그 자체가 또한 이름에 대한 빛이다. (이름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역자 이창우) 아름다움을 통해 어떤 식으로 앎이 있다면, 그것은 앎과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모든 것은 앎보다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아름다움이 앎에 의한 아름다워짐 때문에 전체가 아니라면, 그러나 전체 자체는 있다면,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을 결여한다는 점이 뒤따른다. (소피스트 245b) 살아가는 것,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가. 플라톤이 말하길, "있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서 진정으로 있다. 254d" 그럼 삶은 살아가는 것으로 가득차 생을 살아가고,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을 살아가는 삶이 되며, 삶과 짝을 이루어 색깔을 낳는 것은 앎으로 가득 차게 되어 그 역시 앎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이 뒤따릅니다. 즉 만약 '있는 것'(모든 것)들이 운동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것 안에도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어디에서도 지성은 없습니다. 소피스트 249b" 어떤 이들은 운동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모든 것이 진정으로 정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소피스트 252a) 운동하는 삶은 정지된 앎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의 흐름이고, 과거의 지각이자 미래의 결정이다. 그러나, "확실히 운동과 정지는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254e"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것("아름답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 "즉 있는 것들 중 어떤 하나의 유로부터 분리된, 그리고 다시금 있는 것들 중의 어떤 것에 대해 대비된, 소피스트 257e", 유(앎)에 속하고 하나의 유가 되는 것이다. 

신경 과학에서 "물질적인 뇌가 비물질적인 데카르트적 마음을 대신, 「신경과학의 철학」"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정지된 시간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현재를 위한 현재'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고, 언표될 수도, 말할 수도, 사유될 수도 없는 "있지 않은 것들", 즉 존재가 비존재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과거에 기울어져 있는 현재가 미래를 침범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진정으로 정지되어 있다 말하고, 그것은 있는 것과는 다른 아름다운 것이자, 또한 있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서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목적이란 직접적인 것이자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 말했으며,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움직여지는 주체, 즉 목적이 실현되고 현실에 반영되는 것을 운동(아름다움)이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 "자기를 벗어나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완전한 즉자대자적An und für sich; 정기(정할 精, 기운 氣; Ether)"이라고 「정신현상학」은 해석한다. (헤겔은 에테르를 학문이라 하고, 이것은 우리-신체와 정신-가 "느끼고자" 하는 것의 결론이다.) Gott(주어) ist tot(술어). (헤겔은)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고 있는 그대로의 정신이 곧 정신의 대상이 되는 것, 그리하여 추상적인 지와 진리(알 지知, 참 진眞, 다스릴 리理)의 장을 넘어서 자아의 대상인 실체가 운동하는 것, "결국 이 운동은 점 그자체가 스스로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주어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 자가 행하는 운동}이 된다. 「정신현상학」" 여기서 존재의 운동이란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되는 것"이다. 「신경과학의 철학」은 정신을 통해 (생득적 능력은 이미 DNA를 통해 주어지고 순수 기억은 시간에 모순되므로) 신체가 합리적 관성synapse을 획득한다고 본다. "지각하는 자와 지각하는 대상 사이의 인지적 관계", (정보를 얻는 과정; 운동하는 대상에 적용하는 algorithm,) 즉 "지각하는 것"이란 물질의 흐름flux 속에 형성되는 관성이라는 것이다. (리벳 실험의 자유의지는 의식에 국한되어 있고, 나의 관성은 이미 자유의지를 표출한 상태다.) "나라는 것은 일련의 "신경세포들이 펼치는 활동일 뿐"이라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프랜시스 크릭" 정신의 성향, 경향, 기질은 감각, 인지, 사고가 필요로 하는 힘이므로, (눈의 영혼이 시각이라 하면) 관성은 힘에 의존한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입자(무기체)는 일정한 무늬를, 파동(유기체)은 간섭무늬를 만든다. 입자가 일정한 무늬를 만들어야 하는데, 삶은 감각과 인지와 사고가 필요하므로 "실체"는 간섭무늬로 나타난다.

낮과 밤, 운동은 정립되고 폐기된다. 지금이 무엇인가. 지금은 (낮의 타자) 밤이다. 지금An und für sich은 낮도 되고 밤도 된다. (지금) 운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지금'은 '이 지금'으로 명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되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만둬 버린다. 지금 있는 '지금'은 명시된 '지금'과는 다른 '지금'이며, 따라서 '지금'이란 지금 있으면서 더 이상 지금이 아닌 것임이 판명된다. 우리에게 명시되는 '지금'은 벌써 지나가 버린 '지금이었던 것'으로서, 이것이 '지금'의 진리이다. 그런 '지금'은 '있다'라는 존재의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이 있었다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또 지나가 버린 지금이었던 것은 사실은 지금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는 있는 것이 아니다. 한데 '지금'의 본질은 당연히 '있음'에 깃들어 있어야만 한다. 「정신현상학」" Sight, Hearing, Touch, Taste, Smell, 정의를 앞서가는 "학문"은 쾌와 불쾌다. (헤겔에게 있어서 쾌와 불쾌는 선과 악이다. 그에 따르면 선한 부는 우리가 모든 가능성을 보는 것이고, 악한 부는 그저 자기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낭만적인 것은 그가 종을 교양Art으로 본 것이다. 또 그는 선과 악이라는 두 실재는 "지금"의 진리[앎]가 되지 못하고 운동 속에서 서로 전도된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헤겔이 「법철학」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제가 성립된다.) 지금은 학문인가. 느끼다, 의식함은 간섭무늬를 만든다.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나, 의식은 가변적인 결과를 출력한다. (물체.대상이 흡수하고 남은 빛-질량은 0, 표현되고 자신에 속하지 않은 자아-으로 상이 맺히기 전까지 출력이 아닌 표출이다.) 실체, 그것을 파악하는 타자가 진리를 경험할 때 진리의 개념은 사라지고 의식의 대상은 즉자적으로 표상된다. "즉자적으로 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파악하는 타자, 즉 의식이 있음으로 해서 그렇게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느끼고 의식하고 운동하므로써 실체는 자기 안에서 해체되고 (헤겔의 정신) 무기체가 아닌, 죽어 있는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가능성", 헤겔의 인륜적 세계(절대정신)는 피안(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과 차안(삶과 죽음이 있는 세계)으로 분열된 세계, 아폴론적 몽환과 디오니소스적 도취 사이에 펼쳐져s'étend 있다. 이 정신은 "나의 가능성"으로 외화되어 (삶에 스며들어) 피안과 대립하고, 피안은 (앎과) 현실의식에 따라 차안과 대립하게 된다. 이 정신의 현상을 헤겔은 "언어의 음절", 즉 개성을 종(독일어 Art, 씨 종種)이라 부르기에 알맞으나 에스페스(불어 Espèce; 직역 - species)와는 구분을 둔다. "에스페스는 온갖 별명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중간하다는 뜻이며 가장 심한 경멸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느끼는 것, 그리고 의식하는 것, "운동하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현상학」" 정신은 아름다움의 주체다.


"신념은 관찰자에게 사치일 뿐이다. 뷰티풀 마인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아직까지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의 95.1%의 암흑 에너지와 물질과 대조해 84.5%를 차지하는 암흑물질을 뺀 나머지 4.9%를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는 매우 근접한 시점에 와있다. 쾌속적 과학 발전의 발단은 403년 전 발생한 뉴턴의 철학에 근거한다. 분명 고대 수학이나 아카데메이아의 기초없이는 현재의 학문이 가능할 수 없다. (헤겔은 에테르를 학문이라고 한다.) 과학이 딸 우주Daughter Universe와 다중우주론인 거품Bubble을 논하고 지구에 근접한 소행성들과 화성 자원에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이유도 모두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르네상스 중심에서 꽃을 피워낸 케플러의 노고와 그외 많은 "관찰자"들의 덕임은 자명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의식한다는 것은 5가지 감각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의 주파수에 맞춰진 경우다. 누군가가 어떤 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색이 지닌 파동에서 기쁨과 평온을 느낀다는 의미다. 양자역학의 파동-입자 이중성에서 어떤 대상에 관찰자가 있을 경우 이를 (유기체이자 생명체인) 입자로 분류하여 (무기체이자 물체와 닫힌 체계인) 두 파동이 만났을 때 간섭무늬는 나타나지 않는다. (쌍둥이) 광자가 "이중 슬릿을 통해 나아가는 것은 실재의 물질이 아니라 확률에 불과하다. 바이오센트리즘, 로버트 란자" 파동이라는 잠재적 공간은 관찰을 통해 입자라는 존재의 "상"을 만든다. (언어는 "상징"이다. 코끼리 상象, 부를 징徵, 모양 상像, 상象은 코끼리를 옆에서 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요컨대 무지개의 존재는 관찰자가 있어야만 가능하고, 카메라의 경우, 조리개의 노출 시간과 렌즈의 초점거리에 따라 피사체를 담은 이미지는 제각기 다른 결과물을 초래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판가름하는 것은 저마다 개성있는 감각과 오성이고, 그 대상의 이미지는 본디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두 관측자는 상대의 시간이 지연되거나 팽창된다고 느끼고, 양자역학은 두 관측자의 감각과 오성에 따라 대상을 다르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반면 동일한 것은 구분의 기준이 무엇에 대해 의식하는 바로 "나"self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달을 보지 않을 때에도 달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스로 이루어진 목성은 만질 수 없으나 볼 수 있다. 산소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숨·쉬므로 그 존재를 확신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의 복잡한 실체를 5가지 감각으로 세분화하여 정의하는 환원주의의 편협함에 빠져있을지 모른다. "시각은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촉각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이오센트리즘, 로버트 란자" 느낀다는 것5은 시상이 수용체(외수용기exteroceptor와 내수용기interoceptor)로부터 감각정보를 받아 대뇌피질 해당부분에 신호를 보내 지금까지의 순수기억과 대조하는 행위다. 고민한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 하지만 '고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으로 위의 담론은 4.9%를 알고 있다고 믿는 존재의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시인의 시각을 구한다. 정신과 물질을 분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해 횔덜린은 우리가 느끼는 실체란 정신적으로 구성되었거나 비물질적인 것(파동)이라 구분한다. 횔덜린은 여신에게 "한 여름 만 주소서, 한 가을 만 주소서. 운명의 여신들에게"라고 말하여 삶의 아름다움으로 영혼의 안식을 되찾기 바란다. 목적론을 말하는 칸트는 물질(입자), 즉 존재에는 의도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목적은 분명 기쁨이나, 사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테아이테토스에게, 또 존재에게) 생명의 성질은 아름다움이다. (물질적인) 존재는 입자를 구하는 파동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측정하는 대상이며, 우주는 자로 측정하는 대상이다. 공간이란 자를 들고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 우리의 시간은 선형적이나 "지구는 돈다". (그렇다면 열역학적 기준에서) 모래시계의 모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경험이 없으면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따라서 운동이 없으면 시간은 영원하다. 정의할 수 없는 낙조나 오로라를 신기하다, 미묘하다, 괴상하다, 기이하다, 절묘하다, 오묘하다라고 일컫는다. 분명 삶에서 정의되지 못한 것이 아름답다. "인간의 언어와 관념은 사물의 경계를 결정한다. 바이오센트리즘, 로버트 란자" 양자장론은 "너"를 정의하라고 한다. 양자장론은 관념이 눈을 뜨고 대상을 보고 정의하여 사물의 경계를 결정하라고 종용한다. "내"가 정의될 때 나는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빛의 속도로 다가갈 때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299 792 458 m/s로 이동할 때 비로소 시간은 멈춘다.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파우스트" 중첩된 양자(쌍원자)는 한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가. 존재의 공통분모가 쌍원자인가. "그렇다면 기다린 보람이 있어. 그대로부터 궁극을 빼앗아 냈나니, 진실로 신은 모든 원소{한 종류만의 원자로 구성된 물질} 안에 머물러 계시도다! 괴테" 나는 카메라고, 빛이 있으면 필름이 제작된다. 【힌두교에서 요가는 실천이고, 베다는 이론이다. 이같은 상Image을 만드는 것Veda을 그리스어로 이데아Idea라 하고, 라틴어로는 비디오Video(I see)라고 한다. 아유르베다Ayur-Veda(삶-앎)는 생명 혹은 장수라는 아유르와, 지식 또는 과학이라는 베다를 합친 것이다. 아유르베다는 신체에 공기의 기질인 '바타'와, 불의 기질인 '피타'와, 물의 기질인 '카파'라는 세 가지 근본적 생명력이 있다고 보고, 이것을 부패를 뜻하는 '도샤'라고 일컫는다. 두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 세 가지로 바타는 공기의 매개체인 '에테르', 피타는 불의 매개체인 '물', 카파는 물의 그릇인 흙으로 균형을 이룬다. 요가와 관련된 것이 일곱 차크라인데, 차크라는 원, 혹은 바퀴를 의미한다. 물라다라 차크라는 흙 원소, 스와디스타나 차크라는 물 원소, 마니푸라 차크라는 불 원소, 아나하타 차크라는 공기 원소, 그리고 비슈다 차크라는 에테르(정할 정精, 기운 기氣; 의사소통, 정신에너지) 원소와 관련이 있다. 남은 두 개는 "제 3의 눈이자 명령의 중심"을 뜻하는 아갸냐 차크라와 '천 개의 연잎'을 뜻하며 "우주적 참나{참 진眞, 나 아我; 진짜 나}이자 신성한 실재"인 사하스라라 차크라가 있다. 인용.참고: 배다 입문 - 데이비드 프롤리】

 

존재에게 탁월함arete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최고의 선이다. 신체는 감각을 통해 현상을 보고, 정신은 지성을 통해 형상eidos를 본다. 형상, 다시말해 상image이란 대상의 어떠한 상태고, 몸과 마음의 기능이 경지에 도달하여 완벽하게 발휘된 상태인 '탁월함'이다. 플라톤은 메논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둥긂은 형태인가, 아니면 형태의 일종인가? 흼은 색깔인가, 색깔의 일종인가? {끈 이론,} 곧은 것{직선}이 형태인 것처럼 둥근 것{면}이 형태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게 바로 자네 주장이네. 메논 74b-75e, {관찰자에 따라 조리개의 노출 시간이 짧거나 길어도 결국 동일하게 하나의 상이 완성된다. 여기서 시간의 역설이 들어난다. Thus, 빛은 시간을 만든다.}" (텅 빔blank, 흰빛blanc, 검음black, 불꽃flame은 모두 같은 어원, *참고: 흰 - 한강) 플라톤은 "사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항상 색깔에 수반되는 것"을 형태라 하고, 형태는 입체의 한계라고 한다.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색깔이란 시각에 들어맞고 지각될 수 있는, 형태들의 유출물{필름}이라는 걸 말일쎄. {여기서 현상과 형상은 의식이고 무의식이다.} 메논, 76d" 정의를 앞서가는 "학문"을 탐구와 배움이라 하고, 탐구는 생각나기고 배움은 생각하기다. "탁월함에 관해서든 다른 것들에 관해서든 영혼이 어쨌든, 메논, 81d" 상상으로 상기anamnesis(생각 상想, 일어날 기起)하는 것이 탐구고, 회상으로 배움을 얻는 것도 상기다. "탐구와 배움은 결국 모두 상기니까 말일세. 81d" 플라톤은 메논의 전기가오리(변증술사)에 대해 (기하학을 모르는 아이에게 확신만으로 문제를 풀게하여) '너 자신을 알라'(베다와 같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 속에서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참인 확신들이 있는 거지? 85c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 지양relève("부정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것, 헤겔")의 이중적 의미, 즉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사변적 사유"(경험의 도움없이 순수 이성으로 생각나기)에 이른다. 사변적 사유는 물리학에서도 사용한다. *참고: 헤겔의 사변과 데리다의 차이, 조홍길}" (루소의 에밀에 대해) 나(우리)의 의도는 학문이고, 나의 의도는 기쁨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인식"을 빛의 산파(탁월함에 교사가 없다는 것이 아닌,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라고 한다. "그러므로 탁월함이 영혼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필연적으로 유익하다면, 그것을 앎이어야만 하네. 왜냐하면 영혼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그 자체에 있어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지만, 앎이 더해지느냐 무지가 더해지느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유해하게도 되기 때문이지. 88d" 앎은 빛이지만 아름다움에 있어서 (운동함에 있어서) 지와 무지에 따라 정의의 척도가 결정된다.  

 

헤겔의 「논리학」의 유-무-생성은 앎-삶-운동이다. 부정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 언어다. 까닮은 학문을 탐구와 배움이라 하면 탐구는 생각나기고 배움은 생각하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관념적인 것이 실재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생각하는 나Cogito는 타자인 생각나는 나를 정의하지 못하므로,) 데리다는 운동이 있으므로 (음성언어에서) 문자화된 언어에 차연(차이diffèrence와 지연deferment)이 있다는 것이다. "차연에 도달하고자 할 때 우리는 흔적들을 따를 수 있을 뿐이다. 데리다 평전, 제이슨 포웰" 따라서 정신에 도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신의 흔적 따른다. 언어가 문자화 되기 위해서 삶은 앎을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현상과 형상사이 (헤겔 왈 절대자, 앎으로) 승화되지 못한 정신이 데리다의 유령, 찌꺼기다. 맑스의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5'즉자적 유령'은 아름다움을 위한 '대자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은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담겨져 있고, 빛은 시간을 만듦으로 관찰은 공간의 계념으로 확장된다. 입자를 구하는 존재는 현상을 관찰해 형상(공간)을 정의할 수 밖에 없고, 대상을 보고 있지 않으면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파장은 가시광선380~770㎚ 정도다.) 내가 '알고 있는'5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다. 거울 속 나는 현전적인(나타날 현現, 앞 전前) 의식을 지닌 (운동하는) 존재다. 여기서 내가 순수 기억으로 언어화되면 나는 과거가 묻혀 비현전(아닐 비非)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코기토는 현전적이여야 한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필멸의 일시적인 '표현'이고, 필연적으로 그것은 사용되는 매 순간에 ¨나는 죽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 평전" 데리다는 드만의 회상rememberance를 통해 '나'는 나를 기억하는 상대의 상像을 위해 존재하는 '기억의 장소', 즉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를 넘어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이것의 타자성은 '영혼'이라는 것 속에 있는 기억이라 불리는 그에 대한 상像일 뿐이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요구되는 한에서만 오로지 한 사람 또는 하나의 영혼{정신}이다. 데리다 평전" 표지binding이자 균열crack인 언어에 차연이 있고, 그래서 언어의 흔적이 상징象徵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자신이 가장 천천히 늙는 곳에서 살고 싶어하며, 중력은 만물을 그곳으로 이끈다. 「인터스텔라」, 킵 손" 천천히 피는 꽃, 아름다움이 아주 느리다는 것이고, 그것은 당기는 힘이 크므로 (트램펄린; 시공간), 앎의 무게로 삶은 침전된다. 삶과 앎의 사이 아름다운 휨, "휨이 휨을 낳는다. Warping begets warping." 휨이 휨을 낳기 위한 이무익비以无翼飛란, 중력 새총 비행gravitational slingshot을 통한 랑데부(우주상의 두 물체가 서로 만나는 것)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쫓는 것은 현상이고, 얻는 것은 형상이다. (눈의 영혼은 시각이고, 예컨데 아름다움의 시선이 영혼이다. 현상이 형상을 얻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신체 감각의 지나간 과거의 행위를 들춰내는 것이다. 무의식은 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의 관성이다. 따라서 감각 기관의 영혼은 오감5이다. 직관6은 이성과 본성DNA을 포함한다.) 앎의 무게로 생겨난 초공간(벌크, bulk)이 존재한다면 거기엔 정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4차원 공간에서 5차원 공간과의 공통 분자를 찾는다.) "인터스텔라에서 책들이 떨어지는 것을 머프는 5유령의 탓으로 돌리는데, 그런 현상이 중력이상gravitational anomaly이다. {−− −−− ·−· ··· · (space) −·−· −−− −·· ·}, 킵 손" 상대를 끌어당기는 중력,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 의해 받는 중력에 의해 생겨나는 기조력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5차원 중력이상 때문에 발생한다고 킵 손은 설명한다. 그는 만약 앎의 무게로 특이점이 형성되면, 벌크美의 공간은 반드시 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중력은 형상이고 현상이다.

 

"있는 것들 각각에는 그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앎이 생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고, 앎 자체는 네 번째 것입니다. 앎의 대상이며 참으로 있는 것인 것 자체는 다섯 번째로 놓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름이요, 두 번째는 정의요, 세 번째는 모상이요, 네 번째는 앎입니다. 플라톤 - 일곱째 편지 342a" "원"이라는 것이 "이름"이고, 구형이고 둥글고 어느 가장자리에서나 중심까지의 거리가 같다는 것이 "원"에 대한 "정의"이고, "그려지거나 지워지며 돌림판에서 돌려 만들어지거나 부서지는 것, 342c"이 원의 모상이고, 앎 자체는 네 번째 것이고, "앎의 대상이며 참으로 있는 것인 자체는 다섯 번째"로 놓여야 하는데, 그것은 능동적인 것poiēma(현상)과 수동적인 것pathēma(형상; 기쁨같은 감정 또한 형상이다)에 관련된 것을 포함한 것이여야 하므로 말과 글을 포함한 "언어"는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을 가진 "예컨대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갑자기 혼 안에서 생겨, 341d"나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만,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지 않는다.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다)]는 어떤 것 안에 있지만 한 부분으로서 들어 있지 않고, 또 그것이 있는 곳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 범주들 1a 25" 수동적인 기쁨같은 형상(형상 형形, 코끼리 상象)은 그 바탕이 되는 운동하는 능동적인 현상(나타날 현現, 형상 상像) 안에 있지만, 형상(감정)이 현상(휨)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상(아름다운 것, 살아가는 슬픔)이 없으면 형상(기쁨)은 있을 수 없다. 기쁨은 아름다운 것에 있지만 아름다운 것을 (슬픔의 공간을 채우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현상現像(developing)하는 현상現狀(paused)으로부터 "언어"는 추상적인 상징(코끼리 상象, 부를 징徵)이다. (이 범주가 소요학파의 언어이고, 따라서 이 불확정성 또한 아카데미학파의 언어이다.) "예를 들어, 흼은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즉 이 물체 안에 있으며, 이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서술된다. 물체는 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흼의 뜻은 결코 그 물체에 대해 서술되지 않을 것이다. 2a 30" (중력렌즈 효과로, 앎으로 휘는) 삶은 아름답다고 말해진다. 슬픔은 삶 안에 있고, 삶은 슬프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슬픔의 뜻은 결코 그 삶에 대해 (슬픔의 공간을 채우는) 기쁨을 제외한 채 서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 실체를 으뜸 실체라 하고, 제2 실체를 버금 실체라고 한다. 그럼 수많은 상들 가운데 어떤 꼴(정신, 일반적인)이 으뜸 실체인가. 상象을 제 3 실체로, 상像을 제2 실체로 한다면 생각하는(생각나는) 상상(생각 상想, 형상 상像)은 이상(헤겔의 정신ein Ideal; 다스릴 이理, 생각 상想)으로 나아간다. "으뜸 실체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가장 본래적인 뜻에서 실체라 불린다. 2b 35"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는 '더와 덜'이라는 정도의 차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사람을 보았을 때 누가 더 사람이지도 덜 사람이지도 않다는 그의 주장("사람은 이전보다 지금 더 사람이라고 말해지지 않으며, 3b 35 - 4a")은 플라톤의 필레보스나 테아이테토스의 적도to metrion에 따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앉자 있음, 4a 35'을 동의하고,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했으므로,) 사피엔스가 되거나 네안데르탈렌시스가 될 뿐이다. 이 의미는 앎이 커질수록 실체는 계속 새로운 으뜸 실체를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현재라는 특이점(공통된 경계, 5a 10)이 정해지면 미래와 과거가 나뉘지는 것과 같다. 상像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양(5a 35)처럼 시간에 객관적이나, (빛이 시간을 관장하므로,) 우리가 으뜸 실체로 보는 특이점은 반대되는 것이 (아직까지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 6a"에서 '다른 임의의 방식으로hospōsoun allōs'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면 관성계에 따라 "더 큰 것은 더 작은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것이라고, 더 작은 것은 더 큰 것보다 더 작은 것, 6b 30"이라고 말해진다는 것이고, calvus clavati cavus, clavatum est clavo clavtum, 이 상호작용 관계의 범주에 드는 것은 서로 맞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대상이 없으면 (관찰이 없다면) 앎은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양자얽힘을 설명한다. "그것이 무엇에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에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8b" 정신을 겪어 관성이 생긴다는 것 - , 물질의 색은 빛을 겪기 때문에 생기고, 다시 물질은 빛을 발하게 된다. "반대되는 것들 중 하나가 질이면, 나머지 것도 질이다. 10b 20" 따라서 (모순되지만) 정의라는 것은 관찰자의 범주에 달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빛色을 통해 상태空를 느끼는感) 기쁨의 형상은 (형상 형形 코끼리 상象, 즉 추상적인 모양,) 감각(느낄 감感, 깨닭을 각覺)이고,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반야심경", (공즉시색空卽是色, 현상이 형상을 얻는) 휨warping의 현상은 (나타날 현現 모양 상像, 즉 구체적인 모양,) 예술(재주 예藝, 재주 술術)을 보는 것이다. 삶은 현상을 관찰하고 시선을 통해 형상을 맺는다. 아름다움은 (언어로 표현되고) 상징되어야 하므로 파동은 입자가 되고, 간섭무늬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상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상은 파동으로 남게 된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언어를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모상에 가깝다고 설명하며, 언어(로고스, 이성)는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모사된 대상das Abgebildete'과 결부"되어 그 대상의 존재에 귀속된다고 덧붙인다. 삶의 아름다움은 앎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입자는 무기체이다. 공기의 밀도 변화, 파동은 유기체다.) 프리초프 카프라에 의하면 그림자란 3차원(사실 4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면 위에 투영된 것이고, 덧차원에 있는 점들이 4차원 시공에 투영된 것은 {−− −−− ·−· ··· · (space) −·−· −−− −·· ·}이다. (후자는 사변이다. 사변이란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칸트의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중력이상gravitational anomaly이 있다. 이것을 기초로한 사변은 연역적 추론에서 귀납적 추론으로 이어져야 하고, 따라서 다윈의 귀납적 추론으로 상대론의 연역적 추론을 사변할 경우, 우리는 진리내지는 으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사전의 연역적 추론이란 "이미 알고 있는 판단을 근거로 다른 판단을 유도하는 추론 방법"이고, 귀납적 추론이란 "개별적인 사실이나 현상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전제로 일반적 원리를 이끌어 내는 추론 방법"이다.) 헤겔은 종을 교양으로 본다. 여기서 종은 형태소(morpheme, morph모양, -eme최소단위)를 말한다. 그리고 교양Bildung에는 Bild(image; 상像)이 들어 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형태를 갖춘'informare, 고대그리스 form이란 모양morph, 모양을 빚는자morphai, 모르핀morphine이고, 가다머는 Bidung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ormatio(형성)이라고 설명한다. "Bildung{교양; 라틴어 eruditio는 교육.학습.지식.학식}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ormatio(형성)이고, 외국어에서, 예컨데 영어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은 form과 formation이다. 독일어에서도 forma 개념의 파생어들, 즉 Formierung과 Formation이 있는데, 이것들은 오랫동안 Bildung이라는 낱말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진리와 방법」" 형성(형상 형形 이룰 성成)이란 헤겔의 절대정신(absoluter Geist, absolute spirit)이다. 느끼고 깨닮는 감각5은 어떤 형태를 갖추어informare 형성formatio, 즉 종이 된다. 그리고 사변을 통한 직관은 (아직은 막연하나) 지식을 기초로한 순수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절대정신으로 설명된다. Gaia, from legend to myth- 랑데부Rendezvous의 중심에는 중력이 있다. (이것은 개별적인 사실이고, 402-, 우리는 중력의 원리Principia를 이끌어내야 한다.) 색空이 공간을 휘게 만든다. (중력장.) 현상이 형상을 얻으면 공空의 새로운 장의 공간(토포스topos)은 휘게된다. ¨그리고 살아가는 슬픔, 아름다운 기쁨. 거센 파도는 새하얀 포말들을 개워낸다.¨ 가다머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는 이해Verstehen다. "그렇게 보면 어떤 형태의 이해든 간에 이해를 하는 사람은 어떤 가능성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기투한다고 할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은 현존재의 근원적인 실현형식, 세계-내-존재이다. 「진리와 방법」" 독일어에서 이해Verstehen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가능성"이고, 기투Entwurf란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신을 내던지는 실존방식'이다. 예컨데 살아간다는 것은 형식(형상 형形 법 식式)을 의미했고,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은 내용(지평Leerhorizont, 가다머; 형성形成)이었다. "(언어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대신에 어떤 것과 관련해서 탄생한 그 지식에 대한 전체를 갖는다nihil de suo habens, sed totum de illa scientia de qua nascitur. 「진리와 방법」" 언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나아가 정신을 형성한다.

 

가다머는 (전자electron의) "현상"(나타날 현現 코끼리 상象)을 알고자 관찰하는 이유를 되집어 보고자 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문제를 보는 시야를 열어둔다는 뜻이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가 미지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것은 해답 역시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결정적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불확실하다. 물음의 핵심적 의의는 이처럼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도 의문인 채로 열어두는 것이다. 예: 플라톤의 대화편들, 「진리와 방법」" 물음의 본질은 현상에 대해서 제시되는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시선에 주어진 형상은 현상의 현현(본질적인 것이 외적으로)이다. 의의-, 사진을 찍는 이유는 "형상"을 얻고자 함이다. *가다머는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는 명제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을 '상대방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이해한다는 것'(상대가 되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해석Hermeneutics한다. 이 텍스트의 헤겔적 해석은 이 상황이 이미 경험을 넘어 사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언어로 예술은 앎의 가상이다. "경험적인 것은 그것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 사변적 개념이다. 헤겔" 휨의 현상을 보는 것, 예술이 가상을 산출하는 것이 헤겔의 "표상의 표상"이다. "그려진 사자는 우리에게 표상의 표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헤겔" 예컨데 추상적인 형상이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는 것, "이념(선.진.미)의 감각적 현현, 헤겔"이 바로 현상이다. "내용은 사상이며, 형식은 감각적인 것, 형상적인 형태이다. 헤겔" 살아간다는 것은 형식이고 감각적인 것이며, 공즉시색, 느끼고 깨닮는 감각은 어떤 형태를 갖추어 형성되는 것, 곧 형상적인 어떤 형태이다. (낭만적인 자기-내-존재das Insichsein로 부터) 세계-내-존재는 내용이자 사상이며, 따라서 현상이 형상을 얻는 과정인 예술은 (인륜적인) 생래적 "정신"을 통해서다. 헤겔은 자유로운 예술가A Ս B를 형상적bildend이라 하고, 상징적 예술가Ac Ո B = B \ A를 상상적einbidend라고 규정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표상과 더불어 형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예술가는 "우리에 대해 현상하는 것이므로" 즉자대자적이고 완결적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예술가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Parole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한정짓지 못하고 상상에 머문다. 생각나는 상상이 이상ein Ideal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 4차원에서 초입방체 테서랙트를 보는 듯, 관찰자는 머리속에 그려지는 형상으로 상징Langue을 말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A △ B 전제 하에 단독적인 Ac = U \ A  A Ո B 이다. (A Ո B 는 Justice다.) 헤겔은 엔치클로페디에서 정신이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으로 동요하는 자요, 순수한 활동"이라 밝혔고, 피히테 역시 존재는 "행위하는 자인 동시 행위의 산물"이자 "활동하는 자인 동시 활동에 의해 산출되는 자"라고 지적한다. (로타 엘라이는 피히테의 코기토는 바로 "사유의 사유, 자기에 관계하는 활동"이라고 덧붙인다. 피히테는 나아가 사유가 없다면 존재도 없으며 교차관계인 둘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유의 사유"는 일반적인 사유가 아닌 "존재의 사유"다.) 피히테가 「전 학문론의 기초」에서 언급한 첫번째 동일성의 원칙은 A = A 이고, 두 번째 근거의 원칙은 -(-A) = A 다. A를 나(자아)라고 하면, 비아(나 밖의 모든 것)가 아닌 것은 바로 나다. 세 번째 '자기의 형식에 따라 제약된 원칙'은 "자아로서 스스로 활동적인 자아"이자 현상이고 형상이다. 현상을 보는 A는 형상을 얻는다. 그리고 (시간이 있고 칸트의 순수이성에 따라 순수정신이 있고,) 형상은 반드시 표상되므로 A Ո B 는 성립된다.

 

현상 형상이다. "바다는 바다이고, 공기는 공기이며, 달은 달이다. 헤겔" 그럼 "내가 나비인가. 나비의 꿈胡蝶之夢"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관자재보살. 슈뢰딩거는 무엇을 보았나5. 뉴턴의 "아름다운" 운동법칙에 따라 4차원 두 물체가 충돌하여 주고받은 충격량의 합은 0이어야 한다. 라이프니치에 따라 "어제를 등에 업고 내일을 뱃속에 넣은 오늘" 우리의 상像은 추론에서 직관6으로 84.5%를 가늠하고 있다. 추억은 상.쾌.했던 관성의 그림자다. (여기서 상上은 객관적이다.) 우리는 달을 보고 있지 않으면서 월광 소나타에 취되어 있다. 쑥-대강이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이상(다스릴 이理, 생각 상想)이란 꿈꾸는 것이다. 현상과 형상 사이 교량이 인연생기因緣生起다. 불확실성에서 플라톤은 (되려) 질문한다. ¨불재하처(떨칠 불拂 있을 재在 어찌 하何 곳 처處)? 자, 견지망월(볼 견見 손가락 지指 잊을 망忘 달 월月)? 다시, 달은 달이다.¨ 공중무색空中無色이란 공 가운데 색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아무 것도 없는 무색色인 상태空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존재(데미안의 아브락사스, 즉 자기 충족적인 존재)를 관찰함으로써 인연이 맺여져 휨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피히테가 설명하는 인간의 언어는 가다머와 다르지 않다. 가다머는 언어가 "모상"에 가깝다 했고, 피히테는 언어란 초감각적인 감각을 포착한 인간이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감각적 그림"이라 설명한다. 피히테가 말하는 "초감각적인" 감각이란 물은 물이고, (물은 수소와 산소이며), ether, 즉 "이 감각"은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이라는 것이다. 형상形象- "이 그림이, 학생들 자신의 독립된 활동에 의해 작성하되 결코 수동적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고, 또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여부를, 또 그 그림이 명확성과 생명으로 승화되어 있는가의 여부를, 이 교육이 앞서 다른 문제에 대해서 동일한 방향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선, 이 인식이 실제로 ¨참다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영원히 상주할 ¨촉감각적 세계 질서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학생의 독립 활동에 의해서 그의 마음속에 그리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 필연적인 성질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데(Idee, 이념)는 독일어의 게지히트(Gesicht, 환상, 환영)과 동일한 감각적 그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루터가 성서의 번역에서 '너희는 환영을 볼 것이다. 너희는 꿈을 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징¨이다. 독일국민에게 고함, 피히테" 여기서 (기수는 현상을 보여주고,) 학생은 "교양"morpheme을 배운다.

 

야스퍼스는 운동(분열) 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은 "현상"現象일 뿐이며, 색은 형상形象을 위한 것이고, 객관적으로 파동, 즉 현상이 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색깔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전자파가 감각기관에 작용함으로써 주관적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다만 파동이 있을 뿐이며 세계 자체는 색도 없고 빛도 없다. 야스퍼스, 철학학교" 물질 표면에 들어나는 색은 빛이 물질을 통과할 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색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나머지 색을 말한다. 우리는 빛의 파장이 가시광선400-700nm 안에 들을 경우 시각을 통해 물질이 반사하는 색으로 사물을 구분하고, 촉각으로 볼 수 없는 자외선과 적외선 또한 느끼며, 청각으로 소리의 파동을 감지하고, 후각과 미각을 동원해 신경이 물질을 감지하여 만든 전자파장을 뇌로 보내 상像을 떠올린다. 따라서 존재란 색, 야스퍼스의 말대로 주관적인 대자존재이며, 빈 것이 곧 물질色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이란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 달리 말해 물질form이 아니라면 그것은 빈 것, 공空이다.

 

"신들조차 그 순간을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버리고 인간이 되지 않았던가? 빌헬름 마이스터 수업시대, 괴테"

 

403

Monad1, 뉴턴은 백광실험을 통해 빛(emptiness)이 색(form)을 만들고 물질(form)이 모여 다시 성질(emptiness)이 된다는 것을 깨닮는다. (반야심경에서 이것을 백즉시색 색즉시백이라 한다.) 삶의 항상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끊임없이 알고자 자신을 재촉하는 오늘이다. 시간은 “각”5(깨닮을 각覺)이 기지개를 펴는 듀이의 “경험”「경험으로써의 예술, 듀이」이 제시한 아름다움에 반비례한다. 여기서 경험이란 꽃이 씨앗「단자론monad, G. W. 라이프니츠」에서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것이다. 시간을 살아가는 생生은 망각과 각성을 오가며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라,) 수축하기도 팽창하기도 한다. 각에는 특수감각과 일반감각이 있다. 특수감각이란 빛 에너지를 감지하는 1시각, 압력 에너지를 감지하는 2청각, 화학 분자를 감지하는 3후각, 그리고 분자 에너지를 감지하는 4미각이다. 일반감각이란 표면감각, 장기감각, 그리고 평형감각을 말한다. 쉽게 촉각·압각·온각·냉각·통각, 공복감·오심·장기통각, 회전·가속도·직선 가속도 등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중 「기억의 지속」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는 각성으로 내일을 쫓는 욕망에 따른 어제의 구속과 촉박함을 풍자한 망각의 기이함을 토로한다. (이것을 아인슈타인의 ‘시간의 왜곡’이라고도 한다.) 유년은 아득하기만 하다. 유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개화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경쾌한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와 흡사하다. 사물이 극단에 이르고 “마땅히 지켜져야 할 이치”, 곧 “마땅히 와야할 세상”은 필레보스의 한정되지 않은 것to apeiron이 한정자to peras를 통해 정의로워지는, 유년의 각이 기지개를 펴는 것이다. 연륜이란 직관이 관성으로 거듭나는 자유로운 것이고, 노년의 추억은 상”쾌”했던 관성의 그림자다. 라이프니츠는 이것1을 “어제를 등에 업고 내일을 뱃속에 넣은 오늘”이라고 말한다. 삶은 현실적인 의식actuel과 잠재적인 무의식virtuel이 “뒤틀린 목재”다. 삶은 앎을 향해 스스로를 복제한다. 각은 다시 “현상”되고 의식과 무의식의 과정으로부터 “형상”을 얻는다. (“현상”에서 “형상”이 플라톤의 우주적 속성, 즉 내재적 편향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이것1에 내재적 편항이 있다고 하지만 DNA의 ACGT염기배열은 무작위이며, 오히려 양자정보 처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형상은 현상으로의 ‘확률 밀도 함수’를 소지하고, 관찰자는 ‘침묵한 유전자gene silencing’에서 변이를 발견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슈뢰딩거는 유전자 분자에 ‘양자도약’이 일어날 때 돌연변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물리학의 ‘양자도약’, 또는 전이transition란 원자나 분자가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확실하게 광자에너지5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즉 “테아이테토스의 흰 것”인 경우다. 다시말해 에너지의 흡수나 방출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연속적이며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 않고 계단을 뛰어넘듯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앎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제각기 왜곡된다. 황혼에 추억을 생각하는 나는 더 이상 생각나지 (Primer) 못하고 결국에 “나”를 정의한다. 프루스트의 다시 고쳐야 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대자존재로써의 “나”의 (가능성이라는) 정의는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처럼 미묘하게 ‘재고착’(프로이트의 소급작용)하는 기억의 뉴런 구조다. 앎ATP이 없으므로 동화작용이 없고, 라이프니츠의 내일은 이화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DNA 정보는 우선 RNA 형태로 전사되며, 그 후 단백질 형태로 번역된다. 그 단백질 분자가 우리다. 외가닥 RNA는 산소-OH를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화학적 반응이 DNA보다 높고, 불안정하므로 변이가 쉽다. 그러나 이중나선 DNA는 반대사슬이 상보적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손상시 본원될 수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데옥시리보 핵산에 새겨진 생득적 “관성”으로써의 특수감각과 데옥시리보 핵산에 새겨진 생득적 “관성”으로써의 일반감각이 일상에서 얻은 “정신” 교육과 습득으로 발달하는 “정신 속에 자기 몸을 던져서 실체 그 자체로 춤출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나의 가능성”을 품은 생명은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이 말했듯이 “피할 수 없는 열역학적 평형의 순간(죽음)을 무한정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거칠고 난폭한 물질”이다. 한편 ‘역열학적 평행상태’의 미소입자는 브라운 운동에 따라 액체나 기체 분자와의 충격에서 오는 불균형으로 불규칙한 운동을 하게 된다. 열에너지를 통한 상전이phase transition와 광자에너지를 통한 양자학적 전이transition가 있다. 그리고 생명에너지를 통한 생물학적 천이Ecological succession가 있다. 전이transition에는 열에너지, 화학에너지, 전기에너지, 소리에너지, 혹 빛에너지가 필요하다. 

“앎”은 정의horismos(분리하다, 나누다, 경계를 갖게 하다, 묶다, 즉 운동)되어야 하므로 기로Double-slit에 놓인 삶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또는 존재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실존”하고, “비존재”가 “비존재”이고 “존재”가 “존재”라면 사물들은 “존재하는”esti 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ouk esti이라 한다. (있다esti, 있지 않음ouk esti)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이것을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즉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고 하나가 일체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에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어 슈뢰딩거 왈,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입자가 입자이고 파동이 파동이며, 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말이 상대론적 시각에서 오늘이라는 것이 어제이기도 내일이기도 하다는 것만큼 애매한 것이고, 사실 지“각”하는 것이란 물질의 흐름flux 속에 형성되는 관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쉽고도 애매한 것은 존재하는 현상에서의 존재하지 않는 형상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를 낮에 비유하면서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두 개의 양자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파르메니데스에게 손쉽게 증명한다. 그럼 이데아, 즉 선 자체, 아름다움 자체, 정의로움 자체가 대상에 참여되는가 아니면 분리되는가. 주위 기울여야 할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한 참여나 분리가 아닌 현상과 형상 사이의 "각"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라 (테아이테토스의 척도, 즉) 한정성이 “존재의 조건”이 되는데, 경계가 명확한 것은 오직 “앎” 뿐이다. 이것으로 이사도라 덩컨 춤의 두가지 모형, “정신 속에 자기 몸을 던져서 실체 그 자체로 춤출 수 있는 디오니소스”와 “무용의 정신을 말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자로 춤출 수 있는 {열역학 제1법칙; 고립계 내에서 에너지는 사라지지도 생겨나지도 않지만 그 형태는 바뀐다} 아폴로”가 설명된다. 디오니소스적 생각나기(미리 예豫 느낄 감感6)는 '현실속 상상이 환상으로 이상'을 아폴론적 생각하기(돌아올 회回 생각 상想 , recall)다. 나쁜 사자는 없다, 그러나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은 있다.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릴케” 

색은 물질의 속성이 아닌 우리의 지각이 만들어낸 속성이다. 산란된 빛은 망막에 3원색의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추상체와 간상채의 색소 물질에 화학 반응이 일어나 물리적 신호가 뇌신경에 전달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자연의 “미”를 판단한다. 은빛에 비춰진 줄리엣의 진심을 보고 확신에 가득찬 로미오는 “축복받은 저 달을 두고 맹세”하기도 한다. 이같은 은빛, 비록 흡수되지 않고 산란된 색, 자연이 겉으로 들어내는 색깔을 향유자의 관점에서 “미”라고 한다. (관찰자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자연 현상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간직한다. 분명 그에 대한 그의 신념은 사치다.) 듀이는 향유자에게 비춰진 (야누스의 일각,) 이와같은 활동을 ‘자연의 극치’라고 설명한다. 향유자는 아테나의 푸른 눈과 성스런 화한을 쓴 데메테르의 기태를 목격하기도, 황금의 날개를 지닌 이르스의 몸짓과 판의 자연 모든 형태와 테르프시코레의 자연스러운 현상에 주시한다. (참고: 무용에세이, 이사도라 덩컨) 이러한 향유자의 활동이 바로 “취미”다. 단지 취미를 통해 자연의 입자성이 획득되면 물질의 파동성은 붕괴하고 만다. “요리에서처럼 명백히 탁월한 솜씨는 요리사의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취미는 [예술을 향유하는 자]의 것이다. 경험으로써의 예술, 존 듀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삶을 살아가는 것, 곧 매개변수, “눈과 짝을 이루어 색깔을 낳는 것은 흼으로 가득 차게 되어 그 역시 흼이 아니라 흰 것, 테아이테토스”이 된다. 흼에서 가시광선으로의 상전이相轉移가 흰 것이다. 

무엇의 현저성salience이란 어떤 현상이 무엇보다 두들어지고 독특하다는 것이다. 현저성이란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지적했듯이 빛의 역동적인 순간을 담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같은 것이다. “사슴{현저성}을 ‘보호’하자는 캠페인, 포식자가 사라지자 사슴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곧 사슴의 먹이가 바닥나버렸다. 먹을 것을 찾아 나선 사슴은 나무의 새순까지 뜯어먹었지만 먹을거리는 계속 부족했고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수보다 굶어죽는 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 (...) 문제는 우리가 천적 구실을 하는 동물을 모두 죽인 후에야 비로소 그 동물이 맡고 있던 조절 기능을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침묵의 봄” 그리고 현저성에 의한 감상(느낄 감感 형상 상像)은 다다dada(취미)로 이어진다. 우리는 감상感賞(느낄 감感5 상줄 상賞)하고, 감상感想(느낄 감感5 생각 상想)을 적고, 감상感像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앎을 향하는 삶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느냐다. 취미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향유자의 관점이고, (자정능력이란,) 향유자가 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듀이는 향유자의 관점이 바로 ‘취미’라고 말한다. 그리고 푸르스트는 향유자로써 (문학의) 맛을 형상화taste한다. 【후각은 화학분자를 감지하고 미각은 분자 에너지를 감지한다. 프루스트가 마들렌에서 얻은 후각과 미각은 해마 조직에 각인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프루스트는 그것을 빛 에너지로, 청자는 거기서 압력 에너지를 감지한다. 기억이 조정되는 곳은 신경돌기들이고, ”각”을 통해 소환된 기억은 CPEB로 기억을 변형시킬 수 있다. 전사 RNA들은 신경돌기에 있고 이것이 활성화되면 기억은 변경된다. 이 전사 RNA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세포가 CPEB 단백질이다. (인용.참고: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 조나 래러)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는 내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범용한, 우연인,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다소퍼Dadasopher라는 애칭을 얻은 라울 하우스만의 ‘소리-시’ 「ABCD」는 청각적인 요소를 시각적으로 형상화 했다. 【온실가스란 수증기(즉 구름), CO2, N2O, CH4, 오존O3, CFC를 말한다. 지구가 평균 14-15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온실가스가 태양복사를 흡수하고 지구복사도 흡수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발하는 적외선을 지구복사라고 하고, 복사란 ‘빛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열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우주의 평균 온도는 -270도다. 일교차가 심한 날은 구름이 없고 건조해 온실효과가 없다. 예로 사막은 밤에 춥다.) 탄소배출권 거래란 공장이 많은 나라(또는 기업)가 공장이 적은 나라로부터(혹 환경을 개선시킨 나라나 기업으로부터) 배출 권한을 사는 행위다. 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은 구름과 CO2이며, 온실가스가 늘어 기온이 상승할수록 바다와 강은 더 많은 양의 수증기를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공기 기둥의 무게가 다른 ‘연결된 두 장소’의 기압차로 바람이 형성되고, 자전 또한 이 복잡계에 한 몫을 거든다. (에베레스트 산 0.33기압/364hPa, 지표면 1기압/1013hPa) *참고: 기상 구조 교과서 - 후루카와 다케히코, 오키 하야토 저.신찬 역】

무의식은 의식에게 상징(코끼리 상象, 부를 징徵)을 준다. 전체적 이데아(‘입자’나 ‘파동’이 아닌 ‘입자와 파동’)에서의 상은 “하나가 동시에 하나이자 여럿이며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며, 139d, 파르메니데스”, 시간에 참여하는 물질은 운동하고 존재한다. 형상(무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늘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므로,) 현상(의식)은 관찰된다. (우리가 정의하는) 인류에게 (무의식은 언제나 존재했고,) ‘의식’은 이제 막 깨어난 새로운 것이다. 인류는 코기토 전에 즉자였다. “의식은 자연이 최근에 새로 손에 넣은 것이라서 아직 ‘실험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문명화된 의식은 기본적인 본능으로부터 점점 분리돼 버렸다.... 따라서 본능은 신경증에 수반되는 생리적 증상,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 갑작스러운 망각 현상, 뜻밖의 말실수 등등 여러 모습의 돌발 사태로 나타난다. 카를 구스타프 융” 융이 설명했듯이 무의식을 통한 망각은 관성(버릇 관慣, 성품 성性)에서 각성을 향할 “의식에 새로운 인상과 관념(볼 관觀, 생각할 념念)이 들어설 여지”를 남겨주는 유익함이다. (비록 그것이 유익하다면.) 잠재적으로 이미 주어있는 것을 깨닮는다는 것이 취미다. 「자연학 소론집」, 아리스토텔레스 말이, 감각한다는 것은 배움의 행위가 아닌 앎의 실행이다. 감각은 현재고, 감각은 생각하기다. 감각이 제공하는 것이 ‘미’고, 감각은 의식이다. 무감각하다는 것은 망각되어 버린,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배움의 행위이자 미학이고 생각나기다. 유리알 유희(놀 유遊, 놀 희戱)의 장인은 현상을 표현하는 특출한 재능과 현상의 성질에 대한 “특이한 감수성”을 갖춘 생산자이고, 그에 취미를 얻는 것은 향유자의 몫이다. 의식을 무의식에 심는 반복은 장인을 낳는다. 다윈과 과학의 증언이 맞다면 장인은 무의식을 문명과 바꾼 것이다. 【진흙탕을 좋아하는 코끼리는 수생 조상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인류의 조상을 바라보는 주류의 시선은 사바나 가설이 정설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정설을 부인하는 수생 유인원 가설이 있다. 인체의 체액 화학적 성분의 비율은 바닷물과 비슷하고, 해양에는 우리 뇌가 필요로 하는 도코사헥사에노산DHA, 오메가 6, 그리고 오메가 3이 풍부하다. 유인원에게 털은 온도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현존하는 원숭이와 유인원 193종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털이 없다.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지방이 10배나 많다. 어린 포유류는 체온 저하를 위해 갈색지방이 많은데, 아기는 3-4월 사이에 모든 갈색지방을 백색지방으로 변환시킨다. 이같은 백색지방은 해양 포유류에게 보온과 부력 유지를 제공한다. 다원이 주장하는 우유성 진화의 과정은 “자연선택”이다. 우주배경복사가 우주팽창을 설명하므로 자연은 현재까지 그냥 흐르는 것이고, 존재는 ‘변이’라는 주사위를 이제껏 무수히 던져왔다. 그럼 “유인원”에 속한 “인류”를 돌아볼 때 작지만 “수렴진화”가 보이고, 시간을 거슬러 생명이 처음부터 다시 주사위를 던질 수 있다면 생명의 설계가 필연임을 확인할 수 있겠다.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의 관점에서 보면 수렴진화는 진화가 특정 생태적 조건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거의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를 때가 많았다는 의미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진화는 적응 공간을 탐험하면서 똑같은 생태적지위niche를 여러 차례 걸쳐 다시 발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진화의 주문」에는 먹이 섭취, 걷기, 헤엄치기, 날기에 필요한 기관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미각, 청각 같은 감각을 만들어내는 기관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의 요점은 수력학, 광학, 음향학 같은 물리적 제약들이 특정한 생태적 지위에서 생명체들이 마주하는 문제에 대한 성공적인 해법의 가짓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진화는 이런 해법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 - 케네스 밀러” 곧  케네스 밀러의 결론은 생명이란 “생명의 궁극적 잠재력,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체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생명은 생물학적 지적 평등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한가지 조건은 인류의 “지금”이 the moment이여야 하고,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화석으로 남은 공룡일지도 모른다. “혼돈, 순전한 우연, 돌연변의 주사위와 ‘유전적 부동’의 포커스”라는 기무라 모토의 중립 진화 이론에 첨가되지 않은 변수는 다윈이 말했듯이 “자연선택이 종의 변에 주된, 하지만 독점적이지는 않은 수단”, 곧 “의식”悟性인지도 모른다. ‘모든 길은 로마via Salari로 통한다.’ *인용.참고: 호모 아쿠아티쿠스 - 일레인 모간, 하얀 황금, 소금의 경제사 - 홍익희, 소금의 미래를 열다 - 채점식,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 조나 래리】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날 뿐이다. - 앎의 나무, 마투라나”

상(코끼리 상象)은 육서의 상형이다. 인(사람 인人)은 육서의 지사다. 상형은 형태가 있는 물체의 형상을 본뜬 글자이고, 지사는 점과 선을 이용해서 “상징”(코끼리 상象 부를 징徵)되는 부호로 만든 글자다. 인人과 상象이 회의(모일 회會 뜻 의意)하여 만든 것이 형상 상像이다. 형상(형상 형形, 코끼리 상象)을 본뜨는 것이 현상(나타날 현現, 형상 상像)되는 것이다. (þ = th in Ireland, þe = ye & þū = thou) 우리가 어떠한 상象을 볼 때 우뇌는 언어를 이해하고 좌뇌는 언어를 분석한다. 우뇌는 빛의 파장을 지각(400-700nm)하고 좌뇌는 고뇌(30-45Hz)하는 것이다. 무의식 상태에서 뇌파는 0.2-3.99Hz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파수f(Hz)는 파장λ(nm)과 역수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용.참고: 글자풍경 - 유지원,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질 볼트 테일러)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시광선 파장은 400-700nm이고, 볼 수 없는 적외선은 780-1,000nm이다. 자외선은 100-400nm이고, 라디오 전파는 100,000,000,000nm(100m)이다. FM은 주파수가 높고 파장이 짧으며, AM은 주파수가 낮고 파장이 길다. 음파 주파수f(Hz)(진동수)가 높다는 강음은 파장λ(nm)이 짧고 진폭(파도의 출렁임 높이)의 차가 크며, 발음시간이 짧다. 의식 상태에서 고뇌한다는 것은 뇌파(진동수)가 높음을 의미한다. 음파 주파수f(Hz)(진동수)가 낮다는 약음은 파장λ(nm)이 길고 진폭의 차가 작으며, 발음시간이 길다. 무의식 상태에서 명상한다는 것은 뇌파(진동수)가 낮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대략 100~8000Hz(29979245.8-37474.05725m, 100m = 100,000,000,000nm)이다. 두 파장을 비교하면 전체 감각 비율 87%를 차지하는 시각 파장이 400-700nm, 전체 감각 비율 7%를 차지하는 회화영역의 청각 파장이 3,000,000,000-37,474,057,250,000nm이다. 두 파장 간에 큰 차이가 있고 음파는 매질(공기나 물)이 있어야 한다. “사방의 지역마다 자연의 풍토가 다르다. 따라서 지역마다 사람의 발성과 호흡도 달라진다. 그러니 언어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글자 또한 서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하면 조화에 어긋난다. 구텐베르크 1398년경-1468” “그리고 국어란 그대로 문화의 체계이기 때문에 각각에 국어에 의해 사람들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에 관한 분류 방식, 절취 방식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토포스, 나카무라 유지로” “정음(바른소리라는 뜻)은 글자의 모습과 소리가 이탈되어 있는 상태{당시 한자가 통용되었고 구텐베르크의 말처럼 자연과 풍토와 지역을 고려해 음성과 문자, 즉 상징 또한 통합되는 것이 유익하므로}에서 다시 본연의 관계를 되찾아 주어 만물의 속정을 소통하는 소임을 하기위해, 세종대의 음성학 - 한태동” 세종(1397-1450)이 집현전(런던 왕립학회와 비슷)에서 만들었다. 정음(바른소리)은 집현전 학자들이 음성의 변화가 민감한 점을 고려, 인간의 음성구조에 정확히 대등되는 세피리(ㄴ, 2/3입인두 : 3/2성대), 향피리(ㅁ, 1입인두 : 1성대), 당피리(ㅇ, 4/3입인두 : 3/4성대)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쉽게 사람의 사상인 생각과 사고가 조음기관(발성기관)을 통해 조음기관의 모양을 상징하는 활자로 들어난 것이 정음이다. “‘ㄱ’은 [K]소리를 낼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꼴을, ‘ㄴ’은 [n]소리를 낼 때 혀가 윗잇몸에 닫는 꼴을, ‘ㅁ’은 입술소리[m]을 내는 입의 모양을, ‘ㅅ’은 [s]소리를 내는 이의 모양을, ‘ㅇ’은 [0, zero]의 소리값, 즉 목소리를 내는 목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물‘ㅇ’ → 나무,싹‘ㆁ’ → 나무,비탈‘ㄱ’ → 나무,성장‘ㅋ’ → 나무,노장‘ㄲ’. 하늘과 땅이 처음 사귄다는 의미의 ‘ㅗㅜ’, 하늘과 땅의 작용이 사물에 피어나되 사람을 기다리는 의미의 ‘ㅓㅏ’ (‘·’ 하늘을 본뜸, ‘ㅡ’ 땅을 본뜸, ‘ㅣ’ 사람을 본뜸) *정음은 표음문자이지만 활자의 상징에서 표의문자가 된다.}” *참고.인용: 세종시대의 국어학 - 김석득 (음성이란 둘숨과 날숨을 통해 형성된 폐기압이 호흡기관과 성대를 지나 이동하다 생겨나는 것, 즉 폐에서 들숨을 통해 압축된 공기가 날숨으로 기관을 지나-기압의 차이가 생겨-벽을 진동시켜 폐기압이 생긴다. 음성학에는 양순음, 순치음, 치음, 치조음, 치조경구개음, 경구개음, 연구개음, 후음이 있다.) [‘바른소리’ 정음이 갖는 문자로서의 특징은 크게 도상성, 자질성, 비선형성이다. 도상성이란 해당 글자를 발음할 때 그것이 발음기관의 모양과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형상에서 현상으로써의 상징의 낮은 오차값을 얻는다). 자질성이란 비슷한 음소(자음과 모음)들이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ㄱㅋㄲ, ㄴㄷㄸㅌ, ㅁㅂㅃㅍ, ㅅㅈㅉㅊ, ㅇㅎ, ㅣㅓㅔㅖㅏㅑㅐㅒ, ㅡㅜㅢㅟㅝㅞ), 다시 말해 배워야 할 글자수가 적다는 것이다. 비선형성이란 사각형 안에 “모아쓰고” “모아 읽기” 때문에 누구나 쓰기 쉽고 읽기 쉽다는 것(인간의 시각은 극히 제한적이므로)이다. 과학이 그렇듯 정음의 창제 배경에는 음절문자인 한자, ‘네모난 글자’라는 명칭의 몽골어(즉 파스파 문자), 자음자와 모음자가 비선형적으로 결합하여 음절을 이루는 인도 산스크리트어(음소음절문자), 그외 위그르 문자, 페니키아 문자가 거론된다. *참고.인용: 일반문자학에서 바라본 훈민정음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강음은 강한 빛(자외선, X선, 감마선)처럼 파장이 짧다. 그러므로 언어-소리는 빛의 형태를 답습한다. 세종은 고유한 빛을 의식하여 고뇌했고, 그는 빛을 마시고 명상했으며, 그에 따른 합당한 ‘바른소리’를 적었다. “살아 있다면, 감각의 재능을 받았다면 그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를 감싸고 펼쳐진 공간, 그 모든 찬란한 현상 중에서도 만물을 기쁘게 하는 빛을 - 그 빛깔과, 그 뻗어나감과, 그 일렁임을. 우리를 일깨우는 빛의 부드러운 편재를. 그것이 생명 가장 깊은 곳에 깃든 혼인 양, 휴식을 모르는 별들의 거대한 세계는 빛을 들이마시고, 그 푸른 물결 속을 춤추며 헤엄친다. - 불꽃을 품은 채로 영원히 쉬는 광물도, 헤아리며 흡수하는 식물도, 야성으로 불타오르는 다형의 동물도 빛을 들이마신다. - 밤의 찬가, 노발리스”】

“From the New World, Op. 95, 내게는 회백색으로 보여..... 내가 보기에는 황갈색이야.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는 회색이었어. 「퍼스트 맨」” 아폴로는 고요의 바다에 하나의 조각배를 띄웠다. 그가species “누구든 그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되었다. 열역학 제 2법칙을 수호하는 그에게 명분은 사소한 멍에의 핀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353, “‹우리가 달에 가야 할 이유는?›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가 돌아오는 게 이 우주비행의 ¨명확한 목적¨입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우리가 달에 가야 할 다른 철학적인 이유는 없나요?› ..도전에 직면하려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내면 깊은 마음의 본질이죠.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퍼스트 맨」” 내재적 편향에서 우유적 속성을 지닌 것이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성이였다. 명분을 뺀 나머지가 의문 속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가 ‘바른소리’ 곧 표음문자이고, 사물의 모양을 흉내내어 나타난 글자가 ‘기호’ 곧 표의문자다. 따라서 언어로 ‘시각적인 존재’가 표시되는 것이 ‘기호’signifiant이고, 언어가 ‘청각적인 존재’를 표시하는 것이 ‘바른소리’signifie다. 현존재Dasein에서 ‘바른소리’는 “들린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들린 존재, 데리다”다. 결국 ‘기호’는 시각적인 존재의 상象이다. 아즈텍인들의 표음주의적 기의와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기표의 기로에서 논의될 것은 기표로 표시한 기의(그러나 표시될)와 기의로 표시된 기표(그러나 표시할)다. 루소는 이것을 기표의 놀이, ‘재현적 관념의 놀이’라고 설명한다. 관념이란 어디까지나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생각이며, 그로부터 비롯된 현상학적 은유는 ‘관념’像과 ‘관념의 대상’象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하자가 될 수 없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밝혔듯이 “정념의 기표는 본래의 것”이고 단지 판단의 오류가 있을 뿐이다. 분명 그 판단에는 (파동성의 붕괴, 즉 취미로 인한 사유와 운동, 그 계기로 발화될 신경물질에는) 기억(혹 문자)에 의존하는 환기적hypomnesis 가치와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상기적anamnesis 기준이 요구된다. “나에게는 회백색으로 보여.. 내가 보기엔 황갈색이야.” 언어의 모순은 “운동하는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관념적인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달빛’으로 표현된다. 그럼 듀이의 말이, 과학은 정말 자연의 사건을 행복한 결과로 유도하는 시녀인가. 그가 옳다면 “텍스트”는 월인천강月印千江다.)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문자 언어란 음성 언어의 대리 재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작 대상물보다 그 이미지를 결정짓는 데 더 많은 배려를 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공통분모를 찾기 앞서 푸르스트의 후각적이고 미각적이며 촉각적인 언어의 토템이 전해줄 감각을 상상해 본다. 아-, 그것이 우마미うま味(감칠맛C5H9NO4, 이케다 기쿠나에)인가. “L-글루타메이트C5H9NO4는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아미노산이고 단백질 분해 과정-죽음, 부패, 요리 과정을 가리키는 점잖은 용어-에 의해 생명체로부터 방출된다.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래러” 데리다는 언어를 고정시켜야 하는 문자 언어가 ‘대리 재현’으로 모사되고 묘사될 때 언어의 특질을 변화시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정음의 방점傍點: 글자 옆에 찍는 점으로 ‘높은 소리’ ·거성, ‘높아가는 소리’ :상성, ‘낮은 소리’ 평성이 있다) 그는·Ḋėṙṙi̇́ḋȧ 문자 언어에서 힘, 어조, 억양 등은 개념속에서 상실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활자를 접하는 푸르스트의 의식의 흐름을 믿어본다.) 그러나 사이먼 콘웨이 모르스의 관점에 따라 삶이 생태적지위像를 여러 차례 걸쳐 다시 발견하는 경향이 있다면 언어의 변질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나르키소스의 의식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새로운 것이다. 데카르트는 겨우 세 단어로 그것을 검증해 냈고(dubito, ergo cogito, ergo sum), 플라톤의 ‘아름다울 이론’은 ‘이기적 유전자’를 추월하게 되었다. 「이기적 유전자」는 질문한다. “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혹자, 아름다움을 위한 운동의 크기만큼이 더없이 족하다 말한다. 아름다움은 장미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우리는 그 장미가 지닌 어떤 교양species을 지향한다. 로미오의 선언은 종을 정의하고자하는 (헤겔이 지적한) “허영”과 “위선”에 저항한다. “우리가 장미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여전히 달콤한 향내가 나지 않겠어? 로미오와 줄리엣” 에머슨의 장미들은 더 아름다운 장미들을 참조하지 않고, 스타인의 “장미는 장미, 는, 장미, 는 장미, 는 장미이다.” 헤겔은 자연적인 것은 (즉 자연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전한다. 그런데 자연이 자유롭고 자신 또한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된 나르키소스의 “자유 의지”에서 욕망, 충동, 경향은 욕망하는 것, 충동하는 것, 경향되는 것, “운동하는 것”으로 발전해 데카르트의 사유는 지각하는 대상을 ‘교양에 따라 정의로운 사자’로, 즉 “자신을 만물의 근거로 보는 추상적인 자기-확실성(abstract self-certainty), 「Philosophy of Right」”에 의해 분류되게 만든다. 헤겔은 자연적인 것을 “교양”을 통해 의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운동”이 ‘자유 의지’를 발설하는 자신에게 타당성과 현실성을 부여한다고 「정신현상학」에서 밝히고, 천성이 아닌 습득된 개성은 종(Art)으로 부르기에 알맞으며 종(Art; Species)은 “어중간한” 교양espèce이 아니라 “나름대로 좋다in seiner Art”라는 겸연쩍은 해석을 덧붙인다. (독일어의 종Art은 “나름대로 좋다”. 프랑스어의 종Art은 “어중간하다”. 그리고 과학의 종Art은 돌연변이다.)

헤겔의 공감각이 프루스트의 입술에 번지는 강렬한 기쁨, 그것은 들숨으로 하여 감미로운(달콤한 아름다움)이 즉자에 현현되고 날숨에서 또 잊혀진 시간의 자락을 떠올리게 만든다. 신선한 기쁨에 새로운 종(교양)이 의당 요구되었다. 기쁨(도파민, 세로토닌)은 운동의 근원이 되고, 대자적(대답할 대對 스스로 자自;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는) 데카르트는 직관6하고 → 표상하며 → 사유하여 “정신”을 촉발시킨다. 반포지효, 예술은 정신의 표상re-present이 되었다, 예술은 진리를 담았다. 아, 사유와 성찰이 순수예술 위에 자신들의 날개를 덮어 버렸다Uberflugeln.. - 진리가 있다면 정신이 따르고, 그 이념은 이상das Ideal이 예술로 현상하고, 곧 예술이 형상화되는 것이다. 기교에 있어 (재주 기技 공교로울 교巧, 재주 예藝 재주 술術)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 감각이 출현해야 하나 칸트의 신적인 오성, 즉 본원적이고 생산적인 “직관적 오성”과 헤겔의 “자기표출적인 정신의 형식 속에서 신적인 것이 삼투하여 작용”됨으로 다윈의 발자취를 따르기에 생득적 관성이 몹시 불가피하다. 분명 칸트의 “내재적인 목적에 준거한 쾌”와 헤겔의 “무관심적인 쾌”의 공통 분모는 생득적 관성의 기준이다. - (참고: Ästhetik, oder Die Philosophie der Kunst) 어둠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펼 수 있다. “저기 비치는 빛은 무어지? Welch Licht leuchtet dort? 「Götterdämmerung」” ..레이첼은 외투를 건네는 호라이Ὧραι를 그렸고, 헤겔이 봄의 서풍을 선물한 제피로스Άνεμοι를 적으며, 랭보는 여름 아침을 껴안았다.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위대한 ·정·오를 준비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판테온에서)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Ästhetik」” 헤겔은 눈먼 시계공이 설계한 섭리1를 비판한다. (질문한다.) 계의 엔트로피가 정말 0에 수렴되는가. 셸링이 말했다. ‘바로 저 순간 안에 놓여 있는 미를 현상해냄으로써 그것을 시간에서 끌어내리는 것,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다.’ (사변적이지만) 생명은 “아름다움의 보다 높고 진화된 완성, 「아름다움과 악, 손호현」”을 위해 ·시·계·공 놀이가 필요했다. 

철학이 죽었음을 선포한 스티븐 호킹은, 설계될 삶은 “우아할 것”이며, 설계된 앎은 “자의적이거나 조정 가능한 요소들을 거의 포함하지 않을 것”이고, 삶과 앎은 “기존의 모든 관찰들에 부합하고 그것들을 설명할 것”이며, 만일 그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이 “틀렸을 경우에 모형을 반증할 수 있는 미래 관찰에 관한 상세한 예측들을 {곧 상象} 내놓을 것”이라 한다. 살아갈 유기체에 필수적인 탄소와 이산화탄소의 양, 알맞게 조절된 핵력과 전자기력의 강도, 정확하게 떨어지는 우주 상수 등, 스티븐 호킹이 설명하는「위대한 설계」에는 시계공의 아름다울 섭리가 필요하다. “이론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가진 간결함, 즉 대칭에서 온다. 올바른 이론은 적합한 대칭성을 갖는다. 이런 이론은 아름답다. 결국 아름다움은 진리다. 떨림과 울림, 김상욱”

XY는 이중성을 표한다. 그리고 XX는 잠재된? 선험적 이중성에 답변한다. 나탈리 앤지어는 XX를 “아이를 낳지 않은 어머니의 몸 속에 든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고 비유한다. (X는 가장 큰 염색체이며, Y는 가장 작은 염색체 축에 속한다. XX는 X자 모양의 구조물을 23쌍, 즉 46개를 가지고 있다. 그 중 1쌍만이 성염색체이다. 반면 XY은 하나의 Y염색체를 제외한 45개, XX와 동일한 나머지 22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D.H.로렌스는 그것이 감지된 그 무엇이며 그것은 기쁨으로 가득찬 절묘함 또는 공감되어진 절묘감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상대적이고, 정의되지 못한 그것은 신기하다, 미묘하다, 괴상하다, 기이하다, 절묘하다, 오묘하다라고 일컫는다. 시간이 있자면 시계공이 필요하다. 요컨데 시간이 존재하므로 운동은 불가피하다. (케플러는 그 아름다운 운동을 처음으로 도식화한 인물이었다.) 생명은 ‘보다 높고 진화된 완성’을 위해 (그렇다면 내제적 편향이) 1,2,3,4,5를 발달시켜 절묘한 비율을 구했다. 로렌스 말이, 감각이 제공하는 것에 절묘함이 있었고, 코기토 이후 그 절묘할 비율은 표상에 갇혔다. 로렌스는 제창한다. ‘앎에서 구해지는 묘함(미美 ← 각覺)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에게 질문한다. 생명의 최고 비율이 시각87%, 청각7%, 촉각3%, 후각2%, 나머지 1%의 미각인가. 그런데 ‘자연 선택’이 옳다면 풀어야 하는 문제가 또 있다. 나탈리 앤지어의 예리한 지적, 우연히도 운명적으로 수렴 진화Darwin된 XX의 생식 수명450~480이다. “아난다미드Anandamide를 신호 전달 분자로 사용한 것은 순수한 우연의 일치, 분자적 다용도 적응이다. 하지만 그것은 멋진 우연의 일치이다. 카나비노이드cannabinoid는 베아에 환상 속에서만 즐거움을 누리는 비법을 경화로 제공한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 마음대로 광경을 만들어내는 정신과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가는 길을 말이다.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나탈리 앤지어” 어떤 기원을 적당히 송과선이라 둘러대자면 이 시기를 (관찰되지 못한) 생득적이라 하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미학은 예술이 아니라 관조의 작용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심미적 태도는 미학자의 태도가 아니며, 그것은 예술적 관조내지는 취미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미학자는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자도, 그것을 향유하는 자도 아닌 미적관조자, 즉 감각이 제공하는 것에서의 절묘함을 “관찰하는 자”일 뿐이다.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인데 하르트만은 미적 직관이 철학의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셸링에 급구 반대하며 미의 법칙의 의식이란 없으며 그 본질은 의식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우리가 감격Begeisterung이라 부르는, 지극히 내적인 심정과 정신의 힘의 생생한 움직임에서만 생겨납니다. 셸링” 하르트만의 해석은, 묘한 것이 “그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그럼 향香의 「향연」에서 무엇을 관조할 것이며, 그렇다면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1%.. 열대산 후추, 계피, 육두구, 정향, 올스파이스와 같은 협의의 향신료가 있고, 열대와 아열대와 온대지방에서 생산 건조된 신물의 종자, 과실, 꽃, 봉오리, 줄기, 수피, 근괴와 같은 광의의 향신료가 있다. (그 외 유럽 등의 온대 지역에서 재배하는 파슬리, 월계수, 바질, 타임에 속하는 허브 및 향초, 그리고 고추, 마늘, 생강, 계피, 산초, 파, 부추, 깻잎 등등이 있다.)  2%.. 여기 사향musk, 양묘향civet, 헤리향castoreum, 그리고 용연향ambergris이 포함될 것이다. 단지 이 「향연」에 참석한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시인들에는 아직 점성, 탄성, 부착성, 기하특성 내지 역학적 특성, 피막감을 “관조”할 식감이 제공되지 않았다. (향료기술 용어집 인용.참고) “두 종류의 관조는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어진다. 하나는 감성을 통하여 실재적인 것으로 향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오직 관조하는 우리에게 ·대해서만 존립하는 별개의 것으로 향한다. 미학이란 무엇인가, 니콜라이 하르트만” 셸링과 헤겔은 벗이니 두 사람 모두 미학이 이데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감성적 현상”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며, 휘덜런 역시 그들에게 동의할 것이다. 덧붙여 셸링은 감정만이 언젠가 사라질 존재가 관조할 수 있는 최고의 실재성을 정신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명 셸링은 휘페리온을 읽었을 것이다. 코기토, “후자의 경우 무한자가 유한자 안으로 들어온 경우에, 무한자는 유한자 그 자체를 (스스로) 무화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예증을 통해 무화하기 위해 존재하며, 또 그렇게 해서 두 세계의 한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후자의 경우에 세계의 이념은 신이 인간으로 됨과 신의 죽음(Menschwerdung und Tod Gottes)이다. 예술철학, 셸링” (공교롭게도 하르트만은 미학 설명에 있어 색채와 명암의 대조를 강조하는 렘브란트에서 그 예를 든다.)

존재에게 시간이 주어지는 것을 현실성(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라하고 이어 현존재는 어떠한 개념(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지닌다. 예컨데 장미의 개념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미학, 헤겔」에서 미는 자체 안에서 무한하고 자유로우며, 장미의 개념은 독자적인 법칙을 내세우지 않고 미와 조화를 이루며 이념의 통일성, “자연”을 이루는 것이다. 이념Idea이란 개념있는 존재가 “영혼을 스스로에서서 드러내는 것”, 형상을 ‘의미 심장하게sinnvoll’ 보고 현상하는 것(“미는 이데아 그 자체가 아닌 이데아적 감성적 현상”)이다. 요컨데 이념이 감각적으로 표현된 것을 헤겔의 뜻대로 미적이라 말하자면, 하르트만은 아라베스크는 “선의 유희를 들어내고 완결성과 기하학적 도형과 균정”에 있어 그림과도 동일한 “미적 자주성”을 띤다고 설명한다. 3%.. 요컨데 장미의 (의미 심장한) 언어는 가시다. 「미학」은 존재가 자신das Ich 스스로를 위해 이념적인 성격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말한다. 장미의 의미 심장한 발언이 즉자적인 행위였다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념은 현실성으로 이행해 나가야 하며, 그 개념에 맞는 현실적인 주관성을 띠고 이념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현실성을 획득한다. 「미학」” 시클리드의 습성은 무척이나 흥미로우며, 생리활성물질Biological Response Modifiers대한 깊은 이해는 불가피하다. 【헤겔의 예술은 무한한 현존성, 자유로운 한계성, 그리고 독자성을 지닌 이상Ideal의 피규정성Bestimmtheit(적극성)으로 예술을 관조하는 관객들과의 향유, 즉 파토스(공감, 감성)를 형성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은 작품을 관찰하는 관객의 “교양”을 이해해야 한다. 이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고, 외적으로 들어난 현상의 내적인 의미가 헤겔의 이상, 즉 절대이념die absolute Idee이다. 예술 형식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이념에 결함이 있음을 뜻한다. “예술은 다름 아닌 이상理想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작품을 관조하고 향유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즉 관객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은 내적인 정신이 외적인 형상들을 지닌 실제성으로 드러내야 할 뿐더러, 절대적(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와 현실의 합리성도 외적으로 현상하도록 해야 한다.「예술미의 이념 또는 이상, 미학」” (곧 호메로스의 격동적인 신들과도 같이) 미의 외적인 형상을 쫓는 윤리와 정의는 동시대에 맞서 개성있고 주관적이여야 하며, 정신의 찰라를 현상하는 예술은 반드시 자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므로 절대정신(예술)으로의 이상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사상을 그려낸다. “예술작품은 정신적인 것을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집적 현존재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예술미의 이념 또는 이상, 미학」”】

표현될 적합한 대상이 고려되지 않은 채 아름다움이라는 무한이 표현되려는 시도가 헤겔의 일반적인 숭고이며 일반적인 “정신”이다. 자연미라는 것은, 장미는 장미는 장미는 장미는 장미이다. 전체성에서 선악은 없으므로 숭고함이란 없다. 그러나 “순수한 모순”으로써의 ¨das Anundfürsichsein¨ 장미는 숭고하다. “이제 즉자대자적인 존재das Anundfürsichsein가 감각적인 현재, 즉 경험적이고 외적인 개체성으로부터 처음으로 단호하고 확실하게 벗어날 때 들어나는 것이 바로 숭고함Erbabenheit이다. 「미학 제 2부」” 「판단력비판」에서 장미는 “향연”을 위한 것이다. 칸트의 “정의”는 “밤하늘에 빛나는 로미오의 별들 -Allegorie”과 도덕적 법칙이다. 원문은, “본래의 숭고함은 어떤 감각적인 형태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성적인 이념과 관계된다. 그 이념은 물론 그에 알맞게 표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바로 이념 자신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적합한 그것에 자극되어 우리의 심정에 불러일켜지는 것이다. 「판단력비판」” 청자의 “날이 선 -die Metapher” 상상력은 자기외적인 존재Außersichesein가 대자적으로 자유로운 현존재가 되게끔 인도한다. 자연미에서 벗어나 “우리는 상상력이 지닌 숭고함과 신성함을 만나게 된다. 「미학 제 2부」” (자기외적인 존재는 즉자다. “존재는 존재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존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L’ tre est. L’ tre est en soi. L’ tre est ce qu'il est. 「존재와 무」” 철학이 과학에 예술을 질문한다. ‘대자즉자적 존재는 실존한다.’)

벽의 장식, 도기, 유리, 금속공예, 제본, 도서, 카펫 등에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해 기하학 무늬로 배합한 것이 바로 아라베스크다. 재현주의적 표현을 금기시한 이슬람은 필사Calligraphy를 통한 “추상적인” (뽑을 추抽, 코끼리 상象) 형태의 문양들을 예술로 전승시켰다. 「미학」에서 헤겔은 아라베스크를 자연형상들로 구분하고 무늬에 상징성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상상의 유희라고 규명한다. “사실 아라베르크 무늬는 유기적인 것의 형태 면에서나 역학 법칙과 관련해 볼 때도 자연에 어긋난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자연에 어긋나는 것은 대체로 예술의 권리일 뿐더러 심지어 건축의 의무이기도 하다. 「미학 제 3부, 건축」” 미술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은 머리속에 모사된다. (본뜰 모/모호할 모模, 베낄 사/부릴 사使) 하나 형상을 현상하는 것은 묘사다. (그릴 묘描, 베낄 사/부릴 사使) 이미 묘사된 것을 감상하는 것이 “표상에 대한 표상Vorstellung von einer menschlichen Vorstellung”이다. 원문은, “예를 들어 내가 실제로 살아 있는 사자라는 동물을 바라보면, 그 사자의 특수한 형상은 나에게 모사abgebildet된 것과 똑같은 ‘사자’의 표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모사 속에는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즉 그것은 그 형상이 표상 속에 들어 있었고 현재 보이는 모습은 원래 인간정신Menschengeist과 그의 산출행위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단지 어떤 대상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인간의 표상에 대한 표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제 본래 예술의 욕구는 사자, 나무 또는 어떤 다른 개별적인 대상을 이렇게 재 산출하는 데 있지 않다. 반면에 우리는 예술, 그것도 특히 조형예술이 그런 대상들을 가상화 하는 주관적인 능숙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원래 관심사는 객관적인 직관, 즉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사상을 자신과 타인들의 눈앞에서 직관시키려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나 한 민족이 갖고 있는 그같은 관념은 우선은 추상적이고 스스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이것을 표상하기 위해서 역시 추상적인 것, 즉 어떤 특정한 형상은 될 수 있어도 스스로 구체적이고 참된 정신적인 형상은 될 능력이 없는 물질 자체, 즉 무거운 덩어리의 물질에 손을 뻗친다. 「미학 제 3부, 건축」”  ¨추상¨은 ¨정신¨이다. 헤겔은 벌크와 입방체가 필요하다. 

추상은 정신이고, ¨정신¨은 ¨역동¨한다. 7%.. 음이란 사물의 운동Bewegung을 청각화 모사하고 비로소 묘사된 것이다. 예술에서 향유자는 외화(바깥 외外, 될 화化)된 감각적 요소를 얻는다. 「미학」의 주체(생산자)는 “정신”을 회화나 건축으로 표현(외화)하는 데 있어 그 감각적 성질이 공간과 화합하지 못한다. 헤겔(1770-1831)의 「미학」을 들어보자. “그러나 내면은 이미 회화의 원리에 들어 있듯이 실제로 스스로를 주관적인 내면성으로서 드러내야 한다면, 이에 참으로 적합한 질료는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존속하는 성질}을 지녀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객관성}이 공간적인 형상으로서 감각적인 요소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지속되려고 고집하지 않는 외화방식을 얻게 되므로, 자기의 타자를 위해 존재하면서 불안정하게 생성되어 존재했다가 곧 다시 사라지는 {질료}가 필요하다. 이처럼 하나의 공간적인 차원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대체로 총체적인 {공간성이 사라지는 것}, 즉 내면은 물론 외화의 측면에서도 이같은 주관성 안으로 완전히 회귀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의 낭만적인 예술, 즉 {음악}이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원래 주관적인 것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삼는 표현의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음악은 예술로서 물론 내면을 전달하지만, {그 객관성 자체 속에서도 여전히 주관적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음악은 {조형예술}처럼 결정된 외형 자체를 자유로이 놓아 두어 그것이 그 자체로 {고요히 존속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이를 {객관성}으로 지양한다. 그리하여 외적인 것이 우리 눈앞에 외적으로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미학 제 3부」” 음이란 매질인 공기(질료)를 진동해 생기는 파동이다. 결코 “주관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은 “수렴”된다. 

정신은 “내면적으로 직관되기 위해 분명하게 외적으로 현상된 형상, 「미학」”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음”은 정신을 “행복한 결과로 유도하는 시녀, 「경험과 자연」”다. 따라서 헤겔이 설명하는 “사유는 그 자체로는 텅비어 있다.” 헤겔의 “절대”이론은 “사유”를 “운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운동 속에서” “사유”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주체는 사유고, 느낌은 기술할 (قرأ 낭송하다) 뿐이다. “시는..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다. 즉 그것은 정신을 느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느낌 속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미학 제 3부」”

【“언어는 문명의 시초야.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주고, 싸움이나 분쟁에서 처음 사용된 무기이기도 하지. 어라이벌 中” 유량악보는 음의 높음과 낮음(율정틀), 그리고 음의 길이(틀장단)를 표현할 수 있는 악보를 말하며, 오선지(오선보)에 기보법을 적용한 유량악보는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기보법의 유래는 9세기 처음 네우마에서 발견된다. 5음계는 피타고라스(BC 582-497)가, 12 옥타브를 사용하는 평균율은 16세기 후반에 완성된다. 프톨레마이오스(83-168)의 순정율에는 조옮김과 조바꿈의 문제가 있었고, 따라서 바흐(1685-1750)의 제안으로 평균율이 적용되었다.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 즉 정간보는 세종(1397-1450)이 최초로 발명했다. 12율명으로 구성된 정간보는 서양의 12율계와 같은 황(C, E♭), 대(C#, E), 태(D, F), 협(D#, G♭), 고(E, G), 중(F, A♭), 유(F#, A), 임(G, B♭), 이(G#, B), 남(A, C), 무(A#, D′♭), 응(B, D′)을 사용한다. 바둑판처럼 생긴 세종악보(정간보)는 오선보와 같이 쉼표, 붙임표, 숨표 등등의 기보법을 응용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가 오테카톤(1501)이라면, 세종악보(1472)는 세계 처음 활자로 인쇄된 악보다. 훈민정음은 용비어천가(서사시.교향시 → 오페라)와 같은 시기에 편찬되고 간행되었으며, 그러므로 정음에 자연스레 음악의 이치가 고려되었다. 용비어천가를 만들기 전에 표준음(12음을 내는 율관panpipe)을 개발하고, 같은 시기에 말소리의 표준음을 설정하여 정음의 표기법이 창제된 것이다. 또한 정음과 세종악보는 피보나치 수열에서 제시된 2:3의 황금비율 구조를 틀장단과 율정틀을 통해 보여준다. 자연의 소리가 악기소리고, 구음이란 “악기소리를 입으로 흉내낸 말소리”다. 언어가 자연의 소리를 타자에 전달하는 소통의 도구라면, 우리는 조금이나마 정신의 기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인용: 훈민정음과 세종악보, 훈민정음은 음악이다 - 최종만, “예조가 아뢰기를, .....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예를 마쳤다.’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1418) 9월”】

아도르노의 미학은 헤겔의 정반합에서 안티테제만을 사용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사실 아도르노에게 음악이란 들어나는 동시에 숨겨져 있고, 예컨데 율리시스가 청중이라면 바다요정들은 예술가다. 요컨데 그의 말은 요정들의 유혹이 미메시스(Mimesis, 형상을 현상하는)고 밧줄이 “정의”(계몽)라는 것이다. 단자론을 인식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음악이 생각하는 것은 신적 이름의 형상이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제거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유리알 유희를 “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로 분류한다. 한편 음악에는 협화음과 불협화음, 즉 조성과 무조성(12음 기법)이 있다. 조성이란 하나의 으뜸음을 중심으로 화음을 이루는 현상이다. 아도르노의 안티테제는 조성을 버린 쇤베르크1874-1951의 12음 기법이나 다름없다. 일찍이 니체1844-1900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앎) 성질을 ‘조각가의 예술과 비조형적 음악 예술’로 설명했고, 이사도라 덩킨이 실제로 무용을 통해 “정신 속에 자기 몸을 던져서 실체 그 자체”를 보여주는 디오니소스와 “정신을 말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자” 아폴론을 재현했다. 내일은 “현재”가 되고, “새벽과 황혼”이 공존하는 속도는 465.11 m/s이다. 403, 우리는 「인형의 집, Henrik Ibsen」에서 기적을 기다리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은 잊는다. 올무는 토끼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토끼를 얻었다면 올무는 잊는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장자, 외물” 장자가 피력하는 바는 칸트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라고 말할 때 어떤 숫자를 떠올리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미 장자는 ‘나무는 나무다’라고 주장하는 피히테의 장자가 아니다. 전자는 베르그손의 기다리고 기대하는 ‘상대론적 미래’고, 후자는 레비나스의 ‘중력으로 자전하는 늘 현재의 미래’다. 과연 그 사람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칸트의 감성과 직관은 이렇게 말하라고 지성을 부추긴다.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바깥에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는 세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는 던져버려야 하고, (언어를 던져버리므로) 말할 수 없음에 우리는 침묵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자에 들뜸과 바닥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인지한다. 결국 우리는 침묵을 깨운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Caesium, 1초는 세슘 원자에서 방출하는 특정한 파장의 빛이 국제기준 주파수에서 9,192,631,770 번 진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완벽한 자를 만드는 것은 원자와 분자에 의해서 방출된 빛의 파장과 비교해 균일하고 표준적으로 간격을 띠우는 것이다. 「블랙홀과 시간여행」”) 

87%..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의 물질은 2004년 나사의 관측 위성 더블유맵WMAP의 결과에 따라 4%에 불과하고(2015년 플랑크 위성 관측 결과: 물질 4.8%, 암흑 물질 25.9%, 암흑 에너지 69.1%, iii), 나머지 96%는 정체불명의 수수께기 물질과 에너지다. (반물질은 물질에 속하고 물질의 입자 전하가 -1일 때 그와 반대되는 전하가 +인 물질의 짝이다. iv) 이 96%를 우리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성분은 멘델레프 주기율표에 표시된 4%에 불과하며, 암흑 물질 22%와 암흑 에너지 74%가 그 나머지다. “dark matter란 이름 때문에 암흑 물질을 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암흑 물질은 어떤 유리보다 더 완벽하게 투명한 물질이므로, 빛을 반사하지도 흩뜨리지도 않는, 차라리 '투명 물질'이 더 적당한 이름일 것이다. iii” 현재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 그리고 우주를 가속 팽창시키는 원인을 암흑 에너지라고 추측하고 있다. (여기서 팽창은 감속이 아니라 가속이다. 가속 팽창을 관측하기 위해 밝기가 일정한 우주의 촛불 Ia형 초신성이 사용된다. 아직 단정지을 수 없는 이 팽창의 힘의 영향은 은하단 단위에만 적용되므로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는다. 중력이나 원자로 구성하는 힘이 팽창하려는 힘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 초기와 비교해 월등히 증가해 왔다. “초기 우주에서는 99%의 암흑물질과 1%의 양성자와 중성자들[바리온 물질: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진 강입자]의 혼합으로 되어 있었다. ii” 양의 압력을 갖은 일반 물질과 달리 압력이 음수인 암흑 에너지는 우주 팽창과 함께 증가되었다. 세월이 흘러 우주는 상전이를 겪은 것이다. “이런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이라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오직 현재에만 보통의 물질과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는 세 성분이 비슷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v”) 물질들이 만드는 중력에 맞서 우주 공간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척력을 암흑 에너지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제시하기 위해 ‘우주 상수’를 도입했으나 허블이 ‘허블 상수’로 우주 팽창을 증명하자 ‘우주 상수’를 철회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우주 상수’가 우주 팽창에 기여하는 암흑 에너지였던 것이다.) 한편 은하단에 있는 물질의 중력으로만은 은하단을 유지시킬 수 없으므로 은하단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의 중력이 은하를 끌어당긴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중력이 없이는 은하는 은하단 밖으로 날라가 버린다. (지구 → 태양계 → 4,000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우유길 은하 → 3,000개 이상의 은하들의 집합인 은하단 → 1,000만 개의 초은하단) 밝고 짧은 파장의 푸른 별은 질량이 크고, 긴 파장의 어둡고 붉은 별은 질량이 작다. 그런데 별의 밝기로 판단된 질량보다 큰 머리털자리 은하단이 1933년 프리츠 츠비키에 의해 발견된다. 물론 1932년 얀 오르트Oort가 은하수에 보이지 않는 물질의 존재에 대해서 발표한 연구가 츠비키의 주장에 이정표가 되었다. “머리털자리 은하단에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 은하단의 은하는 이 보이지 않는 물질의 중력 덕분에 은하단에 머물고 있다. i” 얼마 후 츠비키는 1936년 아인슈티인이 발표한 중력 렌즈로 암흑물질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자연스레 암흑물질의 가능성을 예측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것을 “잃어버린 질량 i”으로, 다시 ‘암흑 물질’로 불려진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중력원인 태양에 가까워질 수로 공전의 속도가 빨라진다. 은하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1970년대 베라 “쿠퍼” 루빈은 안드로메다은하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은하 전체에 퍼져서 가스에 중력을 미치기 때문에, 중심에서 멀리 있는 {안드로메다 주위에서 회전하는 나선 형태의 원} 가스도 중심에 가까운 가스와 같은 정도의 속도로 회전하는 것이다. i” 이 또한 암흑 물질의 가능성에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본다는 것은 물체가 반사하는 가시광선이다.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긴 적외선(TV Remote)과 전파(방송)는 파장이 길어 더 많은 범위에 미칠 수 있고,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자외선은 높은 에너지로 인해 피부를 검게 그을린다. 천문 위성은 감마선으로 블랙홀을, X선으로 초신성 폭발의 잔해를, 자외선으로 은하를, 적외선으로 암흑 성운을, 그리고 전파로 퀘이사(은하 중심의 거대 블랙홀 발광체)를 관측한다. 같은 원리로 관측하면 지구로 다가오는 천체는 파장이 짧아 청색으로 이동하고,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천체는 파장이 길어 적색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어떠한 빛으로도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은 예외다. 질문한다. 무엇이 “시간”을 정의하는가. “우주의 온도가 내려간 결과, 원자가 생겼다. 암흑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우주 초기에 암흑 물질의 총량을 충족시킬 만큼의 원자의 재료(양성자와 중성자)가 존재했는지를 조사함으로써 추측할 수 있다. i” 조사에 의하면 “암흑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 아니다. i” 또한 “암흑 물질은 어떤 물질과도 충돌하지 않고 빠져 나간다. i” NASA가 관측한 탄환 은하단을 통해 암흑 물질은 다른 물질과 부딪치지 않고 빠져 나간다는 것이 확인된다. 우리는 고민했고, 혹 암흑물질이 모든 물질을 빠져나가는 중성미자(뉴트리노, 뜨거운 암흑 물질)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결국 도쓰카 요지가 우주의 우주 전체에서 차지하는 중성미자의 총 질량을 밝혔고, 그 결과를 암흑 물질의 총질량과 비교해 암흑 물질의 총 질량의 15분 1밖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파생된 연구에 따라 암흑 물질이 은하를 낳는 씨앗일 수 있다고 짐작하게 된다. “{태초}, 보통 물질이 은하 규모의 천체와 별의 씨앗을 형성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암흑 물질에 편승해야만 했다. 만일 암흑 물질이 붕괴를 개시해 주지 않았다면, 별들은 현재의 개수와 분포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iv” 요컨데 암흑 물질은 어떤 물질과도 충돌하지 않으며, 어떤 종류의 빛도 관찰되지 않는다. 빛을 방출하지도 흡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암흑 물질의 총 질량은 은하에서 보이는 물질의 5배나 많다. 암흑 물질의 후보로 초대칭성 입자 중 하나인 뉴트랄리노는 양성자의 1,000배 정도의 질량m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형 하드론 충돌형 가속기LHC가 빅뱅을 재현해 뉴트랄리노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E=mc2}, 고정 표적에 충돌할 때와 빔{+-입자가 빛의 속도 c}과 빔{+-입자가 빛의 속도 c}이 충돌할 때의 알짜 에너지{E} 차이는 훨씬 커지게 된다. v” 빅뱅은 엄청난 에너지다. 충돌에 선호하는 입자(물질)는 양성자로, 질량m은 전자보다 2,000배 크다. 흥미로운 점은 입자(바를 정正)와 반입자(되돌릴 반反) 쌍의 전하가 합(합할 합合)하면 물리학에선 0이 되고 철학에서는 “새로운 합”이 된다.】 그러나 LHC에서 만들어지는 암흑 물질은 “원시 핵합성, 우주 배경 복사, 항성, 은하의 진화와 구조, 은하단 충돌 iii” 등을 설명해야 한다. 한편 LHC는 시간을 포함한 추가 차원을 설명하는 칼루차–클레인 이론을 검증해 낼 수도 있다. 시간을 포함한 4차원에서 중력은 약한 상호 작용이지만, 추가 차원에서는 중력자가 비틀린 기하 속 강한 상호 작용을 하게 된다. 간단한 고찰이라면 추가 차원에 우리의 시간과 같은 “변수”가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암흑 물질의 또 다른 후보로 질량이 매우 가볍고 속도가 0에 가까운 차가운 엑시온이 있다. “엑시온은 보손이다. 이것은 그것이 물질입자가 아니라 광자와 같이 힘 운반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엑시온의 질량은 매우 작다. ii” 뉴트럴리노와 반대로 액시온의 질량은 양성자의 100조분의 1 정도다. 비-바리온 물질에 속하는 윔프(WINP: 약하게 상호 작용하는 무거운 입자들) 역시 차가운 암흑 물질에 속하는 또 하나의 후보다. “WINP의 쌍소멸이 은하수 공륜(“둥근 영역, iii”구멍 공空, 바퀴 륜輪, 후광)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ii” 그럼 (비대칭 암흑 물질 모형), 암흑광자에서 중력이 무엇으로부터 질량을 얻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질량”에 시간의 도움이 절실하다. 사라진 시간을 찾아 별을 쫓는 모형 구축자model builder자의 육성을 들어본다. “그러나 또 다른 유망한 탐색 전략은 암흑 물질 입자가 암흑 물질 반입자와 소멸하여-스스로 소멸할 수 있는 종류일 때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입자와 함께 쌍소멸하여-그 에너지가 다른-바라건대 눈에 보이는-물질로 변형될 때 발생하는 신호를 찾아보는 것이다. 만일 암흑 물질 소멸이 일어난다면, 과학자들은 지상이나 우주에서 간접 검출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소멸에서 생성된 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색은 소멸하는 암흑 물질 입자들이 사라진 뒤에 생성되는 입자들을 찾아본다. 우리가 운이 좋다면, 그렇게 나타난 입자들 중에는 전자와 그 반입자-즉 양전자-쌍 혹은 광자 쌍과 같은 표준 모형 입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iv” (참고.인용: i.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 우주의 96%를 차지하는 미확인 질량과 에너지, ii. In Search of Dark Matter - Ken Freeman, iii. 우주의 빈자리, 암흑 물질과 암흑에너지, iv. 암흑 물질과 공룡, 리사 랜들, v.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리사 랜들, vi. 블랙홀과 시간여행, 킵 손)

「소피스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암흑 물질이 나선 은하 소용돌이의 고삐를 당기다. iv’ ‘암흑 시대’에 적합한 투명하여 존재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암흑 물질, ¨에테르¨를 암시하는 것인가. “‹¨우주상수¨는 어떤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침묵하라고? 소리 높혀 말하라!›, 「4퍼센트 우주」” 젊은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물리법칙보다 더 아름다운 이론을 바랐다. 킵 손은 그의 고찰을 대자와 즉자로 정리한다. “내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의 공간과 시간의 혼합체이고, 당신이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공간과 시간의 혼합체다.” 뉴턴 물리학 법칙에서 빛의 속도는 ¨에테르¨가 정의한다.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맥스웰의 법칙들은 어떤 좌표계, 즉 ¨에테르¨ 좌표계{¨절대 시간을 위한 절대 공간, 아무도 모르는 어떤 힘, vi¨}에서는 복잡하고 보기 흉했다. 물리학의 토대를 재구성하면서 상대성 원리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법칙을 모든 관성기준좌표계에서 하나이고 동일한 단순하고 아름다운 형식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 iv” 빛을 정의하고자 혼돈의 중심에 ¨에테르¨가 놓이고 혈기 방장한 아인슈타인(Newton~1905)은 절대 광속의 원리를 외친다. 이 사건은 천문학자와 천체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들이 숭배할 상대론의 서막이자 촉매를 담을 성배였다. 

【“천문학은 ‘제왕의 학’이라고 했다. 천문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학문이고, 나라의 학문이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며, 그 오묘한 모습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은 곧 사람의 도리를 알고 행하는 것이 된다. 하늘의 과학, 즉 천문·역산학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1434년 세종은 왕립 천문대인 ¨대간의대¨(경희루)와 ¨소간의대¨(경희궁)를 출현시켜 일식, 월식,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혜성, 신성, 그리고 유성을 관측케 하였다. “혜성은 그 출현 일시, 수도의 위치 및 이동 상황, 몸체의 크기와 색, 꼬리의 길이, 소멸 일시 등에 대하여 관측하고 기록과 그림을 겸하여 쓰도록 했다. 5행성의 운행에 대해서는 행성과 달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 행성과 혜성 상호간에 일어나는 현상, 행성 특히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 등이 주로 관측되었다.” 이러한 천체 현상, 즉 “백홍관일, 백홍관월, 일운(햇무리)과 월운(달무리), 지동과 지진, 강수 현상 이외에 구름과 서리·이슬·안개·무지개·번개·우박·눈”의 관측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1395년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1,457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세종은 천문시계인 ¨혼천의¨를 제작하여 별자리를 측정하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갱신했다. ¨혼천의¨는 지구본과 유사하나 은하를 기술한 것이다. 해시계들로 으뜸인 ¨양부일구¨ 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가 있고, “밤낮으로 시간을 아는 기기”라 하여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기 ¨일성정시의¨, 자동인형으로 종과 북과 정을 치는 ¨자격루¨, 또한 신하 장영실이 세종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제작하여 세종께 헌정한 ‘임금의 물시계’ ¨옥루¨가 있다. “그 자동 장치는 11세기 송나라의 소송이 제작했던 거대한 천문 시계와 원대에 순제의 명에 의해서 제작된 궁정 물시계, 그리고 아라비아의 알 자자리(Al-Jazari)의 자동 물시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그러나 ¨자격루¨의 자동 시보 장치의 추진 방식과 격발 방식은 이들 자동 시계의 것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세종실록을 보면 흥미로운 휴대용 물시계 ¨행루¨가 등장한다.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움으로 ¨행루¨를 만들었는데, 몸체가 작고 제도가 간략하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과학」】

“예를 들어, 동일한 하나의 별을 가지고서 저녁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새벽별이라고 부리곧 하는 것 처럼, 발생하고 있는 것과 이야기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감각의 논리」 파르메니데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 하나의 유일한 목소리가 ¨존재의 함성¨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 

'隨筆'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 Search of Lost Time , Sodom and Gomorrah 2  (0) 2021.11.28
In Search of Lost Time , Sodom and Gomorrah 1  (0) 2021.10.19
In Search of Lost Time, Intermission  (1) 2021.08.18
In Search of Lost Time, Part 2  (0) 2021.05.22
In Search of Lost Time  (0) 2020.10.10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