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단순한 본능이나 생물학적 필요성을 넘어 의지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때로 자연적인 경향성을 따르지 않으며, 이러한 선택과 판단의 결과로 윤리적 가치, 의무, 정의와 불의, 혹은 경멸받아야 할 행동 등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적 표현일 수 있다는 존 맥키의 주장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객관적 가치로 절대화할 수 있는가. 현대 인류는 생명을 선으로 여기고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희생을 거쳐 이성적 판단으로 사회적 자연법에 정착된 결과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의 행위가 이처럼 윤리성을 지니는가. 토마스 스칸드롤리오가 말하듯, 어떤 행위들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성격을 지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지향과 의도에 따라 윤리적 색채가 결정된다. 예컨대 자동차 이용은 본래 중립적이었으나, 그로 인한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는 윤리적 관점에서 악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인간의 양심과 지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법과 제도 역시 단순히 존재한다고 정의롭지 않다. 마틴 루터 킹은 “불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고 했고, 플라톤은 “법과 정의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법은 지배자의 이익을 제도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며, 그런 법은 항상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의 짐 크로우법은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고 흑인의 자유와 정치 참여를 억압했으며, 제국주의적 법 체계는 피지배민에게 정의를 제공하지 못했고, 한국의 유신헌법 또한 많은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는 법이 단순히 존재한다고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역사 속 식민지 시대 인류가 정의한 선과 악의 기준이 얼마나 편향될 수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자연법은 변하는가. 자연법은 인간 본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기본 원칙은 불변하지만,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계와 존재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인간 본성natura은 언제나 ¨아름다움¨scientia을 추구하며, 자연법은 이를 기초로 자연적naturale ¨아름다움¨scientia을 지향한다. ʻ알수록 더 보인다. 알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scientia이 드러난다.’ 비록 향락주의 등 외적 요인이 인간의 습관을 바꾸고 양심을 흐리게 할 수 있지만, 인간 본성에 새겨진 자연법 자체는 손상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 서술하는 내용들은 반드시 역사적 시점과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르완다는 1994년 4월부터 약 100일간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인종 학살 중 하나인 대학살이 발생한 나라로, 후투Hutu와 투치Tutsi, 소수 원주민 트와Twa 등 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구성은 후투가 약 85%로 농민 중심의 다수 민족이고, 투치는 약 14%로 역사적으로 왕족과 귀족 계층을 형성했으며, 트와는 약 1%를 차지한다. 독일과 벨기에 식민지 시대(1890~1962)에 벨기에는 투치를 지배층으로 선호하며 사회적 계층을 강화했고, 후투는 교육과 경제,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이후 르완다가 독립하면서 후투가 정치권을 장악했지만, 양 집단 간 갈등은 고조되었다. 1959년 ‘후투 혁명’ 이후 후투가 투치를 탄압하면서 수많은 투치가 난민으로 인근 국가로 탈출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 대통령 주베날 하비아리마나Juvénal Habyarimana의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발단이 되었고, 암살 책임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통령 암살 이후 극단적 후투 민병대와 군부는 투치인과 온건한 후투인을 대상으로 집단 학살을 시작했다. 학살은 칼, 곤봉, 총 등으로 이루어졌고, 마을 단위로 주민을 동원해 집단 처형과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약 100일간 지속된 학살로 80만~100만 명이 사망했으며, 피해자 대부분은 투치인이었고 일부 온건한 후투인도 포함되었다. 국제 사회는 UN 평화유지군UNAMIR을 배치했으나 권한이 제한적이어서 학살을 막지 못했고, 서방 국가들은 내정 문제로 간주하며 적극 개입하지 않았으며, 미군과 유엔군은 철수하거나 최소한의 조치만 취했다. 7월 중순에는 투치 반군인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군사적으로 승리하여 학살이 종식되었다. 학살 후 국가는 폐허 상태였고 수백만 명이 난민화되며 가족 단절이 심각했다. 주요 가해자는 국제형사재판소ICTR에서 기소되어 수천 명이 처벌되었으며, 이후 르완다는 ‘기초 단위 공동체(가차차Gacaca 법정)’를 통해 지역사회의 화해와 정의 회복을 시도하며 경제 재건과 정치적 안정화를 추구했다. 가차차 Gacaca 제도는 마을 단위로 운영되는 전통적 조정 회의 방식을 현대화한 것으로, 지역 주민이 직접 가해자와 피해자를 재판하고 화해를 촉진하도록 설계되어 빠른 재판과 사회적 복원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는 식민지 역사와 사회 구조가 야기한 인종주의와 정치적 갈등의 극단적 결과이며, 국제 사회 개입 부족과 인도적 개입 한계를 보여준다. 스리랑카의 사례와 비교하면, 스리랑카에서 싱할리족과 소수 타밀족 간의 갈등 또한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심화되었고, 특히 19세기 초 영국이 차와 고무 플랜테이션 경영 과정에서 식민지 통치 방식을 통해 두 종족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미움의 씨앗을 뿌린 점은 르완다와 유사한 식민지 유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990년 르완다 반군인 RPF가 우간다에서 출발해 르완다를 공격했으며, 대부분 투치족 출신인 이 반군은 후투족 중심의 정부군과 충돌했다. RPF는 우간다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영국어권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았고, 반면 프랑스는 당시 르완다 정부(후투족 중심,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를 군사·정치적으로 지원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후투 난민과 군사 세력이 콩고 동부로 도피하면서, 르완다는 안보와 복수 차원에서 콩고 내전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는 후일 제1차 콩고 전쟁(1996~1997)과 ‘아프리카의 세계대전’이라고 말하는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으로 이어졌다. 제1차 전쟁에서는 모부투 세세 세코가 1965년부터 집권했으나 경제·정치 위기로 권력이 약화되면서, 르완다와 우간다의 지원을 받은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이 모부투 정권을 붕괴시켰다. 제2차 전쟁에서는 카빌라 정부에 불만을 가진 다수의 반군과 주변국이 개입했으며, 참여 국가는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등 9개국 이상으로, 단순 내전을 넘어 지역 패권과 자원 경쟁이 얽힌 국제전 양상을 보였다. 이 전쟁으로 약 500만~600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3년 평화협정으로 일부 지역이 통합되었으나 동부 지역은 여전히 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편 1994년 대학살 이후 르완다는 지역적·경제적 이유로 영연방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2009년 정식으로 영연방 회원국이 되면서 프랑스어 중심 국가에서 영어와 국제적 연대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외교 지향을 전환했다.

❝유엔의 평화와 안보 활동은 크게 세 가지, 즉 조정과 예방, 평화유지, 평화확립으로 나뉜다. 이 중 실제 활동의 측면에서나 재정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이 바로 평화유지활동PKO이다. 평화유지활동은 분쟁을 겪는 나라가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환경을 만들도록 돕는 방법의 일환으로,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경찰과 비정부기구 등 민간 영역까지도 참여시켜 분쟁 이후의 평화 절차를 감시하고 갈등 당사자들이 합의한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것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의 평화유지활동은 유엔 관할 하의 군대를 통해 유엔 자체적으로 행해지지만, 직접적인 유엔의 개입이 적절치 않거나 가능하지 않은 경우에는 안보리 승인 하에 유럽연합(EU), 아프리카연합(AU),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 같은 지역기구들이나 혹은 그 외 “의지를 가진 나라들의 연합(coalition of willing countries)”이 특정 평화유지나 강제 활동을 이행하도록 하기도 한다.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전쟁과 학살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1994년, 아프리카의 정중앙 위치한 르완다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종청소가 벌어지게 된다. 다수파인 후투족의 공격으로 불과 백여 일 만에 소수파 투치족과 온건한 성향의 후투족 최소 8십만 명의 목숨이 잔혹하게 살해된 것이다. 당시 국제사회를 더욱 충격과 논란에 빠뜨렸던 것은 그 대량학살이 이미 르완다에 파병되어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질러졌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유엔과 서구 강대국 정부들은 몇 달 전에 이미 대량학살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유엔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과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왜 르완다 민중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했는가? 유엔 평화유지군은 왜 르완다에서 분쟁과 학살을 막는데 실패했는가?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한 르완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벨기에로 통치권이 넘어간다. 벨기에 정부는 다른 식민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르완다를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인종 간의 분리정책을 쓰게 된다. 1926년에 새로운 신분증 제도를 도입하여 인종간의 구분을 공식화하였고, 인구의 15% 가량을 차지하던 소수파 투치족에게 교육과 정치, 경제적인 특권을 몰아줌으로써 82%의 다수파 후투족을 통치하게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체제 하에서 투치족은 유럽식 교육을 받은 지배층으로 자리 잡은 반면, 후투족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 계급을 구성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르완다 학살을 연구해온 스티븐 D. 래지같은 학자에 따르면, “후투와 투치 간의 폭력은 태곳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외면할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종종 관찰되지만, 벨기에의 문서들에 따르면 1960년 경 이전에는 인종적인 경계에 따른 폭력은 흔치 않았고, 1994년과 같은 식의 대량 살인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즉, 식민모국 벨기에가 원래부터 존재하던 인종갈등을 지배를 위해 단순히 이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인종 간의 분리정책을 통해 갈등을 조장하고 그것이 점점 서로 간의 폭력으로 확대되어 갔다는 것이다.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주브날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국내적으로는 잔혹한 철권통치를 휘두른 독재자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권력 기반의 유지와 경제 발전을 위해 프랑스 정부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인근 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주로 난민 캠프에서 살아가던 투치족은 폴 카가메의 지도 하에 1987년 우간다에서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결성하고, 1990년 10월 1일 르완다 북부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연일 르완다 애국전선이 승승장구하면서 수도인 키갈리의 목전까지 치고 오자, 프랑스는 1,100명의 프랑스 군과 무게만도 하루 약 20톤에 달하는 무기와 전쟁 물자를 보내면서 꼭두각시 후투 정권을 지원한다. 최정예 낙하산 부대가 포함된 프랑스 군은 르완다 정부군에 대한 훈련과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서 포로로 잡힌 반군에 대한 심문과 치안 유지에까지 직접 관여하였으며, 비밀리에 전투에까지 참여하였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단순히 정부군과 반군 간의 내전이 아니라 사실상 르완다 애국전선과 프랑스 간의 대리전쟁이었던 셈인데, 프랑스 정부는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르완다 정부의 전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가사나는 르완다 군은 프랑스 군의 발사 허가를 받은 후에야 프랑스가 제공한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93년 8월 4일, 국제사회의 중재로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반군 사이에 일시적인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그리고 그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수도 키갈리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2,548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인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의 파병이 결정된다. 해를 넘긴 1994년 1월 10일, UNAMIR의 부사령관이던 벨기에 출신의 룩 마샬 장군은 후투족 민병대를 훈련시키던 고위급 정보원으로부터 투치족에 대한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그 정보원은 자신이 속한 민병대원 1,700여 명이 정부군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사실과 함께 학살에 쓰일 무기를 감춰둔 주요 무기고 네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심지어 마샬 장군을 그 중 한 곳에 데려가 직접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마샬 장군은 이를 즉각 UNAMIR 최고 책임자인 로미오 덜레어 중장에게 보고했고, 덜레어 중장은 그 다음날 뉴욕의 유엔 본부에 전보를 보내 그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유엔평화유지군이 무기고의 무기를 압수하기 위한 작전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 본부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그것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872호에 의한 유엔 평화유지군의 임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작전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1994년의 르완다 대학살을 둘러싼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실패는 유엔의 의사결정과 실행 과정의 핵심에 있는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가 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점에서 객관성과 공정성, 중립성의 결여, 의도적인 정보 묵살을 통한 책임의 방기,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도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 민간인 보호보다는 외국인 철수에만 집중했던 ‘비인도주의적인’ 활동의 방향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1999년의 유엔 보고서에서도 밝힌 것처럼 “르완다가 제3국들에게 전략적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로 인한 “회원국들의 정치적 의지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었고, “국제 사회가 다른곳에서 취했던 조치에 비교해 볼 때 대재앙의 위험에 처한 (르완다에서) 이중 잣대를 적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그 날의 실패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정치적 의지의 부족”을 야기했던 강대국의 이해관계 유무로 인해 유엔 평화유지활동이 좌지우지되는 문제점은 이제 과거 한 때의 잘못이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르와파(Rwafa)는 “A Good Man in Hell” (2002), “Keepers of Memory” (2004), “Hotel Rwanda” (2004), “Sometimes in April” (2005)을 다큐멘터리적 영화로 분류하면서 이들 영화가 다양한 관점으로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접근함으로 사회화(socialization)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르완다 사건 관련 영화들은 국제적으로 제노사이드에 대한 교육적 기능은 물론 참상을 겪은 르완다 국민들이 치유와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시점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새로운 사회화의 효과적인 장치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과 더불어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화는 테리 조지(Terry George) 감독의 “Hotel Rwanda” (2004)이다. Mille Collines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Paul Rusesabagina를 주인공으로 하는 실화에 근거한 드라마이다. 제노사이드의 참상 속에 인류애를 보여주고 있으나 영화 발표 이후 주인공 묘사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과 RTF를 해방자 관점에서 묘사했다는 비난으로 제노사이드라는 본질이 묻히게 했다는 비평을 받고 있다. 주인공이 후투이고 아내가 투치라는 관점이 그가 인류애를 발휘한 동기일 수도 있다.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원인인 증오언어와 내러티브로 형성되는 치유언어의 대비」❞

르완다는 1994년 학살로 나라 전체가 무너진 뒤, 폴 카가메 정부가 교육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삼으면서 2000년대 초반 “비전 2020”을 통해 농업 중심 빈곤국에서 지식 기반 사회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500 프랑 지폐 속 컴퓨터 그림인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책상 앞에서 컴퓨터를 배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곧 르완다의 미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부는 실제로 “One Laptop per Child” 프로그램을 통해 초등학교에 저가형 노트북을 보급하고 전국적으로 인터넷 인프라를 확충했으며, 부모들 사이에서는 “가난해도 학교에는 보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르완다의 초등학교 순수 입학률은 2000년대 이후 95%를 넘어섰고 성인 문해율도 꾸준히 상승했으며, 여아 교육 확대 정책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성평등 교육 참여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카가메 정권은 이를 토대로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를 꿈꾸며 소프트웨어, 핀테크, 스마트폰 제조 등 ICT 산업을 육성했고, 현금보다 모바일 머니MoMo 같은 디지털 결제 시스템이 보편화되며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르완다에서 교육은 단순히 개인의 출세를 위한 수단을 넘어, 학살 이후 공동체 재건과 국가 근대화, 그리고 아프리카 IT 허브라는 비전으로 이어지는 집단적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국외에 군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파견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UN 평화유지군 활동에서는 수단 다르푸르 사태와 남수단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고, 2021년부터는 모잠비크 북부 카보델가도Cabo Delgado 지역에 군대를 보내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르완다는 안보 위기를 완화한 ‘구원투수’로 불렸다. 이러한 군사 개입에는 여러 층위의 동기가 있다. 집단학살 이후 콩고 동부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후투 반군 세력을 제거하려는 안보 논리가 있으며, 콩고의 콜탄·금 등 광물 자원에 대한 경제적 이해도 작용한다. 또한 국제 평화유지군 파견을 통해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강국”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외교적 계산과, 군사적 성공을 통해 폴 카가메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필요도 포함된다. 그 결과 르완다는 현대 아프리카 지정학에서 작은 나라임에도 군사력 투사 능력이 탁월한 “작은 이스라엘”로 불린다. 동시에 콩고 동부 자원 개입 때문에 “신식민주의적 플레이어”라는 비판을 받는 양가적 존재로 자리 잡았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인구는 약 1,327만 명에 달하며, 1,000만 명 이상인 나라 중 방글라데시, 대만, 한국, 레바논에 이어 5위를 차지한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지만, 좁은 국토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농지 확보와 물류가 쉽지 않다. 수도 키갈리에는 약 100만 명이 거주하며, 방문객들은 흔히 도시를 ‘깨끗하고 쾌적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2000년대 후반 일회용 비닐봉지 금지 정책, 매월 전국적인 시민 청소 활동, 공항에서의 비닐봉지 회수와 주변국 유입 단속 등 철저한 환경정책 덕분이다. ‘키갈리를 깨끗하게 보존하자’라는 캠페인 덕분에 길거리에서 미화원과 경찰관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정부는 부정부패 단속과 도시미화 투자, 안전 정책에 힘쓰며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는 모국어인 키냐르완드가 중심이며, 19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어가 교육 언어였던 세대는 프랑스어에 능숙하고, 2000년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는 영어를 더 편하게 사용한다. 경제는 천연자원이 제한적이지만 차와 커피가 주요 수출품이며, 국제시장의 가격 변동과 제한된 농지로 인해 안정적 수익 구조를 확보하기 어렵다. 대신 정부는 외국 자본과 산업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업 설립과 투자 유치를 용이하게 하는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국제회의와 행사를 적극 유치하며, 우간다, 부룬디, 남수단을 연결하는 아프리카 철도 계획 등 인프라 확장에도 힘쓰고 있다. 이처럼 르완다는 작은 국토와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환경정책, 안전과 보안 중심의 사회·경제 정책을 통해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며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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