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터키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아나톨리아반도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인류가 최초로 도시 생활을 실험한 인류 문명의 보고이자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프리기아, 리디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등 수많은 왕조와 정권이 부침을 거듭한 인류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노아의 방주가 걸렸던 아라라트산, 에덴의 동산, 아브라함의 고향과 사도 바울의 생가, 성모 마리아가 여생을 보냈던 마리아 하우스, 초대 7회 교회, 니케아, 에페소스, 칼케돈 같은 초기 기독교 현장들이 살아 숨 쉬는 성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지금 이 땅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터키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국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살고 있는 영토의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지,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로 가르쳐야 하는지 말이다. 터키는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토사가 아닌 민족사를 국사로 가르친다. 터키인을 일컫는 고대 명칭인 튀르크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셀주크 튀르크가 말라즈기르트에서 비잔틴 제국의 디오게네스 황제를 생포하며 승리를 거둔 1071년부터다. 그 후 600년 오스만 대제국을 건설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영토사로 본다면 5천 녀 인류사의 5분의 4는 다른 민족의 터전이었다. 「터키사 100」”

 

아티예Atiye는 이스탄불에서 활동하는 화가이자 교사로, 어린 시절부터 알 수 없는 상징을 반복해서 그려 왔지만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한다. 어느 날 고고학자 에르한Erhan이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서 동일한 기호를 발견하면서 그녀의 삶은 미지의 문명과 연결된 거대한 비밀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이야기는 일종의 ‘열쇠’이자 ‘기호’를 따라 전개되며, 아티예는 에르한과 함께 자신의 과거, 그 상징의 기원, 그리고 신화적 세계와의 연관성을 탐구한다. 문명 이전의 유적과 불가사의한 예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녀는 과거와 미래, 현실과 영성의 경계 위에서 인간 존재와 인류의 기원을 탐색하게 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인간과 신비의 연결을 아름답게 설계한, 현실에 뿌리 내린 드라마”라고 평가하며, 개인적으로도 추천하는 작품이다. 최근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는 초능력이나 판타지 소재에 고고학적 요소를 결합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천 년 전, 농경 이전에도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거대한 석조 종교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큰 놀라움을 준다. 약 20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는 무리를 지어 사냥과 방어를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약 3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는 수렵·채집을 하며 20~50명 규모의 소규모 이동 집단을 이루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초기 정착지인 차탈호육 등도 괴베클리 테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박물관과도 같다. 이곳에서는 약 1만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괴베클리 테페 신전(약 기원전 9600년경 – 기원전 8000년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농경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가 이미 거대한 석조 종교 건축물을 세웠음을 보여주며, 도시 문명은 농경 이후에 가능하다는 기존의 고고학적 정설을 흔들었다. 이후 신석기 농경 공동체의 정착지로 유명한 차탈호육(기원전 7400년경 – 기원전 6000년경) 역시 아나톨리아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강력한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150년경)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경쟁하며 법전과 외교 조약을 남겼고, 그 뒤를 이어 프리기아 왕국(기원전 1200년경 – 기원전 700년경)리디아 왕국(700년경 – 기원전 546년)이 번성했으며, 리디아는 인류 최초의 주화를 사용한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46년 – 기원전 334년)의 지배를 거쳐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4년 – 기원전 133년)에는 페르가몬, 에페소스, 밀레투스 같은 도시가 학문·예술·상업의 중심지로 빛을 발했다. 로마(기원전 133년 – 서기 395년)비잔티움 제국(395년 – 1453년) 시기에는 아나톨리아가 지중해 세계와 중동을 연결하는 요충지가 되었고, 이 역사의 퇴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 바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다. 이 건축물은 로마, 비잔티움, 이슬람 오스만 제국(1299년 – 1922년)까지 여러 문명의 흔적을 겹겹이 담아내며, 아나톨리아 반도가 곧 문명의 교차로였음을 증언한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일시적으로 회복하며 터키, 이스라엘 등 중동 일부와 이집트, 이베리아 반도의 일부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가 제일 먼저 찾아 경배를 올리던 장소였으며, 지중해를 둘러싼 거대한 기독교 제국의 상징적 중심지였다. 유스티아누스 1세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과도한 확장으로 인해 각 지역에서 반발이 일어나거나 주변국들의 공격을 받아 영토가 축소되었다. 결국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했고,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항복하였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내포한 하기아 소피아는 이때 기독교 성상과 회화가 회반죽으로 덧칠되고, 십자가 등 일부 장식이 제거되며, 기독교 성물들이 훼손되었다. 대신 이슬람의 예배를 위해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문 모양의 미흐랍Mihrab과 설교용 계단인 민바르Minbar가 설치되었으며, 현재까지 하루 다섯 번 아잔이 울려 퍼지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렇게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의 교차점으로서 역사적 ·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튀르키예의 역사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기원의 튀르크족에서 시작되는데, 이들은 본래 알타이 산맥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6세기 돌궐 제국에서 처음 역사 기록에 “튀르크 Türk”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이후 10~11세기경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튀르크가 서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하였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한 뒤 아나톨리아에 정착하여 룸 셀주크 술탄국을 세움으로써 아나톨리아가 “튀르크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299년 건국된 오스만 제국은 약 600년 동안 존속하며 1617세기에 발칸반도,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유럽 남부까지 세력을 확장해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왕조와 빈 전투(1529, 1683) 등에서 맞부딪히며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여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 해체되었고,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속주의·민족주의에 기반한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현대 튀르키예의 정치적 시작점이 열렸다. 공화국 시기 초기에는 서구적 근대화·세속주의·공화주의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냉전기에는 1952년 나토NATO 가입과 군부 쿠데타(1960, 1971, 1980)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1980년대 이후 투르구트 오잘의 개방 경제 정책과 세계화 흐름 속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2000년대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이후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이슬람적 보수주의의 부상이 나타났다. 오늘날 튀르키예는 중동·유럽·흑해·지중해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에너지 허브로 주목받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세속주의와 이슬람 정치, 쿠르드 문제와 민주주의, 경제 위기 등 복합적인 과제 속에 역동적인 변화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3.5배, 인구는 2025년 기준 약 8,582만 명이며, 민족 구성은 튀르크인이 약 76~77%, 쿠르드인이 15~20%, 그 외 아랍인·체르케스인·보스니아인 등 소수민족이 6~9%를 차지한다. 국경은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나히체반 자치공화국,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여덟 나라와 접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교차로로서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은 터키 사회와 정체성,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으로, 주인공 갈립이 고향과 가족,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이스탄불의 구불구불한 골목과 오래된 서점, 이웃과 친척 사이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거치며 도시와 전통, 현대화가 공존하는 터키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어둠 속에서 마을은 네 것이고 너는 마을의 것이 되어 함께 죽은 듯이, 네 북쪽 들판의 돌처럼 잠들어. 여기에는 날들의 느린 죽음 외에는 삶이 없어.”라는 구절은 갈립이 고향과의 단절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터키 사회에서 전통적 삶의 지속성과 현대적 변화가 충돌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독자성이든 간에 그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은 유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를 강조하여 개인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터키인의 삶과 문화적 정체성을 성찰하게 한다. 현재 튀르키예는 오르한 파묵의 관찰처럼 튀르크족과 쿠르드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며, 현대화와 전통,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를 이루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며 중동·북아프리카에서 정치적·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수니파 세계에서 터키의 지도적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한다. 경제적 도전과 인플레이션, 도시와 농촌 간 격차 속에서도 터키인은 강한 민족적 자부심과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문학과 예술, 축구 등 문화적 성취를 통해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동시에 세속적 가치와 이슬람적 가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충돌하며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등 현대 터키의 복합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튀르키예는 1987년 유럽연합EU 가입을 신청한 이후 30년 이상 정식 회원국 후보국 지위를 유지 왔지만, 정치적·제도적 이견과 인권 문제 등으로 아직까지 EU 가입은 성사되지 못했다. OECD 회원국이자 G20 경제 대국인 튀르키예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에너지·무역·안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한국과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혈맹 관계를 바탕으로 오랜 우호를 이어가고 있으며,  수교 70주년을 맞이해 양국  경제·문화·외교 협력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 세계일보

‘튀르크’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돌궐족이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중국의 수나라를 견제하던 돌궐족이 바로 터키인의 조상 튀르크족이다. 중국은 이들을 ‘돌궐’, 즉 ‘날뛰는 오랑캐 족속’이라고 불렀다. 폄하하기 위해 발음이 비슷한 말을 쓴 것이다. 중국은 튀르크의 전신이자 우리의 고조선과 이웃하던 훈족을 ‘흉노’, 즉 ‘흉악한 노예’라고 불렀다.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하자 이에 밀린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로마제국을 붕괴시켰으니 결국 유럽 역사의 상당 부분은 아시아가 만든 것이다. 튀르크계가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문자가 없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와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튀르크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것은 중국인들이 느낀 강한 두려움의 반증이다. 만리장성도 ‘흉노’와 ‘돌궐’이 무서워 세우고 보강한 것이다. 중국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서쪽으로 장수들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비단길이 개척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 자웅을 겨루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소피아 성당이 세워질 즈음, 튀르크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를 규합해 522년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러시아 남부, 중국 북부, 몽골과 만주 인근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후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이 있는 중앙아시아의 ‘서튀르크’,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동튀르크’로 나뉘었다. 이 중 서튀르크는 비단길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 아나톨리아 땅으로 들어선 것이다. 10세기 무렵 셀주크가 이끄는 튀르크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들어왔고, 11세기에는 더 많은 튀르크 부족들이 이주했다. 13세기 말 이 모든 부족을 통합한 오스만튀르크가 세워졌고, 이를 직접 계승한 나라가 터키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 Rondo alla Turca, K. 331의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작곡된 밝고 경쾌한 피아노 곡으로, 활기차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강한 박자감이 특징이다. 오른손의 멜로디는 리듬을 강조하며 마치 군악대가 행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왼손은 단순한 화음과 옥타브를 반복하며 경쾌함을 뒷받침한다. 이 곡의 청각적 효과는 18세기 유럽에서 유명했던 오스만 제국 군대 음악, 즉 야니스리 군악Janissary music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북·심벌·캐스터넷 등 강하고 반복적인 타악기 사용을 피아노로 흉내 내어 행진곡 분위기를 재현한 것이다. 따라서 ‘Turkish March’라는 제목은 곡이 터키식 군악 스타일을 모방했음을 의미하며, 밝고 장난스러운 리듬과 행진곡 같은 구조를 통해 오스만 제국 군악의 특징을 피아노 곡으로 표현한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터키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500년 이상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동시에 이슬람 세계의 최고 종교·정치 지도자 칭호를 지니며, 제국의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결합했다. 오늘날 많은 터키인과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수니파 세계의 역사적 맹주라고 자부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와 메디나라는 이슬람 최대 성지를 가진 나라로 스스로 수니파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비즘이라는 엄격한 수니파 해석을 근거로 종교적 권위를 강화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 들어서는 “신新 오스만주의”를 표방하며 중동·북아프리카에서 터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수니파 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려 한다. 현재 터키인의 약 99%가 무슬림이며, 소수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18%의 쿠르드족과 72%의 튀르크족 역시 거의 대부분 무슬림이다. 한편 중국 역사에서는 흉노와 돌궐이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은 막대한 노동력과 자원을 투입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8세기 중엽 튀르크 세력이 약화되자,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서 재침을 시도하며 대군을 보내 토벌에 나섰다. 당나라 원정군은 초기에는 우세했으나, 당시 중앙아시아의 여러 튀르크 부족들은 압바스 칼리프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압바스 왕조도 이를 받아들여 연합군을 형성했다. 751년 7월, 약 30만 명의 튀르크-압바스 연합군과 7만 명의 당나라 군이 타슈켄트 북동쪽 탈라스 강가에서 맞붙었는데, 이 전투가 바로 ‘탈라스 전투’다. 당나라는 패배했고, 중앙아시아는 압바스 왕조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튀르크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압바스 왕조는 이들이 무슬림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 나무위키

한편 터키에는 이와는 다른 비 정통 수피 계 이슬람 종파인 알레비파가 존재한다. 이 종파는 약 150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약25%를 점유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제2의 종파를 형성하고 있다. 알레비의 어원은 ‘할리파 알리에 속한다’는 말에서 기원했는데 벡타쉬(Bektaş) 혹은 크즐바쉬(Kızılbaş)라고도 불리 운다. 이 종파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은 1239년 아나톨리아 셀추크 조(1074~1307) 시기에 발생한 바바이 반란(1239~1240)이었다. 이 반란은 약 1년 여 만에 진압되었지만 반란에서 살아남은 바바이들은 소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져 종교운동을 전개해 오늘날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비정통 이슬람종파인 알레비 종파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알레비종파의 대표교리는 알라(Allah)—무함마드(Muhammad)—알리(Ali)로 표현되는 신의 구현사상12이맘 숭배사상이다. 즉 알레비종파는 쉬아 파와 같이 알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고 12이맘을 숭배하고 있다. 알리를 무함마드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무함마드와 알리 공히 알라로 받은 신성의 빛을 발산한다고 보고 있다. 무함마드가 신성의 진리를 알렸고 알리는 그 보호자이며 미래에 이 양자는 한 명의 성자로 융합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알레비는 무함마드, 알리, 화티마, 하싼 그리고 후세인으로 이어지는 예언자의 가문을 절대적으로 경배하며 ʻ예언자 가문’의 적들, 특히 대중을 노예화시키고 원초의 꾸란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을 왜곡시킬 목적으로 순니 파를 지배적 종파로 만든 무아이야조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한편 이 종파는 꾸란의 해석에 있어서도 터키 내 주류 순니 파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알레비들은 원래의 꾸란이 하루에 다섯 번에 걸친 기도, 모스크참배, 단식, 메카순례 등을 요구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순니 파가 꾸란의 중요구절들을 잘못해석하고 변형시켜 초기의 이슬람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순나나 하디쓰도 아랍인 엘리트들이 조작을 통해 무슬림 지배를 위해 만든 창작물에 지나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 대신 그들은 꾸란과 더불어 알레비 종파의 계율과 종교의식 등이 기술된 독자적인 성서 부이룩(Buyruk)을 매우 중시하고있다. 「터키 알레비 종파에 나타난 샤머니즘 모티프」”

 

알레비Alevi는 튀르키예, 특히 중앙·동부 아나톨리아와 일부 시리아·이라크 지역에서 주로 신앙을 유지하는 이슬람 종파로, 12~13세기 셀주크 투르크 이후 형성된 시아파 계열 신앙과 민속 신앙, 수피즘, 즉 신비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반 수니파와 달리 알레비는 이슬람 정통 지도자보다는 공동체 지도자(딱시·바바)의 권위를 존중하며, 숭배와 의례가 지역사회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교리적으로는 시아파 12 이맘 사상과 수피적 신비주의가 혼합되어 있으며, 이맘 알리와 12 이맘에 대한 숭배가 중요한 특징이다. 예배는 모스크에서의 정형화된 살라트보다는 집회소에서 의식, 노래, 춤, 시적 예술 등을 통해 수행되며, 기도와 금식은 수니파처럼 의무적이지 않고 윤리적 삶과 공동체 참여를 중시한다. 일부 학자들은 알레비 신앙이 남성 중심 의례와 자연 숭배, 신비적 요소를 혼합한 형태라고 평가하며, 이는 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터키에서 알레비는 전체 인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쿠르드족과 아나톨리아 튀르크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 내에서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수니파 지배 세력 아래에서 종교적 차별과 박해를 경험했으며, 현대에도 정치적·사회적 소수 집단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알레비는 공동체 중심의 사회 조직과 의례적 축제를 통해 정체성과 연대를 유지하며, 터키 사회에서 독특한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 행하는 독특한 춤인 세마Sema 의식

13세기경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14~15세기에는 예멘으로 퍼졌다. 당시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수피파 무슬림 순례자들은 예멘으로 돌아갈 때 예배 중 피로를 덜고 정신적 각성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를 함께 가져갔다. 수피파는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으로 명상과 기도, 음악, 춤 등을 통해 신과의 일체감을 추구하며, 15~16세기 오스만 제국과 예멘, 이슬람 세계에서는 수도원과 집회소에서 밤샘 기도와 명상, 정신적 수행을 이어가기 위해 각성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수피파들은 커피를 만들 때 원두를 골고루 볶고 갈아 끓였으며, 이 과정에서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영적 수행과 결합된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커피는 수피파 수도원에서 일반 대중으로 확산되었고, 오스만 제국에서는 카페문화로 발전하여 문학, 철학, 정치 담론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으로 기능했다. 초기 카페는 이스탄불, 브르사, 에디르네 등 도시 중심지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로 남성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담론을 나누는 장소였고, 동시에 사교·문화 교류의 장으로 다양한 계층과 직업군의 남성들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전통 오스만 카페는 간단한 목재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고 벽에는 문학작품이나 시를 걸어 놓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스만 사회에서 공론장의 역할을 하면서 커피가 가져온 새로운 사교문화와 지식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다.

 

1854년 아마데오 프레조이지 Amadeo Preziosi가 그린 오스만 제국의 커피하우스 풍경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터키공화국의 근간인 세속주의를 뿌리째 흔들며, 1923년 설립 이후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해온 터키의 전통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터키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이슬람교가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지 않고 율법이 사회 규범을 지배하지 않는 세속국가로 설계되었으며, 터키공화국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일부일처제, 여성 선거권 부여,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금지 등 서구적 정책을 도입하고 미국 등 서방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세속주의를 유지하려는 군부는 에르도안 집권 이전까지 세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경제 성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향을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으며, 공공장소에서의 남녀 키스 제한, 음주 제한, 낙태 제한, 히잡 착용 권장 등 사회 규범에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1997년 이스탄불 시장 시절 이슬람주의를 고무하는 시를 썼다가 투옥되기도 했으며, 자신을 정통 이슬람주의자라고 밝혀왔다. 또한 2009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와의 논쟁으로 주목받았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 반대자에게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고, 비판적 언론인들에게는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으며, 정부 요직에도 이슬람주의자를 배치했다. 나아가 탁심광장을 재개발하고 오스만제국 시대 포병부대 막사와 이슬람 사원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등, 터키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이슬람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 성장 성과와 인프라 확충, 국제 외교적 성과 등은 상당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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