ビンゴが言った。「お誕生日おめでとう!」 本を読んでくれる男が言った。「悲しみは形式だった、」

 

고등학교 때 나의 제2외국어는 일본어였다.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한 교수님의 소개로, 아이코(가명)라는 누나가 몇 달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머리가 희끗한 그 교수님은 일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셨고, 그래서 일본인 지인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연세가 지긋해서였을까, 아이코 누나는 무척이나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교수님이 말씀하실 때면 언제나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 경청하곤 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일본어를 가르쳐 주거나 짧게 자신의 일상을 나누기도 했다. 아이코는 학원을 다녔고, 집은 거의 잠만 자는 공간처럼 드나들며 하루 종일 외출이 잦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코 누나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아마도 일본인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상대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바람의 검심 るろうに剣心」은 에도 막부가 붕괴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근대 국가로 전환되는 격변기, 즉 사무라이 계급이 해체되고 전통적 무사 도덕과 신분이 흔들리는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과거 막부 말기 암살자로서의 무거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맹세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작품은 사무라이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정의와 구속, 자유와 책임 사이의 긴장을 다루며, 켄신이 과거의 죄책감과 싸우면서 사람들을 지키는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의 이중성과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양면성을 설명한다. 베네딕트는 일본 사회를 서양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 체계로 이해하려 했으며, ‘국화’는 예술적·평화적·우아한 일본의 시·정원·세련된 미학을, ‘칼’은 무사도·전쟁·폭력적이고 엄격한 규율의 측면을 나타낸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자신들과는 다른 타인을 배척하는 문화는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특히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이 두드러지며, 이는 일본 사회를 얽어매는 의무감과 관련된다. 일본인은 내적 양심보다 사회적 시선과 체면을 기준으로 행동하며,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상호 채무 관계가 작용한다. 베네딕트는 이를 ‘온 恩’, 즉 부모·스승·천황 등에게 받은 은혜, 그리고 ‘기리 義理’, 즉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회적 의무로 설명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과 중국처럼, 일본 사회에서도 상하 관계, 충성과 복종, 체면 유지가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노령층 인구가 늘고 청년층이 빠르게 감소하면서 청년 문화의 발전은 침체되어 있으며, 여전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는 현실도 이를 반영한다. 「국화와 칼」은 일본을 이해하려는 서양인의 첫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로 더 많이 쓰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 지식인들은 “서양이 우리를 이렇게 보는구나”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트가 말하는 천황의 ‘국화’는 지고지순한 평화를 의미하며, 사무라이의 ‘칼’은 흔히 생각하는 잔인함이 아니라, 이상理想이 아닌 것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상징한다. 감사의 뜻을 담은 ‘카타지케나이 かたじけない’는 깊은 감사와 은혜에 대한 부채감을 표현하며, 온정을 베풀어준 상대에게 은혜를 되갚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사죄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일본인에게 ‘온’을 받는다는 것은 채무 이상의 무거운 부담이며, 비겁함은 신적 존재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치료를 받는 것과 같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이 세계 질서의 지도자로 선도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출발하며, 사무라이는 정의를 위한 절제와 절도를 지녔다. 과거 일본 카스트 제도에서 상류층인 사무라이는 봉건 영주 다이묘로부터 녹을 받으며 노동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는 황실, 궁정 귀족, 사무라이, 농민, 공인, 상인, 천민으로 구성되며, 천황은 신적 존재로서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신념이 가미카제와 같은 극단적 충성으로 나타난다. 일본 병사에게 항복은 없으며, 미군 대비 일본군의 전투 포로와 전사자 비율에서 그 극단적 충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선비가 덕과 중용을 지키며 학식을 갖춘 정의로운 인격체라면, 사무라이는 선비와 유사하지만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영지를 받아 성을 쌓는 데 목표를 둔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존 F. 케네디, 보이스카우트 창립자 로버트 파월 등에게 영향을 준 「무사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무사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무사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 무사는 스스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무사는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해야 한다. 무사는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무사는 부정부패를 증오하고 공정성을 존경해야 한다. 무사는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무사는 패배한 적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어야 한다.” 사무라이의 ‘기리 義理’는 올바른 도리를 따르며 모욕에 대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책임으로 작용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복수가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따르는 행위이며, 자살·자결(하라키리, 腹切り)도 명예를 지키는 응징이자 사회적 모범으로 이해된다. 서양 문화의 유희적 비방과 달리, 사무라이에게 상대의 정당한 비방은 기리로 이어지며, 승부를 걸 때 계획이 성공할 수 없다면 자신을 걸고 나서야 한다는 절제가 요구된다.

 

우키요에浮うき世よ絵え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 / '빨간 후지'로 널리 알려진 ʻ개풍쾌청 凱風快晴’

나는 애니메이션을 특별히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은 거의 모두 보았다. 그리고 최근 작품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언어의 정원」을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영화 속에는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鳴る神の 少し響みて 降らずとも 吾は留まらむ 妹し留めば이라는 만요슈 11권 2514번의 구절이 인용된다. 주인공 타카오는 구두 장인이 되기를 꿈꾸는 소년으로, 장마철 비 오는 아침마다 학교 대신 공원의 정원에 들른다.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초콜릿 ⁺ 맥주를 즐기는 신비로운 여성 유키노를 만나고, 둘은 비 오는 날에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빈자리를 메운다. 타카오는 그녀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시구에 기대어 고백처럼 내뱉는다. “천둥소리가 조금 들리고, 비록 그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유키노는 타카오가 다니는 학교의 고전문학 선생님이었고, ‘유키쨩’이라 불릴 정도로 학교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나이 차와 현실의 벽은 끝내 두 사람을 갈라놓고, 그들은 각자의 길로 나아가야만 했다. 비와 계절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성장과 이별은 동시에 찾아오고, 요컨대, 그들의 ʻ슬픔은 형식’이었다.

아이 이름, 하나짱はなちゃん ⟶ 어린아이, 귀여운 느낌

친구 사이, 유키짱ゆきちゃん ⟶ 친근감

 

일본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意思: 전체 국민의 일치된 의사, 즉 국민이 헌법을 통해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는 데 합의한 것)에 기초한다”고 규정하여, 천황이 더 이상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징적 존재’임을 명확히 했다.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천황의 권위를 둘러싸고 ‘천황주권설’ ‘천황기관설’이 대립했는데, 전자는 주권이 신성불가침의 천황에게 귀속되어 그의 권력 행사에 제한이 없다고 본 반면, 후자는 주권이 국가(국민)에 있으며 천황은 헌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 국가기관이라고 주장했다. 미노베 다쓰키치가 대표적으로 천황기관설을 주창했으나, 1935년 ‘천황기기관 사건’에서 국가주의 세력의 공격을 받아 사실상 부정되었고, 일본은 제국헌법 체제하에서 천황주권설을 사실상 국가 이념으로 굳혔다. 그러나 패전 후 제정된 1947년 일본국헌법은 국민주권을 명문화하며 천황을 단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규정했다. 다만 군주제를 유지해 온 여러 나라들에서 왕정을 부정하는 이들이 종종 ‘비국민’으로 낙인찍히거나 배제되었듯, 일본에서도 천황제 반대론자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국민 정체성의 주변부로 밀려났으며, 헌법 제1조가 규정한 ‘국민의 총의’에 근거해 천황의 지위가 정당화되는 만큼,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천황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 국민이 아니다”라는 해석을 내놓을 여지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주권과 천황제의 상징화가 규정된 일본국헌법은, 동시에 전후 평화질서 속에서 전쟁 자체를 부정하는 규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일본국헌법의 제2장 제9조는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이나 무력에 의한 위협·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포기한다”는 취지로 전쟁 포기·전력 불유지를 규정한다. 제 2차대전 직후 연합국은 전범 처벌 문제를 놓고 토론했고 일부 연합국, 특히 호주·뉴질랜드 등은 천황을 기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점령 당국은 정치적·안정론적 이유로 기소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을 유도했다. 미군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의 보고·전문에서 “천황 기소는 ‘엄청난 격변’을 일으켜 점령 계획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하고 추가 병력·장비가 필요하다”고 경고하기에 이른다. 이후 냉전의 고조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은 미국의 전략적 판단을 바꾸어, 일본을 반공·후방기지로 활용하려는 필요성이 커지게 되고, 그 결과 점령기와 전후 정치의 전환, 소위 ‘역전정책 Reverse Course’ 속에서 미측의 요청·지도로 1950년 8월경 맥아더 지시 아래 7만여 명 규모의 경찰예비대가 1950년 8월에 창설된다. 재편 과정과 인력 구성에서 상당수가 제 2차 세계대전 군 배경자였으며, 이것이 1952년 보안대로 확대되고 1954년 7월 1일에 자위대로 정식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된다. 이 흐름은 헌법 제9조의 ‘전면적 무력 포기’ 규정과의 국제사회·법학계의 지속적 지적과 긴장을 낳았고, 일본 정부는 전통적으로 “자위권은 인정되므로 자위대는 헌법 위반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인용·참고: 「은근 몰랐던 일본 문화사」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38~710년)는 일본 역사에서 초기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과 불교 도입이라는 중요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이 시기는 야마토 조정이 정치적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천황권을 강화하고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한 시기이며, 중국과 한반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특히 6세기 중반 백제와 고구려, 신라를 통해 불교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종교적·문화적 혁신이 일어났고, 이는 이후 일본의 사원 건축, 조각, 회화 등 예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스카 시대에는 율령제(法令制:형식을 가진 법률제도로 규정되는 국가 체제 혹은 통치 방식)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중앙 관료 조직과 호적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국가 운영의 제도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소가노 우마코 등 유력 귀족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천황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정치적 안정과 동시에 귀족 중심의 권력 다툼도 나타났다. 아스카 시대의 건축·조각·문학은 중국 수·당 왕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일본 고유의 미적 감각과 결합되어 독자적인 문화 양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문화적 성취는 나중에 나라 시대奈良時代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아스카 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5세기, 한반도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의 정복 활동 속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개인적으로 세종대왕 다음으로 존경하는 군주이자 충무공 이순신에 견줄 만큼 뛰어난 영웅이라 생각하는 광개토대왕은 북방에서는 거란과 숙신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倭 세력까지 제압하며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떨쳤다. 특히 399년 신라가 왜·가야 연합군의 침입을 받았을 때 군대를 파견해 신라를 보호하고 사실상 고구려의 영향권에 편입시켰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만주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여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고구려의 패권을 확립했다. 그의 뒤를 이은 장수왕(재위 413~491)은 평양 천도를 단행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해 한반도의 정치 구도를 크게 흔들었으며, 이어 7세기 초에는 을지문덕이 등장해 수隋나라의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무너뜨린 살수대첩(612)을 이끌었다. 을지문덕은 치밀한 전략과 지략으로 적을 유인하고 소모시킨 끝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동아시아 전쟁사에 길이 남는 전과를 세웠고, 이는 고구려의 독립과 존속을 지켜낸 중대한 사건이었다.

 

서기 시대/막부/정권  주요 사건·특징
794 헤이안 시대 시작 수도 교토(헤이안쿄)로 이전, 귀족 문화 발달
894 헤이안 시대 중기 국풍문화 발달, 일본 고유 문학·예술 성장
1086 후지와라 가문 권력 강화 섭정·수상 중심 정치, 무사 세력 성장 시작
1185 가마쿠라 막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사 중심 막부 정치 시작
1274 몽골 침입 일본 방어, 신사·성곽 강화
1333 가마쿠라 막부 붕괴 남북조 시대 시작, 천황 권위 회복 시도
1336 무로마치(아시카가) 막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남북조 통일, 무로마치 문화
1467 오닌 전쟁 전국시대(센고쿠) 시작, 다이묘 권력 강화
157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시작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등장, 전국 통일 진행
1600 에도 막부(도쿠가와)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 승리, 평화적 통치 시작
1639 쇄국 정책 외국인 교류 제한, 기독교 박해
1853 페리 제독 내항 개국 요구, 일본 근대화 시작
1868 메이지 유신 에도 막부 붕괴, 천황 중심 근대국가 수립
1889 메이지 헌법 발표 입헌군주제 확립, 근대적 행정·군사제도 도입
1904 러일 전쟁 일본, 러시아에 승리, 제국주의적 영향력 확대
1912 다이쇼 시대 시작 다이쇼 천황 즉위, 민주주의적 정치 움직임 확대
1931 만주사변 일본군, 만주 점령, 군부 권력 강화
1941 태평양 전쟁 시작 진주만 공격, 아시아 태평양 전쟁 본격화
1945 일본 항복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연합국 점령, 헌법 개정

 


다이묘大名는 일본 헤이안 시대 후기인 12세기경에 등장하여 에도 시대를 거쳐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각 지방을 지배하던 유력 영주로, 막부와의 관계 속에서 정치·군사적 권력을 행사하며 일본의 봉건 질서를 형성한 핵심 세력이었다.

 

“일본의 무사 계급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 과정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수립한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었으며, 이는 귀족 중심의 헤이안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정치 체제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 지방의 유력 호족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이들은 후에 다이묘로 성장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막부의 지방 통치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슈고와 지토 제도는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슈고들은 치안 유지와 군사 동원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토들은 장원의 경영과 조세 징수를 담당했다. 이러한 이중 구조의 통치 체제는 초기에는 막부의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지방 세력의 자립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이르러 호족들의 독립적인 세력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막부의 재정이 약화되었고, 이는 지방 통치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고다이고 천황의 건무 신정이 실패로 돌아간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수립했지만, 이미 지방의 호족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한 상태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시기에 등장한 슈고 다이묘들의 존재였다. 이들은 막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슈고직을 세습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영지를 확대해 나가는 이중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슈고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독자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군대를 조직하며, 독립적인 경제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슈고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쌀과 특산물의 유통을 통제하고, 시장과 상업 활동을 관리했으며, 화폐 주조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 독자적인 군사 조직을 유지했는데, 이는 단순한 치안 유지를 넘어서서 다른 다이묘들과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은 영지 확장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으며, 다이묘들 간의 끊임없는 전투와 동맹 관계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무사들의 성격도 크게 변화했다. 초기의 무사들이 토지와 결합된 재지 영주의 성격이 강했다면, 점차 직업적인 전투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특히 하급 무사들 중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신분 상승을 이루는 사례가 늘어났다. 무사들은 더 이상 세습적인 지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실력과 공적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등장한 센고쿠 다이묘들은 이전의 슈고 다이묘들과는 다른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이들은 영지의 직접 지배를 강화하고, 가신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영지 내의 토지를 조사하여 석고제를 정비했으며, 가신들에게 군역의 의무를 명확히 규정했다. 모리 모토나리는 안정적인 가신단 운영을 위해 군공 평가 제도를 체계화했으며, 다케다 신겐은 법도를 제정하여 가신들의 행동 규범을 확립했다. 이러한 제도적 혁신은 센고쿠 다이묘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영국의 봉건제와 비교할 때, 일본의 센고쿠 다이묘들은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체계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권력 경쟁」”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 ⓒ 불멸의 이순신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에도만에 들어오면서 약 260년간 유지되었던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외국과의 교류와 무역을 금지하고 문호를 닫는 정책)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페리는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한 뒤 1854년에 다시 내항하였고, 결국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외국 상선의 유입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으며, 이 속에서 ‘존왕양이 尊王攘夷’, 즉 오랑캐를 배척하고 천황을 받들자는 사상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막부의 무능은 정치 개혁 요구로 이어졌고, 마침내 1868년 에도 막부가 붕괴하며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하게 하자)’과 ‘문명개화 文明開化’를 내세워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1871년 먼저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전통적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현 제도를 실시, 다이묘들을 화족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문명개화 정책에 따라 서양식 의복과 태양력이 도입되고 도시와 건축 양식이 서양화되었으며, 1872년 학제를 공포하여 남녀 모두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부터 유럽 각국의 헌법을 연구해 프로이센 헌법을 모델로 한 대일본제국헌법을 기초하여 1889년 공포하였고, 이는 천황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의회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어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통해 일본은 징병제를 실시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공장 설립·철도·전신망 등 산업과 인프라를 급속히 발전시켜 서구 열강들을 놀라게 하며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가 된 니가타는 일본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지역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일본 쌀 생산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진 곳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품종인 고시히카리는 ‘고시 지방에서 빛나다’라는 의미를 담아 호쿠리쿠 지방을 상징하는 쌀로 자리 잡았다. 원래부터 니가타의 쌀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고, 1930년대 전국적으로 농업기술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품종 개량이 활발히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특히 ‘농림 1호’와 병충해에 강한 ‘농림 22호’를 교배해 나온 ‘농림 100호’가 기반이 되어 오늘날의 고시히카리가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미곡통장이 발급될 정도의 식량난이 이어졌고, 쌀은 국가 전략 식량으로 전쟁 중인 1942년부터 정부가 전량 수매·배급하는 ‘식량관리제’의 틀 안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국민의 쌀 소비는 줄고 생산성은 높아져 쌀이 남아돌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정부는 1970년 감산정책을 도입해 농민들에게 논 일부를 놀리게 하고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정책이 수십 년간 이어지면서 일본 농업은 수급 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고, 1993년 기록적인 냉해가 닥쳤을 때 쌀 생산이 급감했음에도 시장이 빠르게 회복하지 못해 결국 ‘쌀 대란’이 발생, 사상 처음으로 태국·미국산 쌀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쌀 정책의 경직성이 위기를 키웠다는 비판을 불러왔고, 1995년 식량관리제가 폐지되면서 쌀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농산물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보조금과 농협 중심의 유통, 고령화된 농민 구조 탓에 완전한 자유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나아가 2023년 여름에는 폭염과 이상기후로 수확량이 크게 줄었고, 코로나 이후 관광 수요 폭증까지 겹쳐 외식업계의 쌀 소비가 늘면서 공급이 빠듯해졌다. 하지만 감산정책으로 줄어든 생산 기반과 농협 JA의 유통 독점 구조는 시장의 유연성을 더욱 떨어뜨렸고, 정부가 비상 비축미를 방출했음에도 물류 병목으로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2025년 초 일본 정부는 31만 톤의 비축미를 풀고 7월까지 추가로 30만 톤을 방출하겠다고 밝혔으며, 더 나아가 2027년부터는 감산 중심의 농정을 전환해 생산 확대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난 아름다운 산과 자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그곳에 별천지를 세우고 싶었어요. 안도 타다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생선을 주식처럼 식탁에 올리지만 일본인들은 그중에서 가장 밝고 빨간색이 짙은 도미를 좋아한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많은 책에서도 ʻ인간은 태어나면 장군将官,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서까래와 기둥은 히노끼檜木, 생선은 도미’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제각기 입에 맞는 생선이 있겠지만 도미를 최상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또 「풍속문선」에는 ʻ혼례라든가 연회의 높은 상 위에 고운 색의 끈으로 장식된 도미의 위풍당당함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라고 적혀있으며 ʻ상해서 냄새가 나도 역시 도미’라 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도미를 선호한다. 그러나 프랑스나 중국에서는 귀한 생선으로 취급받지 못해 도미를 요리에 사용하는 일이 없다. 도미가 일본에서 ʻ바다의 생선의 왕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요리의 역사」”

 

롯폰기는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현대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서 국제적인 전시와 이벤트가 자주 열리고 있어,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과 바가 밀집해 있어 미식가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 각국의 요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들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미식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롯폰기는 도쿄의 밤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다양한 클럽과 바가 있어 밤늦게까지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내고, 외국인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와 파티가 자주 열리고 있다. 롯폰기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쇼핑몰과 부티크가 있어 최신 패션을 접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고급 브랜드의 매장이 밀집해 있어 패션 애호가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사진 ⓒ 일본정부관광국

도미는 살이 단단하고 담백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있어 일본 요리의 미학인 “소박함 속의 섬세함”과 잘 맞으며, 생선회로 먹으면 깔끔한 감칠맛을 주고 구이·조림·국물 요리 어디에도 어울려 옛날부터 귀하게 취급됐다. 일본어에서 축하를 뜻하는 메데타이おめでたい, 즉 경사스럽다와 도미를 뜻하는 타이たい의 발음이 비슷해 결혼식·입학식·출산·개업 등 길일에 도미를 차려놓으면 복을 부른다는 의미가 생겼으며, 대표적인 예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구운 도미 소금구이塩焼き가 있다. 에도 시대(1603–1868)에는 도미가 귀족과 무사 계급이 즐기던 고급 어종으로, 쇼군에게 진상되거나 막부 연회 자리에도 반드시 올라갔으며, 일본 회화와 도자기, 목판화, 특히 우키요에에서는 도미가 ‘복’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자주 등장했다. 또한 신사神社 제례 음식에도 도미가 빠지지 않아 신에게 바치는 값진 바다의 산물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도 결혼식 뷔페, 신년 요리おせち料理, 고급 가이세키懐石 요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일본인들에게 단순한 생선이 아닌 행운과 경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제례의 상징인 조기나 영광굴비로, 일본 문화에서는 맛과 상징, 언어유희가 한데 어우러져 도미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본 거리가 깨끗한 이유는 단순히 청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관, 제도적 장치, 사회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있다. 우선 일본은 가정과 상점, 공공장소에서 쓰레기를 종류별로 철저히 분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일반 쓰레기, 재활용품, 음식물 쓰레기, 캔·병, 플라스틱 등으로 구분해 배출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쓰레기 배출 자체가 거부되기도 하고,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이 적은 이유도 사람들이 자신의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가 처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청결을 도덕적 책임으로 인식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청소 시간을 통해 청결 습관과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고, 거리와 공공시설을 함께 청소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재활용과 자원 절약이 생활화되어 있어,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는 행위는 사회적 낙인이나 벌금, 비난을 받게 되고, 지방자치단체와 상점가는 정기적으로 거리 청소를 실시하며 벚꽃 시즌이나 축제 전후에는 주민과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문화적 가치를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어, 길거리를 더럽히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책임 의식과 공동체 의식에 반하는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제도적 규제, 교육, 사회적 압력과 문화가 결합되어 일본의 거리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 사진 ⓒ LIVEJAPAN

 

「유리알 유희」에서 장인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정신적·지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 작품에서 유리알 유희는 음악, 수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지적 요소를 통합하는 고도의 정신 활동으로, 장인은 이를 수행하며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정밀함과 숙련은 모든 규칙과 요소를 정확히 이해하고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창조적 통합은 기존 학문과 예술을 조화롭게 엮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힘을 말한다. 또한 심미적 탐구는 단순한 성과를 넘어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고, 규율과 집중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적 기술을 완성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러한 장인의 정신은 독일과 일본의 전통 장인과 오래된 기업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과 가게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교토에는 1,000 이상 지속된 가게로 이치몬지야 와스케라는 전통 과자점이 있다. 일본에는 이 외에도 200~300년 이상 된 우동집, 스시집, 양과자점이 많으며, 이시카와현의 호시 료칸은 약 1,300년 이상 운영된 일본 최장수 호텔 중 하나다. 장인의 전통은 공예 분야에서도 이어져, 코마츠는 칼, 도자기, 목공 등 전통 장인업체로, 니혼슈 양조장들은 사케와 미림 등 술 제조업에서 300~500년 이상 이어진 곳이 많으며, 일부 기모노 제작사는 200~3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과 독일에 오래된 기업이 많은 이유는 두 나라 모두 장인 정신을 중시하며, 기업을 가족과 지역사회와 함께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품질과 기술 숙련, 세밀함을 세대에 걸쳐 전수하며,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완성도와 신뢰를 중시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 사회에서는 조화를 깨지 않고 주변과 균형을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잘나가는 가게 옆에 일부러 자기 가게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기 가게 옆에 비슷한 업종을 내면 상권 전체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마음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 포함된다.

 

이시카와현의 호시 료칸 ⓒ 세계일보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