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체 게바라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로, 귀족 출신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부르주아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테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건축 자격이 있던 아버지가 설계한 집에서 성장했지만 어릴 적 폐렴 이후 천식을 앓으며 가족은 기후가 맞는 곳을 찾아 여러 차례 이주해야 했다. 알타가르시아에 정착한 뒤 인디오 친구를 사귀면서 빈곤과 불평등의 현실을 접한 그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먹이고 재우기도 했다. 결석이 잦았던 탓에 독서를 즐기며 체스, 테니스, 골프 등에 몰두했지만, 나중에는 학생 시위 주동 혐의로 알게 된 알베르토의 영향으로 럭비에도 빠졌다. 18세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천식 치료에 대한 관심으로 의학 공부에 열정을 쏟았고, 잡지 「태클」을 발행하기도 했다. 방학 동안 알베르토와 나환자 병원에서 봉사하며 사회적 모순을 체감한 그는 빈민촌, 도서관, 선원, 신발 판매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독서와 스포츠를 이어갔다. 1951년 알베르토와 함께 중고 오토바이 ‘포데로사 The Powerful’를 타고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며 가난과 불평등, 광산 노동자의 착취, 정부의 무관심을 목격했고, 마추픽추에서는 시몬 볼리바르의 서간집을 읽으며 혁명가의 길을 다짐했다. 7개월간의 여정은 그를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었고, 195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곧 다시 여행길에 올라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아르벤즈 정부를 지지했으나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정부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하며 미국 제국주의의 실체를 절감했고,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일다 가데아와 결혼했다. 하지만 정국의 혼란 속에 그녀와 함께 멕시코로 망명한 그는 결국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되고, 이것이 쿠바 혁명과의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1955년 멕시코에서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다. 당시 카스트로는 29세, 게바라는 27세였다. 어릴 적부터 천식을 극복하려 단련했던 그는 게릴라전에서 강인한 전사가 되었고, 사진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듯 값싼 ‘카자도레스’ 시가를 즐겨 피우며 담배 연기가 천식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혁명에 뛰어든 그는 아르헨티나식 감탄사 “Che(헤이, 친구)”를 달고 다녀 ‘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혁명과 세계 정세에 몰두하고 정치 분석에도 능했지만 인물 평가에는 서툴렀다. 시대를 앞선 사상을 지녔던 그는 혁명 이후 쿠바 정부에서 농업개혁을 담당하는 산업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로 활동하며 피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립을 도왔다. 그러나 1965년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아프리카로, 이어 볼리비아로 떠나 혁명을 이어갔으나 정부군과 CIA의 추적 끝에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한 폐교에서 체포·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일주일 뒤 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에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그를 추모했고, 체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상징이자 세계사에 남는 혁명가로 자리매김했다.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두고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 평가는 게바라의 순수한 이상과 정신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도 비교되는 성인으로,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악마로, 때로는 감성을 자극하는 시인으로 불리며 노동자의 신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게바라는 빈익빈 부익부를 낳는 ‘자본주의’와 인간의 권리를 희생하는 ‘공산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의 소련식 관리형 사회주의와 달리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에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게바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자발적 노동’을 주창하며 자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규정했지만, 그의 이상은 엥겔스가 지적한 ‘사회적 관료주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새로운 엘리트 계급이 다시 자본을 축적하는 모순에 맞닥뜨렸다. 그는 이를 끊어내기 위해 국제 혁명을 외쳤으나, 이미 자유와 소비를 만끽하던 자본주의적 욕망은 그의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결국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의 삶은 39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열정은 신화 아닌 신화로 남아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상징처럼 회자되고 있다.

 

크게 보면 세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틀로 구분되어 설명되곤 하지만, 실제 국가들은 그 사이의 정치적 지형 어딘가에 자리한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사회주의적 평등을 제도 속에 녹여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시장 원리를 받아들여 발전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곳은 입헌군주제를 운영하거나, 전제적 신정군주제를 유지하거나,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면서도 군부 권력이 실질적으로 병존하는 독특한 체제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이다. 정의로운 사자가 있을 수 없듯인간이 만든 법 또한 언제나 특정 집단이나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역사를 돌아보면 오늘날엔 납득하기 어려운 법들이 존재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정권은 크리스마스를 ‘이교적이고 방탕한 축제’라며 금지했고, 스위스는 밤 10시 이후 변기 물내리기를 소음 방지를 이유로 막았다. 미국 역시 20세기 초 금주법을 시행했지만, 그 결과는 범죄와 마피아의 급성장이라는 역설적인 풍경을 남겼다. 이렇게 보면 정치 체제와 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임시적 합의에 불과하다는 점이 선명해진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것은 분명 편리와 풍요다. 그러나 그것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자본주의를 발전의 모범으로 삼고 칭송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연을 병들게 하고 인간 관계마저도 이익 계산으로만 환원시키는 깊은 폐해가 자리한다. 시장 경쟁은 창의와 혁신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끝없는 소비와 낭비를 부추겨 지구 생태계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더 나아가 인간 사회는 연대와 공동체적 가치보다 효율과 이윤을 우선시하며, 사람마저도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 체제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행복으로 삼고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잠깐,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한 마을에 100명 중 60명이 신라면을, 30명이 진라면을, 10명이 안성탕면을 좋아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다수결에 따라 신라면 100개를 구입해 나누어 먹는 것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다수의 선택이 반드시 소수에게도 공정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정의와 공정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자본주의는 대항해 시대를 거쳐 16~17세기 유럽에서 해외 무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보통선거와 시민권의 확립을 통해 제도적으로 정착했지만, 인류는 이미 기원전 7~6세기 리디아에서 동전을 발명하여 물물교환을 넘어 화폐를 사용했고,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최초의 지폐가 등장하는 등 화폐 제도의 발전이 자본 축적과 교환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일종의 사회적·경제적 자연법과도 유사하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과 생존의 논리, 즉 양육강식적 성격을 지니지만, 여기에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가 결합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의 집중은 빈곤과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이를 완화하고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와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과 제도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이러한 자본의 집중과 불평등에 어떻게 개입하느냐이다. 이는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제도를 통해 조정될 수도 있고, 작은 정부를 통한 시장 규제 최소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 긴장과 조정의 과정을 거치며 현대 사회를 형성한다.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돌보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의 결과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정의의 실천이다. Pope Francis”

 

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두 번째 인물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는 ‘빈자들의 성자’로 불리며, 즉위할 때 13세기 가톨릭의 청빈 정신과 개혁적 변화를 상징하는 이름을 선택했다. 성목요일 미사에서 신자들의 발을 씻는 전통은 여러 교황이 이어왔지만, 그는 전통적으로 12명의 사제만을 대상으로 하던 의식을 여성, 난민, 병자 등 사회적 약자들까지 확장해 직접 발을 씻었다. 교리적으로는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으나, 경제적·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다 22세에 신학대학으로 진학했고, 33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와 주교 시절부터 직접 요리를 하고 작은 집에서 생활하며, 버스로 출퇴근하는 등 검소한 삶을 실천했다. 교황이 된 이후에도 전임자들이 신던 장인이 손수 만든 붉은색 구두 대신 검은 구두를 신었고, 교황궁 대신 바티칸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사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벤츠 대신 중형·소형차를 이용했다. 교황직은 단순히 말년에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전 세계 신자와 언론이 지속적으로 주목하는 무거운 책임임을 보여주듯, 그의 삶과 행동은 겸손과 사회적 섬김을 몸소 실천하는 상징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현대 사회의 경제·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직시하고 실천하는 현대적 성인으로 칭송받는다.

 

“기도와 행동은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Pope Francis”

 

신을 믿는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종종 신이 이미 주신 것에는 감사하지 않고, 매번 오직 ‘주세요’만 외친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돈을 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좋은 직장을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와 같은 기도가 그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이익을 얻으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구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기도에는 모순이 깃들어 있으며, 어쩌면 누군가의 피해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 ‘라 Ra’를 상징하며 세운 사각형 기둥으로, 위로 갈수록 뾰족하게 올라가는 피라미드형 첨탑을 가진 구조물이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로마 제국 시기부터 유럽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이집트에서 직접 가져온 주요 오벨리스크는 이탈리아 로마(바티칸, 나보나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등), 프랑스 파리(콩코르드 광장), 영국 런던(템스 강변), 미국 뉴욕(센트럴파크), 이집트 카이로와 루크소르, 이탈리아 나폴리 등 여러 나라와 도시의 주요 광장과 신전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한편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형태와 상징을 참고하여 새로 제작한 오벨리스크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오벨리스크는 1936년에 세워져 도시 중심과 주요 광장을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고, 미국 워싱턴 D.C.의 워싱턴 기념탑은 1884년에 완공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제작된 현대식 구조물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20세기 초반, 특히 1910~1930년대 아르헨티나는 1인당 GDP 기준으로 세계 상위 10위권에 들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다. 경제의 중심은 농업과 축산업이었으며, 특히 소고기와 곡물 수출이 활발했으며 영국과 독일 등과의 무역이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이러한 부유함 덕분에 인프라와 도시 발전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대도시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며 높은 문화적 수준과 생활 수준을 자랑했다. 경제적 여유는 예술, 문학, 과학 분야의 활발한 활동으로 이어져, 보르헤스와 같은 세계적 작가들이 등장하며 국제적 문화 수준을 보여주었다. 반면 1910년대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극심한 저개발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부터 이어진 성리학적·유교적 학문 전통과 근대적 서양 학문 수용이 혼재하는 시기로, 김택영, 송진우 등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물리학, 수학,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양자학과 상대성이론 같은 현대 물리학 개념을 학문적 토론이나 글을 통해 접하고 논의했다. 또한 유일한 박사는 제약·의학 분야에서 활동하며 유한양행의 첫 자체 개발 의약품인 1933년 안티푸라민과 1977년 유한락스 같은 중요한 성과를 남겼고, 양자학과 물리학 논의는 일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활용에는 한계를 보인다. 석유 개발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며, 내수 가격 안정을 위해 높은 수출세가 부과되어 농업과 축산업에서 큰 이윤을 내기 어렵다. 노동 유연성이 부족하고 연간 한 달 이상 연속 휴가를 사용하는 문화 등으로 외국인 투자자와 기업들이 정상적인 산업 활동을 수행하기 어렵다. 2024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1인당 소고기 소비량은 약 48.5kg으로, 1958년 98.4kg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치킨 소비량은 49.3kg으로 처음으로 소고기를 넘어섰다. 한국의 1인당 소고기 소비량은 2022년 기준 약 10.2kg으로 아르헨티나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2024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소는 약 5,162만 마리로 인구 약 4,550만 명을 초과하며, 광활한 팜파스 지역의 기후와 전통적인 목축업 덕분에 유지된다. 산업 구조는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기반하며, 농산물과 축산물은 GNP의 약 14%, 총수출의 약 69.3%를 차지한다. 한때 세계 10대 경제국 중 하나였으나, 지속적인 경제 불안과 높은 인플레이션, 재정 적자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2025년 2월 기준 경제 활동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5.7% 상승했으나 1월 대비 둔화되었다. 세계은행은 2025년 아르헨티나 경제 성장률을 5%로 전망했으나, 재정 불안정, 기저 인플레이션 상승, 통화정책 긴축 등으로 성장 전망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한편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시절 국영 기업 민영화를 추진했으나, 2012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가 YPF를 강제 국유화하면서 외국 투자자와 국제 사회의 반발을 초래해 투자 환경에 불확실성을 남겼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춤과 음악으로, 19세기 후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도시와 주변 빈민가, 이민자 공동체에서 발전했다. 초기에는 아프리카계, 유럽계 이민자, 원주민 문화가 혼합되어 만들어졌으며, 이후 20세기 초반 도시 상류층과 국제 사회로 확산되면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탱고는 단순한 춤과 음악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도시적 생활 방식과 정체성을 반영하며, 사랑과 그리움, 사회적 긴장과 열정을 담은 정서적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카페, 살롱에서 발전한 탱고는 문학, 영화, 시각예술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며 아르헨티나 문화 전반의 아이콘으로 확립되었다. 오늘날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수백 개의 ‘탱게리아 Tangaria’가 있으며, 보통 레스토랑 한쪽에 조그만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와인을 즐기며 댄서의 탱고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인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 구조로 인해 글로벌 그린 경제 전환 흐름에서 뒤처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아르헨티나 정부는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과 기후변화 대응을 통한 그린 경제 전환을 새로운 경제 동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각 국가 순위에서 재도약할 수 있는 핵심 전략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러한 결과, 아르헨티나의 재생에너지 부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풍력과 태양광 발전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에너지 안보 강화, 외국인 투자 유치, 일자리 창출, 기술 혁신, 환경 개선 등과 같은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린 경제 전환 과정에서 아르헨티나는 여러 도전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도전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통한 인프라 투자 확대, 그린 본드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국제 협력을 통한 기술 이전 촉진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재 아르헨티나는 그린 경제 전환을 통해 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3년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도 그린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시장 친화적인 방식으로 재생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와 회복 전략」”

2023년 12월 10일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는 자유지상주의와 우파 포퓰리즘 성향을 가진 정치인으로, 주요 정책으로 국가 개혁, 정부 지출 삭감, 인플레이션 억제, 공공부문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취임 초기에는 대규모 정부 개혁과 지출 삭감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데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실업률 증가, 경제 활동 위축, 빈곤율 상승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2025년 10월 26일 예정된 중간 선거는 밀레이 정부의 정치적 입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험대로, 현재 그의 정당인 ʻ라 리베르타드 아반사 La Libertad Avanza’는 국회에서 소수당에 불과하여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의 정책 추진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밀레이 대통령은 경제와 국가 개혁을 지속 추진하고 있으나, 최근 정치적 도전과 측근 부패 혐의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다가오는 중간 선거는 그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는 것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메시가 2023년 인터 마이애미에 합류했을 때, 당시 메이저 리그 사커 최하위 팀이었던 인터 마이애미를 창단 첫 리그컵 우승으로 이끌며 팀의 운명을 완전히 바꾼 사건은 축구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마라도나는 1986년 월드컵 우승과 나폴리에서의 세리에 A 2회 우승 등으로 전설적인 영향력을 남겼으며, 국가대표와 클럽에서 수많은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두 선수는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마라도나는 드리블 돌파와 창의적 플레이를 중심으로 한 ‘인간 드리블러’ 이미지로 극적인 순간과 화려함을 보여준 반면, 메시는 짧은 패스와 드리블, 공간 창출 능력, 경기 전체 조율을 특징으로 하는 플레이메이커 스타일로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경기 운영을 선보인다. 성격과 이미지 면에서도 마라도나는 거칠고 인간적인 면모와 논란, 팬과 미디어에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카리스마적 영웅’으로 평가되는 반면, 메시는 비교적 조용하고 신중하며 성실한 이미지로 논란이 적고, 꾸준함과 완벽함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업적 면에서도 마라도나는 역사적 드라마틱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메시는 2022년 월드컵 우승과 FC 바르셀로나에서의 챔피언스리그 4회, 다수의 리그 우승, 발롱도르 7회 수상 등 지속적이고 높은 성적 기록으로 현대 축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 1986년, 2022년에 FIFA 월드컵에서 우승, 16회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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