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 1
「피네간의 경야」, 그는 하얗게 밤을 지새우다. 오리온의 신탁으로 까만 밤 하늘을 모두 집어 삼키려드는 시리우스가 빛나기에, 어둠에 소록소록 스며든 우리는 「한 여름밤의 꿈」을 노래하고자 한다. 그가 베누스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천공에 은빛의 비옥한 은반을 그린다. “즐거움을 위해 쓰라.” 그와 장단을 맞추어본다. “헤이-호, 헤이-호 노래하라. 푸른 {호랑가시나무}에게 우정은 위선이고 사랑은 어리석을 뿐.”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오베론을 거슬릴가보다. 그러나 시인은 멈추지 않는다. “이 향기 속, 이 정원에선 꾀꼬리도 밤새 노래부르겠지. 허나 밤에 일어날 그 많은 것을 보려면은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걸. 왜냐하면 이 {후로라}의 계절은 희랍 사람들이 말하듯이 생과부 아우로라가 미청년 헤스페루스에 미쳐 몸이 달아오를 때거든. 뒤를 돌아 봐! 그녀가 오고 있어! 쏜살같이! 꽃 만발한 긴 들판 가로질러!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그야말로 밤을 휘몰고 있구나. 날렵한 빨간 신을 신고 해와 더불어 달아난 그를 쫓아가 잡으려 미친 듯이 달려가는구나. 저 사랑의 신음소릴 너 느끼지 않느냐? 「서동시집」, 괴테"
¨현재¨는 미래를 향하는 과거, 과거의 결과는 미래의 예상. 후설이 말하고자하는 것, 우리는 결코 현재를 적을 수 없음에, 그것은 단지 가로방향의 과거와 세로방향 미래의 표상이 된다. 쓰고자 하는 현재가 과거지향retention이거나 미래지향protention이거나 '의식의 흐름'은 도표에서 시간을 지워버린다. “현재는 만약 언제나 존재하는 현재이고 과거로 이행하지 않으면, 이미 현재[시간]가 아니고 영원이다. 그리고 현재의 시간은 마음(anima)속에 아로새겨진 것으로서, 과거의 현재인 기억(memoria), 현재의 현재인 직관 또는 지각(contuitus), 미래의 현재인 기대(expectatio)로 이루어진다. 「고백론」” 시간(빛)이 사라지면 마들렌을 즐기는 ‘의식의 흐름’은 여유롭다. “바바번개개가라노가미나리리우우뢰콘브천천둥둥너론투뇌뇌천오바아호나나운스카운벼벼락락후후던우우크! 「피네간의 경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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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장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가 말하는 천황의 ‘국화’는 지고지순한 평화고, 킬빌Kill Bill을 잘못 떠올리는 사무라이의 ‘칼’은 우리가 생각하는 잔인함이 아닌 ‘이상’이 아닌 것에 절대 굴복할 수 없는 의지를 뜻한다.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카타지케나이’かたじけない 란 지금껏 갈고 닦은 자신의 ‘정신’이 모욕을 당한 만큼 면목이 없음을 설명한다. 여기 그는 나에게 ‘온’정을 베풀었으나 나는 그에게 은혜를 되값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온恩을 받는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채무이상의 무거운 부담이다. 일본인에게 비겁함이란 (신적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받치지 못한 부상병이 ¨정신을 버리고 물질적¨ 치료를 받는 것과 같다. 일본의 제국주의란 일본이 세계 ‘질서의 지도자’로써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FACT일 뿐이다.) 의외로 사무라이는 ‘정의’를 위한 절제가 있고 절도가 있다. 과거 일본 카스트 제도 중상류에 속하는 사무라이는 노동하지 않고 봉건 영주, 즉 다이묘로부터 녹을 받는다. 일본의 카스트는 황실, 궁정귀족, 무사인 사무라이, 농민, 공인, 상인, 그리고 천민계급으로 나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이 배운 ‘신’의 존재를 생각하자. 일본인에게 천황은 ‘신’적인 존재이므로 감히 거역할 수는 존재다. 가미카제神風가 그 신념의 결과이고, 비겁함을 거부하는 일본병사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 카미카제를 천황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여기는 일본병사에게 고해성사는 없다. 미군의 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이 보통 4:1이라면 미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로와 전사자의 비율은 1:120이였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시인 윤동주의 자취를 조금 적고자 한다. “이런 친구도 친구들에게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고치면 어떤가’ 하면 그는 응해 주는 때가 없어요.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해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죠.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질 않지요.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런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요? 어리석다 할까요?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이국 하늘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꽃잎처럼 져 갔습니다. 「윤동주, 상처 입은 혼」”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연주한 「쇼팽의 발라드 1번 G 마이너」에 취한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가 있었고, 후카다 쿠미는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의「사랑스런 추억」에 빠졌다. “봄이 오는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 어느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선비라는 말은 영어로 a scholar, a learned man, a man of virtue다. 선비란 덕, 중용, 그리고 도를 지키는 사람이자, 이이가 말했듯이 학식이 있는 지식인이다. 또한 선비란 학식만이 아닌 정의를 구하고 겸손한 마음과 행동을 겸비한 사람이다. 사무라이, 즉 무사는 선비와 비슷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 그리고 보이스카우트 창립자 로버트 파월 등에게 영향을 준 「무사도」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무사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무사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 무사는 스스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무사는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해야 한다. 무사는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무사는 부정부패를 증오하고 공정성을 존경해야 한다. 무사는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무사는 패배한 적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어야 한다.” 성리학을 참고삼는 선비는 과거 시험을 합격해 조정에서 벼슬을 받아 사대부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손자병법을 따르는 사무라이는 섬기는 주군에게 영지를 얻어 성을 쌓아 일국일성의 주인이 되는 점이 선비와 다르다. *참고.인용: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 호사카 유지】
“올바른 도리, 사람이 쫓아야만 할 길”, 사무라이가 외치는 ‘기리義理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은 쉰들러의 감정과도 흡사하다. 다윈이 옮다면 ‘사자’는 후천적으로 습득한 너무 인간적인 체면때문에 기리를 괴로워하는 셈이다. 분명 나쁜 사자는 없다. 한편 훌륭한 사무라이는 모욕에 해당하는 기리 또한 받드시 갚아야 한다. 중국철학과 대조되는 악의에 대한 보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간단히 오른빰을 맞은 예수가 상대의 오른빰을 때려 응징하는 것이 사무라이식 올바른 도리가 행해지는 대칭적 우주다. 서로 경쟁하는 것은 치욕과 모욕을 부르므로 자제하고, 계획이 반드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승부에 나서지 않는다. 사무라이에게 상대의 정당한 비방은 서양문화에서 흔히 여기는 유희와 친교가 아니며, 그같은 도전적 발언은 일종의 기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살, 자결(하라키리腹切り)은 비극적 현실의 도피가 아닌, 명예롭지 못한 현실을 자위적 폭력으로 응징하는 훌륭한 기리이자 사회적 모범이다.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즉흥적 감성자살이 아니다.
헤겔의 독일인과 헤세의 독일인을 살펴보자. 근사하다. 히틀러의 독일인을 떠올린다. 생각하기 싫다. 그럼 제임스 조이스의 설명(율리시스)이 합당한가. 독일을 방문하는 이유가 니체의 독일 때문인가, 아니면 바그너의 독일 때문인가. 목적은 신들의 황혼인가, 아니면 한 여름밤의 꿈인가. 신이 죽었는가, 혹 죽어 가는가. 사실 사람들이 독일에 방문하는 이유는 oktoberfest 때문이다. 카터 핍스는 인종, 문화, 그리고 여러 요소들이 융합되는 멜팅팟Melting Pot에서 각자의 세계관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따라서 그는 “진화는 미래를 결정된 것이 없는 오픈 엔드”로 비유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종들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식 상태가 어떨지 생각해보며, 다른 종들의 존재를 고려하면서 인간의 활동을 거기에 적응시키기 시작”했다고 알린다. 단 진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환경의 변화 속에서 변이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카터 팝스가 지적하듯 진화는 자연선택과 임의적 돌연변이가 합쳐져서 현재에 도달하는 것이고, 변이는 주어진 환경을 선택하는 진화적 생물일 뿐이다. 「생명의 새로운 과학」의 저자 셸드레이크는 복잡한 유기 화합물 분자들이 어떠한 특정 패턴으로 결정화되는 이유-수렴진화를 생각해 보자-는 그 물질이 이전에도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한편에) 그런 방식으로 결정화 되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동시 역설적이게도 평행이론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장미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장미여야 하는가.
“어떤 세계관이 특정시대에 확실히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류 역사에 걸쳐 지배적인 세계관들이 진화해온 것을 확실히 추적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 특정한 사회를 이끄는 큰 관점이 되고, 그러다가 여러 이유로 이것이 갈라지고, 긴 역사를 거치면서 다른 세계관에게 자리를 내준다. 각 단계에서 드러난 특성들은 거리를 두고 봐야만 명확히 일반화시킬 수 있다. 어느 특정한 사회나 시대의 세부 사항에 너무 물입해서 보면 보편적인 패턴을 볼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이 되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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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혹은 일요일에 존재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시간이 멈춘듯 매우 느리게 간다면 우리는 관측되기 전까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혹은 동시 일요일 모두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양자역학이다. 좀 더 나아가 공상과학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Day of Uranos, Day of Neptunus, Day of Ceres, Day of Pluto, Day of Haumea, Day of Makemake, 또는 Day of Eris이다. 존재는 시간에 비례될 때 한곳에 머물게 된다. 만약 당신이 슈뢰딩거라면 무엇을 관측할 것인가. “영원한 흐름은 언제나 양쪽 영역(과거와 미래)을 통해 그 안에서 모두를 압도하면서 모든 시대를 이끌고 간다. 릴케, 두이노의 비가” 카를로 로벨리는 열역학 법칙을 이용해 ‘이 세상의 미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 즉 과거의 상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쉽게 사물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완전한 ¨앎¨이다. 알아가며 ¨삶¨을 (미학적으로) 살아갈 때 시간은 과거, 오늘, 미래로 분리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꿈을 알아가는가. 꿈은 오늘인가. 꿈은 시간의 지배에 속하는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정지해 있는 물체보다 시간이 천천히 간다. 그 의미는 동시 모든 곳에 존재가능하다는 조건하에 시간은 초월된다는 것이다. 은하계 중심에는 거대 중력장을 만드는 가르강튀아 블랙홀과 같은 초거대질량의 블랙홀이 자리한다. 빛까지 휘게 만드는 거대 중력장 근처에서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그러나 제 3자인 관찰자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양자역학을 떠올리는 우리는 잠시 이것을 완전한 (완전하고자하는, 현행 지금,) ¨앎¨으로 부르자.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이 ¨앎¨이 눈(¨삶¨)으로 부터의 봄(¨살아가는 것)¨과 눈(¨삶¨)과 짝을 이루어 색깔(¨미¨)을 출산해 내는 것 사이에서 운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에머슨은 ¨눈¨이 ¨흼¨을 ¨봄¨으로 ¨미¨를 얻어내는 것을 과학의 목적, 즉 자연의 이치를 캐내는 것이라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수상록」에서 에머슨은 세계를 코스모스, 즉 미라고 불렀다. 미란 아름다움이다. “새벽은 나의 앗시라아이다. 일몰과 월출은 나의 파포스이고, 상상도 미칠 수 없는 신선경이다. 대낮은 나의 지각과 오성과의 영국이 되고, 밤은 나의 신비한 철학과 꿈의 독일이 될 것이다. 「수상록」” (담배 영기처럼 곧 사라지는 것, 아침이슬처럼 어느새 증발해져 버리는 것, 헛되고 덧없는 것들은 카오스를 위함인가. “자연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물방앗간 뒤에 있는 계곡의 생기 있는 고요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가. 호머나 셰익스피어도 말로써 나에게 재현해 줄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없었던가. 잎도 없는 나무들은 해질 무렵에 푸른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화염의 뾰족탑이 되고, 별 같은 형상을 한 죽은 꽃덩굴, 서리에 덮여 고갈한 모든 줄기나 그루터기는 이 소리 없는 음악에 무엇인가를 기여한다. 「수상록」”) 「사물과 공간, 1장」에서 후설이 말하는 ‘현행 지금’aktuelles Jetzt은 ¨앎¨이다. ¨앎¨은 ‘과거 지금’과 ‘미래 지금’도 아니며, 주어지지 못하므로 ‘상상되는 지금’ 또한 아니다. ‘곧은 아침 총총히, 늘어진 햇살에 물든 오후 이슬마냥 증발되고, 피곤한 하루 젊은 저녁 노을로 급히 물드는 지금이다.’
중력이 강한 별, 물질을 당기는 힘이 크다. 다시말해 중력이 강한 것은 물질의 시간을 지체시킨다. “무엇이 ‘지금’과 ‘막 지나간’ 사이의 경이로운 차이를, 늘 새롭게 산출되는 지금과 늘 새롭게 과거로 가라앉는 지금의 영원한 드라마를 이해하게 만드는가? 이 때 모든 지금과 모든 과거는 영원한 운동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은 계속 점점 더 뒤로 가라 앉으며, 과거로부터 더 먼 과거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시간은 모든 시간적인 것을 과거의 심연으로 추락시키는 영원한 흐름으로 현출하면서도, 다른 한편 영원하게 응고된 형식이기도 하다. 「사물과 공간, 4장」” 물질은 영원히 운동하는가. 그럼 존재는 늘 아름다운가. 장미의 본질이 꽃인가. 계절이 지고 꽃은 시들지만 열매는 남겨진다. 열매는 완전한 ¨앎¨이다. 알은 세계이고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곳곳 호접란이 만발해 있다. 내가 나비인가. 현상과 형상 사이 (고타마 붓다가 설한 인과법, 즉) 인연생기因緣生起다. (因인할 인 緣인연 연, 戀사모할 연 人사람 인) 쑥-대강이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고통의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주는 잠, 매일의 삶을 마감 짓는 잠, 힘든 노둥 뒤의 샤워, 상처받은 마음의 항유, 위대한 자연의 두 번째 과정, 인생의 향연의 자양분을. 「맥베스」”
¨앎¨으로의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그래서 현재 우리는 수면이 필요하다. 졸음, 잠에 빠져드는 세타파 4-7.99Hz - 잠자기 전 해마의 단기 저장소에 있던 오늘의 기억이 깊은 비렘수면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기억을 더 안전하고 영구적인 피질로 운반한다고 한다. “해마의 단기 저장소로부터 피질의 장기 주거지로 어제의 기억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어제의 경험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동시에 다음 날 새로 배울 것들을 위해 단기 저장 능력을 확보한 채로 깨어난다.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신경과학자인 매슈 워커에 따르면 잠의 단계는 얕은 비렘수면, 깊은 비렘수면, 그리고 램수면으로 나뉜다. 이 단계들은 밤동안 4-6회 정도 90분의 주기로 반복되고 뇌의 각기 다른 영역에 해택을 주게 된다고 한다. 쉽게 얕은수면인 렘수면은 낮동안의 정신적인 피로를 회복하게 해주고, 깊은 수면인 비렘수면은 낮동안의 신체적인 피로를 회복하게 해주어 신체가 노폐물을 처리하고 새로운 영양분, 즉 포도당과 글리코겐 등의 공급하게 도와준다. 매슈 워커는 왜 비렘수면과 렘수면이 반복되는지, 또 왜 초반에는 비렘수면이 우세하고 후반에는 렘수면이 주도권을 쥐는지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먼저 아주 많은 재료를 돌림판 위에 올려놓는다(밤마다 잠이 들 때 새롭거나 오래된, 저장된 자전적 기억들의 덩어리 전체가 올라온다). 우선 남는 재료를 한 움큼씩 떼어 낸다(길게 이어지는 비렘수면). 그런 뒤 잠시 집중적으로 몇몇 부위를 세부적으로 다듬는다(짧은 렘수면). 첫 단계를 마치면, 두 번째로 깊숙이 손을 넣어서 한 움큼씩 떼어 내는 작업이 진행되고(다시 긴 비렘수면 단계), 이어서 좀더 세부적으로 다듬음으로써 군데군데 세밀하게 형태가 빚어진다(좀더 긴 렘수면). 이런 작업 주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면서, 조각의 균형점을 서서히 옮긴다. 원래 재료 덩어리였던 것에서 이제 모든 핵심 특징들을 다 빚어냈다. 중요한 점토만 남아 있으므로, 조각가의 작업과 필요한 도구는 남아 있는 점토의 형상을 다듬고 특징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쪽으로 옮겨 가야 한다(렘수면의 기능이 주로 필요하고, 비렘수면이 할 일은 거의 없다).” 문제는 8시간 자는 사람이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일어나면 계산상 25%의 할당을 채우지 못한 것이나, 사실은 매우 중요한 렘수면의 60~90%를 손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매슈 워커가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기반의 기억을 영구화하고, 더 나아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던 기억까지 복구하는 일을 맡은 수면 유형-비렘수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해온 우리는 수면의 기억 혜택을 증진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일도 시작했다. 성공을 거둔 방식은 두 가지다. 수면 자극sleep stimulation과 표적 기억 재활성화targeted memory reactivation다. 수면은 전기 뇌파 활성 패턴으로 표현되므로, 수면 자극 접극법도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자기 전 마들렌을 먹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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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그 여름의 하얀 밤白夜같은 빛줄기가 시시어스와 히폴리타에게 쏟아지고 활짝핀 벚나무를 동무삼은 늘씬한 흰 자작나무가 그들에게 제촉한다. “아름답지 않아요? 비탈에 몸을 갸우뚱하고 있는, 저 하얀 레이스 같은 나무를 보면 뭐가 떠오르세요?” 그들이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갈 길을 기쁨의 하얀길이라고 하자. 진노랑 빛, 장미 빛, ‘오묘한 초록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연못 어귀 늪에 개구리들이 애처롭고 정겨운 합창을 불러주고’, 하얀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에서 흐르는 향기가 반짝이는 호수 주위에 만발하여 이에 취한 모두는 혼수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들에게 “나흘 낮이라 해도 한순간에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 것이고, 나흘 밤이라 해도 꿈결처럼 빨리 흘러갈” 것이다. 그럼 밤하늘이 막 잡아당겨 팽팽해진 은빛 활 같은 초승달이 「뜻대로」 적히면 한낱 배우같은 남녀에게 오배론이 「뜻대로」 꽃즙을 뿌려댈 것이다. “못해요. 그렇게 시간을 어긴다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차라리 달팽이를 애인으로 삼는 게 낫겠어요.” 그것이 헤라의 영광이다, 그것은 하이멘의 은총이다. 찬양하라 수호신 하이멘의 이름을! (조이스의 볼맨 목소리로) 아멘! “미래의 앞에서 멈춰선 손과 발은 조용한 목소리에 풀어져가고, 외치면 외칠수록 그리워져 오는 건 하나의 생명. 한여름의 빛. 당신의 어깨에 흔들렸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깨져버린 하얀 그릇. 바람이 날려버린 꽃잎. 둘을 띄워보내고도 보이지 않는 강은 노래하면서 흘러가고 있네. 비밀도 거짓도 기쁨도 우주를 낳은 신의 아이들이야.” 센과 치히로는 행방불명이야. 저길 봐, 치히로는 ‘안개 너머의 이상한 마을’에서 냅다 토끼를 쫓아가고 있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문명을 꿈꾸다.
“바빌로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은 어떤 행성들은 행운을 가져오고 또 어떤 행성들은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화성은 전쟁을 의미하고 금성은 {사랑}을 뜻했다. 이들은 몇 개의 신성한 행성들에 하루씩을 헌정했다. 신성한 별들은 태양과 달을 포함해 모두 일곱 개였기 때문에 7일을 한 묶음으로 하는 일주일이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들도 일요일(해의 날), 월요일(달의 날)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당시 사람들이 발견한 행성은 다섯 개였으며, 이것들은 각기 마르스(화성), 메르쿠리우스(수성), 주피터(목성), 베누스(금성), 사투르누스(토성)이라 불렀다. 유럽 여러 나라의 요일 이름에는 아직도 이들 행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서 화요일은 ‘마르디’, 수요일은 ‘메르크레디’, 목요일은 ‘죄디’ 그리고 금요일은 ‘방드르디’이다. 토요일의 경우는 영어를 보자. 영어에서 토요일은 ‘새터데이’이다. 독일어의 경우에는 좀 더 복잡하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이름이 각각에 상응하는 게르만족의 신들 이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화요일인 ‘딘스탁’은 ‘날’을 뜻하는 ‘탁’과 ‘치우’를 합친 말일 텐데, 게르만족에게 치우는 마르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이었다. 마찬가지로 목요일인 ‘도너스탁’은 주피터와 유사한 게르만족의 신인 ‘도나르’와 관계가 있다. 평소 우리가 쓰는 요일 이름에 이처럼 진기하고 중요한 이야기, 수천년이나 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곰브리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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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울타리를 치고 이것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문자가 발생했고, 고로 사회는 법을 필요로 했다. 실크로드 이전에는 누구나 자신의 법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아직은 ¨특수하고 상대적¨인 것을 비교할 수 있는 더 많은 견식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6대륙 각지에 사람들은 모두 ¨맹인¨이나 다름없었다. 법을 시행하기 위해서 지배층의 생성은 불가피했고, 농노와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을 섬겨야 했다. 농경사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아프리카(람세스), 아메리카(테오티우아칸), 아시아(수리야, 미트라), 오세아니아, 중동, 유럽(히페리온)에서 태양신이 등장했다. 그러나 기후제를 드리는 방법은 모두가 달랐다. 그리고 율리우스력이 시행되기에 있어 3,05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시간(그리니치 표준시)을 통일하기에 있어 1,929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의 시장경제가 형성되어야 했다.
아프리카 혼곶을 떠난 최초의 인간이 아라비아 해안을 건너 상륙한 곳이 인도의 케랄라Kerala 였을 것이고, 다시 인류는 인도의 남쪽 끝 코모린곶에서 출발해 호주와 인도네시아로 뻣어나갔을 것이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의 산에는 칼라르부족이 살고 있는데, 그 지방에서 우연히 DNA와 Y염색체를 검사하던 중 한 남성에게서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현생인류가 소유한 M130유전자가 발견됐다. 인더스 문명은 2,601BC에 시작되는데, 학자들은 7,000BC경에 아프리카 떠난 이민자들이 아프가니스탄 고원에 뿌리를 내린 후 인도의 문명이 발탁되었다고 본다.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주의 카치 평원에 자리한 메르가르의 유적지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인더스 문명의 고대 도시 모헨조다로 유적은 분쟁이 없던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인더스 문명 시기에도 현재처럼 인구가 많은 지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나 권력자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없는데도 복잡한 사회가 형성된, 이상한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라고 마크 케노이어는 밝힌다. 또 그는 역사상 이런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인류가 언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 5만년 전이고, 당시 인도에 뿌리를 내린 이민자들은 “아르타(세속적인 부와 성공), 카마(쾌락과 사랑), 다르마(미덕), 모크샤(지식과 해방)”로 인도의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 고누르 테페와 사리아니디 유적지를 훌터보면 베다 시대에 존재한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쓰는 미타니 왕조를 확인할 수 있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점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아리아인이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의 지역으로 퍼져나가 영어, 웨일스어, 게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기원을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인류사에서 핵심적인 사실 한 가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알려진 서남아시아의 한 지역이 일찍부터 중요성을 띠었다는 점이다. 그 지역은 도시, 문자, 제국, 그리고 우리가 (좋든 싫든)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발전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총균쇠」” 인도는 언어만을 꽃피운 곳이 아니다. 인더스 문명을 시작으로 무굴 제국에 속한 카불계곡에는 여전히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세상의 모든 신과 숨쉬고 동행한다는 인도는 인구수 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인지 인도는 타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포용적이다. 무굴 제국 바부르의 유언장을 보면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종교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종교의 예배 장소를 파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마이클 우드처럼 인도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당연히 델리에서 꾸뜹미나르를 확인하고 시크 교도에게 가장 성스럽다는 황금사원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신성하다는 갠지스 강에서 뿌짜를 확인하고, 콜카타에서 칼리사원을 방문한 후 럭나우에서 아잔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뜻의 바라나시에서는 고타마 붓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제 3대 왕인 아소카는 불교에 귀의해 많은 불교적 업적을 남겼는데,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200년 후 아소카가 보수한 불교의 4대 성지로 석가모니가 태어나신 룸비니,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닮음을 얻은 장소 붓다가야,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장소 녹야원, 그리고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쿠쉬나가라가 있다. 또한 열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난 뭄타즈 마할을 위해 샤지한이 지은 '무굴제국이 사랑했던 수피파 성자의 꿈을 현상화한 신비스러운 지도, 심판의 날을 상징하는 지도'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 역시 놓칠 수는 없다. 샤지한의 타지마할은 한 여자를 위한 것이나 사실 이 건물이 심판의 날에 신이 앉을 옥좌의 상징을 뜻하기도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파테푸르 시크리에 조성된 악바르의 붉은 사암제 성곽은 이슬람과 힌두교 건축이 융합된 걸작이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그의 손자 샤지한 대에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더 타임스 세계사」”
마이클 우드의 설명처럼 제국주의는 역시 제국주의다. 식민지는 식민지고, 제국주의 앞서운 지배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우월한 민족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있다. 18세기에 동인도회사가 권력을 잡고 인도가 독립하기 까지 영국은 인도를 200년간 통치했다. 식민지 기간동안 영국과 인도는 수많은 문화교류를 실천했다. “하지만 영국과 인도의 관계가 계속 이런 식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제국의 요구가 너무 강했던 탓이다. 18세기에 두 나라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면, 19세기에는 서로 관계가 멀어졌고, 20세기에는 엄청난 비극과 비용을 감수하여 이혼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이야기」”
인류가 문명을 기록해 남기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맥상통하는 실크로드는 우선 흑해, 카스피 해, 아랄 해 일대에서 스키타인이 개척하기 시작해 몽골 대초원, 톈산 남쪽 기슭, 카자흐스탄 대초원, 남러시아 초원인 유아시아를 대륙을 관통하는 초원길을 포함하며, 기원전 2세기 즈음 장건(164-113 BC)이 개척한 사막길, 즉 중국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과 쿤룬산맥을 지나 파미르 고원과 카라쿰 사막에서 초원길로 이어지는 오아시스 길, 그리고 1세기경 개척된 바닷길로 나뉜다. 곧 서기 97년 장건의 뒤를 밟은 감영이 대진국을 찾아 나섰다. 대진이란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로마를 지칭할 때 쓴 Dasina에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는 중국의 아름다운 실크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서기 627년 현장이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횡단해 657부의 경전을 520상자에 불상과 함께 담아 장안으로 돌아왔다. 서기 757년엔 두환이 아프리카를 가게 되는데, 그는 오늘날 카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시리아, 이라크, 이란,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등 3개의 종교권을 여행하게 된다. *참고.인용: 실크로드 - 리웨이
동과 서의 문명과 문화가 교차했던 곳, 바로 사막길과 초원길이 만나는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다. 초승달 지대는 인류 역사상 농경사회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최초의 정착지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형성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인류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기거했던 동굴을 떠나 최초의 도시를 형성한 곳이다.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난 것은 약 22만~19만 년 전이였고, 6만 5천년 전에 유럽으로, 1만 6천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했고, 드디어 2만 3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도시문명의 길을 닦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가우디처럼 수없이 관찰하고 사유한 끝에 르꼬르뷔제와 같은 사람과 함께 도시계획을 추진한 것이 분명하다.) 긴 빙하기가 끝나자 각 대륙에서 차츰 문화가 형성되고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문자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문명에서 설형 문자를 개발하면서 부터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동토들이 들어나기 시작했고, 인류는 더이상 수렵채집을 위해 이동하지 않고 비옥한 땅에서 기존 자원을 이용해 동식물을 길들이는 방법(케년이 요르단에 있는 성서의 예리코의 고대 마운드에서 유적을 발굴한 결과 농경시대의 기원은 대략 서기전 8,350년~7,300년)을 모색했다. 이것이 인류의 최초의 농경사회의 기원이였다. 최초의 작물로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있는 완두콩, 강남콩 등의 꼬투리 식물이 채택되었다. 감자는 인데스에서 처음 재배되었고, 마니옥, 얌, 토란, 고구마는 열대지방에서 기르기 시작해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초창기에 인류는 양, 염소, 돼지, 소를 기르다가 농업과 교통을 위해 당나귀, 말, 낙타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류는 수렵채집 때 처럼 균형있는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없었다. “문명이라는 것은 이제 토종이 풍부한 지역의 잘 보호된 구석에서, 사람이 노력하여 가꾼 저 약하디약한 꽃이 아니다. 토종은 그 왕성한 활력 때문에 위협적이긴 해도, 그 반면에 변화무쌍한 강한 모종을 새로 만들어낼 능력도 갖고 있다.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슬픈열대」”
“네페르타리가 ‘수련꽃들의 장소’를 떠날 결심을 하자, 람세스는 그녀를 ‘위대한 초원’이라 불리는 ‘왕들의 계곡’으로 데려갔다. 18왕조 이후의 역대 파라오들이 쉬고 있는 곳이었다. 왕과 왕비는 람세스1세와 세티의 무덤 속에 오래 머물렀다. 모든 그림들이 걸작품이었다. 왕비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둥에 새겨진 그림과 신성문자들을 보았다. 기둥에는, 죽은 태양이 젊은 태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태양의 변모의 여러 국면들을 드러내는 ‘숨겨진 방의 책’이 새겨져 있었다. 태양의 변모는 파라오의 부활의 모델이다. 태양신 라, 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를 보기 위해 자신의 눈과 눈의 신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라는 세계를 보게 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눈엔 눈물이 고였다. 파라오의 마음이 이러하리라. 「람세스」” 고대 이집트어 람세스Rameses는 태양신 라Ra가 그를 낳아주었다라는 의미다. 성서학자들은 구약 출애굽기의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추정하기도 한다. 람세스 2세가 출현하기 전에 아크나톤은 태양 대찬가에서 태양신을 찬양한다. “우리 눈에는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하시는 일 그 얼마나 많은지. 아, 하나뿐인 신, 그 누구에도 비하지 못할 분! 당신의 홀로 계시면서 당신의 뜻에 따라 이 땅을 만드셨습니다. 사람과 가축과 길짐승들을, 자기 발로 일어나 땅 위를 돌아다니는 그 모든 것들을,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시리아와 누비아 같은 이웃 나라 그리고 이 이집트 땅을.”
칭기즈칸의 몽골은 최전성기에 유럽대륙 대부분과 아시아 대륙 전반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였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징벌에 나섰는데, 이 징벌을 통해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을 정복하여 킵차크한국, 일한국, 차카타이한국, 오고타이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는 고려, 일본, 미얀마, 인도차이나 반도와 자바 등지를 침범하기도 했다. “몽골족이 세계 각지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담한 전략, 철통같은 기강, 기발한 정치선전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이 상대편의 허술한 조직 및 무능과 맞물린 결과였다. 「더 타임스 세계사」” 칭기즈칸은 징벌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설립하였으나 문제는 그가 이 방대한 제국을 통치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가 역사상 유례없는 이 방대한 제국을 이룩한 것은 분명 그가 말 위에서 보여준 뛰어난 지도력과 그의 용맹한 유목민 전사들 때문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을 건설하고 그의 전사들과 후손들이 말에서 내려왔을 때 제국의 명목은 증발한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은 중동이였으며, 고대문명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하여 히타이트, 아시리아, 헤브라이,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등 인류가 문화의 기초를 다진 곳 역시 바로 중동이다. 페니키아의 표음문자의 경우, 그리스에 전해져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 통일된 칼리프 체제가 무너지고 나자 수니파의 셀주크튀르크족과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가 무슬림의 두 진영을 이루었다. 무함마드의 타계 후 이슬람에서 칼리파 시대가 펼쳐지는데, 칼리파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칼리파가 되자 시리아의 무아위야와의 갈등이 알리 세력들을 이탈하게 만들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시아파를 결성하게 만든다. 이 시기는 이슬람에 있어 정치적 격변과 대대적인 문화 발전을 이룬 때이기도 하다. 특히 파티마 왕조의 통치하에 이집트는 산업 호황을 누리고, 카이로는 교역을 위한 화물 집산지로 거듭난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수니파의 셀주크튀르크족이 이란에 발을 들이고 바그다드를 점령한 후, 수니파의 아바스 칼리프를 최고권자에 앉힌다. 그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항구를 통해 고급 직물과 향신료들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탈리아는 십자군을 불러내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된다. 결국 무슬람과 십자군의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아슈켈론을 비롯한 예루살렘 인근 땅들이 수중에 들어오고 나자, 살라딘은 이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공략을 마음먹고 만전의 노력을 기울였다. 연안 곳곳에 흩어져 마음껏 약탈과 파괴를 일삼던 그의 병사들도 다시 합류했다. 그러자 살라딘은 하느님에게 의지해 그분 손에 자신의 뜻을 맡기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성공의 문이 활짝 열려 그에게 어서 오라고 재촉하니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터였다. 「살라딘의 진기하고도 비범한 역사 - 이븐 샤디드」” *참고.인용: 더 타임스 세계사 - 리처드 오버리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인들에게 강탈자들을 처벌하러 왔다고 말하며 자신은 알라와 그의 예언자, 그리고 쿠란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 자바르티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당신들의 권리를 압제자들로부터 되찾아줄 목적으로 이곳에 왔소’라는 말은 그가 한 최초의 거짓말이자 꾸며낸 위선일 뿐이다.” 그리고 1,917년 머드는 영국의 침략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이방인들의 폭정에 시달려왔던 당신들을 구해주고 바그다드인들이 번창하도록 도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전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아랍 세계 분할안에 합의한 상태였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제국에 포함될 새로운 영토였다. 이같은 끊임없는 침략과 제국주의의 모든 현상은 16세기 아랍 세계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1,516-1,830)에서 기원한다. 16세기 전환기에 지중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하는데, 에스파냐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그라나다를 함락하면서 에스파냐에서 이슬람 통치는 종식된다. 아랍의 근대 역사를 크게 나누면 오스만 시대, 유럽의 식민 시대, 냉전 시대, 미국의 지배로 나뉜다. 그 중 지난 4세기 동안 아랍을 통치한 오스만은 수없이 변화하고 국경을 새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오스만은 1,699년 유럽에게 크로아티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포돌리아, 우크라이나를 상실하고 세입 증대를 위해 관직과 지방의 농지를 경매에 붙친다. 19세기 오스만은 새로운 규칙을 도입해 모든 오스만 신민에게 행정, 병역, 세금과 같은 영역들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오스만이 페르시아와 흑해 연안, 발칸 지역에서 바르게 팽창하던 시기에 아랍은 제국에 편입되었다. 제국 영토의 팽창 속도가 새로 정복한 지역에 적합한 행정가를 양성하고 파견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넘어섰다. 이에 오스만 제국 중심부에서 가까운 지역들-시리아 북부의 알레포와 같은 도시-만이 오스만의 표준을 따르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서 먼 지역일수록 오스만은 기존 정치질서를 보존하며 원활한 통합을 추진하고자 했다. 관념론자이기보다는 실용주의자였던 오스만인들 역시 아랍인들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제하기보다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하는 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정복 이후 초창기에는 아랍 지역에 대한 오스만의 통치방식이 매우 다양했고 광범위한 자치를 그 특징으로 했다.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그러나 발칸에서 입지가 약화되면서 제국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또한 많은 지방 영주와 국가들이 독립을 원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1,875년 오스만의 파산 사태로 인해 유럽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의 분할안을 검토하면 발칸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나누어 가지고 시리아는 프랑스, 그리고 이집트와 주요 지중해 섬들은 영국에게 맡기자는 제안을 한다. 러시아에게 완패한 오스만은 1,878년 베를린 회의가 제시한 조건에 승락하게 되고, 유럽 열강은 오스만 영토의 첫 분할에 착수한다. 불가리아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했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에게,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유럽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뒤에야 민족적인 자각의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집트인’, ‘리비아인’, ‘튀니지인’, ‘알제리인’ 또는 ‘모르코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랍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민족적인 호칭들은 어떤 의미 있는 정체성도 부합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에게 누군인지 또는 어디 출신인지 질문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극도의 지역적인 정체성을 내세웠을 것이다. 예를 들면 출신 도시(‘알렉산드리아인’)나 소속 부족, 기껏해야 출신 지역(‘카비일 산맥’)을 밝혔을 것이다. 또는 이슬람 움마(ummah, ‘공동체’)와 같은 좀더 큰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규정했을 것이다.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그리고 얼마있어 천천히 팔레스타인에서 시온니즘이라는 바람이 불어오고, 얼마 후 나치주의가 등장하여 홀로코스트가 1천1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곧 영국군의 1,948년 소등나팔을 불고 깃발을 내린 후 팔레스타인에서 홀연히 떠나버렸고, 결국 오스만이 남겨준 아랍 제국이라는 명목하에 이제 막 독립한 국가들은 아랍 세계의 세력 균형을 서로가 바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일으킨다. *참고.인용: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 유진 로건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피사로의 이슬라델가요의 13인은 건설된지 이제 막 100년이 된 잉카제국에 도착했다. 그곳은 파라카스 문명과 나스카 문명이 번성한 곳이였다. 나스카인들은 땅에 거대한 기하학적인 도형과 동물의 형상을 새긴 것(지오글립스)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해수면에서 2,430m나 되는 산맥의 정상에 고대 요새 도시이자 ‘잃어버린 도시’, ‘하늘에 떠 있는 세계’ 마추픽추를 지었다. 그곳을 둘러본 피사로는 에스파냐로 돌아가 왕에게 페루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5년 후인 1532년, 피사로가 63명의 기병과 2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툼베스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전쟁과 질병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연두는 아스텍 인구의 절반을 사망하게 만들었고, 이로인해 카리브해 지역 인구 또한 급감했다.) 아타우알파와 그의 이복형제 우아스카르의 권력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손쉽게 아타우알파를 제압한 피사로는 그의 몸값으로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양의 황금을 얻어내고 본보기로 그를 처형하게 된다. ‘위대한 잉카’에 300년간의 에스파냐 식민지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정복자들의 부를 위한 과다한 착취와 강제노동의 쳇바퀴 속에 빠져 버린다. “에스파냐 왕이 잉카의 자리에 앉아 중앙집권제를 계승했지만, 그는 모두를 위한 부의 재분배를 하지 않았다. 잉카의 공물은 경제구조에서 균형과 순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신의 아들인 잉카는 자신의 신민에게 신의 가호를 내려 줘야 했고, 사회질서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온전과 보상을 수여했다. 특히 잉카는 병자나 노인, 일할 수 없는 사람을 부양하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기근이 들면 잉카는 창고에 저장한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납부한 공물을 소비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피정복민들에 대한 이해 - 나탕 왁텔」” 잉카에 의한 물품의 중앙 집중은 재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에스파냐의 공물은 그저 일반통행이였던 것이다. “피사로가 도착한 지 200년이 흐른 후, 안데스 세계는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극도의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고, 에스파냐인의 오만함 앞에 분노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속출했다. 시간이 지나자 식민주의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잉카 왕국이 재건되었다.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에스파냐의 억압에 대한 반란이 에콰도르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안데스 전지역에서 터져나왔다. 1,822년과 1,824년 사이, 몇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콜롬비아와 페루, 볼리비아가 독립을 획득했다.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카르망 베르낭 」” 【1,839년 10월 3일,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뉴욕을 떠나 유카탄 반도로 떠났다. 1,821년 유카탄은 멕시코의 다른 지방과 함께 독립을 향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도착한 당시 유카탄은 정부군과 원주민 반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 앞서 폭풍의 전야와 같은 곳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야 유적지 치첸이트사와 마주한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유카탄 여행에서 마주친 일들」이라는 책을 퍼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차차 마야 문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고대 마야 문명은 15세기 스페인이 들어온 뒤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캐더우드와 스티븐스의 스케치와 출판물로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참고.인용: 인류의 역사 - 제레미 블랙, 고고학의 역사 - 브라이언 페이건
1,789년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1,793년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승승장구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략하고 프로이센을 물리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되나 1,802년 스페인, 그리고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지나친 욕심의 댓가로 러시아군에게 패하고 만다. (1,798년 나폴레옹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였던 이집트 나일 강에 도착한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이집트 연구소를 세우는데, 1,799년 6월 나일 강 삼각조 로제타 근처에서 군인 하나가 방벽을 세우다가 바윗 덩어리 사이에서 서기전 196년에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내린 명령이 적힌 돌을 발견한다. 이것을 계기로 학자들은 이집트 전역을 여행하면서 유럽과는 판이하게 다른 건축물들과 유물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파라오 신전에서 람세스 2세의 거대한 동상을 끌어내었고, 그것은 결국 영국박물관으로 안착된다. 제국주의에 빠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했으나 학문적인 성취는 이룬 것이다. 영국 혼슨에서 주먹도끼와 매머드 뼈를 출토한 것 이외 나폴레옹의 발견은 고고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고고학의 정식 기원은 1,841년 프랑스의 외교관 폴 에밀 보타와 영국의 탐험가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이라크 북부에서 성서에 기록된 니네베를 찾아내고서 부터다.) 결국 1,814년 폐위된 루이 18세가 취임하게 되고,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추방당한다. 1,815년 후 50년 동안의 탐험으로 유럽은 새로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중남미 식민지는 해방되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모든 식민지를 빼앗기고 만다. 이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은 싱가포르, 홍콩, 나탈, 버마, 라오스를 식민지화하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된다. 한편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나, 프랑스는 잃어버린 제국을 만회하기 위해 알제리, 타히티, 마르키즈, 그리고 세네갈로 식민지를 확대한다. 당시 제국주의 대한 꿈은 유럽에만 있지 않았고, 미국 역시 필리핀을, 그리고 일본은 대만과 조선을 침공한다. 곧 유럽 열강들의 베를린회의에서 아프리카에 관한 협약이 체결된 후 1,880년부터 1,913년 사이 아프리카의 분할이 최고치를 찍는다. 제국주의적 팽창의 원인은 원자재 확보와 값싼 노동력이였다. 곧 프랑스, 영국, 독일, 포르투갈,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이 아프리카 쟁탈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는 저항할 수 없었으나 유일하게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던 것은 기존의 유럽 정착민들이였던 보어인이였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우리가 아프리카의 주인이였습니다.. 보호령이라는 불편한 장치가 없어도.. 우리가 바다의 주인이며, 원주민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그러한 지위가 아무리 편리하더라도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이 해안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가 들어와 그중 일부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아루런 힘이 없었습니다. 솔즈베리 경” *참고.인용: 더 타임스 세계사 - 리처드 오버리
1,815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는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중상주의, 즉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폐기하면서 유럽의 식민제국은 축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식민 제국은 점점 늘어났다. 당시 유럽엔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생산된 물건들은 제시각에 곧바로 팔려나가야 했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팔리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면 공장은 문을 닫게되고, 제2차 산업혁명이 쏟아낸 일자리들은 소리없이 증발되어 사회는 ‘경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세계적 곡물 과잉 생산으로 인해 1,929년 봄에 시카고 거래시장에서 곡물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E. H. 카 평전) 따라서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팔지못해 경제 공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생산된 물건을 외국에라도 팔아야 했고, 따라서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일본 역시 상황은 같았다. 물건을 팔기위한 것만이 아니라 방직을 위한 목화나 휘발유 생산을 위한 석유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1,700에 지중해로 부터 프랑스의 면화 수입은 21만 킬로그램이었으나 1,789년 쯤은 거의 1,100만 킬로그램으로증가했다. 식민지가 늘어나자 더 많은 공장이 필요했고, 더 많은 상품이 쏟아지자 더 많은 식민지가 필요한 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그리하여 메테르니히 시대의 유물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지구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괴테의 말처럼 빛이 강렬한 곳에도 짙은 그림자는 있다는 것일까. “소비에트 정권은 계획적인 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그 자체로 우리의 경제적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선례를 서유럽에 적용하려는 시도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현재 러시아는 광대한 미개척 영토와 급속한 인구 증가, 낮은 생활수준을 가진 경제 발전의 원시적 단계에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천연자원 이외에는 중요한 수출품이 없고, 기본 소비재를 거의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국내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결합된다고 해서 과잉생산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독일의 선례는 훨씬 더 교훈적이다. 독일에서는 1,933년 이후 경제의 계획화가 줄곧 고도로 발달한 산업 경제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경제는 10년 전부터 해외에서 들어오는 집중적인 자본 투자의 자극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상당한 정도로 과잉생산의 징후를 보여 왔다. 이런 독일이 채택한 방법은 계획적 소비라는 강령이었다. E. H. 카”
1,87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성장한 제국 체제가 1,930년이 되면서 세계 영토의 84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혁명 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지배력을 강화시킨다. 하버드 C. H. 베크가 설명하듯 “제국은 다양한 인간 공동체들의 상이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기회, 문화적 역량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강력한 동인”이였기에 열강들의 정력적인 제국 건설과 식민주의를 향한 열망은 러시아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우선 러시아는 폴란드의 동쪽 절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핀란드, 아르메니아, 조지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에서 몽골인들까지, 오스만튀르크에서 콩키스타도르까지, 티무르에서 쉴레이만 1세와 그 이후까지 제국적 충동의 주된 결과 중 하는 종교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든 상업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든 새로운 공간을 획득하고 이를 새로운 제국적 힘의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흔적이 두드러진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세계사 - 하버드 C. H. 베크」”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의 정복과 이주가 계속되었으며, 영국은 싱가포로, 말라카, 홍콩, 나탈, 버마, 라오스로 제국을 확장해 나간다. 그리고 프랑스는 알제리를 정복하고 타히티와 마르키즈를 합병했으며, 세네갈과 인도차이나로 식민지를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일은 서남아프리카, 카메룬, 동아프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섬들을 얻고, 이탈리는 트리폴리,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얻는다. 다시 영국은 나이지리아, 케냐, 우간다, 로디지아, 이집트, 수단, 피지, 보르네오, 뉴기니 일부에 지배권을 확립한다. 그 후 20세기 초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란스요르단, 탕가니카에서 신탁통치를 하게된다. 또한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토골란드와 독일령 카메룬도 공동으로 신탁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 제국의 영토에서 반제국주의 저항은 수시로 일어났고, 결국 저항 세력의 주동자는 정부나 민족 자치단체에서 일하는 엘리트 층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국주의에 맞서기 시작한다.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은 쉽게 무시될 수 없었고, 그들의 독립 요구 또한 더이상 지체될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자치령 지위’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유럽 제국들이 하나둘 해체되었고, 전쟁 후 국제정세가 바꾸자 식민지 열강들도 제국주의를 이어갈 명분과 제정적 제력이 없었다. 그리고 국제정치는 이미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에 기울어져 있었다. *참고.인용: 더 타임스 세계사 - 리처드 오버리, 곰브리치 세계사 - 에른스트 H. 곰브리치, 하버드 C. H. 베크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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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바와 같이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반드시 전쟁, 가난, 영양실조, 대기오염, 수질오염, 그리고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소유욕이 자리한다. 철학자 오귀스토 콩트는 인간 진화에 세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로 농경사회의 기우제에서 비롯된 종교적 단계, 두번째는 르네상스, 메너리즘, 바로끄,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정신에서 불거진 형이상학 단계, 그리고 세번째는 산업혁명 이후 현세대를 대표하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메리카, 멜라네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대한 세세한 연구가 보여주고 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인원이 하루에 2~4시간만 노동을 해도 생산 활동에 아직 참여하지 않았거나 더는 참여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포함한 모든 가족의 생존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내는 우리 현대인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그럼 「슬픈 열대」의 수렵채집인과 철학이나 과학을 쫓는 현대인들 사이에는 무슨 격차가 있는가. 그가 지적한바와 같이 우리가 원시인이라고 부르는 민족들은 농업이나 목축을 거의 하지 않고 사냥과 낚시와 야생식물을 채집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보다 천연자원에 대한 지식이 넓다. 다시말해 자연에 훨씬 더 잘 적응된 것이다. “농업은 섭취하는 음식의 질을 떨어뜨렸습니다. 즉 음식이 칼로리는 풍부하지만 영양소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몇 가지 산물로 제한되었다는 겁니다. 흉작이 한 번만 들어도 기근이 옵니다. 게다가 농업은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전염병의 전파에도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과 공간의 측변에서 농업의 분포와 말라리아의 분포는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그가 지적하듯이 숲을 없애고 농업을 시작한 곳은 말라리아의 원인인 얼룩날개모기들이 번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형성했고, 먹이사슬에 얽혀있는 수많은 야생 동식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이미 면역체가 있는 야생으로부터 옮겨온 AIDS나 COVID19을 보면 인류가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인인 그들보다 나은 점은 고작 긴 수명일 뿐이다. 과연 루시는 우리보다 못한 ¨부¨를 누렸는가. 양에서 비롯된 우리의 ¨부¨는 질5로 심하게 기울어져가고 있다. 한편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새롭고 다양한 문화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고유한 속성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차이를 관찰해야 합니다. 장-자크 루소”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를 역학적 기계로, 현대사회를 열역학적 기계로 비유하고 있다. 역학적 기계란 정밀한 시계처럼 차가운 사회이지만 “무질서”(엔트로피)를 거의 생산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결국 열역학적 기계를 사용해 “질서”를 만드는 현대사회는 더 많은 엔트로피(무질서)를 만들고, 이에 따른 불균형은 오늘날 「침묵의 봄」을 가져온 것이다. 반면 질서(essential business)를 가로막은 COVID19은 또 다른 「침묵의 봄」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침묵”은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한 문화의 성숙기인가, 아니면 이기적인 「확장된 표현형」의 짓궃은 장난인가.
“문명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살았던 토지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진보적인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된 주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랜된 거주지에서 문명이 쇠퇴한 주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모든 경향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요인이었다.. 문명인은 어떤 방식으로 이토록 유익한 환경을 파괴했는가? 그는 이것을 주로 자연자원을 고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는 숲이 우거진 구릉지대와 계곡에서 유용한 목재의 대부분을 베거나 불태웠다. 그는 가축의 먹이가 되는 초지를 지나치게 이용함으로써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그는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을 죽였으며, 물고기와 다른 수서 생명체들을 많이 죽였다. 그는 자신의 농경지에서 생산적인 표토가 유실되는 침식을 방치했다. 그는 침적토가 강물을 막고, 저수지, 관개 운하, 항구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대체로 쉽게 채굴할 수 있는 금속이나 기타 필요한 광물질의 대부분을 이용하고 낭비했다. 이에 따라 그의 문명은 자신의 창조물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쇠퇴했거나 아니면 그가 새로운 땅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경로에 따라 파괴된 문명만 해도 10~30개 정도가 된다. 「표토와 문명」”
인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수렵채집인으로써 천천히 자연을 즐기며 느긋하게 목적에 도달하는 것, 또는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과 철학의 도움으로 결론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E. H. 카의 해석처럼 과거의 유토피아를 찾는 것은 시대착오일 뿐이며, 선조들의 잘못된 판단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보다는 집단주의를 통해 민주적이고 진취적인 발상을 이상으로 채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미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를 단숨에 따라잡은 인류는 남아도는 여가시간이 솔직히 너무 많다. (자원낭비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200~300만 년 전 호미닌의 대뇌화encephalizataion로 인해 두뇌가 커지고 위가 줄어들어 고칼로리를 섭취해야만 하는 인간의 신체는 여전히 수렵채집인으로 적합하게 진화되어 있다. (뇌는 하루에 350~450 칼로리를 소모한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거대한 차원의 벽을 찰라에 초월한 것이다. 한 예로 많은 현대질병들은 피가 응고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수렵채집인은 상처가 자주 생겨 피가 빨리 응고되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기술적으로 급작히 비약한 인류는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혹은 번식하기 위해) 더 이상 평생에 걸쳐 자식을 낳을 이유가 없어졌다. 또한 인류는 과거에는 모르나 먹이사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가지 인간이 신체적으로 더 진화되어야 했는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동물이나 곤충은 현재 얽힌 먹이사슬을 지탱시켜주기 위해 진화해 왔으므로 그들은 자연과 함께 앞으로도 진화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의 상보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보호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있다. “자연 정복으로 해로운 결과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면서, 아니 이용하지 않아도 인간의 존재 자체가 어머어마한 파괴 수단이 되어 인간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공간, 공기, 물, 다양하고 풍부한 천연자원 같은 것들이 희박해지고 오염됨으로써 인간의 생존은 늘 잠재적으로, 아니 실질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 아름다운 자연과 그 풍광을 즐기는데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번식적 이기성에서 벗어나 종 이익적 선택을 한 인류가 번식적 이타성을 추구하지 못한채 주저앉아 심미적 취미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계승이 아니다.) 다른 종의 이타적 행동의 예로 찌르레기와 같은 경우 겨울철 집단 비행을 하는데, 이 비행을 통해 찌르레기는 개체군의 크기를 확인하여 밀도가 높으면 종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물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위해 자식을 덜 낳는다. 불임 일군들의 이타적 행동의 대표로 벌과 개미가 많이 알려져 있으나 다른 곤충과 동물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는 종종 나타난다. 벌거숭이 두더지쥐의 경우 수많은 불임 일꾼들이 평생 여왕과 왕을 수발하며 그들과 함께 집단에 머물머 천적인 뱀이 공격할 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도 한다. 세이셸 솔새의 경우, 번식하는 암수 한 쌍이 낳은 새끼가 집에 남아 둥지 도우미가 되는데, 둥지 도우미로 남은 솔새는 형제자매의 먹이를 구해다주거나 둥지관리를 맡게된다. 세이셸 솔새를 관찰한 결과 그들은 주위에 좋은 서식처가 없는 경우 자신의 형제자매와 부모의 번식을 위해 자신은 번식하지 않고 남아 도우미가 되며, 환경이 나쁜 영역에서 태어난 솔새의 경우 부모의 번식성공도까지 낮추기보다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자신의 집을 떠난다. (그런데 인구 감소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감소시 현재의 인프라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그럼 많은 불편함이 따라온다. 그럼 우리는 생활속 스스로하기를 기피하는 여러 가지들에 대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고, 차선책으로 우리는 가급적 자급자족하는 모순에 빠질 것이다. “당신이 특권을 누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평등이 마치 억압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인류의 목적은 더 이상 번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유전자 차원에서는 아직 불가능할 것이고,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 신경물질에 대한 실용적인 과학 발전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신경전달물질이란 뉴런과 뉴런, 또는 뉴런과 근육 사이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화학물질이다. 도파민은 행동학습, 세로토닌은 기분, 아세틸콜린은 주의력, 노르에피네프린은 각성, 히스타민은 수면, 멜라토닌은 생체리듬, 오렉신과 히포크레틴은 수면과 기상, 부신 피질 자극 호르몬 방출 인자는 스트레스, 옥시토신은 사랑, 아드레날린은 활동적인 에너지, α-엔도르핀.β-엔도르핀.γ-엔도르핀은 행복, 아데노신은 신경조절, 일산화질소는는 혈압을 낮추는 작용, 글리신은 셀린.사르코 신.퓨린.쿠레아틴.글루타티온.콜라겐 등을 합성하기 위한 재료, 카노비노이드은 향정신 등등】 메뉴얼이 없는 우리는 이것을 민간요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엉클 토비의 사례 간혹 립밴 윙클 사례라고 부르는 사건이 있었는데, 갑상샘저하증으로 7년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있었다. 대사저하증에 적응해 있는 이 환자에게 티록신을 투여하여 천천히 채온을 올렸더니, 의식이 돌아온 이 환자는 다시 정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 악성 귀리세포암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가 급성 암을 무려 7년 동안 냉장보관 상태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연히 의학이 진상을 밝혀낸 것이고, 우리는 주위에서 신기하게도 의학의 도움없이 각종질환을 신체가 스스로 완치한 경우를 목격하곤 한다. 만약 과학이 엄청나게 급변해 유전자 차원의 자율조작이 가능하다면 CCR5 유전자의 델타32 돌연변이를 생산해 신체가 HIV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감기에 대한 면역체를 만들 수 있다면 비슷한 질병에 대한 면역체도 신체가 거든히 조합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1만 년 전의 치타와 같이 어떤 동물종이 개체 수가 크게 감소하는 병목현상을 거치면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하고 면역적으로 취약해진다고 하는데, 빙하기에 살아남은 포유류의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인간도 면역적으로 취약해졌는지는 모른다. 혈액응고로 인한 뇌졸중같은 경우 (뇌경색은 혈관이 막힌 것이고, 뇌출혈은 혈관이 터진 것) 혈관내 치료를 하는데, 의학이 현재 사용하는 도구는 혈관시스와 카테터 등이다. *참고.인용: 모든 것은 그 자리에 - 올리버 색스, 신경외과 실제 - 정천기, 진화의 배신 - 리 골드먼, 사회생물학의 승리 - 존 올콕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계체를 넘어서 확장된 표현형으로써 자연을 유린하고 유한한 자원이 무한하리라 믿어 열역학적 과열된 사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Great Pacific Garbage Patch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야성 그대로의 자연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이란 오직 우리들의 욕구와 필요에 전적으로 구성되고 복종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직 두 개의 선택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첫번째 선택은 너무나 무자비하게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 사용된 결과 하나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마치 야외의 공장과 같이 돼버린 자연이다. 두번째 것은 인간이 매우 오랫동안 점거한 결과 파괴되어버렸으나, 어떤 점진적이고도 계속적인 적응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풍경’의 수준으로 재상승된 자연이다. 「슬픈열대」” 선사시대를 살던 수렵채집인들에게 예술은 마술적 행위의 수단이였다. 그들이 동굴벽화에 남긴 그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실용적이며 경제적인 목표를 위해 그려진 것이다. 브뢰이유는 알타미라 벽화를 일종의 ‘사냥 마법’이라고 설명하며 그려진 이미지는 동굴 벽에 그려진 야생의 황소와 들소의 영혼과 연결되어 반드시 사냥에 성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구석기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림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예비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마술적 시범에 뒤이어 실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을 낳는 데는 두가지 상한 동기가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단지 존재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감상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라고 말했다. 수렵채집인에게는 이 두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벽화를 그리는 그들은 헤겔의 종Art이고, '그것은 조금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한편 익명의 수공업자들인 고대 이집트 예술가들은 오직 합리주의적인 형식원리를 따르며 정면성Frontalitat의 원리를 작품에 표현한다. 고대 이집트 공예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보다는 계념이다. 작품에 나타난 사물이 시각상 모순을 보여도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의미를 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명확성을 위해 원근법.생략법.중첩법 등을 포기해 버린다. 바빌로니아 예술 역시 다른 고대 오리엔트 예술처럼 궁정예술과 사원예술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나 자연주의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대 오리엔트 예술 전체에서 크리티Kriti 예술만큼은 그렇지 않다. “크리티에서는, 더욱이 예술 이외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은 주위 세계와 동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채롭고 분방하며 대담하고 생동감 있는 일대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전제군주와 봉건영주가 지배세력이었다는 점, 전제적인 사회질서가 문화 전반을 휩쓸었다는 점 등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조금도 다른지 않은데도 예술관의 문제에서는 그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크리티는 주위 세계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모두 비슷했으나 주위와는 차별된 예술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술적 변이인가. 우리는 ‘하나의 풍경’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며 ‘다채롭고 분방하며 대담하고 생동감’ 있는 자연을 원한다. *참고.인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고고학의 역사 - 브라이언 페이건
영웅시대의 미술은 봉건적이라기 보다는 귀족적이였다. 특히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면 평민이나 평범한 병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그와 대조되는 헤시오도스의 작품은 대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그의 작품에서 인생의 가치관 혹은 목표나 억압받는 민중의 소리를 들려준다. (울타리가 생기고) 경제적인 개인주의와 개인 재산권의 관념이 등장하면서 문학도 서서히 자연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소재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전형보다는 개성이 중요해지고, 줄거리보다는 등장인물의 성격에 초점은 맞춘 극이 그려졌던 것이다. 계급과 계급 사이와 계층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진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합리주의가 팽배하자 작업공동체가 생겨나고 경쟁과 실적을 중요시한 예술이 선보여진다. 그러나 상류층의 엄격한 형식주의적 예술양식과 진보적인 세속예술은 골고루 다양하게 존재했다. 헬레니즘 예술을 뒤이어 로마 예술의 시대가 열리는데, 제정하 로마에서는 제국예술이 두각을 나타낸다. 기독교 종교운동이 최하층 민중에서 상류층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예술 분야 역시 민중적 정신과 지방정신이 고전주의 시대적 이상을 대처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민중예술은 모두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공로를 세운 장군이나 정복한 도시, 그리고 개선행진과 같은 내용은 그림으로 그려져 대중에게 선보여졌고, 신을 찬양하는 내용이나 대중선전물도 모두 회화를 통해 대중에 전달됐다. 연속적 묘사법이 들어난 ‘두루마리 그림책’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가 그 좋은 예다. 한편 당시 육체노동에 대한 경멸로 예술가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대체로 낮았다. 그러나 “미는 신의 본질적 특색의 하나이고 개개의 단편적 현실은 미를 통해서만, 그리고 예술의 형태로만 신과 멀어짐으로써 잃어버렸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플로티노스의 주장에 따라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조금씩 개선되어 선사시대때의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평가되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저 마술시대에 그랬듯이 신비스로운 일에 통달한 신들린 카리스마적 인간으로 등장했으며, 예술창조 행위는 이른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독일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인간 영혼과 신적 실체의 합일)의 성질을 띠고 이성(ratio)세계하고는 더욱더 멀어지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참고.인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중세초기에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 같이) 사람들이 고립되어 작은 촌락을 이루고 있어 시장을 갖지 않는 경제라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생산하려는 의욕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폐쇄적 가정경제, 즉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교환이나 투기하지 않는 정체된 사회에서 사회적 신분 또한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고 학문, 문학, 미술 역시 소극적인 경제처럼 엄격하고 고루한 보수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발견하고 새로이 창조하는 형태의 예술은 극히 드물었고, 교회의 권위주의가 모든 정신생활, 학문, 예술을 주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생겨난 것은 후기 상공업을 영위하는 시민층이 확대되어 화폐와 교역경제가 일어나고 기사적 낭만주의가 기승하면서 부터다. (중세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의 건축물으로 밀라노 대성당이 있다.) “로마네스끄 예술의 형식이 초기 기독교 예술의 형식보다 간결하고 단순했던 것은 결코 그것이 더 민중적이고 순진해서가 아니다. 형식이 간소화된 것은 대중의 취미와 이해력에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교양보다 권위를 내세우는 지배계급의 예술관에 영합했기 때문이다. (...)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초기의 기독교도들에게 구세주가 죄인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좀 난처한 것이었다. 당시 귀족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육체적 고통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네스끄 미술의 수난상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의 경우 십자가에 서 있으며 보통 눈을 뜨고 있을뿐더러 왕관을 쓰고 옷을 걸치고 있는 예도 많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참고.인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레비 스트로스의 ¨자연적¨이라는 삶이 신(앎)에의 풍경인가. 그것이 또한 호머의 서사시고, 지극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중세예술이 차안에서 피안으로 시대정신을 낳기위한 두란두스의 ‘민중을 위한 강의이자 독서’가 되었다면 우리는 문화의 각 시기마다 존재한다는 「니벨룽겐의 노래」와 「롤랑의 노래」를 우리세대에 필수 적어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르반떼스와 셰익스피어의 메너리즘을 탐독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정교하고 섬세하지만 때로는 조야하고 엉성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하우저에 따르면 메너리즘이란 꿈과 같이 현실의 여러 관계들을 폐기한채 사물들을 추상적인 상호관계 속에 집어넣음과 동시에 개개의 사물을 가장 선명하고도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초현실주의이다. 카프카 몽환적인 「변신」이나 앞뒤가 잘 설명되지 않는 「성」, 또는 조이스의 몽따주 기법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이와같은 메너리즘에 빠진 소설들을 필독하며 「반지의 제왕」 같은 영웅시대의 영화를 즐겨본다. 한편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히 르네상스를 꿈꾼다. 르네상스가 반교권주의적, 반스꼴라적, 반금욕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거나 반신앙적이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안적인 세계상에서 벗어나 표현주의를 갈망했던 것은 확실하다.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고자하는 것을 예술에 담았던 시대가 르네상스고, 비록 귀족적이고 보수적이였으나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묘사했던 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그러나 사실은 외면되고 사상은 위조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생에서건 예술에서건 자기통제와 감정의 억제 및 자발성, 영감, 황홀감 등의 규제가 지상명령이었다. 감정의 표출, 눈물과 괴로운 표정, 기절, 비탄과 절망의 몸부림, 요컨대 후기 고딕의 잔재로서 꽈뜨로첸또에서 여전히 볼 수 있던 시민적 다정다감은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예수는 이제 더이상 괴로워하는 순교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약점 위에 군림하는 천상의 왕으로 되돌아 갔다. 마리아는 죽은 그녀의 아들을 눈물도 표정도 없이 바라보며, 심지어 어린 예수에 대한 일체의 서민적인 애정이나 부드러움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편 우리의 예술은 그 어떤 시대와도 동일시되지 않으며, 그 어떤 시대와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소통의 시대에서 다다주의를 모방하며 방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끄 시대의 혼란과도 같으며, 우리의 가치는 쉽게 ‘검색’되고 있다. “바로끄 이전까지는 그래도 한 세대의 예술적 의지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 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 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정할 수 있었지만 바로끄 시대에 와서는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떤 통일된 성격을 더이상 갖지 않게 된다. 이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적이고, 분석적이자 종합적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편 바로끄 시대 단원 김홍도는 대체적으로 시민적 자연주의를 표현한 화가로써 풍수화나 낮은 사회계층의 풍속도를 많이 선보였다. 반면 비슷한 시기 빛의 화가이자 ‘근대적 명암의 시조’인 렘브란트는 주로 고전주의적이자 인문주의적인 성서·신화·역사·위인 등의 그림들이 주를 이룬다. 아름다운 것이 부이므로, 시민적인 취향이 점차 귀족적 경향으로 기울은 탓이다. *참고.인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403 - 3
(Paphus,) 베누스 푸티카 Venus Pudica (정숙한 비너스)·그대·푸른·오렌지, 제피로스의 서풍 (플라토닉)·장미·그대·사랑이고, 바다·오렌지나무언덕·그대·황금빛 줄기가 신성함을 들추어, 호라이 주관하니 (시간과 계절)·그대·분홍·영원한 꽃을 전하고, 님프의 수호·그대·수레국화·상록수인 은매화로 영원을 맹세하노니, “봄과 베누스가 지나간다, 그리고 그의 앞서 베누스의 날개 돋친 길라잡이(쿠피도)가 걸어간다, 제퓌로스(서풍)의 발자취 가까이에선 어머니인 플로라(꽃의 여신)가 그들을 위해 앞길에 온통 빼어난 꽃들과 향기를 뿌려 채운다. 「루크레티우스」” 「그런데 작은 종달새는 어디에 있지?」 「종달새는 여기 있어요! 여기에 등을 달고, 여기는 꽃을 달아야 해. 크리스마스트리는 예쁘게 될거야. 토르발,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할 거에요.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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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에 따르면 예술은 표현하고, 전환하고, 예감한다. 예술은 실존을 폭로하고 계시를 예감한다. 무엇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은 그 바탕과 후경을 통해 구원에 대한 예감을 전하는 것이다. 예술은 실존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게 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비록 역동적이나 고정된 (그러나 시공이 초월된) 아름다움이다. 예술은 대하는 것은 블랙홀을 대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블랙홀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해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고, 얻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나타나는 것은 폭격의 공포이지만 우리가 얻는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고 혁명에 대한 이유다. 한때 모나리자는 미의 상징이였으나 이제 (바로끄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통일된 성격을 띠지 않는다. 우생학의 종기는 위험하기 짝이 없어 아름다움(진리)은 정의로운 원심분리기를 통해 어떤 통일된 성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리쿠르구스 제도를 실시한 스파르타의 경우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아버지가 세 아들을 낳으면 동원을 면제해주고 네 아들을 낳으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또한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낄 때 아내가 우수한 남자와 동침하도록 허용하기까지 했다. 국가에서 결혼을 우생학적으로 관리하였던 것이다. “가축을 잉태시킬 때에는 좋은 수컷을 고르는 인간이 아내를 독점하는 것은 허영이자 악이다. 그러므로 우생의 원리를 알고 자기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자만이 자식을 낳을 권리가 있다. 「Plutarch」” 플라톤 역시 국가론에서 결혼 및 가족제도를 폐지하고 아이들이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양육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산 또한 국유화시키며 개인의 존재 이유가 국가의 복지를 증진함에 있으며 국가의 세포적인 존재인 인간번견은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참고.인용: 역사의 연구 - 토인비】 이제 우주-앎-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필연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방드르디는 정의로울 수 없다. 그의 노동은 Mule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아의 방주가 정의롭다는 것인가!) 그런데 유행하는 것은 유희적 기술일 뿐인가. “얼굴의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지만 동등하게 아름다울 수 있으며, 하지만 그 형상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얼굴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수(즉, 얼굴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 각기 고유한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신체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지성을 지닌 판관들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다수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변화하는 미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미학, 브라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아름다움이 정말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분명 자연은 아름답고, 인류는 아름다워지고자하는 수수께끼다. (그가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은 사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전체를 위해 협력하는 하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이란 “대칭적 균형 이상의 어떤 것”이며,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대칭적 균형이 없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필로칼리아philocalia(미학)와 필로소피아philosophia(철학)를 두고 지혜와 아름다움이 분명 동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자매라고 말한다. 칼리아와 소피아가 앎임은 (Elephant 통해) 이제 명백한 사실이다. “필로칼리아와 필로소피아는 거의 같은 이름이다. 그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이기를 원하며, 또한 사실 그러하다. 필로소피아가 무엇인가? 지혜의 사랑이다. 필로칼리아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사랑이다. 그리스인에게 물어보라! 그럼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진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닌가?”】 여기서 플로티누스는 악의 개념을 아름다움의 사슬로 설명한다. “악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 본질 때문에 그리고 선의 능력 때문에 악은 단지 혼자 존재하지는 않는다. 마치 어떤 포로가 황금의 족쇄에 묶여 있듯이 악은 필연적으로 아름다움의 사슬(chains of Beauty)에 묶여 등장한다.” 플로티누스에게 악은 필수불가결한 감초와 같은 것이다. 악은 회화에서의 검정색과 같이 밝은 부분들을 강조하기 위한 기능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럼 그 대칭적 균형 이상의 어떤 것은 평형상태를 도달하기 위함인가. 헉슬리는 생명의 도가니에서 어떤 한 종이 운동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켜 더 독립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일으킬 때 다른 생명들에게 압력을 발휘해 그에 대응하는 운동을 하게 만들어 새로운 평형을 유지토록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선과 악은 삶이 평형을 유지토록 (아름답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수상이였던 얀 크리스티안 스뮈츠는 생육과 번성을 지향하는 평형상태이고자하는 유기체는 항상 약간의 평형을 파괴하지만 완전히 평형을 이루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완전한 평형은 정체와 퇴화를 의미하며 달성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평형을 향함은 악이 선으로, 선이 악으로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발돋음이다. 유명한 말 사육사인 M. H. 헤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을 앞으로 숙여 평형을 깨트리는 것이 빨리 걷기에 도움이 되듯이 말도 빨리 달리려면 신체적 평형을 앞으로 이동시켜야 하는데, 기수가 말을 달리 때 몸을 앞으로 내미는 것도 말의 평형에 있어서의 불안전성을 증대시키려는 것이다. 평형상태의 불안전성이 클수록 평형을 회복하기에 더 많은 힘이 필요하고 그 동작의 반복으로 말은 앞으로 향하는 전진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발타자는 거짓말조차도 진리에 봉사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데, 그것은 악이 선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악은 통제되는 포로이면서, 동시에 신의 섭리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도구이다. 아름다움과 악 - 손호현” 선과 악 사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신은 죽었다. 그것은 빅뱅이다. “신은 악을 제거하고자 원하였으나 그렇게 할 힘이 없었거나, 혹은 신은 악을 제거할 힘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자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신은 원하지도 않았고 힘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신은 원하였고 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신이 악을 제거하고자 원하였으나 그렇게 할 힘이 없었다면, 신은 무기력할 뿐이며 그러한 무기력은 신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신이 악을 제거할 힘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자 원하지 않았다면, 신은 질투하는 것이며 그러한 질투도 동일하게 신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신이 원하지도 않았고 힘도 없었다면, 신은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질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신이 아니다. 만약 신이 원하였고 힘도 있었다면, 그것만이 신에게 적합하지만, 그렇다면 악의 기원은 무엇인가? 왜 신은 악을 제거하지 않는가? 에피쿠로스” *참고.인용: 아름다움과 악 - 손호현
로꼬꼬는 더이상 왕실예술이 아니였다. 바로끄 당시 부르주아지 예술의 중심이었던 성과 궁전의 싸늘한 대리석과 거대한 청동은 로꼬꼬에 들어와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개인들의 건축활동이 늘어나면서 우아하고도 근엄한 여러 유희적 색채를 담은 예술작품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하우저의 설명에 따르면 로꼬꼬는 우아하면서도 사치스럽고, 그러나 유희적이면서 변덕스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부드럽고도 내면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색채도 다양해서 근엄하고도 장중한 색조를 위해 갈색과 자색을 사용하고, 때로는 밝은 파스텔 색조로 대상을 부드럽게 표현하기도 하며, 회색, 은색, 녹색, 그리고 장밋빛의 조합으로 강한 이미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하우저는 바로끄가 묵직하고 조각적이며 사실적인 공간성을 지닌 양식이라면, 반대로 로꼬꼬는 날카롭고도 미묘하며 민감하고도 능란한 장식예술을 선보인다고 강조한다. “로꼬꼬는 후기 바로끄의 고전주의를 해체함으로써, 그리고 그 회화적 양식과 회화적 디테일에 대한 민감함과 인상주의적 기교를 시민계급 예술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 르네상스와 바로끄의 표현형식보다 휠씬 더 적합한 하나의 수단으로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이 새로운 양자택일을 준비한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당시는 루이 15세와 16세의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넘어가는 역동적인 시기다. 나폴레옹의 수석화가 다비드는 「대관식」이나 「군기 수여식」 같은 그림을 통해 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역사적인 현실, 즉 혁명과 이념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감각주의적이며 유미주의적 요소를 지닌 로꼬꼬는 낭만주의와 감상주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차츰 인상주의를 향해 시대를 반영하기 시작한다. 【실러는 낭만주의자를 ‘고향에 가고 싶어 애태우는 국외추방자’이자 그의 이상을 ‘이 지상에 귀속되지 않는 정신’이라고 말했으며, 「푸른꽃」을 통해 낭만주의를 선보인 노발리스는 낭만주의 시를 ‘쾌적한 방식으로 사물을 소외시키는 예술, 즉 사물을 낯설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친숙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천을 적용한 데에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자연주의 보다 더 감각적 경험으로 다가가는 인상주의는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기법으로 끊임없이 변화는 상태의 현상이 하나의 연속체라는 인상을 남겨준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조각배를 띄우고 신념과 원리와 고독에 사로잡혀 우주를 유영하는 모습일 것이다.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속성과 지속성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번 다시 발 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상주의의 그림은 존재의 ‘영구운동(perpetuum mobile)에서 어느 한순간을 포착하며, 서로 갈등하는 힘들의 유희적 운동에서 위태롭고 불안정한 균형상태를 묘사한다. 빛과 공기와 분위기의 묘사, 평평하게 칠해진 색채평면을 크고 작은 색채의 점들로 해체하는 작업, 물체 고유의 자연색을 색가로, 투시도법적.분위기적 표현가로 분해하는 일, 반사된 빛과 비추어진 그림자의 움직임, 경련하는 것 같은 색점들과 아무렇게나 함부로 그은 듯 당돌한 붓질, 빠르고 거친 스케치의 즉흥적 기교, 얼핏 부주의해 보이는 피상적인 대상 파악과 표현수법의 교묘한 우연성 등은 결국 투시도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림의 방법이 주관화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해간다는 현실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궁정이나 교회 또는 시의회의 의뢰를 받아 작곡되었던 음악도 18세기에 이르러 순수한 연주음악으로 거듭난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시민들이 음악 연주를 듣기 위해 입장료를 내기 시작했고, 대중을 대변하는 시민 계급의 정서가 음악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불화로 유명한 모차르트의 자유로운 창작이 그 좋은 예다.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어디에서나 사회학적으로 모순이 많은 현상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시민계급 해방의 연장 내지 상승으로 평민층과 과다한 감정과 정열을 표현함으로써 상류층의 까다롭고 절제된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운동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와 개혁주의에 반대한 운동이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그리하여 현대로 접어든 예술은 더이상 자연을 따르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는 반인상주의적 요소를 지녔으며, 대표적으로 브라끄, 샤갈, 루오, 삐까소, 앙리 루쏘, 쌀바도르 달리 등은 자신들이 믿는 초현실 세계를 대중에게 선보인다. 그러나 우주는 초현실적인 세계의 조건을 채울 무궁무진함이 있고, 인상주의를 부정하는 현재의 (반)인상주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초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과 아름다운 색조를 더이상 거부하는 현대예술은 새로움을 위해 끊임없이 도약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대예술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도 반인상주의적이다. 현대예술은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과 아름다운 색조를 거부하는, 근본적으로 ‘보기 싫은’ 예술이다. 회화에서는 ‘회화적’ 가치를 부인하고, 시에서는 정서의 조화와 아름답고 일관성 있게 구성된 이미지를 배격하며, 음악에서는 멜로디와 음조를 파괴한다. 현대예술은 모든 즐겁고 기분 좋은 것, 모든 순전히 장식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를 한사코 기피한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편 현대예술은 심미적으로 ‘선’을 쫓지 않고 아름다움에 머물며, 비록 새로운 예술의 혁명을 기다리며 낯익은 인상파의 작은 ‘조각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고.인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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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처음 시작된 곳은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에서다. 정치가 솔론은 사회 불평등을 다스리기 위해 최초의 성문법인 드라코Draco 법전을 개정하여 새로운 법을 만든다. “대자연에서 유래하는 이치가 엄연히 존재했고 그 이치는 바르게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범죄에서 돌이키도록 불러세우지. 그 이치가 문자로 쓰이게 된 이후에야 법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치가 발생했을 때부터 이미 법률이었다네. 그리고 그것은 신적 지성과 동시에 발생했지. 「법률론」” 아테네는 직접민주제를 실행한 국가다. 기원전 594년 아레오파고스 의회는 현자 솔론과 함께 개혁을 단행하고 빚을 진 공민이 노예로 전락되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기원전 7세기 드라콘이 반포한 법은 강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채권자의 사회적 지위가 채무자보다 높을 경우 채무자는 채권자의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으로 사회를 개선하기를 피한 아테네는 재산을 기초로 공민을 4등급으로 나누게 된다. 모든 공민은 민회에 참가할 수 있고 구성원 모두는 배심원이 될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또한 솔론은 400인회를 만들고 이 행정기관이 일상적인 안건을 처리하도록 만든다. 그 후 솔론의 친척 페이시스트라투스가 권력을 탈취한 후 그는 공상업자와 소농에게 유리한 정책과 조치를 취했고 씨족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곧 참주 정권을 무너트린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로써 민주정치의 길로 순회한다.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귀족 통치를 꾀하던 그는 400인회를 해산시키지만 곧 축출되고, 그 뒤로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혈연 씨족을 해체한 후 인구 비율에 따라 행정구역을 데메로 나눈다. 그는 솔론의 400회를 500인회로 늘린 후 각 데메에 50명을 할당하여 그 위원들의 임기를 1년으로 하였고, 500인회에서 50명의 집행위원회를 두어 매달 한 차례씩 새로운 위원을 다시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500인회는 민회에서 법안을 토론하고 통과 여부를 결정했으며 법을 집행할 관리와 행정 관리 또한 직접 선출하였다. 민중 법정은 30세 이상의 공민 가운데 추첨을 통해 6,000명의 배심원을 선출하고 열 개의 부족에게 각각 600명을 할당하는 제도였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패각추방제를 만들고 6,000명 이상의 공민이 누군가를 아테네에서 추방할 수 있는 투표제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상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제가 출현한 경우는 드물다. 모든 공민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표하게 할 필요 없이 직접 국정에 참가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되었다. 현대 민주정치에서와 같은 ‘정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냐’라는 현상이 출현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전체 공민이 민회에 참가하고, 500인회와 배심원은 각자 맡은 일이 있었다. 500인회에서는 매달 50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했고 매일 한 명의 위원장을 뽑았다. 모든 공민에게는 하루 동안 국가의 원가 될 기회가 있었다. 「신세계사1 - 쑨룽」” *참고.인용: 신세계사1 - 쑨룽
기원전 445년 로마의 민회는 카눌레이아 법을 통과시켜 기원전 449년 평민과 귀족의 혼인을 금지한 조항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376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을 통과시켜 집정관의 직위를 회복시킨다. 이 법은 평민과 귀족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고자 해마다 두 명이 맡는 집정관 자리 중 하나를 평민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정복을 통해 얻은 국유 공유지를 각 시민마다 500유게라로 제한하여 공유지가 귀족에게 독점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300년에 로마의 민회는 오굴니아 법을 통과시키는데, 이것으로 사제직이 평민에게 개방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되는데, 개기는 야니쿨룸 언덕으로 철수한 평민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을 막기위해서 였다. 이 법은 시민을 대표하는 ‘트리부스 인민회’와 ‘평민회’가 입법권을 갖게 되는 것으로 원로원은 이를 부결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귀족을 향한 평민의 완승은 아니였다. 민회가 입법기구이기는 했으나 자주성이 없어 법안은 반드시 관리가 제출하고 입법을 위한 토론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평민의 목소리는 ‘찬성’ 혹은 ‘반대’로만 표할 수 있었고, 원로원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의결을 부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8년 오비니아 법이 통과됨으로써 원로원의 명부를 확정하던 집정관의 권력이 감찰관에게로 넘어갔다. 문제는 집정관의 1년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원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로의 명부를 확정하는 것이 국왕의 권리라 하여도 원로원이 집정관에게 휘두룰 수 있는 권력이 상당했을 것이다. “트리부스 인민회 아래의 평민회는 평민 출신의 관리를 선출하는 일을 책임졌다. 평민회는 체제 바깥의 권리평등 위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귀족이 보기에는 권력 찬탈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애초에 평민은 국민의 일부를 데리고 나가서 따로 정권을 세울 작정이었는데, 이제 체제에 남아서 트리부스 인민회 내부에 평민회를 두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이 평민회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했던 아테네식의 의회는 분명 아니었다. 「신세계사1 - 쑨룽」” *인용.참고: 신세계사1 - 쑨룽 【로마 제국은 남유럽 모든 영토에서 시작해서 서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포함, 발칸반도,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와 모로코가 위치한 북아프리카까지 포함된다. 너무나 거대한 제국이여서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 정치(테트라키tetrachy)를 펼쳤다. 그러나 제국은 100여 년의 내전을 겪으면서 혼란에 빠졌고 경제 또한 크게 악화되었다. 제국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사건은 콘스탄티노플 북부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군 2/3이 전멸하면서다. 발렌스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군인보다 많은 로마 귀족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전쟁터로 향하는데, 이 전쟁에서 그들까지 죽음을 당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멸망의 첫번째 원인은 로마에 ‘후계자 임명’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였다. 로마 제국은 ‘왕정’도 아니고 ‘공화정’도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기 쉬운 시스템이였다. 둘째 빈부의 격차가 커서인데, 많은 부를 누리고 있던 귀족과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없던 중상층 사이의 괴리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로마 군대가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전략적인 전술과 좋은 무기, 그리고 잘 정비된 도로와 부상병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시스템 덕이였다. 하지만 재정 위기가 발생하자 사회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고, 무기와 전쟁을 위한 기초 인프라는 질적으로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76년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은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서로마에서 프랑크족은 프랑스가 되고, 고토족은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리며, 서북부 독일에서는 게르만족 일파인 앵글족이, 영국은 색슨족이 점령한다. 당시 로마의 잦은 침략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기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은 국가를 만들어 상비군을 조직하고 왕을 추대해 국가를 존립하게 된다. *참고.인용: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
1,788년부터 1,789년까지 혹독한 추위와 극심한 가뭄이 흉작으로 이어져 프랑스 농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파리 노동자는 하루에 30-40수sous를 받았는데, 이 금액으로 그들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빵 1파운드가 2수를 넘어서는 않되었지만 빵값은 두 배로 수직 상승했고 지방에서는 8수가 넘는 곳도 있었다. 빵만이 아니였다. 다른 생활필수품들도 모두 상승해 프랑스는 최악의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당시 군중들이 “빵을 달라”고 외쳤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비스킷을 먹으면 될 게 아니냐?”라고 말했던 점을 보면 궁정은 국민들의 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17세기까지 혁명이란 단어는 천문학상의 용어로서 회전, 순환, 주기, 공전을 의미했다. 그런데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말 그대로 혁명은 프랑스를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코페르니쿠스적 회전’을 하게 만든다. 프랑스에서 혁명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배층과 귀족들이 무능하고 신뢰성이 낮아 민심을 잃은 루이 16세를 염려하기는커녕 오히려 튀위시키려 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시민들이 로크 사상을 따르는 자유로운 영국과 미국의 자유사상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전국삼신분대표의회를 소집했는데 거기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제3신분 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강요하는 루이 16세와 맞서게 된다. 제3신분 대표자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국민회의’라고 선포하고 의회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결정하게 된다. 낭만주의 소설가 스탈 부인이 말한바와 같이 “이 법령은 혁명 자체였다”. 당시 루이 15세가 루이 16세에게 물려준 빚은 15억 리브르였고,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부채는 45억 리브르로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제3신분 대표자들의 선언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은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차례로 국민의회, 제헌국민의회, 입법국민의회, 국민공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앙시앵 레짐(절대 군주 정체)을 거부한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고 모든 권리에서 동등하다”, “모든 통치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속해 있다”는 내용을 선포한다. 그리고 의회는 50억 리브르에 가까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30억 리브르에 가까운 성직자들의 재산을 국유화한다고 발표한다. 결국 왕권을 보존할 능력이 없어 망명을 꾀하던 루이 16세는 자유주의적 입헌군주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공화제에 근접한 입헌군주로 추락한다. 모든 주권은 이제 프랑스 국민들이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782년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공회는 제1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인민의 이름으로 1,793년 1월 21일에 혁명 광장인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된다. 곧 국민공회는 공포정치를 시작하는데 에르망과 푸키에 탱빌은 파리에서만 1만 7,000명을 처형한다. 그리고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빵 가격 인하, 제품 가격 및 임금의 공정화, 그리고 국유재산 분할 및 매각의 조치가 취해진다. 그 후에서 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된다. 1,793년부터 1,796년 사이 17만 명이 희생되었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100만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100년 후 이 혁명을 기념하기위해 에펠탑이 세워진다. “우리는 조국이 낡은 것을 갈아치우길 희망한다. ... 관습이 지배하는 독재정권 대신 이성이 지배하는 제국을 희망한다. ... 어여쁘고, 어리석고, 비참한 백성 대신 고결하고, 강하고, 행복한 백성을 희망한다. 이 말은 군주제의 그 모든 악덕과 치기 대신 공화국의 그 모든 덕과 기적을 희망한다는 뜻이다. 막시밀리앵 로베스파에르” 【1,762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시작으로 봉기의 시대가 열린다. 1,755년 코르스에서 파올리가 제노바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1,793년 다시 파올라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시도했다가 영국에 점거당한다. 1,768년에는 제네바에서 시민들이 소수 귀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1,773년 러시아 남동부에서 카자크족과 농민, 그리고 아시아 부족들이 귀족들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 1,775년 아메리카가 영국의 재정 정책에 반발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 독립을 선언한다. 1,787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에서 황제 요제프 2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발해 반란이 일어나고 벨기에 연합주 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리고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1,790년 헝가리에서 마자르족 귀족들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칙령을 거부하고 합스부르크 제국 내 헝가리의 독립성을 요구하게 된다. 1,794년 폴란드에서 애국파 귀족들을 주축으로 시민 반란이 일어나나 러시아 군대가 장악하여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당한다. 1,791년 아이티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1,793년 사르데냐 섬 주민이 피에몬테-사르데냐 연합 왕국 내에서 자치를 요구한다. 1,794년 독일령 네덜란드에서 삼부회를 장악한 귀족 문벌과 민주화를 원한 중류층의 애국당에서 대결이 벌어져 프랑스의 도움으로 공화제가 선포된다. 1,798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하나 영국 군대에 진압당한다. 1,804년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내에서의 자치권과 독립을 요구한다. 1,809년 티롤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로부터 탈취해 바이에른에게 넘겨주나 농민들이 바이에른의 새로운 통치자들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1,830년에서부터 1,945년 사이에 세계는 제국주의 경쟁에 빠져버린다. 1,930년 당시 세계의 85%가 제국 체제의 일부이거나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참고.인용: 프랑스 혁명 - 서정복, 더 타임스 세계사 - 리처드 오버리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페루, 볼리비아 등 안데스 지역에서 지방행정관들의(코레히도르) 부패와 학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들은 상인들과 짜고 의류, 노새, 그리고 그 밖의 수입품을 주민들에게 강매(레파르토)시켰다. 결국 1,780년 가혹한 세금과 코레히도르의 레파르토를 거부하며 투팍 아마루의 반란이 일어난다. 시작은 부패와 학정 때문이였지만 봉기는 잉카 제국의 복원과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 혁명의 혼란 가운데 유럽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를 침약해 스페인 국왕을 폐위시키고 봉건제를 철폐하게 된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는 프랑스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물러나자 스페인의 식민지 통제권이 약화된 것을 계기로 자신들의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08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1,810년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난다. 1,810년 4월 카라카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스페인 군대는 베네수엘라에서 쫓겨나고, 5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고 9월 16일에는 멕시코에서 이달고 신부가 이끄는 농민과 원주민들이 식민지를 반대하며 반기를 든다. 이달고 신부는 농민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과달루페의 성모 만세! 악독한 정부는 물러가라! 스페인 본국인들은 모두 죽어라!” 이달고 신부의 원주민과 메스티소들은 광산촌인 과나후아토 시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는데 군중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달고는 1,811년 7월 30일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달고를 어어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가 반란군을 이끌게 된다. 그들은 10개 조의 원칙을 채택하여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독립, 주권재민, 삼권분립, 사유재산권의 확립, 신분제도의 폐지를 외쳤다. 그러나 결국 모렐로스도 1,815년 11월 5일에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카라카스 혁명의 주역은 볼리바르인데, 그는 루소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프랑스와 유럽 혁명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811년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포하고 카르타헤나 선언을 발표한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주장한 볼리바르는 1,814년 왕당파에게 참패하여 망명하나 다시 아이티 공화국과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들로 구성된 혼성부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에 들어와 다시 독립 전쟁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는 1,819년 9월 7일 보야카에서, 그리고 1,821년 카카보보에서 스페인 군과 맞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북부 지역에서 볼리바르가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남부 지역에서는 산 마르틴이 독립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산 마르틴은 페루를 공략하기 위해 1,817년 1월 샤카부코에서, 1,818년 4월 5일 마이포에서 스페인 군대와 맞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1,888년 브라질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1,910년 멕시코에서 또 한번의 혁명이 시작된다. 1,930년 브라질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나 바르가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공화정을 채택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여러번 헌법을 계정하게 된다. 스페인은 식민지 통치를 위해 부왕령제도를 두었는데 부왕이란 총독을 말한다. 19세기 초 스페인은 4개의 지역에서 부왕령을 실시했는데,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 부왕령, 페루 부왕령,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부왕령, 그리고 리우데플라타(아르헨티나) 부왕령 등이다. 하지만 독립 후 광대한 지역을 경영할 세력이 없자 중남미는 20개의 나라로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참고.인용: 스토리 세계사 7 - 임영태
1,848년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럽의 일부만 혁명에 성공했던 이유는 부루주아지가 지배 세력과 타협한 결과였다. 그러나 거센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바람은 전 유럽에 새로운 물결을 만들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 파리는 혁명의 도시가 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혁명은 언제나 파리에서 시작하게 된다. 1,846년 아일랜드 감자기근으로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불황이 닥치면서 유럽 노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1,848년 전 유럽에 걸친 혁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1,846년 당시 프랑스에서 시작한 혁명의 바람은 노동자 대책 정부 위원회를 창설하게 되고 노동위원회는 노동 시간의 단축, 실업자 해소, 노동 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권의 보장등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유권자는 24만 8천 명에서 960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혁명의 불길은 독일로 이어진다. 바덴의 자유주의자, 노동자, 수공업자가 들고일어난 이 혁명은 독일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바덴의 북부 지역, 뷔르템베르크, 그리고 헤센-다름슈타트까지 혁명은 확대되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인센마져 혁명으로 물들게 된다. 그리고 이같은 노동자들의 승리는 점점 주변국가들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혁명의 불길에서 겨우 위기를 벗어난 영국은 적극적인 자세로 노동자들을 위한 개혁을 감행해야 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굶어 죽거나 싸움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엄청난 폭동으로 응수했는데 이 폭동은 현대를 가르고 있는 두 계급 사이의 최초의 대전투였다. 그것은 부르주아지 질서의 유지냐 파괴냐를 놓고 벌어진 투쟁이였다. 공화국을 가리고 있던 장벽은 찢어졌다. 맑스” 유럽 혁명의 기수는 당연히 카를 마르크스였고, 그의 사상을 집약한 「공산당 선언」은 모든 혁명의 지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붉은 혁명 박사’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그는 지배자들에게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노동자들과 피지배자들에게는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참고.인용: 스토리 세계사 7 - 임영태
유럽의 혁명은 서서히 러시아로 번져나갔고, 농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차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인민의 의지’파는 1,879년 8월 알렉산드르 2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881년 3월 차르를 암살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를 뒤이어 그의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 3세가 새로운 차르에 오르고, 그는 혁명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혁명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점점 인민주의는 퇴락의 길을 걷게되고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1,915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점령된 서부 지방을 상실한 러시아의 경제는 제구실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공장의 전시 체제로의 전환은 내수시장 또한 파괴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철도수송 체계가 파괴되자 공산품을 받을 수 없는 지역이 늘어나고, 생산물들을 수송할 수단이 없어지자 러시아는 인플레이션과 기근에 빠졌다. 소비자들은 스스로 협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으나 독일 출신 니콜라이 2세는 군주제 이상에 매달려 통치행위를 중단하고 국정을 황후에게 맡겨 버렸다. 많은 사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은 망명 중이거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레닌(볼셰비키), 토로츠키(국제주의자), 마르토프(멘셰비키)는 제국주의적인 전쟁을 비난하고 나섰다. 1,917년 2월 19일, 군중들은 군주제에 반대하며 차르의 동상들을 쓰러트리고 행정부처에 걸려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들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철도 수송체계는 여전히 마비되어 있었고, 식료품을 지급받지 못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무능한 각료들을 비판하며 그들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2월 23일, 수많은 학생들과 사무원이 페트로그라드 중심부를 행진하였고, 오후부터 빵의 부족을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러시아 혁명의 불씨가 점화된 것이다. 2월 24일, 파업 중이던 15만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도심으로 몰려와 100개의 무리를 이루며 토론회가 펼쳤다. 2월 25일 파업은 확대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빵을 달라!’, ‘차르는 물러나라!’, ‘전쟁을 중단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혁명이요? 혁명은 무슨 혁명? 노동자에게 빵 1파운드만 주면 파업은 끝날 거요!” 그러나 군의 생각은 달랐다. “내일이 되기 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무질서를 무력을 동원하여 멈추게 하라.” 결국 2월 26일 기병대와 수비대는 네프스키 대로와 즈나멘스카야 광장을 향하여 발포를 시작해 150명 이상이 사망하고, 군 사령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 닥터 지바고에서처럼 군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2월 27일 병사들과 노동자 시위대는 병기창을 점령하고 1만 정가량의 총을 탈취하여 정부군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바스티유 감옥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감옥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감옥들로 향해 대부분 보통법을 위반한 8만 명 가량의 죄수들을 석방하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군중의 아시아적 폭력을 드러내는 행동들을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약탈이 시작되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도대체 예측이 불가능하다. 많은 피가, 이전에 흘린 어떤 피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르리라는 예감이 든다. 막심 고리키” 많은 상점이 털리고 부르주아지는 폭행당했다. 이 ‘영광의 5일’ 동안 혁명의 대지도자인 레닌과 마르토프는 취리히에, 트로츠키는 뉴욕에, 체르노프는 파리에, 그러나 체레텔리와 스탈린만이 시베리아에 머물러 있었다. (맑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 것은 레닌이였고, 그것을 실천해준 혁명가가 바로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테인과 트로츠키다. 그러나 스탈린과의 권력 싸움에서 실패한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볼셰비키, 노동당의 투사 50명이 토리드궁의 12번 회의실에 모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정치문제를 둘러싼 토론을 했으며 도시 곳곳에는 토론회, 총회, 회합, 선거를 알리는 벽보들로 가득찼다. 노동자들은 여덟 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을 주장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권리를 획득하거나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히 요구하기에 이른다. 4월 4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고 경찰, 군대, 국가 관료 전체의 폐지, 대토지 몰수와 토지의 국유화, 노동자의 기업 관리등을 밝히며 세가지 슬로건 ‘전쟁 중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를 발표한다. ‘7월의 날들’이 지나고 볼셰비키들은 일시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러시아 혁명은 지속된다. 빵과 실업과 평화와 토지의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 중 명확하게 해결된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어두운 본능과 함께 날뛰던 볼셰비즘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는 퍽 다행스런 일이다 ... 그러나 오늘날 부르주아지 세력이 사회주의자 전체에 대항하여 폭발하고 있다. 반혁명은 이제 더는 유령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막심 고리키” 국가의 권력은 혼돈에 빠지고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자 병사들은 탈영하거나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장교들을 학살하였고, 농민들은 지주를 약탈하거나 그들의 집을 방화하였다. 수많은 왕족이 죽임을 당했고, 1만 헥타르 정도의 토지가 마을공동체에 분배되었다. 곧 ‘10월의 사회주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공장, 병영, 마을, 전선, 소비에트와 별도로 혁명은 또 다른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레닌의 머릿속이었다.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그는 7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111일 동안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회담하는 일조차 제한해야 했다. 그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대화나 조직체들과의 접촉 없이 혁명의 근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상에 더욱 과감하게 집중하여 그것들을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문제들로 제기했다. 트로츠키” 수비대, 크론슈타트 해병대, 페트로그라드 혁명군사위원회에 가담한 병사 수천 명,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볼셰비키 투사 수백명은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에 참여해 쿠데타를 수행했다. “임시정부는 폐기되었으며, 정부의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 조직인 혁명군사위원회의 손에 이양되었다. 이 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수반으로 조직된다. 이것으로 인민이 투쟁을 벌여 온 목표(즉각적이고도 민주적인 평화의 제시, 토지소유제의 폐지, 노동자의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 건립)가 달성되었다. 레닌 혁명군사위원회 선언문” 러시아 10월의 혁명은 그 후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혁명들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는 제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위한 전쟁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참고.인용: 러시아 혁명 - 니콜라 베르트, 스토리 세계사 7 - 임영태
별이 붙은 베로모를 쓴 혁명가로 유명한 체 게바라는 사실 의대에 다니는 총명한 학생이였다. 의사가 되기 전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자주 여행하던 게바라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앞에 쓰러져 가는 수많은 국가들을 직접 목격하며 심한 충격을 받게된다. 당시 카스트로는 맑스레닌주의자 호세 마르티(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쿠바의 혁명 지도자)의 정신을 따르며 반식민주의적 민주주의를 외쳤다. 놀라운 암기력으로 변호사 시험에 거든히 합격한 카스트로는 그 후 도미니카 공화국 이민자들의 인권을 대변하게 된다. 전직 군인이였던 카스트로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과 쿠바의 대지를 깊이 존중하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왔던 것이였다. ‘횃불행진Marcha de las Antorchas’를 시작으로 1,953년 아바나 대학에서 출발한 쿠바 군중들은 쿠바(타이노 말로 쿠바나칸 cubanacan는 ‘쿠바의 중심’, ‘쿠바의 한가운데’를 의미한다.) 동부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쿠바 시에서 “혁명, 혁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꽃과 깃발의 행진Marcha de la Flor y la Bandera’을 벌이며 국토를 횡단해 마르티 동상 앞에 도착한다. 이후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에 의해 산티에고 감옥에 수감되지만 그로 인해 불거진 대대적인 파업과 학생 운동으로 인해 곧 특별 사면된다. 당시 카스트로는 자신을 직접 변호하며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는 웅변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한다. 그 후 1,955년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해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카스트로는 겨우 29세였고 게바라는 27세였다. 그리고 쿠바는 “애국이 아니면 죽음을 Patria o Muerte”이라는 구호을 외치며 비티스타 정권에 대항해 1,956년 쿠바 혁명을 일으킨다. “바티스타 정부가 4년 동안 저지른 부패는 쿠바인 다수를 부정부패와 연고주의에 진저리치는 냉소주의자로 만들었다. 바티스타는 의회와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독재자는 북아메리카의 자본이 쿠바 은행의 목을 조르고, 대부분의 설탕 정제소와 담배 회사, 철도 등 공익사업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미국의 갱들은 도박과 매춘, 포르노 산업을 지배했다... 끊이지 않는 살인, 잔학행위, 투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티스타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경찰과 육군, 해군, 공군 장교들의 모반이 줄을 이었고, 이것은 바티스타의 장악력을 갉아먹었다. 「카스트로의 쿠바 - 그레고리토지안」” 15세기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쿠바는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미서전쟁 이후 미국 군대의 군정이 실시된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1,952년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1,956년엔 바르킨이 구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1,959년엔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쿠바 정권을 장악한다. 젊은 인권 변호사의 호소력있는 목소리와 젊은 의대 지망생의 역동적인 몸짓들은 몇백년간의 외세와 탐욕스러운 독재자들로부터 지친 순수한 사탕수수 노동자, 시거 마는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을 단숨에 열광시킨 것이다. 그들의 열정적인 혁명은 어쩌면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은행이 이자를 위해서라며, 또 침체해 있는 내수경기를 활성화하고자,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라며 통화량을 늘려 화폐가치를 하락시키고, 통화팽창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오르고, 결국엔 그로인해 디플레이션이 찾아오면 돈의 가치상승이 뱅크런을 만들어 통화량이 수축되고 소비는 위축하게 되어, 상품이 넘쳐도 사용하지 못하며, 상품가치 하락으로 은행에 빛을 진 기업들이 파산하고, 생산과 고용은 줄어들어 이자를 갚지 못해 파산을 끝없이 반복하는 ‘콘드라티예프 파동’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진정 거부했던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본가가 이윤을 위해 기계를 들여 노동생산을 높이고, 그러므로 늘어난 ‘상대적 잉여가치’가 노동력 착취로 이어져 임금하락과 실업자를 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을 거부했거나 월가시위가 없을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꿔왔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노인의 바다’가 만드는 파도로도 충분한 ‘파동’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거시경제학을 따른 정부가 개입하는 ‘뉴딜정책’이나, 그 후 주장되어온 ‘시장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신자유주의’에서는 결코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인용: 카스트로의 쿠바 - 그레고리토지안, 역사를 살았던 쿠바
사전을 보면 혁명이란 “권력이나 조직 구조의 갑작스런 변화를 의미한다.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법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제1차 산업혁명은 1,760년에서 1,820년 사이 영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제조 공정과 기술의 혁신을 말한다. 당시 봉건제가 해체되어 누구나 자신의 부를 쌓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면직물의 수요가 증가하자 자연히 대량 생산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제2차 산업혁명은 1,865에서 1,900년 사이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을 일커른다. 이 역시 더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과학기술의 발전은 불가피했다. (세계대전의 원인도 있었다.) 제3차 산업혁명은 현재를 가르키며,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로 수많은 가전제품과 인터넷을 포함한 기술 발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제4차 산업혁명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에 앞서 기후변화, 인구절벽, 600개의 글로벌도시,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가상현실(웨어러블), 3D프린팅, 드론, 바이오기술 등의 혁신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다가올 제4차 산업혁명은 한스 로슬링이 말하는 4단계 20억 명 중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 과연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럼 우리는 다음을 질문해야 한다. ‘혁명이 필요한가.’ 기후변화나 인구절벽 같은 경우, 모두에게 해당되므로 산업혁명이 절실하다. 어쩌면 우리는 예상과 기대보다는 혁명을 조직해야 할 것도 같다. 우리는 에펠탑에 올라 베토벤의 영웅을 들어보며, 또 혁명광장을 걸으며 쇼팽의 연습곡 Op. 10, 12을 감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과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라는 교과서가 필요하고, 배회하고 있는 하나의 ¨앎¨이라는 유령이 우리의 ¨삶¨에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혹 누가 이 유령(ether)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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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저것 봐, 유령이 다시 나타났어! 벼락을 맞더라도 한번 막아봐야겠어. 허깨비야, 게 섰거라. 입이 있거든 말을 해봐. 혹시 이 나라의 재앙을 알고 있는 건 아니냐?」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새벽을 알리는 닭이 밤새도록 울어서 유령들이 얼씬도 못한다는 말이 있어. 그러면 별들도 마력을 잃고, 요정들도 장난기를 거두고, 마녀들도 신통력을 잃게 된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가 되면 정결하고 복스러운 기운이 넘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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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태워?」 「안돼, 탈 때 냄새가 나네. 내 원고를, 내 정열을 기울인 원고를..」 「또 읽어주려나? 지겨워.」 「아니, 종이는 재로 돌아가고, 시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네. 이 세상의 큰 손실이다... 로마의 멸망이다...」 흐릿한 어느 날 무성한 풀섶이 모진 바람에 서그럭거릴 쯤, 길을 잃은 곤충들과 생존의 갈래를 떠도는 야생들은 습기가 스며든 나무가지 아래서 혹독한 천둥과 거친 비를 호되게 그었으며, 청명한 어느 날 예전과 똑같은 무더움이 찾아왔을 쯤, 푸른 빛깔을 띤 맑게 갠 하늘은 신기한듯 거세게 타오르는 대지를 나지막이, 그럼에도 침착한 대지를 또 게염스럽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비로소 높고 넓은 하늘아래 여름의 거대한 대장정이 시작된 것일까. 하여 은하수를 가르는 화려한 유성의 소리가 존재의 자장가가 되어주고, 밤하늘을 이동하는 이슬의 짧은 여행이 깊은 수면에 빠진 생명들의 자명종이 되어주며, ‘빛의 커튼’ 오로라의 발자취를 찾아 차분하게 내려앉은 안개가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활력소가 되어줄 때, 어느덧 여름의 축이 된 하늘은 무상한 조양에서 이글거리는 정오로 이동하여 생동하는 대지를 조용히 감싸줄 것이고, 낮동안 스며든 더위를 식히는 검은 그림자들은 낙조가 물들이는 금성과 빛나는 별들의 천문으로 더없는 생기를 띠어갈 것이 분명하다. 더러 계절의 거친 호흡이 생명에 수없는 도전을 가져다 주고, 비록 계절의 변덕이 생명에 때아닌 갈증과 피로를 부른다 하여도, 그래서 걱정만큼 수염이 한없이 자라나는 키다리 옥수수와 날카로운 태양의 시선이 부끄러워 붉게 물드는 토마토와 길어진 일조 덕에 목이 아픈 해바라기가 생겨날지라도, 굵은 장대비는 지독한 폭염을 식히고 작열하는 한 낮의 강렬한 햇살은 곡식과 열매에 더없는 성숙을 불러오므로, 모진 계절의 움직임이 그렇게 자연의 성장을 부를 즈음, 여름은 어느세 놀라운 풍광을 자아내여 삶에 지친 우리에게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낼 생활의 활엽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오. 무엇을 하오? 쓰세요. 어떻게 사오? 그저. 가난하나 기쁘게 부자같이 지내오. 시와 사랑의 노래, 꿈과 이상의 나라, 아름다운 낙원, 마음만은 백만장자. 빛나는 그대의 눈동자 조용한 내 마음속을 불같이 태우네. 사랑스러운 눈은 지나간 나의 꿈과 나의 애타는 마음을 어지럽게 해도 난 모르고 있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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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르스가 왕녀와 사랑을 나누어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얻었는데,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의 로마다. 또 다른 해석은 테베레 강의 옛이름인 ‘힘’이라는 뜻의 Ruman, Rumendp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다. 둘은 분할통치를 하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로물루스는 100명의 장로를 모아서 원로원을 창설한다. 당시 원로들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였고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전부였고, 왕은 그것을 승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파테르’라고 불리었는데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 로물루스의 뒤로 민회의 찬성을 얻어 왕위에 오른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여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에 소속되게하여 부족간의 대립을 막았다. 누마는 백성들의 일상에 질서를 위해 달력도 만들어 12달과 1년의 날수를 355일 정한다. 누마는 혼자서 자주 숲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와 새로운 개혁안을 민회에 제출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님프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고,) 그 개혁안은 모두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승인된다. 제3대 왕 툴루스 후 제4대 왕이였던 안쿠스가 죽자 타르퀴니우스는 스스로 왕에 입후보하여 선거운동을 펼친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을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리비우스” 압도적으로 선출된 타르퀴니우스는 원로원의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타르퀴니우스의 신임을 얻어 왕이 된 세르비우스는 군제 개혁을 실시한다. 군제 개혁은 곧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였다. 당신 군역으로 세를 치루는 것이 전례였고, 세를 치룬 시민은 당연히 투표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세르바우스를 죽인 타르퀴니우스는 제7대 왕이 되어 선왕파로 알려진 원로원 의원을 모두 죽였다. 이런 독재적 전제군주에게도 하나의 재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사적 재능이었다. 그렇게 로마의 일곱의 왕을 뒤로 로마는 500년 동안 이어지는 공화국을 건설하게 된다. 250년 동안의 왕정을 정리하고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이행한 로마는 왕을 대신할 초대 집정관 2명을 선출할 제도를 창설하고 2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을 300명으로 늘린다. 그리고 집정관이었던 발레리우스는 정치와 군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이 국가 재정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법률을 제정했다. 또한 그는 로마 시민은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도 민회에 항소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로 그는 ‘푸블리콜라’라는 별명, 즉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509년 부터 기원전 503년까지 4번이나 집관정으로 재선된다. 당시 에트루리아인의 유출로 국력을 잃은 로마는 경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스티아의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 판매를 국가로 이관하고 소금을 화폐 대용으로 쓰게 된다. 그리고 타국인들의 로마 이주에 적극적으로 나서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원로원 의석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중엽에 로마는 불문율의 집성이던 로마법에서 글로 표기한 성문법을 만들게 된다. 지배계급은 처음에는 성문법에 대해 반대하였으나 당시 지형상 로마는 주변국과 잦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시민들의 뜻을 거슬려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파업을 하도록 지켜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449년 동판에 새겨진 12표법이 발표된다. 그럼 그 당시 아테네는 어땠는가. 페리클레스(기원전 495년경 ~ 429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의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의 제도를 흉내낸 것이 아니다. 남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범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이 정치체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공적 생활에 봉사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예도 세인이 인정하는 그 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고, 출신 가문이나 성장 과정에 따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빈곤 속에서 입신했더라도, 나라에 유익한 능력을 가졌다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길이 막히는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이 공사에 이바지할 길을 가졌으며, 또 사적인 생활에서도 나날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의심이나 질투가 소용돌이치는 것까지도 자유라고 말할 만큼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나날의 수고를 잊게 해주는 교양과 오락을 만끽하고, 경기와 제전을 해마다 정해진 날에 개최하고, 주거도 쾌적하게 정돈하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서도 상호 간의 간격이 크다. 그들(스파르타인)은 어릴 적부터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여 용기를 함양하기에 힘쓰지만, 우리는 자유의 기풍 속에서 자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 물러나는 일이 없다. 우리는 시련을 대할 때에도 그들처럼 비인간적인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의 예정된 결과로써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대한다. 우리가 발휘하는 용기는 관습에 얽매이고 법률에 규정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 개개인이 일상생활을 할 때 갖고 있는 각자의 형동원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질박함 속에 미를 사랑하며, 탁닉함이 없이 지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일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은 깊이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사적인 이익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공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 발휘된 능력은 공적 사업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종합해서 말하면, 우리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테네의 시민이라는 명예와 경험과 자질의 종합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이라는 증거로,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으로 구축된 국력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인용: 로마인 이야기 I
자연이라는 고립계에서 선의 정돈된 엔트로피나 악의 어질러진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흡사 각성의 번뇌와 망각의 두절같고, 그것이 잘 정돈되어 있거나 아무렇게 어질러져 있거나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자연은 어떤 경우에서나 늘 아름답다.) 악이라는 것은 선을 따라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라는 선을 펼칠 때 악은 자연히 선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이익이 충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의에 대한 욕구는 없다’는 말이 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어떤 행동에 대한 제한이 불문법에서 성문법으로 이동하는 것을 수없이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것에 앞서 좀 더 아름다워지려고 무단히 노력할 것이다.) 또 어떤 ¨아름다운¨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것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속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행동이나 예상되는 결과와는 무관하다. 그럼 그것이 선인가. 악이라고 단언한다면 그것은 (승자 독식에 의해) 정의되어 있는 어떤 약속이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그 정의는 애초에 후자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는가. 후자의 ‘자연적’ 아름다움은 칸트의 그 어떤 경험적 목적에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고정된 시선이 우리가 배운 윤리와 도덕이라는 틀을 통해 후자의 아름다움을 목격한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정의는 전체에게 공평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러나 정의가 공리사회의 가치와 기준에 그같은 작은 모순을 가져온다해도 우리는 다수의 이윤과 목적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정의란 누구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반면, 또 다른 누구에게는 오히려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 누가 어떤 땅에 울타리를 치고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사용하던 그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럼 무엇이 선이고 그 선은 누구를 위한 선인가. 벤담은 정의란 최대 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을 때 나오는 보편타당성이라고 말한다. 이런 공리주의는 전체의 복지가 불가능하고, 그래서 롤스는 신칸트적 좌파 자유주의인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자본주의의 폐지를 지향하며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반대하는 동시 공유를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교적 친족간의 관계와 덕의 함양을 주장하면서도 공동체주의가 초래하는 거대한 관료제도에 반기를 들며 무언가 새로운 것이 없는지 주변을 수시로 살핀다. 고대 로마의 과두정치와 2명의 집정관의 1년이라는 짧은 임기, 그리고 1개월씩 번갈아 통치하며 통치하지 않는 달에는 상대 집정관의 정책에 동의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좋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국과 속주국들, 그리고 식민도시들의 이반을 꾀했어도 쉽지 않았음을 보면 당시 로마 연합의 시스템은 사회가 보았을 때 확실히 정의로웠다. 로마는 기회가 주어지면 노예한테도 시민권을 주고 그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는 조세나 연공을 받는 프로빈키아보다는 동맹국으로써 전쟁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관계를 더 선호했다. 승전 후 강화 조치에서도 상대가 수락할 수 있는 한도에서 선을 그어 그들이 훗날 우방이 되는 것을 바랬다. “로마는 소수가 지도하는 과두정 체제를 채택한 공화국이다. 정책을 세워도, 그것이 당장 실천에 옮겨지는 군주제 국가가 아니다. 또한 사전 교섭만 잘하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관료제가 완비된 국가도 아니었다. 공화정 로마에는 지도층이 결집된 느낌을 주는 원로원이 있었다. 이 원로원을 설득해야만 비로소 입안한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 원로원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변론뿐이었다. 그래서 라틴어의 특징인 간결함과 명료함은 로마인들이 변론을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데 따른 결과가 아닐까 한다. 「로마인 이야기 II」”) 그리하여 존 밀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한 가지 의견이라 하더라도 인류는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 것인가. 우리의 시대정신은 아직 정의되지 못해서 인가. *참고.인용: 로마인 이야기 II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채택하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평등했던 것은 아니였고 귀족계급과 평민층 사이의 대립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의 법으로 모든 공직이 평민층에게도 개방되고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국법으로 삼는다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된다. 기원전 200년부터 카르타고가 멸망한 기원전 146년까지 로마가 매년 새롭게 선출하는 집정관 수의 합은 108명이었는데 ‘호모 노부스’라고 불리는 신참들은 그 중 8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28개 일족에 집중되어 있어서 로마 시민 사이에서도 기득권을 갖은 일종의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이 자리했다. 사실 원로원의 시작은 왕을 위한 자문기구였을 뿐이었으나 한니발 전쟁을 겪은 후로부터 원로원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원로원에는 속주나 동맹국의 사절을 관리하는 외교권을 갖고 있었고, 비록 주요 공직이 민회에서 선출된다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인사권이 원로원에 있었다. 또한 원로원은 속주의 조세제도를 결정하는 재정권도 가지고 있어서 국세청 역할도 병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법권조차 재판의 기관의 장은 원로원 의원인 법무관이었고, 배심원단 역시 원로원 의원이 독점하고 있었다. 집정관 선출권이 민회에 있다고는 하지만 선출된 집정관을 관리하는 것 또한 원로원이 결정했다. 한 기관에 이렇게 많은 권력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하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같은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원래 농경민이었던 로마 시민들은 국유지를 빌려 밀밭은 1/10, 그리고 올리브밭이나 포도주밭은 1/5의 임대료를 내고 가족 단위로 농업을 했다. 하지만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가족 단위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규모 농장에서 나온 수확물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빚을 지게 되었다. 당시 원로원 의원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로마 시민은 누구나 농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므로) 한사람에 제한되는 125헥타르의 농경지를 가족이나 친척의 명의로 임차하여 대규모 농장을 경영한 것이다. 그리하여 차츰 자작농들은 부채로 인해 땅을 몰수당하거나 헐값에 자신의 임차지를 팔고 실업자가 되어 사회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로마는 실업자에게 병역이나 직접세를 면제해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로마 시민으로써 수치로 여겼다. 그리하여 편법을 금지하는 농지개혁법을 주장하는 의견들이 속속히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로마 시민에게만 주어지는 토지 임차권에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투표권과 항소권을 갖은 ‘로마 시민권’과 그렇지 않은 ‘라틴 시민권’이 있었다. 이들은 직접세를 내지 않았으나 ‘로마 연합’ 동맹시 주민들은 ‘이탈리아인’이라고 하여 로마에 직접세를 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전까지만 해도 로마 시민은 병역 의무가 가장 무거웠고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의 식비도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 반대로 라틴 시민이나 이탈리아인은 무료로 배급을 받았고 전리품에서도 로마 시민과 동등하게 분배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로마 시민에만 주어지던 전시국채는 폐지되었으나 라틴 시민과 이탈리아인들의 조세는 계속해서 로마에 상납되었다. 그리하여 라틴 시민에게 로마 시민 자격을, 이탈리아인에게 라틴 시민의 자격을 주자는 개혁안이 제출된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안을 제안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모두에게 공평한 농지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국유지 임차권의 양도가 법률화되어 소유 상한선도 철폐된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쇄국주의로 제국주의를 꿈꾸며 시민권 개혁법조차 폐기처분해버리고 만다. (그러고보면 전쟁은 라틴 시민과 이탈리아인에게 ¨선¨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이 없는 동맹시들이 불평등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맹주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한니발이 그토록 원했던 ‘로마 연합’의 해체를 실현하여 ‘이탈리아’라는 신생국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는 형제와 같은 상대와의 전쟁 끝에 ‘율리우스 시민권법’으로 ‘로마 연합’에 살던 모두는 로마 시민이 된다. 로마는 이제 국가의 핵심적 도시에 사는 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든 것이다. *참고.인용: 로마인 이야기 III
기원전 6세기 로마는 공화정을 수립하고 명망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1년에 한 번씩 지명되는 집정관 제도를 통해 500년간 번영을 누렸다. 또한 로마는 귀족들의 정치 독식에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기원전 494년 민회를 세우고 호민관이 평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원로원과 집정관을 견제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81년에 술라가 원로원이 승인한 “독재관”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므로써 수백년동안을 이어온 견고한 로마 공화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재관이 된 술라는 형사재판의 배심원 자격을 원로원 의원으로 한정시켰다. 당시 귀족들의 부패가 만연했던 로마에서 키케로는 기원전 80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사건을 통해 법률가로써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디시 가이우스 베레스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원로원 원단(법정)에 나서게 된다. “내가 여러분 앞에 가져온 이 사건은, 제대로 판단할 수만 있다면 사법 절차에 대해 로마 시민들에게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우리의 동맹국들로부터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을 기회입니다. 가이우스 베레스는 공공기금의 횡령꾼이며, 아시아와 팜필리아의 꼬마 폭군이며, 시칠리아의 도시들로부터 권리를 박탈하고 오욕과 폐허만 가져온 강도입니다. 여러분이 신에게 맹세한 그 엄격함과 공정성에 바탕하여 이 인물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마땅한 권위를 계속 지켜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혹시라도 이자가 막대한 부로 정의를 추구하는 법정의 존엄성과 정직성을 매수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나는 한 가지만은 증명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지금 공화국에는 재판정에 세워 마땅한 범죄자나 그런 범죄자를 고발할 용기 있는 검사는 있지만 진실된 판결은 없다는 것을.” 이 사건을 뒤로 키케로는 기원전 63년에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암살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티비아누스가 키케로를 지원하지 않고 얼마 후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게 되면서 키케로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로마는 500년간의 공화제를 뒤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르 옥타비아누스를 로마 초대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참고.인용: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 - L. 레너드 케스터
몽테스키는 모든 존재가 자신들만의 법을 갖고 있고 각자의 법은 그것과 상이한 존재들 간 관계이자 상호 관계라고 설명한다. “모든 존재는 그들의 법을 갖는다. 신들도 그들의 법을 갖고 있다. 물질세계도 그것의 법이 있다. 인간보다 우월한 영적 존재들도 그들의 법이 있다. 짐승들에게도 그들만의 법이 있다. 인간들도 그들의 법이 있다. 그리고 법은 그것과 상이한 존재들 간 관계이자 이 여러 존재들 상호 간 관계다. 창조자나 보존인과 마찬가지로 신은 우주와 관계를 맺는다. 즉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법은 곧 신이 천지를 보존한다는 법에 다름 아니다. 신은 이 법칙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신은 이 법칙을 실행했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신은 이 법칙이 자신의 지혜나 힘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했다. 「법의 정신」” 자연법이란 언제 어디서나 자연히 존재하는 보편적 불변의 법칙을 말한다. 하지만 지식과 감정이 있는 생명체는 때로는 자연법을 따르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이 돌발적인 행동을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법 외 민족 상호 간 관계 속에서 나타는 법을 만민법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는 수많은 외국인들과 로마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로마는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여러 도시와 여러민족의 입장을 대변해줄 수 있는 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여러 관습들 중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인정된 규칙과 원칙들만을 규정하여 모든 민족에게 통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만민법은 원래 다음 원칙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즉 여러 민족은 각자의 참된 이익을 손상하는 일 없이 평시에는 서로에게 최대한의 선을, 전시에는 최소한의 악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의 정신」” (각 사회는 만민법 이외에 정치법이 있다. 인간은 서로와 협력하고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공화정체, 군주정체, 그리고 전제정체가 그것이다. 공화정체는 국민들이 주권을 갖는 정체이고, 군주정체는 한 사람이 제정된 불변의 법에 의거하여 한 민족이나 집단을 다르리는 정체다. 그리고 전제정치는 통치자나 법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만민법의 예를 살펴보자. 2,015년 난민 4,00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다가 지중해에서 익사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해양지 해변에 떠밀려온 죽은 아이들을 보고 세계는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그 비난을 절박한 난민들로부터 1,000유로나 수수료를 받고 이동시키는 알선자들에게 돌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터키에서 스웨덴이나, 리비아에서 런던으로 가는 항공은 50유로 미만이였고 그들이 공항으로 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였다. 하지만 문제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불법 이민에 대처하는 규정을 정해놓은 2,001년 유럽 이사회 지침 때문이였다. 예를 들어 적절한 서류를 갖추지 않은 사람을 유럽으로 보내 그들을 본국으로 다시 송환할 시 그 모든 비용을 항공사와 선박 회사가 지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유럽으로 가는 난민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떻게 탑승 수속 카운터 항공사 직원이 주어진 단 몇분안에 그들을 제네바 협약에서 인정하는 난민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느냐다. 그래서 항공사는 그들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8개월을 기다려 비자를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항공을 이용하거나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난민 신청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좋은 배를 타고 갈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유럽연합에 도착하는 난민의 배는 무조건 압수 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좋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갈 수 없는 것이다. 참고.인용: 팩트풀니스】 원시인, 문명인, 국가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만민법은 과거 이탈리아종족들의 관습들 가운데 만들어져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분만을 교정한 것이므로 이 법은 최대다수를 위한 정의이며 형편상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 될 수 없기도 하다. “따라서 비록 로마 주변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재산양도가 다른 형태로 행해지더라도, 실제 이전이 되도록 한 실제 물건의 양도(transfer), 인도(tradition) 혹은 명도(delivery)는 절차의 일부였다. 이를테면 비록 부수적인 부분일지라도, 로마에서의 독특한 면제나 양도방식이 그 일부였던 것이다. 고대법 - 헨리 S.M.” 따라서 정의는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소통의 도구이자 사회가 합의하에 정한 관습과 규칙을 따르는 공동의 표석이 될 뿐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면 자연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한 사람은 건강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은 병들게 만들고, 한 사람은 영리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은 바보스럽게 만든다. 사회질서는 자연의 부당함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 - 한스 켈젠” 한스 켈젠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의 견해 중 무엇이 옳은지를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말한다. 아무리 다수를 위한다고 주장하여도 소수의 피해를 묵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말하는 다수의 정당성은 상대적이며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404 - 5
“만사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되는 법이니 좋은 일이 아니냐. 씁쓸한 지난 일은 다 흘려버리고, 앞으로 달콤한 일들만이 반갑게 찾아 올 거다.” 나: 「어떻게 그리 확신해요?」 「사실 난 똑똑하고 가난하죠.」 나: 「똑똑하고 가난한 건 나지.」 「왜 그리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나: 「당신과 커피는 안 마실 테니까.」 「마시자고 할 생각도 없어.」 나: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지.」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인신(person)이라는 재산을 소유한다. 신체와 재산에 대해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그의 손의 작품은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그래서 그가 자연이 제공해준 상태로부터 제거하고 자연에 남겨둔 그 무엇이든, 그가 그의 노동을 거기에 혼합하였고, 그 자신의 것인 어떤 것을 자연에 결합했고 그렇게 결합함으로써 그것을 그의 재산으로 만든다. 그가 그것을 자연이 제공한 공통의 상태로부터 제거했기 때문에, 그것은 이 노동으로 인해 그것에 더 보태진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보태진 이 노동이 그 노동자의 의문의 여지없는 재산이므로 이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한 때 결합되어 있던 권리를 가질 수 없다. ... 떡갈나무 아래에서 주은 도토리로 혹은 숲속 나무로부터 채집한 사과로 영양을 섭취하는 사람은, 분명 그것들을 자신에게 전용했다. 아무도 그 섭취가 그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언제 그것들이 그의 것이 되기 시작했는가? ... 그 대답은 명백하다. 만약 첫 번째 채집이 그것들을 그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 외의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노동이 그것들과 공통의 것을 구분했다. 그 노동이 그것들(도토리와 사과)에게 모두의 어머니인 자연이 한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을 보탰다. 그렇게 그것들은 그의 사적 권리가 되었다. 그가 모든 인류로부터 그 도토리와 사과들을 그의 것으로 삼아도 좋다는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거둔 도토리들과 사과들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 만약 그와 같은 동의가 필요했다면, 신이 그에게 내린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굶주렸을 것이다. 우리는 [협약(compact)에 의해 그런 상태로 남아있는] 공동소유(commons)에서 알게 되는 사실은, 공동의 것으로부터 일부를 취하는 것, 그리고 그 일부를 자연이 남겨둔 상태로부터 제거하는 것이 재산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재산이 없이는 공동소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존 로크”
빛이 있어야 어둠이 존재한다. (흼이 있고,) 흼의 부재가 바로 검정이다. 모든 색의 조합은 흼이고, 모든 색의 부재는 검정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검은 색은 색채의 무이며, 하얀색은 색채의 전체다.” 흼과 앎의 배경은 무無이자 어둠이다. 무는 전체의 필연이다. 로크에게 자연은 공통의 상태다. 그리고 자연이 제공해준 상태에서 노동으로 어떤 것을 공통의 상태로부터 제거했을 경우 그것은 노동자의 의문의 여지없는 재산이므로 그것은 그의 권리가 된다. 자연이 한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을 보탰을 때 그것은 사적인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공통의 상태에서 누군가가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자연법(칙)은 무로부터 그의 권리를 보호해준다. 사실 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색채라는 권리가 주어지자 무는 그에게 해가 되었다. “자연법(적) 윤리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서 ‘선’(goodness)이란 그 유형의 피조물을 위하여 최선의 것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다. 그러므로 ‘선’이란 그 피조물의 속성에 달린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 자연법(적) 윤리학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 최선의 것을 달성하는지 혹은 좌절시키는지에 의해 선악이 결정될 수 있다고 천명한다. {사전에서 ‘자연법’이란 사람들에게 원초의 상태에서 부터 적용된다고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나 자연적 정의이라고 설명한다.} 자연법은, 그래서, 인간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자세히 밝힌다. 무슨 목적들을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지, 인간의 본성과 가장 조화로운 목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킬 최선의 성향을 지닌 목적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밝힌다. 그래서 중대한 의미에서, 자연법은 인간에게 ‘행복의 과학’(science of happiness)을, 그의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 길들을 제공한다. 「자유와 윤리」” 과연 그의 아름다움은 행복을 제공하는가. 우리에게 무엇이 선하다는 것, 즉 좋다는 것은 그것이 주는 효용, 가치, 만족으로 결정된다. 나의 자유, 곧 자신을 위한 선은 누군가에게 구속을 초래하기도 한다. 만약 토리당의 A정책이 휘그당의 B정책을 맞선다면 토리당이 정권을 잡았을 경우 휘그당 지지자들은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그럼 휘그당 지지자들은 공리주의의 열변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만족해야 하는가. 롤스는 정의를 위해 두가지 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정치과정을 참여할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인격의 자유, 자의적인 구속과 압수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개인적 재산을 가질 권리에 대한) 최대한의 평등한 자유 원칙이고, 두번째는 최소 수혜자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며 공정한 기회평등의 원칙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평등을 준다고는 하지만 제논의 역설처럼 제 아무리 뛰어난 아킬레우스라도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구조다. 그럼 어떻게 권력을 나누고 어떻게 서로를 견제하여 더불어 사는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케이크를 선물받은 두 아이가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은 두 아이 중에 케이크를 나누는 아이와 고르는 아이를 각각 정하는 것이다. *참고.인용: 헌법을 쓰는 시간 - 김진한, 맑스와 정의 - 엘런 E. 뷰캐넌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에 관한 의견이 생겼다. 당위{마땅히 해야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의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당위의 의견은 인간들에게 판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당위에 따르는 인간들의 행동에 의해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당위의 의견이 현실과 사실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당위’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가치이고 판단입니다. 옳다, 그르다를 포함해 사람들마다 생각과 양심에 따라 다양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 당위입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양한 의견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진실과 거짓은 없습니다. 법학이란 이런 당위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헌법을 쓰는 시간 - 김진한” 법은 의견이고 당위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호박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행위는 당위를, 다수의 당위는 정의를 이룬다.)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존재해야만 하는 것,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당위다. 의견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황적인 우리의 생각에 존재한다. “의견에 진실과 거짓은 존재할 수 없지만, 공정함과 공정하지 않음은 존재한다. 헌법을 쓰는 시간 - 김진한” 다음은 1649년 영국의 국왕 찰스 1세의 당위다. “왕이 신하를 사형시키는 것과 신하가 왕을 사형시키는 것 어느 쪽의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그대들의 왕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런던 시민들의 당위는 달랐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왕권의 폭정을 반대한 다수의 의견은 350년이 지나도록 영국 의회가 다수를 위한 헌법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실행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준다. *참고.인용: 헌법을 쓰는 시간 - 김진한, 맑스와 정의 - 엘런 E. 뷰캐넌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처럼 본능이나 생물학적 필요성 외에도 의지적인 선택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인간은 자연적인 경향성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럼 존 맥키의 주장대로 객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고 ‘윤리적 가치, 의무, 정의와 불의의 개념, 경멸받아 합당한 행동들 등은 모두 개인의 주관적인 표현일 뿐’이며 그것을 우리는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절대화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가. (cf. J. Mackie, Etica) 예를들어 (현인류에서) 인간에게 생명은 선한 것이고 생명을 거스르는 것은 악에 속한다. 인간은 생명이 단지 자신을 위한 선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선이라는 것을 숙지하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피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다수의 인류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생명을 선이자 자연법으로 이행하는데는 자고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처럼 윤리성을 지니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선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행위들이 있는가? 대답은 긍정이기도 하고 부정이기도 하다. 긍정적 의미에서 어떤 행위들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것들이 있다. 사실 중립적인 행위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구체적으로 보면 항상 특별한 윤리성을 취하고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일단 중립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들을 행하는 경우도 우리의 지향에 따라서 그 행위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색깔을 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법, 토마스 스칸드롤리오” 우리가 자동차를 타는 것은 중립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우리가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야기되는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악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양심’은 냉전(冷戰) 때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법은 시간에 따라 변경되고 변질되는가. 자연법은 인간 본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기본 원칙에서 불변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내-존재는 언제고 새롭게 갱신한다. 단지 인간의 본성natura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한 자연법은 자연적인naturale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토마스 스칸드롤리오는 향락주의가 우리의 습관을 바꾸어 양심을 악하게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지성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 본성에 흠집을 낼 수 없고, 자연법은 그렇게 손상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인간 본성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참고.인용: 자연법 - 토마스 스칸드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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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의 권력자들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법을 만들지 않았다. 【중세란 로마 제국의 몰락(476년)에서부터 근세(1500-1800년)가 시작되기까지의 세기를 말한다.】 그들은 정치적인 권력을 정의하기 위해 법적 제도를 정비했으며, 그리하여 이 시기에 제정된 법은 사회의 구성원들과 모든 영토에 동일한 구속력이 없었다. 그래서 각 지역 사회에 존재한 관습법이 권력자들이 공포한 법령이나 종교법과 동일한 위상을 지니며 당시 법적 시스템이나 체계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같은 영지에서 생활하는 경우라 하여도 개인의 권리와 연관된 원칙은 서로 다르게 적용되었으며, 서로 다른 민족들은 통합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사회적인 관습을 따랐다. 관습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법적 전통이 달랐으며, 따라서 중세 유럽에는 다른 관점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법령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중세법 관계자들은 관습을 증명하고 관습을 관찰했으며, 법제를 구성하는 행정관들은 관습을 존중했다. 차츰 성문법의 필요성에 따라 법령을 적기 위해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민족의 권리는 관습법의 형태로 구전되었다. “그렇게 해서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다양한 법전이 등장했다. 「서고트 법전Lex Visigothorum」, 「부르군트 법전Lex Burgundiorum」이나 클로비스가 프랑크 민족에 적용하기 위해 공포했던 「살리족 법전Pactus legis Salicae」이 대표적인 실례들이다. 이후로 643년에 로타리 왕(?-652, 636년부터 왕)은 「칙령Edictum」(이하 <로타리 칙령>)을 통해서 랑고바르드족의 법적 전통을 법제로 구성했다. 같은 맥락에서 7세기부터 영국 군주들은 유럽 대륙의 전통과 달리 지역의 속어(벙언)를 활용해서 법전을 공포했다. 서고트족의 왕국이나 부르군트족의 왕국에서 법령의 공포는 로마의 법을 참고했다. 예를 들어서 「부르군트의 로마법Lex Romana Burgundiorum」은 180개의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오도시우스 법전」, 「헤르모게니아누스 법전」, 「그레고리우스 법전」과 파울루스의 「격언Sententiae」과 「가이우스의 책Liber Gai」을 참고로 제작된 것이다. 「서고트의 로마법Lex Romana」은 알라리크 2세가 507년에 공포한 것으로, 갈리아 지방의 프랑크족과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에게도 적용되었고, 이후로 오랜 세기 동안 서유럽 지역에서 로마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었다. 중세 I - 움베르토 에코” *참고.인용: 중세 움베르토 에코
11세기와 12세기 사이 문화적인 번영의 영향으로 도시화와 제조업 활동이 증대하고 농산물의 생산이 늘어나면서 관습법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법적 수단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에 의해서 로마법으로 새롭게 불린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이 문헌학적으로 제구성된 「학설휘찬Digesta」, 「칙법휘찬Codex」, 「법학제요Institutiones」, 「신칙법Novellae」로 재발견된다. “11세기와 12세기의 사회.경제적인 변화로부터 새로운 법 규정에 대한 요구들이 나타났으며, 「로마법 대전」의 복구와 연구를 시작으로 볼로냐 주석가들의 학교에서 시작된 이론 작업이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고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학의 번성을 통해 새로운 법학은 유럽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법률인 ‘보통법common law’의 모태가 되었다. 중세 II - 움베르토 에코”
“군주제 강화, 법 이론의 실질적인 영향, 교회 입법의 영향력은 중세 후반에 등장한 형법 체계의 근대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인이었다. 반면 잉글랜드에서는 12세기부터 기소 형태로 3인 배심원 제도가 등장했다. 13세기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교회 재판(소)의 이단 재판을 위한 범례가 확립되었다. 중세 III - 움베르토 에코”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이 구분된 것이 바로 12-13세기다. 민법이란 개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정해주는 법으로 가해자의 위법행위가 피해자에게 물권적인 손해를 주었을 때 그 손해를 보상해주는 법이다. 형법은 민법과 상관없이 재판을 통해 국가가 개인에게 형벌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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