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辰 - 小滿

2024. 4. 28. 00:05 from 六十干支

 

“「누군가에게 말한 적 있던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일인지.」뜨거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리는 고통일지도 몰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어린아이가 바람에 찢어진 여린 잎처럼 바들바들 온몸을 떨던 두려움인지도 몰라. 차라리 모를수록 좋았을 시간들을 기어코 알 수밖에 없도록 한 꺼풀씩 제 눈의 막을 벗겨내야 하는 고문인지도 몰라. 있어야 할 것을 잃었을 때 없어야 할 것을 안고서라도 바득바득 살아야 할 숙명 같은 건지도 몰라. 시시때때 세상의 기울기에 물들이 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의 너와 나라면.「누군가는 말해줄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얼마만큼 미워해야 가벼워질 수 있는 질량인 건지.」” 

 

 

사랑의 기쁨이 있으므로 사랑의 슬픔이 있고, 사랑이 있었으므로 미움이 존재한다. 우선 대상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을 미워할 수 없고, 대상의 깊이를 알아간다는 것은 교제를 통해 그것을 사랑해 나간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랑은 행복이지만 외로운 투쟁이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침묵은 ‘미움받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칼릴 지브란이 말한 사랑은 ‘신의 고결하고 숭고한 향연을 위한 빵’이므로, 반죽되고 부드러워진 빵이 알맞게 익은 후에 그것은 아름다운 연회에 사용되어 본 사명을 다하여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사랑은 말 그대로 성애화되고 잉여 상품화되어 에로스없는 에로틱한 상품으로 전락되고 만다. 불필요한 감정에서 사생된 이 남아도는 사랑, 그것이 혹시 미움일까.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닌 새롭게 모형을 변형한 ‘반정립’, 즉 미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타들어가는 빵 한조각, 과연 검게 그을린 증오는 여전히 사랑일까. 미움이란 어떤 사물의 형태가 자신이 지금껏 믿어온 이상을 벗어날 때 지각하는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선이라는 것은 늘 타자를 포함한다. 하지만 격정이나 사랑으로 객체화되지 않은 타자로부터 남겨진 ‘미움’이라는 조각은 ‘사랑의 슬픔’(Liebesleid)이란 의미없는 혼란만을 부추길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늘 자신의 주관만을 앞세워 자신이 보고 느낀 것만을 인정하게 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망각은 용기대신 거짓으로 ‘자아’(책 읽어주는 남자)를 학대하게 된다. 하지만 ‘무기력한 상태’(아기같은)에서 현재의 위치보다 좀더 우월해지려는 우리는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보다 나은 자신을 위한 성장의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을 무기로 상대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은 권력을 통해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테제인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또 하나의 ‘우월에 빠진 열등’일 뿐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보면 객관적인 우리는 ‘과거의 원인이 아닌 현재의 목적’으로 사실을 부정한다고 한다. 아들러는 ‘경험의 충격’, 외상의 고통을 피하고 경험을 통해 목적이 가져온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고 설명했으며, 인간은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칸트가 말하는 ‘경험을 초월하는 대상’ 물자체는 인식될 수 없는, ‘대상(사물)이 우리의 감각을 촉발해 생겨나는 표상’이라는 점을 (또는 프로이트의 원인론, 트라우마 ‘마음의 상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럼 니체의 말처럼 감정이 아닌 오직 감각만이 실재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해.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가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네.” 자유롭게 ‘미움받을 용기’란 바로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자기수용), 의심을 품지않고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는 용기(타자신뢰), 그리고 나의 가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를 실감하기 위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나를 헌신할 수 있는 자세(타자공헌)를 말한다. 사랑하기 위해선 반드시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던 우리는 ‘미움’이라는 단어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영혼’은 사랑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자신을 인정하는 것, 자신의 가치를 투영하지 않고 상대를 곧이 이해하는 것, 그래서 나를 희생하여 나의 가치를 찾는 “에네르게이아 erergeia 적 인생”(“지금하고 있는 것이 그래로 이루어진 상태,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 반대로 키네시스 kinesis 란 목적론적 운동, 목적을 완전히 실현한 상태, 정해진 목적을 향해 가는 운동”), 순간 순간을 즐기며 과정 자체에 만족하는 자세만이 ‘사랑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오늘 죽어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은 과정의 연속이다. 2016-06-24

 

 

Los Angeles의 운각에서 찾은 천사의 음률

 

취미는 향유자의 것, 그럼 소금이란 심미적 취향의 도구인가. 이에 유리알 유희는 미슈랭의 향연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들의 지혜의 이슬, 즉 넥타르를 마신 후 우리의 굿펠로가 진행하는 한 여름밤의 꿈을 꾸자. 그렇다면 제주의 호랑가시나무를 흔드는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적 빨강머리의 인상을 안주삼는가. 그러므로 율리시스는 썩은 감자볶음을 설파하며 사랑의 흐름 속 사이렌의 데시벨에 몸서리 친다. 이같은 우리의 잡담은 天 계의 고원에 한 축이다. 그러므로 그리하여 여름의 아침을 껴앉은 자가 곧 이삭줍는 여인들을 위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결국 우리의 아침에 우리는 수렴을 떠올려 멋쩍은 break-fast를 하여야 할 것이다.

 

넥타르: Wiser's & 참이슬

호랑가시나무: Hollywood

인상: Impression, Sunrise - Claude Monet

사랑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天계의 고원: 천 개의 고원, 즉 잡담이란 텍스트의 한 Chapter

가을의 기도: 김현승 시인

수렴: 세잔의 사과가 없는 평행세계의 또 다른 인류, 즉 가죽옷이 없는

 

 

Conte

 

안녕 젊은이. 비루한 나에게 그는 낭낭하게 외쳤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의 당당하고도 자신감찬 무언의 눈빛은 그가 이제껏 겪어온 지난 과거를 상대에게 강렬히 뿜어내며 시의적절하게 호소해 오고 있었다. 상대의 허술한 빈틈으로 뚜러지게 쏟아지는 그의 눈동자는 이제막 대지를 찾은 석양의 최후를 미리 답습한 듯, 지목한 대상을 향해 지독히도 강렬하게 발해오고 말았다. 그가 언뜻 화제를 이어갔다. 삶이란 그런거지 젊은이··· 대화를 주저하던 나는 멈짓거리며 잠시 아무런 대꾸도 그에게 건네지 않았다. 나는 이상황에서 도대체 무었을 그에게 토로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단지 주어진 하루를 모질게 연명하려는 한낫 나그네이자 그저 기습적인 허기에 지친, 기껏해야 검은 눈동자의 이방인이였을 뿐, 나는 그렇게 스쳐 지나는 그 누구에게나 삶의 연장을 비굴하고도 쉽게 구걸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지난 몇날몇일을 길거리에서 간신히 연명해온 나에게 어둠이 찾은 도시의 매서운 추위와 새벽이슬의 명렬한 습격은 무척이나 혹독했다. 나는 생의 거짓을 증명하려드는 상대에게 단지 따뜻한 웃옷을 구하려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들을 임이로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그리고 다시 결혼해서 2명의 자식이 더 있지. 그래 젊은이, 추위에 떠는 자네에게 나의 소유물을 나누어주는 것 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자네가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해. 난··· 그래 난··· 지난 8년간 감옥에서 생활해 왔었지. 규율과 질서에 구속된 일률적인 교도생활은 정말로 끔찍하다네. 음, 생각해보니 당시는 참으로 긴 세월이였네 젊은이. 짧게 설명하자면 이렇다네. 내 아들들은 내 첫 아내를 살해했다네. 하지만 나는 내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하지 않았네. 그래서 선택할 수 있었지. 대신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해 내 생을 걸어 보기로. 그는 더 이상 생의 한 가운데 서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삶을 포기한채 무턱대고 아무곳에서나 주저 앉거나 주위에 동정을 구하려 스스로를 비틀거리려 들지는 않았다. 보름이 채 되지않는 객지에서의 낯선생활로 인해 과다한 피로를 느끼는 내가 그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취했을 것인가. 이쯤에서 그녀가 지독한 사랑에 빠져있었다고 넌지시 일러야 하는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사랑의 실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으려 하는 것일까. 아마도 눈부신 황혼을 기다려온 나는 이젠 사랑 따위는 진절머리가 난다고 주절주절 변명을 쏟아낼 것인가. 조곤히 들려오던 추가적인 그의 열변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나는 한동안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건네지 않았다. 얼마후 그는 묵묵히 세월의 흔적이 담긴 때묻은 가방들을 차근차근 뒤적이더니 묵직하고도 두뚬한 잠바 하나를 꺼내 들곤 그것을 나에게 말없이 건넸다. 젊은이, 이걸로 충분할 걸쎄. 기쁨 마음을 뒤로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잔잔한 미소로 답하며 그의 남은 점심식사를 아낌없이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주섬주섬 그가 권하는 물건들을 챙기며 떠날 차비를 하던 나에게 그가 돌연 말해왔다. “젊은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걸쎄. 나에게는 여분의 담요가 있으니 이걸 가지고 가게. 그의 지난 세월을 설명하는 풋풋한 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빨지 않아 도시 구석구석의 모진 흔적들이 배인 담요는 이제 영락없이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카렌 블릭센의 해석처럼 모든 병에는 소금물이 약일까. 땀이 그렇고, 눈물이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바다의 진심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바다 바람은 거셌다. 온기를 전해오던 금빛 모래들은 어느세 어둠과 함께 서서히 식어갔고, 고향에 도착한 율리시스는 지독한 파도를 견뎌온 돛을 차분히 걷어내린 후 항구에 정박한 선박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인다. 반복적으로 육지와 성난 파도를 오가는 두 눈을 감싸던 헝겁은 침식한 하루와 함께 파도의 멜로디에 잊혀져 영롱한 달빛의 음영 속으로 어느세 사라졌다. 지독히도 빛나던 밤하늘의 별들과 쓰디쓴 해변의 모래알들은 오래전 느꼈었던 오감에 새롭고도 긴 여운을 남겼고, 매서운 바닷바람은 체온을 낮추어 잊고있던 허기를 다시금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 떠나기 전 무엇인가를 기록해야 한다. 에덴의 동쪽은 실낙원이 아니다. Timshel!

 

생을 걸다, 생을 살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생의 한가운데

Timshel: Thou Mayest, Genesis 4:7 

에덴의 동쪽: California Salinas, 카인(농사하는 자)이 아벨(양 치는 자)을 죽이고 갔다는 놋 땅, 가죽옷이 있는

실낙원: 잃어버린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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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