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辰 - 夏至

2024. 7. 2. 01:41 from 六十干支

 

만지면 끝이 바스러질 듯한 판본, 훼손된 표지를 두꺼운 종이로 수선한 판본, 때로는 아예 새로 인쇄한 판본까지 정렬되어 있다. 저 초시간적인 책장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책들의 운명이란 이런 것이다. 대출자가 없을 때는 코마 상태로 기거하다가 누군가 나타나 잡으면 아무리 오랜된 책이라도 일순간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영원한 망각의 물결에 도도히 합류했으면서도 부활의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로 선택을 기다리는 위대한 언어적 창조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독자는 소수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남루하지만 기름진 문장들, 한때 어두웠지만 그 어떤 신간보다 대낮처럼 정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종이 뭉치들을 더듬으면서 나는 이 책들이야말로 나를 현실에서 꺼내줄 영혼의 도르래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미래의 독자가 망각하지 않는 오래된 책은 일종의 녹이 슨 작살이다. 복잡한 의미와 뒤엉킨 문장으로 적힌 글들은 한때 한 세대를 주도하는 물성으로 존재하다가 어느덧 커튼 뒤로의 퇴장을 명 받았지만 보이지 않는 휘장 뒤의 묵언 속에서 빛으로 가득한 책은 분명히 있었다. 굳어버린 빵 조각 같은 종합자료실 책의 문장을 하나씩 발라내 음미하면 그것은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곤 했다. 오래된 책을 정기적으로 펼쳐 읽는 행위는 생의 곁길로 빠지면서 즐기는 잠깐의 군것질이 아니라 정신의 식탁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는 정찬의 의례에 가까웠다. 묵은내가 폐부 끝까지 전해지는 도서관을 에어포켓 삼아 숨 쉬어보는 몽상을 거듭한 나는 수은을 삼키고 불가사의하지만 흡족한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귀가하곤 했다. 일회적이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책들을 내 안에 꾹꾹 눌러 담고 나오는 날의 노을빛은 아름다웠다. 생활인으로서, 한 명의 독자로서 그것은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금서는 세상이 온통 뿌연 때에 뜻밖의 색조를 띠며 세상의 불온함을 고발하는 초월적 문장의 합이었다. 그 책들은 한 시대와 불화했다. 금서라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불화의 방향은 소수의 권력자가 탈취한 이념이었다. 금서의 작가들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와 독자에게 자유를 선물하고자 했다. 독자는 문장으로 적힌 지옥의 창문을 열어보면서 자유의 물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 편협한 생각, 작가에 대한 권능자의 질투와 조바심이 금서를 만든다. 금서의 작가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힘썼던 초극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안전하지 못한 책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었다. 금서를 읽으며 여행하는 일은 곤경에 처했던 책들의 광휘 가득한 복권이다. 금서를 선택하여 읽는다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적 행위다. 독자는 망각의 물결에서 의식적으로 책의 불온함을 제거해준다. 이 위대한 일은 독자만이 해낼 수 있는 과업이다. 나쁜책

 

우리는 죽는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척도가 될 수 있다. 토니 모리슨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농담, 밀란 쿤데라”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Lecture 7-Eleven

 

나는 운명론을 말하고 있어. 

↘ 그래, 설계자가 제공한 자유의지란 양자학의 확률을 설명하지. 

 

그럼 최후의 심판은? 

↘ 시작은 사과라고 말했지? 그게 황금사과이면 어떻고, 혹 세잔의 사과라든지 또는 빌헬름 텔의 사과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거지? 

↘ 내가 오렌지 주스를 사마시기 위해 자판기에 지폐를 넣었어. 하지만 콜라가 나왔어. 

 

그럼 자판기를 설계한 사람의 실수라고 보아야 하나, 아니면 자판기를 관리하는 직원의 실수일까. 

↘ 자판기는 설계자의 작품이 아니야. 설계자는 우리가 레고놀이를 할 수 있게 Periodic Table을 선사해 주었지. 

 

설계자의 자연은 완벽하다는 말인가. 

↘ 가죽웃을 입은 우리는 씨앗을 대지에 뿌렸어. 하지만 설계자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아담의 첫 피조물 아벨의 저주없이는 술과 식초가 너무 빨리 등장한다는 걸 말이지. 문제는 이후 인류가 너무 향신료에 빠져 가인처럼 신성한 대지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는 점이야. 그래, 상한 고기를 보존하기 위한 향신료는 농사에 지친 가인의 업業이라 볼 수도 있어. Periodic Table을 확장할 수 있는 물질들은 아마도 우유길에 차고 넘치겠지. 오르트 구름을 넘어서 평행세계를 꿈꾸는 칼 세이건의 보이져는 향신료에 미쳐 Starwar나 떠올리는 인류를 비웃고 있을지 모르지. 벌거벗은 가르공튀아가 되어버린 우리는 더이상 거인의 어깨에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지.  

 

불신과 구원을 어떻게 해석하지? 

↘ 설계자는 이렇게 물어올거야. 너의 결과는 오렌지였는데 왜 자몽으로 나왔니,하고 말이야. 그리고 ‘너’의 성장과정을 살피며 추가적인 설명을 하시겠지. 여기서 ‘넌’ 이같은 mineral이나 nutrition을 섭취하면 않됐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자유의지란 특별한 선물을 주었지. 

 

우리에게 술이 필요할까. 

↘ 사실 술은 설계자의 축복이였어. 지속되는 각성상태에 지친 피조물이 풍년을 통해 얻은 술로 수면과 같은 망각에 빠져 괴로움으로 인한 죽음을 모면하는 것이라 보면 돼. 술에 취한 노아를 생각해 봐. 

 

성性에 대해서 우리 과감하게 토론해 볼 수 있을까. 

↘ 성에서 쾌락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건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일종의 노동으로 전략할 뿐이야.  

 

그렇다면 왜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 샤워를 마친 후 스스로를 전신거울에 비추면 어색하고도 창피하지 않나? 창피하다, 부끄럽다,라는 사실을 인지함에는 우리의 ‘삶'이 ‘앎’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지. 에덴의 ‘삶’엔 우물을 들여다보며 부끄러워하는 윤동주가 없어. 에덴의 동쪽과는 다른 ‘삶’이지. 낙원에는 가죽옷이 없지만 실낙원에는 가죽옷이 존재해. ‘가죽옷’이란 ‘피’와 ‘죽음’을 의미해. ‘앎’에 도달하기 위해 ‘삶’은 ‘죽음’을 관통해야 돼. 예수가 예수로 정의된 순간이 바로 오후 3시라는 점을 기억해. 그래, 너는 너라는 ‘삶’이야. 너를 타인이 정의하기 위해서 너는 ‘죽음’을 경험해야 돼. 그럼 ‘넌’ 결국 너라는 ‘앎’으로 완성되고 정의되는 거지. 네가 홍길동이 되고, 네가 로빈후드가 되려면 말초적인 본능을 낮추고 긍지와 희망의 자세로 후세의 귓감이 되어야 돼. 자연법을 빼고 일인층의 정의란 성립되지 않지. 그래서 무리에서 쫓겨난 외로운 사자는 정의롭지 않아. 사자를 공격하는 하이에나 무리에게 정의는 공존하지. 설계자의 자연법을 들여다 볼까. 설계자는 그의 열정과 수고가 담긴 피조물을 범하여 ‘피’와 ‘가죽옷’을 인류에게 제공했어. 하지만 정작 최초의 낙원에는 ‘선악과를 건들지 말라’,라는 단 하나만의 자연법만이 존재하지. 외롭던 아담(삶)에게 선악(앎), 즉 바른 것바르지 않은 것이 필요했을까. 설계자의 깊은 섭리란···

 

성장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성性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까. 

↘ 카프카의 ‘변신’은 너무 조신해. 차라리 수음으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는 포트노이가 솔직하다고 봐. 포트노이는 눈으로 이성을 탐하는 것, 즉 상대를 만지는 간음보다는 죄의식 속 수음이라는 쾌를 선택한 거야. 포트노이Portnoy는 프랑스의 오래된 성으로, ‘검은 문’을 뜻하는 프랑스어 ‘porte noir에 어원을 둔다고 합니다. 설계자는 우리의 왕성한 호기심을 위해 레고놀이를 우주 곳곳에 비밀리 숨겨 놓으셨지.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레고 법을 만들어야 해. 단, 레고 십계명을 지키면서. 그러한 우리의 ‘삶’은 ‘앎’을 남기고 초신성으로 빛나는 거야. 성은 오감의 완성이야. 따라서 성은 사랑이라는 조건을 통해 오감을 100% 충족시킬 수 있지. (시각 87%, 청각 7%, 촉각 3%, 후각 2%, 미각 1%: 바다란···’) 그리하여 우리는 초인으로써 ‘나를 상대에게 기투하여’ 다이아몬드를 품은 초신성에 도달하는 것. 즉 성으로 육감을 확인하고 정반합을 실천하는 거지. 말하자면 테제와 안티테제가 성이라는 갈등을 통해 진테제로 초월되어 ‘정신’을 남긴다는 말이야. 남성이 테제냐, 여성이 반테제냐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테지. 오감 중 가장 강력한 시각은 권력을 의미하지. 주체인 대자의 비밀스러운 시선이 객체인 즉자, 즉 터부시하는 타자의 치부를 목격하면서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거야. 관객이 관중과 다른 점은 화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지. 밝은 방에서 카메라 루시아Lucida를 사용하려 했지만, 결국 닫힌 방에서 카메라 옵스큐라obscura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어. 율리시스가 바다Il Mare에 남겨진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그래, 철학이 어려우면 ‘삶’이 어려워져. 플라톤이면 족하고, 아리스토텔리스의 과학이면 충분해. 그럼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다다른, 그가 가닿은 설계자의 레고놀이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2차 향신료 전쟁 후 ‘열락과 신열의 들뜬’ 인류에게 남겨진 건 오직 허무주의 뿐이야. 결국 마약이 즐비했고,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유행처럼 번지지. 피카소의 규비즘이나 색의 마법사 샤갈의 작품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몇천년 동안 매일저녁 낙조를 관조하면서 장방정식을 잘못 풀어내고 겨우 윤년을 더해 가까스로 그레고리력 시간을 정의한 인류가 과연 무의미하고도 허무한 슈퍼노바 공식을 완성하였다하여 허수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리하여 과연 그것을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자유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조지 오웰” 

↘ 내가 쓰고 싶은 것, 내가 써야하는 것, 그리고 내가 쓸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하면 너에겐 결국 슬픔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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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