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밍」과 「약속의 땅」을 읽고 다시 「자기만의 빛」을 집어 들었다. 이제 은퇴한 그들은 분명 고료에 얽매이거나 자신의 성향을 대중들에게 표현함에 있어 그 무엇에 구속받거나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것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올 법한 정치인들을 상대하던 젊은 버락이 「비밀의 숲」의 황시목 검사였다면, 변호사 사무실에서 버락과 함께 일하며 틈틈이 그와의 연애를 즐겼던 미셸은 아마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버락이 미셸을 만나면서 그녀의 내조로 점점 「검사내전」의 이선웅 검사처럼 익살스럽게 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마도 미셸은 유년시절 하와이 해변에 누워 돌고래 춤을 지긋이 관람하며 「모비딕」을 즐겨 읽던 버락의 천성이 항상 유지되기 바랐을 것이다. 백악관 영부인에서 일반인으로 돌아간 미셸은 브런치로 전자렌지에 토스트를 구워먹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으신 분이다. 자, 날씨도 꽤나 쾌창한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녀의 책소개를 시작하는 건 더욱 유쾌하지 않을까? 소시지를 만드는 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게다가 정말로 커다란 소시지를 요구하고 계시다고요.”

 


조상 중에 누구 한 명이 가문에 먹칠했다면 백 명은 그러지 않았다. 악한 자는 승리하지 않는다, 종국에는, 아무리 요란스러울지라도. 승리했다면 우린 결코 여기 있지 못할 테니. 그대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알면, 홀로 전진하지 않으리라. 그대는 금세기의 긴급 속보다. 그대는 앞으로 나선 선한 자다, 온갖 난관에도. 그 반대라고 느껴지는 날이 아무리 많더라도. 내일이라는 집, 알베르토 리오스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우리가 품고 사는 것들에 대하여.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를 똑바로 서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의지할 만한 도구를 찾는 방법에 대하여. 다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남과 다르다는 기분과 씨름하며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다름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믿고 따라야 할 사람, 버리고 갈 사람에 관한 폭넓은 대화에서 핵심을 이룬다. 하나같이 복잡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복잡한 문제다. 게다가 ‘다르다는 것’의 의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다름을 경험한 사람들을 대신해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남들은 볼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는 장애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의 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나만 다른 지도를 보면서 움직이고, 남들과는 다른 난관에 맞닥뜨린다는 기분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때로는 지도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을 보기 전에 나의 ‘다름’부터 볼 것이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그리고 극복은, 내포된 의미처럼 몹시 지치는 일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해서 주위를 경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에너지를 아끼고 한 걸음도 허투루 내딛지 않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현기증 나는 역설이 있다. 세상은 남과 다른 사람에게 신중함뿐 아니라 대담함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요점만 말하면, 공식은 없다. 장막 뒤의 마법사는 없다. 인생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깔끔하고 명쾌한 해결책이나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래 인간의 경험이란 그런 정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뒤죽박죽이니까.. 나는 우리 각자가 내면의 밝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아주 고유하고 개별적이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불꽃, 자기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이다. 자기만의 빛을 알아볼 능력이 생기면 그것을 사용할 힘도 생긴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지닌 빛을 돌보는 법을 터득하면 인정 넘치는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 사람의 빛은 다른 사람의 빛을 밝힌다.’

 

내 안에서 반짝이는 빛은 누구도 어둡게 만들 수 없다. 「구름 속의 무지개」, 마야 안젤루

 

편안하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에게는 단순한 개념이다. 두려움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불안과 긴장감이 나를 멈추기보다 이끌도록 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삶의 불가피한 좀비와 괴물들 앞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맞서는 것.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믿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완전히 편안하지도 완전히 두렵지도 않다. 그 중간 지대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깨어 있고 자각하고 있지만 꼼짝 못 하는 상태는 아니다. 편안하게 두려워한다는 것’, 매니악 마냥 고양된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기라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세상 사물 한결같지 않고 천태만상이므로 우리 또한 십인십색의 모습과 생각으로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려온다. 평온함 속에서도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자세, 가령 아폴론적 세계가 아닐까. 아폴론적 세계는 암담하고 공포로 가득 차있고 차가운 기운만이 인간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하나의 조각배 위에 그 허약한 배만을 믿으며 뱃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개개의 인간들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며 고요히 앉아 있는 그런 세계이다.

 

두려움 한 스푼을 가지고 나아가 한 수레 가득 능력을 쌓아 돌아오라.” 그녀의 신조이자 가훈, 자유와 안전의 위협 앞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명철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 필시 떠올려야 하는 격언이 아닐까. 

 

나는 나의 두려워하는 마음과 이제 58년을 살았다.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다. 내 마음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 마음은 내가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내 마음은 거대하고 뚱뚱한 서류철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는 내가 범했던 모든 오판과 과실이 담겨 있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내 결점의 증거를 찾아 전 우주를 흝어본다. 내 마음은 내 겉모습도 싫어한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든 그렇다. 내가 동료에게 보낸 이메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한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토록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다닌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매일매일 내 마음은 나에게 제대로 하는게 없다고 한다. 매일매일 나는 내 마음에게 말대꾸를 하려고 한다. 적어도 좀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눌러보려고 하지만 내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은 내가 만난 모든 괴물이다. 그리고 내 마음은 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내 마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좀 더 익숙해졌다. 반갑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이 내 머릿속에 어는 정도의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마음에게 일종의 영주권을 준 셈이다. 그래야 이름 붙이기 쉽고 해독하기 쉽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끊임없이 이기려 들기보다 내 마음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내 마음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것만으로도 두려워하는 마음의 손아귀는 느슨해졌고 모습은 감추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급격한 마음의 동요가 나를 습격해도 쉽게 놀라지 않는다. 내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시끄럽지만 대체로 헛된 경우가 많았다. 천둥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나는 여기 속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아프지 않은 답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곧잘 일그러트리곤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 따라 드러나는 다름을 관리하기 위해 숨고 끼워 맞추고 벌충한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다양한 가면을 쓴다. 사실상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좀 더 안전함을 느끼고 더 큰 소속감을 갖고 싶어서 짐짓 그런 척을 하지만 이것이 진정 한 내 모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만다.비틀즈와 애플에 영감을 준 「인간의 아들」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또 다른 것을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숨겨진 것을 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숨겨진 것에 관심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들 사이에는 매우 강렬한 느낌, 일종의 충돌이 발생한다.베르사유에서는 매일 밤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가면 무도회를 즐겼는데, 가면이 신원이나 신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여 매너리즘에 빠진 그들에게 일종의 새로운 오락과 희열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유행병 때문에 마스크를 쓰는 우리는 가면 무도회를 즐기는 부류, 내지 음악의 정령’이라는 명함을 돌리는 오페라의 유령」에 속하는가.  분명 우리 모두는 익명으로 군중에 묻혀 영혼의 해방을 경험’하려는 베네치아 사육제(Carnival of Venice:  Carnevale, 고기를 금한다)를 즐기고 있다.  혹시 우리는 가벼운 만남에 갇혀 사실상 첫 번째 만남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지려는 욕구에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당신은 이렇게 운을 띄운다. 목마른 사람처럼, 원하는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미련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사적인 행사(수석 졸업생 축하파티, 1991)입니다. 그쪽이 올 데가 아니에요. 자가용을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흑인 가족(스테이시 에이브럼스)은 주지사와 어울리는 자리에 초대될 리 없다는 것이 보안 요원의 생각이었다. 익숙한 메시지였다. 나는 네가 그걸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떠나 가면 뒤 숨겨진 상대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관계는 역동적이다. 변화로 가득하고 언제나 진화한다. 모든 것이 공정하며 평등하다고 두 사람 모두 느끼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항상 맞춰주고 있다. 누군가는 항상 희생하고 있다. 한쪽이 일어설 때 한쪽은 주저앉을 수 있다. 한쪽이 경제적 부담을 더 지는 동안 한쪽이 집안을 보살피고 가족의 의무를 다할 수도 있다. 이런 선택지들과 그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 가정, 일 모든 것이 전부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다. 튼튼한 동반자 관계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번갈아 가며 타협하고 그 어중간한 영역에서 서로 공유하는 편안한 집의 감각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나에게 똑같은 관용을 베풀 수 있고 베풀고자 하는 사람, 나에게 똑같은 인내를 보여주려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내가 짐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도, 최악의 순간에 내가 보이는 모습과 행동을 알고도 나를 사랑할 사람이어야 한다.. 성공적인 동반자 관계는 승승장구하는 농구팀과 같다. 팀은 완성된 기술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언제든 꺼내 쓸 줄 아는 숙달된 두 개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각 선수는 슛을 하는 것뿐 아니라 드리블, 패스, 수비 하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약점이나 차이점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둘이 함께 코트 전체를 커버해야 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다재다능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히 깨달았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임신과 출산의 경험과 동일한 궤적을 따르고 있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완벽한 가정생활을 꿈꾸고 준비하고 계획할 수는 있지만 결국 상황에 따라 되는대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체계와 일과를 정립하고 온갖 다양한 스승으로부터 재우고 먹이고 훈육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다. 집에서 지켜야 할 준칙을 만들고 신앙과 철학을 소리 높여 선언하고 동반자와 모든 것을 지겹게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개 얼마 가지 않아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나의 통제력은 하찮다는 사실을, 때로는 매우 하찮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년에 걸쳐 외항선에 뛰어난 지휘력을 갖춘 선장을 배치하고 소독 수준의 청결과 질서를 유지했더라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배는 주먹만한 아기들에게 강탈당했으며 내가 좋든 싫든 아기들은 배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저들만의 계획이 있다. 아이들은 각각의 개인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학습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짜놓아도 소용없다. 호기심으로 들끓는 아이들은 주변의 세상을 탐험하고 시험하고 만지고 싶어 한다. 배의 함교에 침입해서 모든 표면을 손으로 만지고 무심코 깨지기 쉬운 것을 깨뜨릴 것이며 우리의 인내심도 깨뜨릴 것이다. 

 

우리는 고독하고 외롭다. 그래서 타인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개개인만의 빛은 저마다 다르고, 상대가 자신만의 빛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상호 간의 피치 못할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만남의 대상으로부터 경계심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마음의 문을 열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경험 등을 상대와 공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통해 얻는 기쁨이 있다면 각자가 지닌 관점과 관습의 차이로 인해 불거지는 단점 역시 만남 속에 존재한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충실한 멘토가 되어야한다는 모순, 선임은 자신의 의견을 항시 후임에게 조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또 가난한 사람은 장인의 명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고착된 관념의 틀과 일반화된 생각에서 우리는 상대를 대응한다. Let It Be.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나란히 앉아 일할 수 있게 되어 기뻐. 네 모습 그대로가 좋아. 나도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좋아.” 상대와 어두운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만의 빛 The Light We Carry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품위 있게 가는 일은 증명해야 하는 일이다. 사랑을 베푸는 삶, 고상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자녀들과 친구들, 동료들, 지역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품위 있게 가는 일은 노력이다. 때로는 힘들고 따분하고 불편하고 멍을 남기기도 하는 노력이다. 혐오와 의심을 일삼는 사람들을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나와 내가 실패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 벽을 세워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지치거나 냉소주의에 빠졌을 때에도, 그들이 포기했을 때에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시민권 운동가 존 루이스는 우리에게 바로 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자유는 상태가 아니고 실천이다. 우리가 마침내 주저앉아 쉴 수 있는, 저 멀리 고원에 자리 잡은 마법의 정원이 아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오직 나를 위한, 나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펜을 들었다. 하지만 훗날 깨닮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타인을 위해 자유를 쓰고 그것을 주위에 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줄기차게 노력하자.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