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신생국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গণপ্রজাতন্ত্রী বাংলাদেশ는 근대 100년의 격동이 응축된 공간으로, 20세기 초 영국령 인도 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 벵골 분할과 농업 수탈, 1943년 대기근의 참상을 겪었고, 1947년 인도 분할로 동파키스탄이 된 뒤 언어·정치·경제적 차별이 누적되며 1952년 벵골어 언어운동, 1960년대 자치 요구, 1971년 해방전쟁과 학살을 거쳐 독립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수차례 군사 쿠데타와 권력 교체, 취약한 제도와 만성적 빈곤 속에서 1억 7천만에 이르는 인구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행정을 작동시키는 능력은 국가의 생존 조건이 되었다. 이런 구조적 곤경 속에서 농촌 빈민, 특히 여성에게 기회가 닿지 않는 금융의 사각지대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의 실천이었다. 그는 담보도 신용 기록도 없는 여성들에게 소액 “한 사람당 불과 수만 원”을 공동체 책임과 상호 신뢰에 기반해 대출하는 방식을 고안했고, 이는 생계형 소규모 사업의 자립과 상환을 가능케 하며 그라민은행 모델로 제도화되었다. 이 실험은 국제기구와 개발금융의 지지를 얻어 확산되었고, 금융이 빈곤을 완화할 수 있다는 강력한 사례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방글라데시의 전통적 시중은행들은 정치적 연줄과 부실 대출, 비효율적 감독으로 경제의 발목을 잡았고, 자본은 생산적 투자보다 특권층에 편중되었다. 그 결과 “은행은 부자를 위한 자선단체”라는 비판적 통찰이 힘을 얻었으며, 금융은 이윤 극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효용과 포용성을 전략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국가 발전 담론의 한 축으로 굳어졌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의 지난 100년은 식민·분단·전쟁·권위주의·빈곤이라는 연쇄 속에서도 제도 혁신과 시민의 생존 전략이 끈질기게 축적된 역사이며, 통치력과 행정력, 그리고 금융의 공공성이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실험실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방글라데시는 미얀마에서 박해를 피해 탈출한 로힝야족 수백만 명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인도적·재정적 부담을 떠안았는데, 이는 국제 정치와 난민 문제의 최전선에 국가를 놓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는 최근 수년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의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확대, 소득 증가에 따른 중산층의 급격한 성장, 내수 소비 시장의 확대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풍부하고 유연한 노동시장과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 비용은 글로벌 제조업의 핵심 거점으로 국가를 부상시켰고, 이는 빈곤·난민·제도적 취약성이라는 무거운 역사적 짐과 역동적 성장이라는 현재가 공존하는 방글라데시를 21세기 세계 경제의 가장 복합적이고 실험적인 공간 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의 땅’이라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벵골 평원의 한가운데에 놓인 나라로, 동쪽과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인도라는 두 대륙 국가 사이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벵골만의 넓은 바다를, 북쪽으로는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사면을 배경으로 한다. 국토 면적은 남한의 약 1.5배에 지나지 않지만 인구는 1억 7천만 명을 훌쩍 넘겨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를 기록하며, 수도 다카는 도로와 골목, 시장과 강변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밀도로 거대한 생물처럼 숨 쉬는 초고밀도 도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방글라데시는 남아시아의 벵골 델타 그 자체로, 갠지스강·브라마푸트라강·메그나강이 수천 킬로미터를 흘러와 쌓아 올린 충적 평야 위에 놓여 있으며, 연중 고온다습한 기후와 막대한 강수량 덕분에 한 해 세 번의 농사가 가능한 드문 토지를 이룬다. 매년 히말라야에서 시작된 강물은 눈과 빗물, 그리고 산맥을 깎아낸 엄청난 양의 토사를 함께 실어 나르며 평야를 덮고, 이 퇴적물은 땅을 파괴하는 동시에 다시 살찌우는 역설적 순환을 반복해 수천 년 동안 인구와 농경 문명이 이 지역에 밀집되도록 만들었다. 북쪽 히말라야 산맥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산비탈에 몬순 계절마다 쏟아지는 빗물은 셀 수 없이 많은 지류를 이루어 남쪽으로 흘러내리고, 벵골만에서 증발해 올라온 습한 공기가 히말라야의 찬 공기와 충돌하는 순간 하늘에 구멍이 난 듯한 폭우가 쏟아지며 강과 평야를 동시에 적신다. 서쪽에서는 인도 대륙을 가로질러 2,500km를 흐른 갠지스강이, 동쪽에서는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2,900km를 달려온 브라마푸트라강이 히말라야 전역의 물과 시간을 끌어안고 방글라데시에서 마침내 하나로 합류한 뒤, 거대한 물의 몸집이 되어 벵골만으로 흘러 들어가며, 이 나라를 문자 그대로 히말라야의 모든 물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흘려보내는 ‘물의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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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기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방글라데시는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간의 긴장이 역사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국가다. 수도 다카 인근에서는 매년 약 50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이슬람 부흥회인 이즈테마Bishwa Ijtema가 열리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 집회로, 방글라데시 현지인은 물론 150개국 이상의 신자들이 참석한다. 참가자들은 3일간 이어지는 행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며, 고단한 삶의 무게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신에게 맡기며 위안을 찾는다. 이러한 개인적 신앙의 순수함과 달리, 정치와 결합된 종교는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 수많은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되었다. 1971년 독립 이후 제정된 최초 헌법은 세속주의를 명시하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슬람을 국교로 규정하지 않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독립 직후 초대 대통령이 암살되고 이후 정치적 변화가 이어지면서, 이슬람 과목이 학교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고 제8차 헌법에는 “이슬람은 국교state religion이다”라고 명시되었다. 현재 집권 여당인 아와미 리그Awami League는 1971년 독립 당시 세속주의를 천명한 정당으로, 서파키스탄에 대항한 벵골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의 전통을 이어오며, 2008년 집권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인 자맛Jammat을 해산하는 등 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 정치의 주류는 아와미 리그와 야당 민족주의당BNP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적 관용 측면에서도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의 기념일과 행사도 자유롭게 개최될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중국에 이어 전 세계 2위의 의류 수출 국가다. 국가 전체 수출의 83%를 섬유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인 자동차, 반도체, 핸드폰, 선박 등에 해당하는 것이 이 방글라데시에서는 섬유산업 하나로 통한다고 보면 된다. 1971년 독립전쟁으로 모든 산업이 파괴되어 1970년대 후반까지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다. 이런 방글라데시에 1978년 대우가 봉제업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한국은 전국 최대 수출산업단지인 구로공단에서 수출 효자 산업인 봉제업이 인건비 상승으로 점차 경쟁력을 잃어 가던 시기였다. 구로공단은 1967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여 3년 후인 1970년에는 전국 최대의 공업단지가 되었다. 기술과 자본이 일천한 그 당시로는 주력 산업이 지금의 방글라데시처럼 당연히 단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봉제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건비가 상승하고 정부에서 1970년 중반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전환하자 봉제업은 점차 국내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구로공단의 많은 봉제업체들은 중국, 동남아, 중남미 등지로 빠져나갔는데 이 중 일부가 방글라데시로 진출했다. 대표적으로 1978년 대우가 최초로 진출했다. 초기에 현지 기업과 합작으로 공장을 운영하면서 150명의 현지 직원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교육을 시켰다. 사실 이들 150명이 방글라데시 섬유산업의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이들이 독립하고 퍼지면서 현지 기업들도 나름대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 대우는 현지 합작 파트너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되면서 공장 운영에는 손을 떼고 주력 분야인 무역업에 전념하고 방글라데시 공장은 제품 공급 기지로만 활용했다. 그리고 이때 새롭게 등장한 기업이 영원무역이다. 영원무역은 1980년 남들이 중국으로 진출할 때 방글라데시에 터전을 잡았다. 현재 방글라데시 내에서만 종업원 6만 명 이상의 가장 큰 의류생산 회사로 손꼽힌다. 특히 기능성 아웃도어 의류와 신발을 주로 생산하는데 세계적인 브랜드인 North Face, Nike, Adidas 등 주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3배에 이르는 300만 평 이상의 거대한 KEPZ(Korea Export Processing Zone: 한국수출가공공단)을 확보하여 향후 발전 가능성과 더불어 현지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지금도 지속적인 설비 투자와 실부터 옷까지 영원무역은 벵골만 최대 무역항인 치타공(Chittagong)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도 국제거래에 유리한 점이 많다. 셀 수 없는 풍파를 헤치고 이렇게 현지인들과 동고동락한 세월이 40년,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성기학 회장은 2018년 전 세계 섬유산업의 수장인 국제섬유생산자연맹(ITMF) 회장이 되었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벵골만의 기적으로 회자된다. 방글라데시 전국에는 영원무역 외에도 한국에서 온 100여 개의 중소 의류생산 기업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전만큼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전체 섬유산업은 지금도 많은 발전과 외형 확장을 하고 있지만 이곳의 한국 기업들은 투자 1세대가 지나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들이 대세로 외국 바이어들도 한국 기업을 주로 찾았지만 그 이후 현지 기업들이 경험을 축적하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봉제산업 투자에 나서면서 한국 기업은 차츰 설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포스트 차이나, 방글라데시가 깨어난다」”

 

 

 

 

 

Posted by trefresh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