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북미 모피무역은 유럽에서 비버 가죽 모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상인들과 쿠루르 드 부아는 북미 내륙 깊숙이 들어가 원주민들과 교역을 통해 비버 가죽을 확보했다. 주요 교역 지역은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그레이트 레이크 지역, 미시시피 강 상류, 그리고 때로는 허드슨만 인근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퀘벡은 1608년 사무엘 드 샹플랭에 의해 설립되어 곧 프랑스 모피무역의 핵심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퀘벡을 중심으로 프랑스는 휴런 등 원주민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안정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는 북미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프랑스는 퀘벡을 포함한 지역을 신프랑스New France라는 이름으로 통치했으며, 모피무역은 이 식민지의 경제 기반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와 영국은 북미 식민지의 지배권을 놓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이 경쟁은 결국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이어진 7년 전쟁으로 이어졌고, 북미에서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763년 파리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퀘벡을 포함한 북미 대부분의 영토를 영국에 양도하면서 북미에서의 프랑스 식민지 시대는 막을 내렸다. (아래는 퀘벡의 ‘도깨비 문’)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고, 그 여파로 전국에 걸쳐 농민 폭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귀족의 영주권과 봉건적 의무에 반발하며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성과 문서를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에 나섰다. 이런 혼란 속에서 1789년 8월 4일 밤, 국민제헌의회에 모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전례 없는 결단을 내렸다. “8월 4일 밤의 결의 La nuit du 4 août”라 불리는 이 날은 프랑스 사회의 봉건적 특권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밤 특권층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했고, 봉건적 신분제도는 단 하루 만에 무너졌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날을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제도적 변혁의 순간으로 기록한다. 귀족들은 농노제 폐지, 십일조 폐지, 영주권과 사법권 포기, 관직 매매 금지 등을 잇따라 선언했고, 그 분위기는 의회 전체로 퍼져 연쇄적인 결의로 이어졌다. 특히 브르타뉴 지방의 귀족들이 먼저 특권을 포기하자 다른 지역의 귀족들도 감동 속에 동참했으며,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권리를 내려놓은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결단은 중세 이래 지속된 봉건 질서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시민 사회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당시 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영화로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Délicieux 이 있다. 이 영화는 귀족들이 여전히 특권을 누리며 음식과 요리마저도 계급 중심으로 작동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귀족을 위해 일하던 요리사 피에르 마누르는 어느 날 궁정에서 쫓겨난 뒤 한 여인과 함께 모든 사람을 위한 식당을 열게 된다. 영화 속 ‘누구나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요리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계급의 벽을 허물고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혁명 정신을 상징한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만찬이 공공의 식사 공간, 즉 레스토랑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평등, 시민의식, 공유 문화의 핵심 상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레스토랑 restaurant’이라는 개념 자체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 주막이나 여관 수준의 식당뿐이었고, 외식이라는 개념조차 일반적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상인과 장인 조합인 ‘길드 guild’가 상업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예를 들어 고기는 정육 조합, 빵은 제빵 조합, 수프는 특정 길드 소속 요리사만이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각 분야가 배타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음식을 함께 제공하는 ‘레스토랑’은 존재할 수 없었다. ‘레스토랑 restaurant’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restaurer’, 즉 ‘회복하다’ 또는 ‘원기를 돋우다’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건강 회복을 위한 영양 수프를 제공하는 장소를 의미했으며, 1765년 파리의 요리사 부랑제Boulanger가 ‘기력을 회복하는 수프’를 내걸고 손님에게 선택 가능한 메뉴를 제공한 장소가 최초의 레스토랑으로 간주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 계층이 몰락하자 많은 궁정 요리사들이 실직했고, 이들이 너도나도 파리 시내에 레스토랑을 개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존 궁정 요리의 정교함을 그대로 메뉴에 반영했고, 이를 통해 레스토랑 문화는 빠르게 성행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레스토랑 문화는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며, 1793년 미국 보스턴에는 프랑스 이민자가 ‘레스토레이터 Restorator’라는 이름의 최초의 미국식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이름 그대로 피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 기운을 회복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오늘 밤 당신은 연인과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즐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슐랭 가이드는 1900년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운전자들을 위해 타이어 판매 촉진용으로 만든 무료 가이드북에서 시작되어, 이후 레스토랑 평가와 추천을 포함하는 권위 있는 미식 안내서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노예폐지론자였던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레가 처음 착안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디자인하고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프 에펠이 내부 구조를 설계했으며, 제작비용은 프랑스 국민들의 성금 40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정식 명칭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일반적으로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으로 불렸다. 바르톨디는 이미 1856년 이집트를 여행하며 고미술을 연구하던 중 ‘동방에 광명을 비추는 자유 La Liberté éclairant l’Orient’라는 이름으로 수에즈 운하 입구에 대형 조각상을 세울 계획을 가졌으나 자금난으로 무산되었고, 이때 구상한 디자인이 이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으로 실현되었다. 로마 신화의 자유 여신 ‘리베르타스’를 모티프로 하되 프리기아 모자 대신 7개의 뿔이 달린 왕관을 씌우고, 오른손엔 세계에 이성의 빛을 밝히는 횃불을, 왼손엔 ‘JULY IV MDCCLXXVI’(1776년 7월 4일)이라 새겨진 독립기념일의 석판을 들었으며, 끊어진 쇠사슬을 밟고 있는 모습은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뉴욕 여신상이 세워지기 전 제작된 원형 중 하나는 파리 공예기술박물관 Arts et Métiers에 있으며 크기는 1/16,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기증한 1/4 크기의 동상으로 파리 센강변 시뉴 섬 Île aux Cygnes에 설치되었고, 바르톨디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만든 또 다른 1/16 크기의 축소판은 그뤽상부르 공원에 있던 것이 2011년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그의 고향 콜마르에는 자유의 여신상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크기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1998년 ‘프랑스의 해’를 기념해 파리의 여신상을 1년간 임시 전시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큰 인기로 인해 프랑스에서 복제품이 제작되어 2000년 일본에 영구 설치되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 100주년은 1876년이지만 여신상이 미국에 전달된 시점은 1885년 1월로, 300장의 구리판이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선박으로 운송되었으나 조립 예산이 부족해 한동안 항구에 방치되었고,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모토로 뉴욕 월드를 전국 1위 신문으로 성장시킨 헝가리계 미국인 조셉 퓰리처가 신문 지면을 통해 모금 캠페인을 벌인 끝에 조립이 가능해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동상 표면의 구리가 산화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록색의 자유의 여신상이 되었다. 여신상 조립에 큰 역할을 한 퓰리처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퓰리처상이 오늘날까지도 저널리즘, 문학, 음악, 특히 사진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상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45년 퓰리처 사진 부문 상 「아이오와마 섬 국기 게양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Photograph by Joe Rosenthal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을 알린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파리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은 루이 16세가 개혁 성향의 재무총감 네케르를 해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히 한 관료의 해임이 아니라, 구체제가 개혁의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네케르의 해임과 함께 파리 외곽에 왕당파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더욱이 연이은 흉작으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과 빵값 폭등은 민중의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파리의 거리는 실업자들과 굶주린 민중들로 넘쳐났고, 이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적인 봉기로 이어졌다. 바스타유 습격 당시의 현장은 극도의 혼란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스트유 함락의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저나갔고, 이는 ‘대공포’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상을 촉발했다. 귀족들은 음모로 반혁명 세력이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을 휩쓸었고, 농민들은 영주들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봉건적 특권문서들이 불태워졌고, 구체제의 상징물들이 파괴되었다. 바스티유 함락은 단순한 감옥 습격 사건이 아닌,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그들은 민중의 과격한 행동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남긴 표현으로, 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즉 왕의 뜻이 곧 법이 되며, 국가의 운영은 전적으로 왕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절대왕정의 상징적 선언이다.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절대군주제가 가장 두드러졌던 국가 중 하나로 왕권은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종교적 요소와 결합되어 왕이 신의 대리자이자 지상에서 신의 뜻을 구현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루이 14세 외에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영국의 제임스 1세 등은 대표적인 절대군주로 이들은 입법, 사법, 행정, 군사 등 모든 국가 권한을 직접 행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군주의 독단적 판단에 국가 전체가 휘둘릴 위험이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절대군주들의 오판과 전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다. 그 결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절대군주제는 강하게 비판받았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건은 상징적으로 “국가”가 처형된 것과 같은 충격을 세계에 안겼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와 공화정의 출현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반면 조선의 세종대왕은 절대군주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덕치德治를 실현하며 신하들과의 논의와 집단지성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 왕권은 강했지만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과 과학, 문화의 발전을 주도한 세종은 권력을 독점하기보다는 조화롭게 사용한 이상적 유교 군주의 전형이었다. 18세기의 정조 역시 세종과 함께 이상적인 성군으로 평가된다. 그는 탕평책을 통해 붕당의 폐해를 줄이고 규장각을 적극 활용하여 학문과 정책 연구를 장려했으며, 실학자들을 중용하여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혁명재판소는 프랑스 혁명기의 가장 극적인 사법기관으로서, 그 존재 자체가 혁명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깊은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혁명재판소의 설립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반혁명 세력을 처단하기 위한 긴급한 조치였으며, 이는 혁명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인의 역할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대부분의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재판소의 판결은 대개 사형이나 무죄였으며, 중간적인 처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재판소는 파리 시내의 옛 법원 건물에 설치되었는데, 이 장소는 곧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다. 재란정의 벽에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슬로건이 걸려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이념들이 철저히 왜곡되어 적용되었다. 매일 아침, 죄수들은 콩시에르쥐리 감옥에서 재판소로 끌려왔고, 대부분의 경우 그날 저녁이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잘 정비된 기계처럼 작동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자비나 인간적 고려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부터 평범한 시민들까지,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인 루이 16세의 재판과 처형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8세기 말,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지던 국왕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으며, 이는 중세 이래 지속되어온 왕권신수설의 근간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

 

혁명의 서막을 알린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후, 1792년 프랑스는 왕정을 폐지하고 제1공화국을 선포한다. 그 이듬해인 1793년엔 국왕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후 부정부패와 경제난, 그리고 자코뱅 독재와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수립된 총재정부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국민의 불신을 키웠다. 혼란 속에서 프랑스 국민은 강력하고 안정된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고,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며 제1통령으로 등극한다. 1802년 국민투표를 통해 종신 통령에 임명된 나폴레옹은 1804년 자신의 손으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며 프랑스 제1제국을 수립한다. 이는 로마 교황 피우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나, 나폴레옹은 교황 대신 직접 왕관을 머리에 씌움으로써 세속 권력의 우위를 상징했다. 1803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 재개가 임박하다고 판단하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북미 대륙에 보유한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다. 이는 제3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재임 중 이뤄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총액은 1,500만 달러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나는 이 영토를 영국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국에 넘기겠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영국의 적수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1805년부터 1812년 사이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프랑스 제국은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 이후 전세는 급격히 불리해졌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즉 ‘국민의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장군 장 르 마루아가 한 도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불가능하다고 쓰셨습니다: 그런 말은 프랑스어에 없습니다. Ce n’est pas possible, m’écrivez-vous : cela n’est pas français.” 또한 1808년 스페인 원정 당시 참모가 소모시에라 고개Somosierra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뭐라고요? 불가능이라고요? 그런 말은 저는 모릅니다! 제 폴란드 정예병에게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Comment ? Impossible ! Je ne connais point ce mot-là ! Il ne doit y avoir pour mes Polonais rien d’impossible !” 이러한 발언은 이후 발자크 등 프랑스 문인들에 의해 문학적으로 널리 전파되었으며, 오늘날 ‘나폴레옹의 명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이듬해인 1815년 3월 엘바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귀환하여 다시 권력을 잡고 백일천하les Cent-Jours를 시작한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1821년 사망한다. 워털루 전투는 이후 ‘결정적 패배’ 또는 ‘치명적 전환점’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며 문화적으로도 깊이 각인되었다. 이 전투는 1974년 스웨덴 혼성 그룹 ABBA가 발표한 곡 「Waterloo」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 곡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며 ABBA를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노래에서 ‘워털루’는 실제 역사적 전투를 사랑의 은유로 차용하여 “사랑에 항복했다”, “운명처럼 받아들였다”는 감정을 표현한다. 이는 강렬한 사랑과의 투쟁 끝에 자신이 패배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Waterloo」는 이후 영화 맘마 미아!마션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었다. “나의, 나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항복했듯. 워털루, 난 패배했고 당신은 전쟁에서 이겼죠. 워털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해요. 워털루,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어요. 워털루, 내 운명이 당신과 함께임을 깨달아요. 마침내 내 워털루를 마주하네요.”

 

1670년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 Pensées」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내며, 프랑스 문학과 철학, 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은 파스칼을 주로 수학자로 기억하지만 그는 수학뿐 아니라 철학과 신학에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파스칼은 특히 파스칼의 삼각형을 체계화하고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와 함께 확률론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또한 물리학 분야에서는 ‘유체 정역학의 기본 원리’(파스칼의 원리)를 밝혀냈으며 이처럼 다양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 파스칼과 비슷하게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졌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수학적 문제인 ‘파스칼의 세 원 문제’에 관한 해법을 증명하기도 했고, 후에 뛰어난 철학자로서 192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송은 1922년 프랑스 철학회 강연에서 만나게 되는데, 상대성 이론의 시간 개념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저서 「지속과 동시성 la durée et la simultanéité」에서 상대성 이론을 물리학적 비판이 아니라 칸트의 이성 비판에 근거해 비판하며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시간 개념을 재해석했다. 그는 시계의 객관적 시간과 구분되는,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절대 지속 la durée absolue’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내재한 독특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은 수학적으로 쪼갤 수 있고, 초, 분, 시간 단위로 균일하게 흐른다. 반면 베르그송의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즉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재미있게 놀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지루한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는 것처럼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은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흐르는 경험이다. 베르그송은 「지속과 동시성」에서 ‘지속’은 시간을 숫자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겹치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동시성’은 여러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물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내면적 경험의 시간, 즉 ‘지속’과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베르그송의 삼각형 비유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은 ‘기억’이라는 과거, ‘지금 느끼는 순간’이라는 현재, ‘예상과 기대’라는 미래로 구성된다. 이 세 요소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작용하며, 하나의 ‘지속하는 시간’을 이룬다. 만약 누군가가 ‘기억’이라는 요소 없이 현재와 미래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타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즉 물리적으로 동일한 ‘1분’이라 해도 그 지속의 깊이와 질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볼테르Voltaire,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등 시대와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철학자들을 다수 배출하여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터미날Terminale부터 철학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 철학 시험이 포함되어 모든 계열 학생이 응시해야 하며, 학생들은 논술형 에세이 또는 텍스트 해석 중 하나를 선택해 작성한다. 프랑스 사회는 철학 교육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시민 의식을 키우고, 이를 공적 토론과 민주주의 교육의 핵심으로 여긴다. 「팡세 Pensées」는 프랑스어로 ‘생각들’, ‘사유들’, ‘단상들’을 뜻한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은 ‘사색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이 조각의 받침대에는 ‘Le Penseu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 작품은 인간 정신과 지성,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표현한 아이콘으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자 프랑스 미술의 상징 중 하나다. 참고로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상징주의와 실존적 사유가 결합된 깊이 있는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1902년부터 그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비서로 일하며 로댕을 깊이 존경했고, 그로부터 ‘관찰’과 ‘형상화’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배웠다.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이기도 한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등의 대표작들이 있다. 살로메보다 14세 연하였던 릴케는 그녀와 진지한 연인 관계를 맺었으며, 살로메는 그에게 예술적 감수성과 문학적 절제를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역시 살로메에게 깊이 매료되어 구애했지만 거절당했다. 정신분석학으로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을 설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녀와 지적인 친밀함을 바탕으로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으며, 살로메는 초기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프랑스는 노동에서 벗어나 여가와 휴가의 개념으로 즐기는 바캉스 문화가 일찍 발달했다. 근로자의 법적 유급 휴가제도가 1906년도에 제정되었으니 이들은 이미 100년 전부터 바캉스를 문화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 정책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격려와 보상 차원에서 제정되었고 정책수립자들은 노동자에게 일하는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휴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노동과 여가의 밸런스의 필요성을 잘 인지하였다. 노동자들은 긴 유급휴가로 산과 들로 여행을 떠나면서 재충전의 의미를 알았고 이를 여가문화로 발전시켰으며 이 문화는 사회환경 안에서 생활화되면서 문화자본과 교육자본으로 확장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1달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11개월을 일한다는 표현은 우스갯소리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즐기는 바캉스 문화를 어느 정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문학으로 파리를 거닐다」” 

 

프랑스에는 약 1,200종의 치즈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특정 지역과 전통 제조법을 인증하는 AOP 제도를 통해 45종 이상의 전통 치즈가 인정받고 있으며, 브리, 카망베르, 로크포르, 콩테 등 다양한 맛과 특징의 대표 치즈들이 포함된다. 프랑스인에게 치즈는 역사와 지역, 전통이 깃든 일상 속 문화적 자부심이자 미식의 핵심이다. 프랑스인들은 각 지방의 특산 치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치즈 만드는 전통과 방식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다.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프랑스는 일과 삶의 균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처럼, 프랑스인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닌다. 따라서 단순한 경제적 성공보다는 삶의 즐거움, 개인 시간, 가족과 보내는 여유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이러한 가치관은 제도적으로도 뒷받침된다.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연간 최소 5주의 유급 휴가가 보장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를 온전히 누린다. 특히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는 많은 기업들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고, 직원들이 장기 휴가를 떠난다. 이 시기를 ‘그랑 바캉스 Grandes Vacances’라고 부르며, 프랑스 여름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풍경이 되었다. 프랑스의 휴가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점차 확장되었다. 그 기원은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모든 노동자에게 2주의 유급 휴가를 법으로 보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제도는 이후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함께 꾸준히 강화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동시에 쉬는 구조 속에서 프랑스인들은 죄책감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직장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이 비난받지 않으며 오히려 정당한 권리로 존중받는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적 개념의 전시공간인 뮤지엄은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계몽주의 이상이 실현되는 장으로 여겼다. 예술 작품들은 더 이상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콜렉션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성전이나 지배층들이 전시 공간에 소장되었던 예술작품들과 진귀한 대상물들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공개적인 전시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은 근대적 전시 공간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러한 전시공간은 전시방법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한편 영국·프랑스·독일에서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국가가 후원하는 미술관 건축 디자인 공모전이 홍수를 이루었다. 이러한 공모전들은 제후와 귀족들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한 전시 공간의 구성에서 점차 박물관을 대중 교육시관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공간구성으로 바꾸어 간다. 「프랑스 미술관의 확장된 공간연구」” 

18년 전 직접 다녀온 프랑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미술관은 로댕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대작 수련 연작을 감상하고 싶다면, 단연 오랑주리 미술관을 추천한다. 자연광이 쏟아지는 타원형 전시실에 펼쳐진 수련 연작은 마치 연못 한가운데 들어선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또한 로댕 미술관에서는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등 진흙에서 빚어낸 생명력 넘치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뒤편의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거닐다 보면, 한때 이곳에서 로댕의 비서로 일하며 그를 도왔던 시인 릴케의 발자취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여운을 안고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제 2의 성」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 부조리 철학자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지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등 당대 문인들이 자주 찾았던 카페 ʻ레 되 마고Les Deux Magots’를 방문해보자. 생제르맹데프레의 오후 햇살 아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기며 그들이 나눈 대화의 흔적을 상상해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예술의 발자취를 좇아 리옹으로 내려간다면 고흐의 그림 속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그가 머물렀던 병원과 해바라기의 배경이 된 풍경을 직접 마주할 수도 있다. 단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타야 한다는 점만 잊지 말자. 가능하다면 여정 중 세잔이 평생에 걸쳐 그렸던 「생트 빅투아르 산 Montagne Sainte-Victoire」의 위엄도 눈에 담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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