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눈 오는 지도」, 윤동주

눈이 내린다. 새하얀 눈이 고요에 잠긴 새까만 대지를 쉴 새 없이 두들기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첫눈은 꺼져가던 낡은 기억의 방아쇠를 완고히 잡아 당긴다. 휑하니 찰나를 가르며 허공을 긋는 눈꽃의 배회, 가로수가 쏟아내는 빛에 반사되어 쉴 틈 없이 반짝이는 백설의 기별, 또 모진 눈보라를 결연히 수용하는 어둠의 정적이 쉬이 깊은 침묵으로부터 빗여낸 은밀한 옛 자취의 편린들, 및 지긋히 반짝이며 투명한 빛의 실루엣을 수직으로 쏟아가는 일월의 경적은 이제는 덧없이 표류하는 빛바랜 순간들의 궤적과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지난 삼동의 표상을 가만가만 지면에 띄우며 분만한 일상의 초상을 비루하게 몰아친다. 포효하는 밤하늘 별빛들 아래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은종소리는 못다 한 님과의 시간을 조롱하는 듯 매서운 바람에 휘청거리며 골목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휘젓고, 식어가는 대지의 숨결을 가로챈 한기는 무료하고도 을씨년스런 적막한 거리를 버젓이 누비며 멍울진 아득한 회상을 허무하고도 맹랑히 쳇바퀴 돌게 만든다. 

보여주겠다. 분지의 벌판 끝에 서 있는 눈사람 같은 자세를 보여주겠다. 귀 기울여 줄 것, 누가 와서 이 쓸쓸함을 지적해다오. 저무는 황혼으로 내 사랑을 죄다 보여주겠다. 겨울,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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