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리며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이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의 기도」, 김현승”

그대의 반짝이는 두 눈에 담긴 분주한 동녘은 지금쯤 온갖 수려함으로 가득찬 눈부신 자연의 계절일 것이고, 따사로운 소추의 햇살이 내려찌는 그대의 널따란 두 어깨 위에는 계절의 틈바구니에서 피어오른 아련함과 터울거리는 화창함이 기적처럼 들썩일 것이고, 소박한 햇살이 어루만지는 그대의 두 다리를 인도하는 그 아기자기한 골목에는 계절의 넋을 다스리는 오색의 단풍들이 하얀 억새 사이를 말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다. 낯익은 그대의 얼굴, 어색하기만한 너의 이름, 듣고 싶은 당신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공손한 건들마 한 자락이 들녘에 하늘거리며 애수를 자아내는 노란 들판을 넘나들고, 천고마비의 계절이 그리움과 함께 황금빛 물결을 이루면 다가오는 깊은 가을은 기별없는 낙엽이 오롯이 절정에 이르를 것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윤동주”

풍요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곱게 물들은 오색의 낙엽들이 갓맑은 하늘아래 제각기 자신만의 용모와 자태를 뽐내기 여념없고, 황금벌판을 흩날리는 코스모스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청초한 가을의 완연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쑥부쟁이 꽃피고 구절초가 열매를 맺으면 풍요와 빈곤이 공존하는 이 계절이 어느덧 무르익어 때를 기다리던 철새가 창공을 가르고 분주해진 농부는 추수를 위해 숨 쉴 새 없이 논밭을 오고간다. 남겨진 가을 한 칸, 몰래 타들어가는 붉은 노을처럼 잔잔한 애수에 젖어 나 영원을 향한 그리움을 채워가고, 조용히 대지에 내려앉아 새날을 기다리는 낙엽들은 어둠이 파고든 애초로운 가로등 거리를 배회하며 가을의 끝자락에서 적막과 쓸쓸함을 나지막히 속삭여 온다.

 


“인생을 살되 젊거나 늙거나 저 참나무처럼 봄엔 눈부신 황금빛으로, 여름엔 무성하지만 가을이 찾아오면 색깔이 은근한 빛을 가진 황금빛으로 다시, 마침내 나뭇잎이 다 떨어진 그 때 보라 벌거벗은 줄기와 가지 적나라한 그 힘. 「참나무」, 알프레드 테니슨”

조용히 사색하는 오후, 사뿐 내리비치는 낙조가 파스텔 빛깔의 사물들을 빗어내어 더없이 눈부신 계절의 위용을 들어내며 가을향기가 물씬한 한 폭의 그림같은 단풍길을 열어준다. 일엽지추, 한가득 쌓인 낙엽을 자박자박 쓸어 밟으며 거리를 나설때면 어디선가 울어대는 귀뚜라미가 계절의 시작을 알리고, 등화가친, 귀가하지 않고 선선한 마을 어귀에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장난치는 꼬마 또한 계절의 묘미에 한껏 동화된다. 돌담길 옆 기울어진 단풍나무 가지아래 연인들의 춘화추월 랑데부, ‘봄에는 꽃이고 가을에는 달’이라 어스름한 달빛아래 월하정인 달맞이 놀이 가는구나. 

일엽지추一葉知秋: 하나의 나뭇잎을 보고 가을이 옴을 안다는 뜻으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장차 올 일을 미리 짐작함.
등화가친燈火可親: 등불을 가까이할 만하다는 뜻으로,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음을 이르는 말. 
춘화추월春花秋月: 봄철의 꽃과 가을철의 달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
월하정인月下情人: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月下情人」, 신윤복”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 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의 시」, R.M. 릴케”

맑고 높은 만추의 하늘아래 열매들이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 찾아와 무료한 일상을 두두리면, 온통 웃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은 산천과 시원한 바람에 선선해진 거리가 모두를 억누를 수 없는 방랑벽에 들뜨게 만든다. 붉은 빛의 낙엽수림과 오렌지색 사탕단풍으로 덮인 산야는 바람에 나부끼어 흩날리는 낙엽들로 수려한 산색을 지천에 알리고, 여기저기 가을소풍 나온 야생들은 짙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뒤로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가을햇살이 쏟아지는 조용하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무마다 매달린 단단한 과육의 야생열매가 오색빛을 띠며 모두를 유혹하고, 다가올 계절을 분주히 준비하는 동물들은 둥지를 단열하고 영글은 곡식들을 수확하기에 여념이 없다. 곧 덧 없이 사라져 버릴 이 분주하고도 아름다운 계절, 아쉬움과 희열이 교차하는 어느 차분한 오후가 찾아오면 나 말없이 떠나간 님을 떠올리며 이 가을을 담아 겸허한 마음으로 또박또박 한장의 편지를 적으리라. 

 


“Ⅰ. 머잖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니, 잘 가라, 너도 나도 짧았던 우리 여름철의 눈부신 햇빛이여! 나는 벌써 들노라, 처량한 소리 높이 울리며 안마당 돌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소리를. 분노와 증오, 떨림과 두려움, 힘겹고 강요된 고역, 이 모든 겨울이 이제 내 존재 속으로 되돌아오니, 나의 심장, 극지의 지옥 비추는 태양처럼, 한낱 얼어붙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리라. 나는 듣는다, 몸을 떨며 장작개비 떨어지는 소리를, 교수대 세우는 소리도 이토록 더 육중하지는 않으리. 내 정신은 지칠 줄 모르는 육중한 소리가 나는 망치에 허물어지는 저 탑과 같구나. 나는 몸이 뒤흔들린다. 이 단조로운 울림 소리에, 어디선가 급히 관에 못질 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누구를 위함인가? ㅡ 아 어제는 여름, 이제는 가을이 왔구나! 저 신비로운 소리는 출발처럼 울린다. Ⅱ. 나는 사랑하노라, 갸름한 당신 눈에 비치는 푸르스름한 빛을. 정다운 미인이여, 하지만 오늘 내게는 모든 것이 슬프고, 아무 것도, 당신의 사랑도 규방도, 난로도 바다 위에 반짝이는 태양만은 못하다. 그렇지만 사랑해 다오, 다정한 사람이여! 어머니가 되어 다오, 내 비록 은혜를 모르고, 심술궂은 놈이라도. 애인이라도 좋고 누이라도 좋고, 해맑은 가을볕이건 저무는 햇볕이건 그 덧없는 다사로움이 되어 다오. 인생은 덧 없고 허기진 무덤만 기다리나니, 아! 당신의 무릎 위에 내 이마를 올려놓고, 따가운 흰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따스한 노란 햇살을 맛보게 하여 다오! 「가을의 노래」, 보들레르”

찬란했던 우리의 여름은 가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수확의 계절이 돌아왔으니, 황금마차 탄 하데스가 찾아와 데메테르의 슬픔이 시작되기 전 들판에 부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천사의 미소같이 맑은 가을하늘 아래 수확의 기쁨 누려보리라.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인 농부가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운채 콧노래 흥얼거리니, 벌판에 서리가 내리고 페르세포네가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서둘러 오색의 화려함으로 유혹하는 들과 산으로 단풍놀이 떠나보리라. 포근한 가을 햇살 한줌이 창가에 속살거리고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이 가을의 화창함을 노래하니, 나 겸손하고도 부유한 마음으로 지난 여름의 추억과 이 가을의 향기를 당신에게 적어 보내리라.   

 


“추억 추억이여 나에게 어떻게 하라는가? 가을은 흐린 하늘에 지빠귀를 날리고 태양은 하늬바람이 부는 황파의 숲에 단조로운 빛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단 둘이서 꿈꾸며 걷고 있었다. 그대와 나 머리와 마음을 바람에 나부끼고 느닷없이 감동의 시선을 던지며 시원한 황파의 소리가 말했다. ‘그대와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였는가’ 그 소리 천사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내 신중한 미소가 이에 답했다. 그리고 경건하게 그 흰 손에 입맞추었다. 아! 처음 핀 꽃 얼마나 향기로운가. 그리고 연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첫 승낙이 얼마나 마음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속삭임인가. 「돌아오지 않는 옛날」, 폴 베를렌”



Posted by trefresher :